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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후기 천재화가 현재(玄齋)심사정(沈師正)

  • 기사승인 2020-04-21
  • 신문 138호(2020-04-21) 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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Ⅳ. 스승 겸재가 외직으로 나가니 화법수련을 중지할 수밖에 없었다

 

심사정 강상야박도 / 제작연도 1747년 / 종류 수묵화 / 기법 견본수묵(絹本水墨) / 크기153.2 x 61 cm

6월13일 경종이 등극하자 병신처분 후 숨죽이고 있던 소론들이 차츰 머리를 들기 시작하니 7월11일 이광좌(李光佐)1674-1740)가 예조참판으로 송성명(宋成明1674-1740)이 부승지로 출사하고, 7월18일에는 조태구(趙泰耈1600-1723)가 이조판서가 되었다가 10월12일에 우의정으로 정승 반열에 오른다.

이런 와중에 겸재는 12월12일자로 하양(河陽)현감 9종6품에 제수 된다.

현감직은 비교적 뜻대로 행정에 포부를 펼칠 수 있고 녹봉 이외의 수입도 얻을 수 있어 하급관리들이 선망하는 자리인데 이렇게 빨리 현감직에 나갈 수 있었던 것은 가난한 그의 집안사정을 꿰뚫었던 김창집 일가의 배려가 크게 작용했을 것이다.

인사권을 담당하는 이조판서직은 노론인 옥오재(玉吾齋) 송상기(宋相琦,1657-1723)에게 넘어 갔다가 11월26일에는 역시 노련 중진인 구계(句稽) 권상유(權尙游1656-1724)에게 넘어 간다. 송상기는 겸재 그림에 심취하여 겸재와 지음(知音)을 허락하고, 겸재의 진경산수화를 극찬 하였던 담헌(湛軒) 이하곤(李夏坤1677-1724)의 장인이고, 권상유는 우암의 수제자로 율곡학파의 제4대 수장이던 수암(遂菴) 권상하(權尙夏1641-1721)의 아우였다. 한편 옥오제(玉吾霽)는 김창집의 내종사촌 매형 이었다.

그러니 겸재가 하양현감이 되는 데는 김창집 일가의 어른들은 물론 이하곤 같은 친구들의 도움이 컸으리라 생각된다. 하필 하양으로 임지를 정한 것도 북송의 대화가인 곽희(郭熙)의 고향이라서 곽하양의 별호로 불려짐으로 정하양의 별호로 이에 대적하게 하기위해서 였던 듯하다.

이에 이하곤은 설 쇠고 경종원년 (1721)신축 정월에 임지로 떠나는 단금의 벗 겸재에게 이런 전별시를 지어 위로와 축하를 겸하고 있다.

「한벌 관복 반쯤 새물 갔으니, 십년을 낮은 벼슬로 서울 먼지 속 달렸었구나. 딱딱이 치며 고생한 뜻 알아야하네. 다만 어머님 위해 가난치 않으려 했던 것을 정월 동풍에 눈은 수례에 차고 용추 남쪽 산마루에 걸린 구름은 아득하다.

자네 이 걸음 맑은 흥취 더하려는 것이니, 하양 한 골 꽃을 다스리겠지. 읍이 작아 말만하면 어떠하겠나.

백성이 순박하고 기쁨 많은 것 신라의 뛰 끝이겠지.

보내며 난 새가 가시에 깃드는것 한탄 않음은, 자네 어머님 진지상에 날마다 생선 드릴 것 아는 탓이네.

가슴속에 선천학(先天學,周易) 갖추어 있고, 붓끝에 반점 티끌도 원래 없구나. 이미 기인(奇人)을 향해 문인을 넘겨다보았으니, 시냇가 사립문에 늙은 나무 많겠지. 조만간 자네는 가서 그릴 터, 먼저 한 장 그려내어 내게 부치게.」

15세 소년인 현재도 스승 겸재가 외직(外職)으로 나가 있는 동안 화법수련을 중지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스승이 상경하는 날 다시 뵙기를 기약하며 겸재댁 출입중단 했을 터인데 이것이 스승과의 영이별이 되었으니 어찌 이일을 꿈엔들 생각했었겠는가.

이때까지 현재는 조부가 과욕죄인이 되어 과거에 응시할 수 없다는 사실 이외에는 큰 불행을 모르고 살고 있었다. 그의 모친 하동정(鄭)씨(1678-1744)가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1607-1689)의 문인으로 그림에 능했던 육오당(六吾堂 ) 정경흠(鄭慶欽,1620-1678)의 셋째아들 곡구(谷口) 정유점(鄭維漸1655-1703)의 무남독녀 외딸이라 곡구의 경저(京邸,서울집)인 인왕곡 집을 물려받아 살면서 외조모 풍천임(任)씨(1656-1727)의 사랑을 독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에게 손위형인 심사순(沈師淳,1701-1723)이 있었지만 청평위 심익현심익현(沈益顯,1641-1683)의 장자인 심정보(沈廷輔,1658-1727)에게 양자로 가서 청평위의 봉사손(奉祀孫)이니 현재는 그로부터 집안의 유일한 아들로 남게 된다.

심정보는 원래 외아들이었으나 그 첩인 심사하(沈師夏,1705-1742) 모친이 시기심으로 독살하여 후사가 단절 되었다.

그래서 심정보는 심사순을 양자로 들이니 대체로 심익창의 환갑해인 숙종38년(1712) 전후한 시기일 듯하다.

심익창은 바로 전년(1711) 8월경에 귀양에서 풀려 집으로 돌아와 있었는데 심지원의 아들로 유일한 생존자였으니 당연히 문장(門長)의 자격으로 청평위 후사문제에 관여하려 했을 것이다. 청평위궁이 누리는 왕척(王戚)으로의 위상과 막대한 상속재산이 탐났을 터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6세 연하의 조카인 심정보에게 자신의 장손에 해당하는 심사순을 양자로 보냈을 것이다.

여기에 심정보의 부인 전주이씨(1659-1742)의 의사가 크게 작용했을 터인데 정종10남 덕천군(德泉君) 후생(厚生.1397-1465)의 후손인 이조판서 이정영(李正英,1616-1686)의 6녀로 그 부친 서곡(西谷) 이정영은 왕희지체에 능하고 전주(篆籒)에도 정통한 명필로 소문나 있었다.

- 다음호에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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