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초 공신, 맹암 김영렬 배위...의성김씨족보, 맹암집에서 밝혀져
11세조 충혜공 심연원이 쓴 글, 김영렬 행장(行狀)에도 나와...
역사학자 심재석 박사 “놀라운 사실.. 심덕부 저서 보완할 사유 생겨”
청송심씨 중흥조이신 4세조 청성백 정안공(휘 덕부)은 슬하에 일곱 형제를 두신 것으로 알려져 있다. 초배위이신 청주송씨의 소생으로 도총제공(휘 인봉), 판사공(휘 의구), 지성주사공(휘 계년) 3형제와 후배위이신 인천문씨의 소생으로 부윤공(휘 징), 안효공(휘 온), 청원군(휘 종), 동지총제공(휘 정) 4형제이다. 이는 9세조 좌의정공(휘 통원)께서 청송심씨 첫 족보인 '을사보(1545)'를 간행한 이래 변함없는 사실이다. 현전(現傳)하는 가장 오래된 족보인 기축보(1649년 간행)에도 7형제만 수록되어 있다. 그런데 최근 확인된 바에 의하면 의성김씨족보와 고문헌 '맹암집'에서 정안공의 고명딸이 있었음이 확인되었다. 의성김씨족보에 의하면 조선 초기 공신인 맹암 김영렬(金英烈,1370-1421)이 정안공의 자녀, 정경부인 청송심씨와 혼인한 사실이 새롭게 밝혀졌다.
김영렬은 의성김씨 주요 종파인 양소공파의 파조로 호가 맹암(孟巖), 시호가 양소(讓昭)이다. 양소공(증 우의정)은 조선초 제2차 왕자의난을 진압하고, 수차례 해전에서 왜구를 토벌하는데 공을 세운 문무 겸전의 공신으로 수군절제사, 병조참판 등을 지냈다. 의성김씨족보와 '맹암집(孟巖集)'에 따르면 의성김씨 11세조 양소공 배위 청송심씨는 김영렬이 초배위(初配位)안동권씨와 사별한 후 후배위(后配位)로 혼인하여 2남 1녀를 두었는데, 김경복(양소공의 3남), 김인복(양소공의 4남), 정경부인(증 영의정 한영정 배위)김씨를 낳았다. 김경복은 개성유수를 역임하는 등 출사에 성공하여 의성김씨 유수파를 이루었고, 김인복은 현령과 상호군을 지냈다. 딸은 청주한씨 한영정과 혼인하여 한확(좌의정, 인수대비의 부친), 여비한씨(명나라 영락제 후궁), 공신부인(명나라 선덕제 후궁) 등을 낳아 청주한씨를 권문세가의 반열에 올려놓았다. 첫자식인 김경복(1398~)의 출생연도를 미루어볼 때 정경부인 청송심씨는 청성백의 후배위(后配位)인 인천문씨 소생으로 추정된다.
양소공의 글과 자료를 모아 조선후기에 편찬한 '맹암집'에는 청원군 심종(문집에서는 청성백 심덕부로 오기)의 화상찬(畵像讚, 영정에 쓴 찬사), 충혜공 심연원의 행장(行狀), 군수 심윤지의 서문(序文) 등 청송심씨 선조들이 쓴 글이 실려있어 두 집안의 친밀한 교류관계와 새로운 역사적 사실을 밝혀주고 있다. 충혜공께서 1540년에 쓰신 양소공 행장에는 양소공의 배위가 '정경부인 청송심씨 某官某女'로 기술돼 있어 이 당시에는 정안공의 소생으로 특정되지 못했음을 알 수 있는데 이후에 간행된 의성김씨족보(1925년 을축보)에서 정안공의 자녀로 등재되었음이 전해온다.
청송심씨 선조사적과 뿌리역사 연구에 천착해온 심재석 박사도 새로 드러난 사실에 자못 놀라워하며, 그의 저서 '<청성백 심덕부 연구, 2022년>의 일부 내용을 추가 보완할 사유가 생겼다'는 의견을 내놓았다.
<앞으로 규명해야 할 쟁점과 접점>
1. 충혜공 심연원의 아우인 좌의정공 심통원이 간행한 을사보(1545년)에는 왜 정경부인 심씨가 등재되지 않았을까?
☞ 심연원이 김영렬 행장에 기술한 '정경부인 청송심씨 모관모녀'에서 보듯 김영렬의 배위가 청송심씨는 맞지만 누구의 자녀인지 확인되지 않은 상황에서 등재되기는 불가능
☞ 을사보를 심통원이 간행하였지만 그 기초자료는 심빈과 그의 아들인 심광언(인수부윤공파)으로부터 받았기 때문에 정경부인 청송심씨의 존재가 기록되지 않은 기초자료를 그대로 간행했을 수 있음
2. 1925년 간행한 의성김씨족보에서 뒤늦게 김영렬의 배위를 심덕부 소생으로 등재한 근거는?
☞ 현재로서는 의성김씨 문중에서 그 근거자료가 확인되지 않고 있으나, 그렇다고 임의적으로 심덕부의 소생임을 특정했다고 볼 수도 없음(혼맥으로 연결된 다른 가문의 족보나 가첩 또는 다른 문집에서 단서가 발견됐을 가능성)
☞ 1390년대에 김영렬과 혼인할 수 있는 청송심씨 여성은 심덕부, 심원부의 자녀이거나 2세조 봉익대부공 심성(沈晟)의 후손으로 한정될 수 밖에 없는데, 당시 정치적, 사회적 상황에서 김영렬과 혼인할 수 있는 여성은 심덕부의 자녀가 가장 유력
☞ 당시 김영렬은 수군절제사, 병조참판 등 문무 겸전의 공신으로 심덕부의 관직생활과 유사한 길을 걸었음
☞ 심덕부의 6子인 청원군 심종이 김영렬의 화상찬(畵像讚)을 쓰고, 태종이 주도한 회맹록(會盟錄)에도 함께 수록되어 있어 친밀한 관계로 추정(심종은 정사공신, 김영렬은 좌명공신)
3. 당시 심덕부는 최고 권력의 중심이었는데 그의 자녀가 후배위(后配位)로 출가하는 것이 가능한 일일까?
☞ 초배위와 사별 후에 후배위가 된 경우에는 정실부인으로 인정되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음.
☞ 당시 김영렬이 무신으로서 왜구를 토벌하는데 수차례 공을 세워 경기우도 수군첨절제사, 중추원부사 겸 경기도 도절제사 등을 역임하는 등 촉망받는 젊은 공신이었음
![]() |
의성김씨 족보(1925년) |
![]() |
맹암집 초간복(1805년)에 들어있는 충혜공이 쓴 김영렬 행장(원문) |
![]() |
맹암집 초간복(1805년)에 들어있는 충혜공이 쓴 김영렬 행장(원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