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언공(휘 상정)행장


公諱尙鼎字聖凝初諱尙燁靑松之沈爲世大姓有諱德符左政丞封靑城伯事載太史氏其後有諱光彦左參贊贈諡胡安公德業名一世公其六代孫也曾祖諱僔裕陵參奉贈戶曹判書祖諱之治儀賓都事贈戶曹參判考諱楫安東府使贈都承旨妣全州柳氏贈淑夫人參判全平君諱淰之女公以庚申十一月十三日巳時生自幼明秀穎悟世以神童稱之己卯中進士己丑以泮製居魁直赴庚寅選隸槐院癸巳薦入注書丙申例陞典籍移兵曹佐郞五月拜正言時有壬辰科獄文泉李尙書塾以考官爲黨人所巧中竟至竄死公儀久而寃之至是上命更査欲直前誣端緖幾發而時議忽變遽命置之公與大司諫尹公星駿爭執不可啓辭中言出於仇怨證成於童騃廷讞失當輿論咸憤等語大觸時諱尹公黜昆陽公黜泗川皆命卽日辭朝十月始蒙許遞因 林川墓結草廬獨樂亭舊基爲終老計公素淸弱善病居慈夫人喪三年不食菜醬哀毁幾滅性自此益羸瘠屢濱於死泗又際海瘴濕不服水土因致積傷辛丑三月初九日病亟竟至不救得年僅四十二公居常以名節自勵體若不勝衣而有千萬必往之意踈儻狷介不容人過尤善於剖析是非辨別臧否若刃入而燭照惜乎際肅廟有宥不幸一言事不合斥遂挫揠齎志以歿公死後平坡往復世道屢嬗識者以爲若使聖凝不死汚隆激揚之際言議風節必多有可觀者云公在縣常以病臥閤而綜理區畵精密得宜吏畏其嚴民懷其簡人皆謂有先大人政事才其後庚戌余奉命過泗川路傍有去思碑邑人至今說當時事歸時槖有數斗糧米公計日而歸其餘官廳云餘可推而知己縣接南海公一日爲審檢放宿村舍寢簏中適齎來歐蘇文數卷問所宿地名乃三千里嘗夢得却來南海三千里嘗讀東坡六一文之句盖亦奇服齋北謫之兆也欺尤可悲也文才尤超絶四歲能知讀書七歲在先大人靈光任所濟州牧使李公喜龍方赴任滄溪林公呼韻命製別章公應聲對曰吾聞漢拏山乃在碧海間使君乘舟去借問幾時還滄溪公大加稱賞曰老夫當閣筆壬申始來受業於先君子先君子常奇公才以爲絶倫嘗命作怪石賦明谷崔相國見之謂有文章家手段未成童己有盛名於場屋間於詩獨得神解工於造語而不傷於尖逼於寫境而不失於俗屛居以後自放於湖山之間而間發於吟咏者幾於融化一時藝苑諸公若崔崑崙趙鶴灘皆自以爲不可及噫余後公五歲同閈游幾三十餘年可謂知公本末始終矣尙記公居憂時澌綴哭泣之狀至今令人感動有大小連之歎友于兄弟與長君仲氏居若嬰兒之於慈母公旣有此高世之行且其通才敏識不直爲一諫官而至如文藝之末亦不小試其緖餘林下歲暮之計又嗇其年天何厄斯人至斯耶顧余顚髮今己種種矣中夜無寐感念存沒何嘗不噓唏而嘆惜也公葬在林川瓢谷先쫿丙坐之原配淑人權氏承旨持之女與公同年生公歿後十年以辛亥正月某日卒葬用上下墳二子哲赫二女長適尹東儀次適李定相皆早夭哲生一子一女赫生一子皆幼公嘗夢遇老人書示悟字於掌上因號夢悟齋有遺稿若干卷行于世
李巨源 撰

16세조 몽오재 정언공 휘 상정(尙鼎) 행장
公의 이름은 상정(尙鼎)이요, 字는 성응(聖凝)이니 초명은 상엽(尙燁)이다. 靑松沈氏가 세상에서 大姓이 되었으니 이름 덕부(德符)라는 분이 있었는데 좌정승으로서 청성백(靑城伯)에 봉(封)해졌고 사적은 역사책에 실려 있다. 그 뒤 이름 광언(光彦)이란 분이 있어 좌참찬(左參贊)으로서 호안(胡安)이란 시호를 받았고 덕업이 세상에 이름났으니 공의 6代祖이다. 증조부의 이름은 준(僔)인데 유릉참봉(裕陵參奉)으로 호조판서의 증직을 받았고 조부의 이름은 之治이니 의빈도사(儀賓都事)로서 증직이 호조참판이다.
아버지 이름은 집(楫)인데 안동부사였고 증직이 도승지이며, 어머니는 全州柳氏로 贈 淑夫人인데 참판인 全平君 염(淰)의 딸이다. 공이 庚申(1680)년 11月 13日 사시생(巳時生)이니 어릴 적부터 밝게 빼어나고 영특하여 세인들이 신동이라고 하였다.
己卯(1699)년에 進士가 되고 己丑(1709)년에 성균관에서 으뜸으로 뽑혀 이듬해 승문원에 선발되고 癸巳(1713)년에 주서(注書)에 천거되었으며 丙申(1716)년에 전적(典籍)에 승급되었다가 병조좌랑으로 옮기고 5月에 正言으로 임명되었다. 이 때에 임진과옥(壬辰科獄)①이 있었는데 문천(文泉) 이상서(李尙書) 숙(塾)이 고시관으로 당인(黨人)②들로부터 간교한 무고를 당하고 일로 인해 마침내 귀양가서 죽게 되었는데 공론이 오래가고 원한을 짓게 되었다. 이래서 王命으로 다시 조사하여 무고(誣告)를 시정하고자 하였고 단서가 거의 나타나서 시론이 홀변(忽變)하니 속히 처치하라는 명이 내렸다. 公이 대사간 윤성준(尹星駿)과 더불어 다투어 불가함을 아뢰었으나 글중의 말이 원수에게서 나온것을 아이들도 증거를 대니 정언(廷쵌)③이 당위성을 잃었고 여론이 다들 통분한다는 등 정황이 악화되어 윤공이 곤양(昆陽)으로 쫓겨나고 公은 사천(泗川)으로 쫓겨났다. 다들 하명된 날 조정을 떠났고 10個月만에 비로소 조령이 바뀌어 林川으로 돌아갔다. 무덤 옆에 풀 집을 짓고 독락정(獨樂亭) 옛터에서 노후를 마치고자 했다. 公이 평소 허약하여 병에 잘 걸렸는데 어머니의 3年喪을 치르며 나물과 장을 먹지 않아 쇠약해져서 거의 죽게 되었다. 이때부터 더욱 수척하고 여러 번 죽을 고비를 넘겼는데 사천은 또 바닷가인지라 풍토가 습하고 수토가 맞지 않았으니 상처가 오래 쌓여 辛丑(1721)년 3月 初아흐레 병이 더해서 마침내 일어나지 못하니 향년 42歲이다.
公이 평소 명절(名節)④로서 스스로 몸을 가다듬고 옷도 못 추스리나 천만 번 갈 수 있다고 여겼다. 씩씩하고 고집이 세어서 남의 허물은 용납하지 못하고 시비를 분별하며 해결하기를 더욱 좋아하니 잘못에는 칼날같이 밝혔다. 아깝도다. 숙종조에 있어 남을 구원하려다가 불행하게도 한 변론사건에 휘말려 여지없이 축출 당하고 뜻을 풀지 못한 채 죽었다. 公이 죽은 뒤에 세간에 오고가는 말들이 여러 차례 바뀌니 아는 이들은 만약 성응(聖凝)이 죽지 않았으면 성쇠가 격발하는 즈음에 의론과 풍절이 반드시 볼 만한 것이 많았을 것이라고 여겼다. 公이 지방에 있을 때는 늘 병으로 집안에 누워 있었으나 구역내의 일들을 종합관리하고 모두 정밀하고 합당하게 처리하였으니 향리(鄕吏)들이 그의 위엄을 두려워하고 백성들이 그의 간명한 처사를 생각하여 사람마다 先大人의 政事 재능이 있었다고 말하였다.
9年 뒤인 庚戌(1730)년에 내가 조정의 명으로 사천 땅을 지났는데 길가에 추모비가 서 있고 읍 사람이 지금도 그 당시의 일들을 이야기하는데 公께서 돌아올 때 전대에 두어 말 양식이 남은 것을 公이 날짜를 계산하고 그 나머지는 관청에 되돌려 주었다고 하니 그 밖의 일도 가히 추측하여 알 만하다.
사천이 남해에 접해 있는데 公이 하루는 돌아볼 일이 있어서 촌가에 나가서 자는데 여장 속에 마침 《구소문(歐蘇文)》⑤ 몇 권을 싸갖고 왔으며 숙소의 지명을 물으니 이에 삼천리(三千里)라고 하였다. 일찍이 꿈에서 얻은 각래남해삼천리(却來南海三千里:문득 남해의 삼천리에 와서) 만독동파육일문(쬹讀東波六一文:할일 없이 소동파의 육일문을 읽었네)이란 구절과 또한 기이한 것은 재최복(齋衰服)⑥을 입고 북쪽으로 귀양가는 조짐이었으니 더욱더 슬프다.
공은 문재(文才:글재주)가 특별하게 뛰어나서 4歲 때 능히 글을 읽고 7歲 때 부친의 임소인 영광(靈光)에 있었는데 제주목사 이희룡(李喜龍)이 부임할 때라 임창계공(林滄溪公)이 운자(韻字)⑦를 부르고 송별의 시를 지으라고 명하니 공이 응대하였다.
『오문한라산 내재벽해간(吾聞漢拏山 乃在碧海間:내가 한라산 이름을 들었는데 이에 벽해의 사이에 있다고). 사군승주거 차문기시환(使君乘舟去 借問幾時還:그대가 배를 타고 건너가니 물어봅시다. 언제 돌아오시는지).』
창계공께서 크게 칭찬하시며 늙은이는 마땅히 붓을 던져야겠다고 하였다.
壬申(1692)년에 부친으로부터 수업을 시작하였는데 부친이 항상 公의 재주가 남보다 뛰어난 것을 기특하게 여겨 하루는 괴석부(怪石賦)⑧를 지으라고 하였는데 명곡(明谷) 최상국(崔相國)⑨이 보고서 문장가의 솜씨가 있다고 말하고 성동(成童)⑩이 못되어 이미 과장(科場)에 이름이 풍성하여 시를 짓는데 특히 귀신같고 말 솜씨가 능하며 첨예하나 남을 상하지 않고 글씨 쓰는 법이 좋아서 속되지 않으니 뒷날 넓은 세상에 나가서 임의대로 활용하면 거의 한꺼번에 융합할 수 있다고 말하였다.
예문관(藝文館)에서도 최곤륜(崔崑崙)·조학탄(趙鶴灘) 같은 분들이 모두들 스스로도 미치지 못한다고들 하였다.
아! 나는 公보다 다섯 살 아래로서 같은 거리에서 노닌 지 30여년이니 가히 公의 시종본말을 안다고 하겠다. 아직도 公께서 거상시(居喪時) 목이 쉬도록 곡읍(哭泣)하던 정상을 기억하며 지금도 사람들로 하여금 크고 작은 감동과 한없는 탄식을 자아내게 한다. 형제간에 우애하고 맏형과 둘째형과 더불어 평상시 자모(慈母) 앞의 어린아이 같이 지냈었다. 公은 이미 탁세(卓世)의 행실이 있었고 또한 신통한 재주와 민첩한 학식으로도 한낱 간관(諫官)으로 머무르고 이같이 문예의 끝자리에서 마친다면 포부의 한 가닥도 시험하지 못한 셈이다. 수풀 아래에서 저물어 가는 계획에 다시 수명에까지 인색하니 하늘은 어찌 이 사람에게만 이와 같은 액을 내리는고. 나의 힘없이 늘어진 머리털을 돌아보니 벌써 종종(種種)⑪하기 그지없구나. 한밤중에 잠 못이루며 만감이 떠올랐다가 사라지니 어찌 한숨지으며 한탄하고 애석하지 않으리오. 공의 장지는 임천 표곡리 선영의 병좌의 무덤이다.
부인 淑人 권씨인데 승지 지(持)의 딸이다. 公과 더불어 같은 해에 태어나서 公보다 10年 後인 辛亥年 1月에 죽으니 장지는 公과 上下분으로 썼다.
두 아들은 철(喆)과 혁(赫)이고 두 딸은 윤동의(尹東儀)와 이정상(李定相)에에 시집갔으나 모두 일찍 죽고 철이 1男1女를 낳고 赫이 1男을 낳았으나 다 어리다.
公이 일찍이 꿈에 노인을 만나고 손바닥에 오자(悟字)를 써 주었기에 호를 몽오재(夢悟齋)라 하고 유고(遺稿)⑫ 몇 권이 세상에 전해지고 있다.
知製敎 이거원(李巨源) 씀.

주(註)
① 임진과옥(壬辰科獄):壬辰年의 과거의 부정으로 인해 일어난 옥사. 임진년에 일어난 옥사이다.
② 당인(黨人):당쟁에 관여된 사람. 여기서는 상대 당을 지칭함.
③ 정언(廷쵌):옥사가 있을 때 조정에서 시비를 가리는 법관. 지금의 검찰과 같은 직위.
④ 명절(名節):명분과 절개.
⑤ 구소문(歐蘇文):중국의 문장가인 구양수(歐陽修)와 소식(蘇軾)이 쓴 글.
⑥ 재최복(齋衰服):삼베로 지은 어머니 상 때 입는 상복.
⑦ 운자(韻字):한시(漢詩)를 지을 때 운각에 맞춰 쓰는 글자.
⑧ 괴석부(怪石賦):문장의 명칭. 부(賦)는 시와는 격식이 다른 문장의 유형.
⑨ 최상국(崔相國):상국은 정승이니 영의정과 좌·우의정을 통틀어 이르는 말. 최는 성임.
⑩ 성동(成童):남자아이 15歲를 이름.
⑪ 종종(種種):머리털이 짧아지고 줄어드는 것.
⑫ 유고(遺稿):죽은 뒤에 남긴 문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