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fault_top_notch
default_news_ad1

故 심의환 장관 서거 40주기를 기리며

  • 기사승인 2019-10-22
  • 신문 138호(2019-10-22) 0면

공유

               

수출 100억불 달성으로 6.70년대 우리나라 산업화를 이끈

한국 경제발전사의 주역 故 심의환 장관 서거 40주기를 기리며

 

의환 장관이 운명(殞命) 직전 당시 박정희 대통령께 올린 편지 글

< 특별기고 >  청송청년회장 심 남 규

수출 100억불 달성으로 6.70년대 우리나라 산업화를 이끈 한국 경제발전사의 주역 故 심의환 장관 서거 40주기를 기리며 지난 10월 22일이 故 심의환 전)총무처 장관 서거 40주기를 맞는 날이다.

오늘날 우리 기성세대들에게 지난 60~70년대 한국 근대화의 초석이었던 새마을 운동과 그리고 보릿고개의 상징이기도 하였던 통일벼 등은 아직도 과거의 소중한 추억과 아련한 향수로 자리 잡고 있다.

그리고 이들 역사적 사건들과 더불어 우리나라 경제사에 또 하나의 빼놓을 수 없는 것이 1977년 12월 22일 대망의 "수출 100억 달러 달성" 이라는 감격적인 사건이 기억에 남아 있다.

한국 수출 100억불 돌파 !

당시 이를 두고 세계 언론들은 대한민국을 "한강의 기적" 이라고 표현하며 수출 1억 달러에서 시작하여 만 13년 만에 목표 달성을 이룬 괄목할 만한 성장이라 놀라 워 하였다.

이는 분명 우리 한국 경제사의 매우 획기적인 성과이면서 역사적인 위업이기도 하다.

그때 당시 수출정책의 야전 사령관 격으로 상공부에서 60~70년대 우리나라 고도 경제성장을 이끌어 온 주역이 바로 이곳 청송 부남면 출신의 故 심의환(沈宜渙) 前 총무처 장관(상공부 차관 역임)이다.

고인은 1923년 3월 11일 경북 청송의 가난한 농부였던 심능준(沈能濬)의 3남중 막내로 태어나 일제 치하인 1930년 초 향리(鄕里)에서 부남초등학교을 졸업한 후 그는 바로 일본으로 건너가 대판(오사카)공업학교 5년을 졸업하고 해방과 동시에 다시 국내로 돌아와 1945년 10월부터 6. 25동란기인 1950년 10월까지 경북지역 및 대구 등지의 여러 국민학교에서 교편생활을 두루 거치다가 이후 교직을 그만 두고 향학(向學) 열정을 불태우며 1952년 경북대 법정대학에 입학하여 이듬해 졸업 후 1954년 9월 제6회 고등고시 행정과에 합격하는 영광을 안았다.

합격 후 이듬해인 1955년 상공부에서 수습사무관으로 공직에 첫발을 들여 놓은 이래 1962~1965년까지 상공부 중소기업과장, 상공과장, 상정과장, 국립공업연구소 수출공산품 검사부장을 거친 후 1966년 상역국장, 1970~1971년 상역차관보와 광공차관보 등 요직을 두루 거쳐 1972년 8월에는 18년 만에 상공부차관으로 승진하여 5년 5개월 동안 재직하며 최장수 차관기록을 세우는 등 무려 23년간이나 상공부를 지켜오면서 상공행정 분야에 탁월한 업적을 남겼다. 특히 그는 업무 보고 시 언제나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마치 신들린 사람처럼 거침이 없을 정도로 브리핑을 잘하였다는 평을 들었으며 또한 매사 업무추진에도 빈틈이 없고 치밀하였다.

이러한 연유로 주변사람들은 그의 별명(별칭)을 “청송택(靑松宅)”이라고 불리워 졌다. 이유는 경북 청송 출신으로 평소 말술도 마다하지 않을 정도로 술을 무척 좋아하고 항상 소박함이 묻어 있는 모습에서 주변사람들에게 붙어졌다.

□ 정통 상공관료로 수출 100억불 금자탑 달성의 주역

당시 박정희 대통령은 지긋지긋한 보릿고개의 가난에서 벗어나 경제발전의 초석을 다지기 위한 10대 국정과제 중 최우선 정책으로 수출주도형 경제개발 추진을 내세웠다.

부존자원이 부족한 국내시장이 좁은 반면 인건비가 싼 양질의 노동력을 많이 가진 우리나라로서는 당시 경제의 효율성을 높이기 위해서는 수출주도형 개방체제를 지향하지 않을 수 없었다.

즉 우리의 앞날을 수출에 걸어보자는 "수출 제1주의, 수출지상주의" 정책 이념은 바로 여기서 비롯되었다.

당시 상공부내는 유능하고 우수한 인재들이 많이 있었다. 상역분야에 이철승 차관보, 김우근 상역국장, 심의환 상정과장이 삼각 편대였다. 기술계통으로는 오원철 공업1국장, 엄익호 공업2국장, 안영철 섬유과장, 이성섭 중공업과장, 유각종 경공업과장 등이었다.

당시 수출정책의 총사령관은 박정희 대통령이었고 작전참모본부격인 주무부처는 상공부였다. 6. 25동란 직후 기아에서 허덕이는 절망적인 민생고와 한 많은 보릿고개에서 탈출할 수 있는 길은 오직  "수출 제1주의" 밖에는 있을 수 없었다.

당시 상공부에서 유행한 노래가 있다.

“수출이 무엇이냐고 물으신다면 눈물의 씨앗이라고 말 하겠어요~” “사랑”이라는 가사를 “수출”로 바꿔 불렀다. 수출이 얼마나 힘들었으면 「눈물의 씨앗」이라고 했을까 ?

그리고 70년대 수출은 모든 가치의 척도였다. 수출은 나라 경영의 수단이었으며 국민통합의 정착이기도 했다. 이러한 일들로 심 장관을 비롯한 상공부 공무원들은 수출기법을 발굴하고 때로는 독려하는 특전대원들이자 수출을 강력하게 밀어 부치는 돌격대원들이었다.

그 당시 정책구호가 있었다. "전 산업의 수출산업화" "전 품목의 수출상품화" 그리고 "전 세계의 수출시장화"가 바로 그것이었다.

실제로 당시 이낙선 상공부장관은 직원들에게 수출에 미치라고 독려했다.

모든 공무원들을 모아 놓고 제정신만으로 수출 100억 달러를 달성하기 어려우니 미친 듯이 뛰라고 공개독전을 펼쳤다.

당시 심의환 차관도 매일 밤 여러 수출관련 유관단체장들과 회식을 돌며 말술을 마다하지 않고 때로는 토해 가며 수출을 독촉했다.

당시 영어에 능통했던 심 차관은 각국의 통상대표들과 입씨름과 술씨름으로 매일 같이 나날을 보내기도 하였다.

그때에는 분명 100억 달러 달성을 위한 노역이었고 과로가 아닐 수 없었다.

그래서인지 수출전선에 매달렸던 당시 많은 상공맨들이 일찍 세상을 떠났고 그 뒤로 안타깝게도 심 장관도 그리 많지 않은 나이에 뒤따라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이러한 수출정책의 노력과 집념의 결과는 차근차근 결실을 맺기 시작하였다. 심 장관이 1964년 상정과장 때 1억 달러, 1968년 상역국장 때 5억달러, 1970년 상역차관보 때 10억 달러 목표를 달성하고 1975년 차관 때 50억 달러를 달성시킨 후 1977년에는 드디어 대망의 수출 100억 달러 돌파의 달성을 눈앞에 앞두고 있었다.

그러나 심장관은 그렇게도 염원하던 수출100달러 달성의 신화를 불과 48시간 앞두고 청와대로부터 총무처장관의 입각을 통보받았다.

당시 입각 통보를 받고 축하 인사도 많았으나 다른 한편으로는 그에게 몹시 서운한 마음도 있었다.

□ 총무처장관 재임 1년 10개월 만에 지병 악화로 별세

1977년 12월 20일 총무처 장관에 임명된 후 3개월 전부터 심 장관은 병세가 악화되기 시작했다. 이후 과로 등이 겹치면서 심 장관은 1979년 10월 22일 만 56세의 나이로 서울 성북구 자택에서 지병인 간암으로 별세하였다.

재임 만 1년 10개월 만에 현직 각료가 사망하기는 정부수립 이후 처음 있는 안타까운 일이었다.

정부는 심 장관에게 최고의 훈격인 1등급 청조근조훈장 추서와 장례비 5백만 원을 예비비로 지급하기로 하였고 장례는 총무처장으로 중앙청 광장에서 거행하기로 결정했다.

10월 24일 중앙청광장에서 거행된 영결식에는 최규하 국무총리를 비롯한 전 국무위원들과 박준규 공화당의장, 신형식 사무총장 등 여야 국회의원들과 유가족 그리고 공무원, 일반시민 등 1,00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엄수되었다.

장례위원장인 최각규 총리는 조사를 통해 "그간 고인은 병을 얻어 고통과 불편 속에서도 맡은바 직무를 수행하고자 최선을 다했으며 우리 모두가 고인이 하루빨리 쾌유하기를 기원하였으나 마침내 현직 각료의 몸으로 불귀(不歸)의 객이 되었으니 참으로 비통하고 애석한 마음 금할 길 없다"라고 애도하고 "고인은 항상 의리와 융화를 존중하면서 소임을 다하는 책임감과 투철한 공직자였기에 오늘 우리나라가 처한 내외의 어려움 속에서 인재를 잃은 아쉬움과 추모의 정이 더하다"라고 추모했다.

영결식이 끝난 후 고인의 유해는 가족들이 간소하게 치르겠다는 평소의 뜻을 존중하여 경기도 광주시 퇴촌면 우산리 묘소에 안장되었다.

한편 박정희 대통령도 10. 26사태 하루 전인 10월 25일 자신의 운명을 예감하듯 심 장관의 부인에게 남긴 편지글에서 "인생은 원래 무상한 것이고 회자정리(會者定離) 라고 하였으니 한번 왔다가 한번 가는 것은 정한 이치인 줄 알면서도 너무나도 홀연히 떠나시니 애석하고 허전함을 금할 길 없습니다"라고 고인의 별세를 안타깝고 애석하게 생각하면서 추모의 글을 남겼다.

 

 

default_news_ad5
#top
default_bottom_notc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