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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후기 천재화가 현재(玄齋)심사정(沈師正)

  • 기사승인 2020-01-10
  • 신문 138호(2020-01-10) 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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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Ⅱ】 천재화가의 자질을 타고난 현재

 

심사정(沈師正) 그림, 〈산수도(山水圖)〉, 《경구팔경첩(京口八景帖)》 중 일엽, 1768년, 비단에 엷은 색, 40.0×51.0㎝ 그림은 크게 세 부분으로 나뉘는데, 가장 멀리 거칠고 험한 느낌의 봉우리들이 보이고, 중간에 먼 산들과 거리가 떨어져 있는 산자락이 보입니다. 산 밑에는 사람들이 사는 마을이 있습니다. 시선에서 가장 가까운 곳은 화면 오른쪽 밑으로 좁고 가느다란 길이 나 있고, 소를 몰고 오는 목동이 아주 조그맣게 그려졌으며, 가을철 추수가 끝난 후를 암시하듯 커다란 노적가리가 보입니다. 그림으로 미루어 여기는 아늑한 뒷산을 배경으로 한 추수가 끝난 어느 마을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호젓하고 조용한 느낌입니다.

남태응 집안은 그의 5대 조부인 병조참판 남이신(南以信1562-1640) 형제가 소북의 선봉이 되면서 소북의 중심가문이 된다.

그런데 소북은 대체로 서울 부근의 기호지방에 생활근거지를 두고 있는 기득권층이 그 중심이 되고 있다. 따라서 소북은 보수색채가 가장 짙고 문화적 우월감을 가지고 있었다.

남태응 같은 소북계 인사들은 이미 문화주도 층에서 밀려나 있으면서도 자신이 아직도 문화를 주도하고 있다는 착각 속에서 새로 출현한 수준 높고 고유색 짙은 겸재의 진경산수화풍이나 풍속화풍을 고의로 무시하여 도외시하고, 조선전기의 잔재를 간직한 채 서인과 교류하여 진경풍속의 기미를 열어놓고 있는 공재만을 조선제일 화가로 평가했던 것이다.

공재가 예송에서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 1607-1689)과 격렬하게 대립하던 고산(孤山) 윤선도(尹善道1587-1671)의 증손으로 소북계 기호남인이었기 때문이다.

어떻든 남태응은 겸재를 폄하하기 위해 현재가 겸재에게 배워 볼만하지 않다는 기록을 현재 26세 때 남기고 있으니, 그 이전에 현재는 겸재에게 나가 배웠던 것을 짐작 할 수 있다. 그래서 심익운은 “현재거사묘지”에서 소년시절에 정원백을 스승으로 삼고 수묵 산수를 했었다고 밝히고 있다. 그렇다면 이 소시적이 언제이고 얼마동안 가르침을 받았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이에 대한 분명한 기록은 아직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으니 당시 현재의 집안형편과 겸재의 근황을 연계하여 추론하는 도리 밖에 없다. 앞서 밝혔듯이 현재의 조부 심익창(沈益昌1652-1725)은 숙종 25년(1699) 10월20일에 치러지는 단종복위 칭경 증광별시에 과거부정을 저지르려다가 발각되어 숙종 26년(1700) 경진 2월 5일에 곽산으로 귀양가서 10여년을 지내고 숙종 37년(1711) 8월경에 풀려난다.

그러니 현재는 그 조부가 과옥죄인으로 귀양살이하는 사이에 태어나서 사대부집안에 태어났으면서도 과장출입이 금지된 불운을 안고 살아가게 된다.

이미 그 부친형제들도 같은 신세가 되었다. 그래서 현재의 부친인 죽창(竹昌) 심정주(沈廷冑1678-1750)의 장인인 곡구(谷口) 정유점(鄭維漸)으로부터 그림을 배워 포도 그림으로 평생을 스스로 즐겼다. 죽창은 그 조부 만사 심지원이 서화에 탁월한 재주를 타고 났었다고 그 숙부 청평위 죽오(竹塢) 심익현(沈益顯1641-1683)도 송설채의 대가였으므로 서화 가문의 혈통을 타고나 처가의 화풍을 쉽게 계승했을 것이다. 따라서 현재는 4자 2녀가 명화가 였던 육오당(六吾堂) 정경흠(鄭慶欽1620-1678) 일가의 명화혈통을 모계로 하고 만사와 죽오, 죽창으로 이어지는 서화혈통을 부계로 이어받고 태어난 셈이다.

그래서 심익운이 “현재거사묘지”에서 밝힌 대로 물건을 형상지을 줄을 스스로 터득하여 모나고 둥근 형상을 그려 낼 수 있었던 모양이다. 이렇게 천재화가의 자질을 타고난 현재였으니 화가인 부친 심정주나 화가의 딸로 화가의 부인이 된 현재 모친 하동(河東) 정(鄭1678-1744)씨가 그 천재성을 간파하지 못했을 리 없다.

그래서 어차피 과거로 출세하지 못할 바에야 명화가로 이름을 얻게 해야 겠다는 결심을 하게 되었을 것이다.

그런데 때마침 겸재(謙齋) 정선(鄭敾1676-1759)이 숙종 37년(1711) 신묘년에 “신묘년풍악도첩”(辛卯年楓嶽圖帖)을 그려내 화명을 크게 떨쳐 사대부사회의 부러움을 산다. (해악전신첩)은 지난해 5월 금화현감으로 부임한 단금(斷金)의 벗이자 진경시(眞景詩)의 대가이며 삼연(三淵) 김창흡(金昌翕1653-1722) 문화의 동문인 사천(槎川) 이병연(李秉淵1671-1751)의 초청으로 함께 금강산을 여행하며 시(詩)와 그림으로 사생하여 이를 한데 합쳐 꾸며낸 시화합벽첩(詩畵合壁帖)은 주옥같은 시와 그림만을 한데 모아 꾸며낸 시화첩이었다.

겸재는 다음해인 숙종 38년(1712) 임진 8월에도 시화 초청으로 사천의 부친인 수암(樹庵) 이속(李涑1647-1720)을 모시고 사천의 아우인 순암(橓庵) 이병성(李秉成1675-1735)과 국계(菊溪) 장응두(張應斗1670-1729)등과 함께 금강산을 여행하고 다시 (해악전신첩)을 꾸며낸다. 이 여행길에서 겸재 일행은 현재의 당숙들인 고성(高城)군수 심정로(沈廷老1653-1712)와 통천(通川)군수 심정구(沈廷耈1656-1714) 형제들을 현지에서 만나 대접받고 돌아온다.

따라서 죽창은 종형들을 통해 겸재의 (해악전신첩)의 내용을 자세히 전해 들었을 것이다.

그런데 이해 11월 3일 몽와(夢窩) 김창집(金昌集1648-1722) 동지은사정사가 되어 연경으로 가면서 그림 잘 그리는 아우인 노가재(老傢齋) 김창업(金昌業1658-1721)을 자제군관으로 대동해 가니 노가재는 겸재, 관아재, 공재, 화원 이치(李穉)의 그림들을 가지고 가서 다음해(1713) 2월 8일에 연경의 감식안인 마유병(馬維屛)에게 감식을 부탁한다. 마유병은 겸재 그림을 으뜸으로 꼽았다.

이에 겸재는 조선제일의 화가로 국제적인 명성을 얻게 된다.

이때가 현재가 7세 때이다.

겸재는 38세, 죽창은 36세였으니 죽창은 현재를 화가로 대성시키자면 겸재에게 보내 가르쳐야 한다는 결심을 굳혔을듯하다.

                                                                                                                                                                             - 다음호에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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