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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도 충렬사에 모셔진 12세조 휘: 현

  • 기사승인 2019-11-25
  • 신문 138호(2019-11-25) 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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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효공의 7대손으로 수찬공 諱: 達源의 증손이신

12세조 휘: 현 추향봉행

 

강화도에 위치한 충렬사에는 순국열사 29위의 영령이 모셔져있다.

11월 16일(10월 중순에 丁字가 되는 날) 11시 강화도 충렬사에서 12세조 휘: 현의 후손들과 강화 부 군수 등 10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祭享을 봉행하였다.

공은 충렬사에 29인의 위패를 봉안한 가운데 5위로 西二位에 배향되어 있다.

공은 안효공의 7대손으로 수찬공 諱: 達源의 증손이시다. 병자호란(丙子胡亂)이 일어나자 공은 돈영부도정(敦寧府都正) 이라는 직책도 버리고 구국의 일념으로 강화로 들어갔다. 그러나 얼마 되지 않아 江華가 함락되고 백성은 청나라 군에 무참히 짓밟히고 살육 당했으며, 물품을 약탈당하는 수난을 당하자 분한 마음을 이기지 못하고 그 참혹한 상황을 통탄하는 유소(遺蔬: 임금께 올리는 글)를 쓴 다음 부인 宋氏와 함께 자결하였다.

공은 옥천(沃川)과 풍덕(豊德)과 철원(鐵原)의 수령으로 부임하면서 가는 곳마다 그 치적이 현저하였다.

공이 벼슬을 버리고 강도로 들어갔으나 끝내 강도가 청군에 함락되자 가묘(家廟)와 신주(神主)를 외딴곳에 묻어두고 손수 임금께 올리는 문서를 쓴 다음 의관을 정재하고 북쪽을 향하여 네 번 절한 후 宋씨 부인께 말하였다.

“나라가 깨지고 집이 망하였는데 바위구멍에 숨어 설사 화를 면한다 해도 그렇게 산다는 것이 구차하지 않은가!” 하니 송씨 부인이 말하였다.

“지아비는 나라를 위하여 죽고 아내는 절개를 지키고 몸을 깨끗이 하여 죽어서 함께 가는 것을 실로 달갑게 여기는 바입니다.” 라고 응답했다. 조카 동구(東龜: 후에 贈 大司憲)가 배를 갔다 대고 피신할 것을 간곡히 권했으나 끝내 물리치고 부인은 목욕재계 하고 옷을 갈아입고 함께 자결하였는데 그 얼굴이 평온해 보였다. 임금께서 환궁하여 공의 유소를 보고 하교하였다.

“국가는 심현에게 아무것도 베푼 것이 없는데 절개 지키기를 중신보다 먼저 하였으니 大賢이 아니고 어찌 이와 같이 할 수가 있겠느냐. 또한 그 아내가 절개를 지키기 위하여 함께 죽었으니 매우 아름다운 일이로다. 부인에게 정문(旌門)을 내리고 그 자손들을 기용해서 충렬을 표하도록 하라.” 하셨다.

병자호란은 신생국가인 淸나라가 明나라를 핍박하며 이어 조선에 君臣의 義를 맺을 것을 요구했으나 척화론(斥和論)의 주장에 따라 요구를 물리치자 凊太宗이 직접 10만 대병을 거느리고 강화도를 함락하고 仁祖가 피난한 남한산성마저 함락시킨 다음 삼전도(三田渡)에서 치욕의 화의(和議)를 맺으니 이것이 바로 천추의 한을 남긴 국치인 것이다.

화의 장소에는 청태종의 세 아들을 앞에 세우고 의자에 앉아있고 인조는 두어 칸 앞에 보복하고 앉아서 태종의 세 아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세 번 절하고 아홉 번 조아리는 항례(降禮)를 올리고야 수치스러운 전쟁이 막을 내린 것이다. 이 엄청난 전쟁의 와중에서 수많은 백성들이 나라를 지키다 명을 달리한 것이다.

이 수많은 순국열사 중에 충렬사에 배향된 29위의 영령 앞에 전의 국치를 되새기며 오늘도 엄숙한 마음으로 祭를 올리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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