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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아버지가 들려주는 우리 청송심가 이야기(14)

  • 기사승인 2020-07-29
  • 신문 138호(2020-07-29) 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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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 속에 꽃핀 선비정신배운 것을 실천하시다(1)

() 할배의 선비 정신과 순국

沈厚燮(아동문학가.교육학박사)

얘야, 너는 지행합일(知行合一)’ 아는 것과 행동이 같아야 한다는 말이 품고 있는 깊은 뜻을 생각해 본 적이 있니? ‘지행일치(知行一致)’도 같은 뜻을 가지고 있단다.

경북 청송을 둘러싸고 흐르는 용전천 언덕 위에 고색창연한 정자 하나가 있지. 우리 청송(靑松) 심가의 본향인 덕천(德川) 마을에서 가까운 곳이야.

이 정자는 바로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일으킨 벽절공(碧節公) (, 15541597) 할아버지를 추모하기 할아버지는 1555년 그러니까 조선 명종 10년에 태어나셨단다. 이 무렵에 벌써 왜놈들은 우리나라 해안을 따라 쳐들어와 노략질을 하는 등 그 횡포가 매우 심했어. 그해 왜놈들이 일으킨 난리를 을묘왜변(乙卯倭變)이라고 하는데, 60여 척의 배를 몰고 전라남도 영암(靈巖)의 달량포(達梁浦)와 이포(梨浦)를 기습하여 부근 10여 개의 진()을 함락시킨 사건이다. 이때 왜놈들은 이미 임진왜란을 꿈꾸었다고 볼 수 있어.

안동에서 청송으로 들어오는 국도 오른쪽 언덕 위에 서 있는 벽절정

벽절공 할아버지는 어릴 때부터 인내심과 독립심이 매우 강하셨대. 아무리 어렵고 힘든 일이라도 꾸준히 해내려고 애썼는데, 그래서인지 몸도 매우 강건하고 성격도 아주 담대하셨대.

각오도 대단해서 공부방 벽에 옛 송()나라의 충신 사방득(謝枋得)의 시() 한 구절인 강개살신이 종용취의난(慷慨殺身易 從容就義難·한때 분개해 가볍게 죽는 것은 쉬우나, 조용하게 의를 다함은 어렵다)’이라고 써 붙이고는, 대의(大義)를 위해 살겠다고 다짐하셨단다.

이 말씀대로 벽절공 할아버지는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일으켜 왜적과 맞섰어. 울산 태화강 언덕 도산(島山)에 왜적이 성()을 쌓고 장차 온 나라를 유린하려 한다는 소식을 듣고는 청송에서 멀리 울산까지 달려가 싸우시다가 불과 마흔넷의 아까운 나이에 목숨을 나라에 바치셨어. 마흔넷이면 너무 짧지. 하지만 할아버지는 학문은 배워서 아는 것만이 전부가 아니고, 실제로 행동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하시며 그대로 실천하셨어.

안동 사람 권주욱 선생이 편찬한 벽절공 할아버지의 묘갈명(墓碣銘)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나와. 이걸 보면 할아버지가 얼마나 굳은 심성을 지니셨는지를 짐작할 수 있지.

예로부터 충성과 절의가 있는 선비는 반드시 재주에 문무를 겸한 뒤에야 큰일을 감당할 수 있으니 옛 당(唐)나라의 장순(張巡)은 널리 배워 아는 것이 많았으며, 춘추시대 제()나라의 자기(子奇)는 식견(識見)이 매우 높아 후세의 여러 선비가 따라올 수 없었다.

이제 벽절공은 학문도 깊었으려니와 국난에 임하여 오랑캐와 싸우다가 죽었으니 어찌 글을 읽는 힘과 그 절의의 기운이 같지 않으리오?

내가 늘 이것을 읽고 감탄하고 있었는데 지금 심사문(沈斯文) 성지(誠之)가 책을 싸서 족자(族子) 의택(懿澤)을 보내어 말하기를 나의 조상 벽절공(碧節公)이 돌아가신 지 이미 삼백여 년이라, 가장(家藏)되었던 서적이 모두 불에 타고 오직 남은 것은 그때 <창의일록(倡義日錄)>만 있어서 대략이나마 천고(千古)의 희미한 명성(名聲)이 있으니 원컨대 자네가 한 마디 비문을 써주게’하므로, 내가 사양하다가 일어나서 말하기를 ‘선생은 이미 오래 전에 세상을 떠났으니 어찌 기록이 많을 수 있으리오? 내가 이 일을 맡는 것이 도리어 과분할 뿐이다’하고 붓을 들었다.

공의 휘는 청(淸)이요, 자는 천일(千一)이며 성은 심씨요, 청송인이고 호는 벽절(碧節)이다. 가정(嘉靖) 갑인년 223에 부북(府北) 도치동(道致洞)에서 났으니 어려서부터 인물이 뛰어나서 남에게 눌려 지내지 않았고, 담력이 세고 용맹하였다. 차차 장성하여서는 널리 경서(經書)와 사기(史記)에 통달하고, 천문역수(天文曆數)에도 연구가 깊었다.

선조 임오년에 진사시에 합격하였으나 병술년에 아버지의 상을 당하여 슬픔을 다하였다. 복을 벗고 나서는 물 위에 정자를 짓고, 손수 아홉 그루의 소나무를 뜰 가에 심어 구송(九松)이라 이름 하였으니, 겨울철에도 변치 않는 소나무의 기상을 본받고자 함이었다.

정자의 벽에 써 붙이기를 한때의 ‘분개로 죽는 것은 쉬우나, 자연스럽고 태연하게 의(義)를 위하여 몸을 희생하는 것은 어렵다.’하였으니 이것은 공이 본디 쌓은 포부이다.(아래 줄임)

이로 보면 우리 벽절공 할아버지는 굳은 의지를 기르셨고 배운 대로 나라를 위해 의롭게 목숨을 바치셨다는 것을 알 수 있어. 이러한 의로운 기운이 우리 심가의 몸속에 찬연히 흐르고 있는 거야. 우리는 이러한 선조(先祖)의 가르침을 잘 이어받아야 하는 거야.(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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