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3대 재상 배출한 명문가
왕실과 혼맥 맺은 공신 집안
섬진강 절경에 은거한 재야학자들
절의 정신으로 국난엔 의병 일으켜
장마로 유실된 문화재 복구 보존해야
함허정 (전남유형문화재 제160호) |
섬진강이 흐르는 전남 곡성군 입면 제월리에는 조선시대 옥과현감으로 부임하면 고장 선비들을 초청하여 향음례를 베풀었다는 아름다운 정자 함허정이 있다. 서석의 기상을 가진 무등산과 굽어 흐르는 섬진강의 비경을 한눈에 보면서 많은 시인문사들이 시를 남겼다는 함허정은 국가민속문화재로 지정된 제호정고택과 함께 청송심씨 인수부윤공파 제호정종가가 15대를 지켜온 보물이다. 이 아름다운 정자가 지난 장마와 홍수에 피해를 입어 문화재 보존에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조선의 명문가의 전통을 계승하고 있는 곡성 청송심씨 제호정종가를 찾아 가문의 내력을 살펴본다.
◇조선개국공신 심덕부, 가문 부흥시켜
청송심씨는 고려 충렬왕 때 위위시승을 역임한 심홍부를 시조로 모신다. 4세 심덕부가 고려 말 왜구를 토벌한 공으로 문하찬성사, 청성부원군에 봉해지고, 개국에 참여해 좌정승에 오르며 회군공신 1등에 추록됐다. 심덕부의 일곱 아들 중 여섯째 심종(?~1418)이 태조의 차녀인 경선공주와 혼인한 부마로서 1차 왕자의 난에 공을 세워 청원군에 봉해졌다. 심덕부의 다섯째 아들 심온(1375~1419)은 세종의 왕비 소헌왕후의 부친으로 국구(왕의 장인)가 되고 영의정에 올라 청송심씨 안효공파를 열었다. 심온의 아들 심회(1418~1493)까지 영의정에 올라 3대 연속 재상을 배출한 조선의 명문가로 부흥한다.
심덕부의 동생 심원부(?~?, 호는 악은)는 포은 정몽주, 목은 이색, 야은 길재, 농은 민안부와 함께 고려5은으로 불리는 고려충신으로 형 심덕부와 달리 절의를 지켜 두문동에 은거했으며 장성 경현사에 배향됐다.
◇대제학 심선, 망세정 은거 심덕부의 넷째 아들인 시조5세 심징(?~1432)은 문과제 급제하고 인수부윤을 역임해 인수부윤공파를 열었다. 7세 심선(?~1467)은 황해도관찰사를 거쳐 대제학에 올랐으나 경기도 양주에 망세정(忘世亭)을 짖고 지조를 숭상하고 절의를 지키며 초야에 은거했고 장릉(단종릉) 유현단과 곡성 구암사에 주벽으로 제향됐다.8세 심안지 해주목사를 지냈고, 9세 심순(?~?)은 돈령부도정을 지내고 기묘사화 후 낙향해 도정공파의 파조가 된다. 10세 심광언(1490~1568)은 전라도관찰사, 사간원 대사간을 거쳐 예조참판으로 명에 사은사로 다녀왔고 형조판서, 우참찬에 올랐다. 심순의 아들인 10세 심광형(1510~1550)은 경사에 통달해 영호남의 유학자들과 교유했으나 관찰사의 천거로 광양·곡성·남평·순창의 중학훈도(교관)를 역임하고 제호정종가를 열었다. 그는 군지촌정사를 창건하고 학당을 열어 지역의 인재를 양성했다. 만년에 학문을 닦고 유림과 교유하기 위해 함허정 정자를 건립했다.
◇절의를 지키며 학문에 전념한 후손 심광형의 손자인 시조12세 심민겸(?~?, 호는 두암)은 예빈시주부를 지냈으며, 임진왜란, 정유재란에 의병군에 군량을 조달하고 이괄의 난에는 어가를 호종했으며 병자호란 때 청국 병영에 척화를 항소한 충신이다. 심민겸의 조카인 13세 심민각(?~?,호는 구암) 역시 이괄의 난에 의병을 창의해 집안사람 900여명을 이끌고 공주에서 어가를 호종했고, 청안현감에 제수됐으며, 병자호란에도 의병을 일으켜 호서지방을 지킨 충신이다. 벼슬에 나가지 않고 후학양성에 매진한 학자로서 구암사에 제향됐다.함허정을 450여년 보존해 온 종가는 은거하며 학문하는 선조와 현인들의 도학의 정신을 계승하기 위해 군지촌정사를 유지했다. 군지촌의 구암사는 함허정 절벽 아래 풍수명혈에 있는 거북바위에서 명칭이 유래한다. 종택인 제호정고택은 3개의 건물이 유지되는데, 안채, 사랑채, 행랑채로 구성됐다. 이 사랑채가 인재양성의 요람 역할을 했던 ‘군지촌정사’며, 무등산(옛 서석산)을 바라보는 곳이라 하여 ‘망서재’라 했다고 종가는 전한다.
군지촌정사. 제호정고택의 사랑채이지만, 외부에서는 대청이 있어 무등산이 보이는 ‘망서재’로도 활용되고, 학당을 운영하는데 불편함이 없는 구조가 독특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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