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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아버지가 들려주는 우리 청송심가 이야기(15)

  • 기사승인 2020-09-29
  • 신문 138호(2020-09-29) 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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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적 물리쳐 나라에 보답노모 허락받고 출전해 큰 공

11세조 벽절공(碧節公, 沈淸) 할아버지(2)

 

沈厚燮 교육학박사. 아동문학가

 얘야, 너는 위인들의 전기(傳記)를 많이 읽어봤겠지. 전기를 읽는 가장 큰 이유는 그분의 일생을 통해 배울 점을 찾기 위한 것이 아니겠니? 묘비명(墓碑銘)을 읽는 것도 마찬가지란다. 묘비명은 묘비(墓碑)에 새겨진 글을 말하는데 비문(碑文) 혹은 묘갈명(墓碣銘)이라고도 해. 돌아가신 분의 일생을 기록되어 있어.

  11세 벽절공 할아버지의 묘갈명은 안동사람 권주욱(權周郁) 선생이 썼는데, 읽어보면 벽절공 할아버지의 어린 시절은 물론 돌아가시기 직전까지의 공적을 알 수 있단다.

 벽절공 할아버지는 젊은 시절 학문도 깊었지만 시대의 흐름까지 내다본 지사(志士)였어. 아는 것을 생각만 하지 않고 실천으로 옮기신 분이기도 하셨지. 그러니 지행합일(知行合一)을 이루신 것이야. 아래 비문을 보면 짐작할 수 있단다.

벽절정 본채

하루는 정자 위에서 글을 읽으며 천체(天體)의 현상을 우러러보고는 탄식하며 말하기를 몇 해 안에 나라에 병화(兵禍)가 있을 것이라 하더니, 과연 임진년 4월에 왜구(倭寇)가 크게 쳐들어와 임금이 서울을 떠나자, ()이 분개하여 말하기를 이제 신하로서 나라를 위하여 일어설 때라 하며 전쟁터에 나가려 할 때, 집에 늙은 어머니가 계신지라 공이 눈물을 흘리며 뵙고 말하기를 충효를 둘 다 온전하기는 어려우나 나랏일이 이와 같으니 감히 한번 죽어 나라에 보답하겠다고 하자 어머니가 울면서 허락하였다.

 공은 곧 사당(祠堂)에 고하고 두 아들을 불러 말하기를 ‘둘째인 응렴(應濂)은 아직 어리니 나를 대신하여 늙은 어머니를 섬기고, 맏이 응락(應洛)은 나를 따라 전쟁터에 가는 것이 좋겠다하고, 이웃 선비인 동계(東溪) 조형도(趙亨道)와 그 아우 동도(東道)와 같이 화강상(和江上)에 가서 죽기로 동맹하였다.

 이 글을 읽어보면 벽절공 할아버지는 용감도 하셨지만 효심도 아주 깊었다는 것을 알 수 있겠지?. 전쟁터에는 나가야 하는데 늙으신 어머니가 걱정이 되자 간곡하게 부탁해서 허락을 얻어냈던 거야. 그러고 보면 그 어머님도 대단하신 분이었던 것 같아.

 물론 나라를 위한 희생정신도 투철하셨지. 둘째 아들은 아직 어리니 집에 있으면서 늙으신 할머니를 모시게 하고, 맏아들만 데리고 전쟁터로 나가셨잖아. 당시 전쟁터도 화살이 핑핑 날고 칼날이 번득이는, 언제 죽을지 모르는 위험한 곳이지. 그런데도 아들을 데리고 전쟁터에 나가셨어. 아들에게 대의(大義)란 무엇인가를 가르쳐 주기 위해서가 아니었을까. 벽절공 할아버지는 훌륭한 선비였던 거야.

 다음 비문을 읽어보면 벽절공 할아버지는 지략(智略)도 뛰어났지만, 당신이 세운 공도 남에게 양보할 만큼 훌륭하신 분이셨던 것 같아.

 계사년에 초유사(招諭使) 김성일(金誠一)이 진주에서 전사하였다는 말을 듣고 깜짝 놀라 말하기를 우리나라의 남쪽에 중진(重鎭)이 될 사람이 없어졌으니 우리는 더욱 마땅히 죽을힘을 다하여야 할 것이라 하였다.

 갑오년에 조형도와 같이 무과(武科)에 급제하고, 다시 의병진영(義兵陣營)에 돌아와 힘을 다하여 물자를 조달하니 체찰사(體察使) 이원익(李元翼)이 그 공()을 알려 조정에서 훈련장(訓鍊將)에 임명하였다.

 주사산(朱砂山)에 이르러 적()과 싸워서 대파(大破)하니, 여러 장수가 기뻐하여 말하기를 의병을 일으킨 이래로 이번 싸움에 이긴 것이 가장 통쾌한데, 이는 모두 심 훈련장의 지략 덕분이라고 치하하였다. 이에 벽절공은 김응택(金應澤)에게로 그 공을 돌렸다.

  벽절공 할아버지는 전국 각지의 지사들과도 폭넓게 교류하셨어. 청송에만 머무르지 않고 멀리 현풍의 곽재우 장군과도 서신을 주고받으셨고, 대구의 팔공산까지 직접 가셔서 그곳 의병들과 의기투합해 전략을 세우기도 하셨지.

아래 비문을 읽어보면 이를 짐작할 수 있어.

 병신년에 인근 의병장이 팔공산(八公山)에 모였는데 공이 시()를 지어 말하기를 유천수인대(有天讎忍戴) 위국사무우(爲國死無憂)’ 같은 하늘 아래 원수와 같이 있는 것을 참느니 차라리 나라를 위해 죽어서 걱정을 없애리로다.’라고 하며 결의를 다졌다.

 정유년에 방어사(防禦使) 곽재우(郭再祐)가 어머니의 상을 당하자 서신으로 조문(弔問)하고 나라일을 걱정하였다.

벽절정 마당의 향나무.멀리 보이는 산 중턱에 벽절공 할아버지 묘소가 있다.

그래, 벽절공 할아버지는 이처럼 자랑스러운 우리 선조님이야. 우리의 몸속에는 이런 훌륭한 선조님의 피가 흐르고 있단다. 우리 역시 선조님들의 훌륭한 가르침을 가슴에 새기고 실천해 나간다면 부끄럽지 않은 사람이 될 수 있을 거야. 다음 호에서는 벽절정 할아버지가 어떻게 돌아가셨는지 살펴보도록 하자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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