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병대장 남일심공 순절비문


호남의 항일의병장들
일본의 소위 「남한대토벌」에 끝까지 항전하다 체포된 호남의 의병장들. 가슴에는 포로번호를 달고 있다. 앞줄 왼쪽부터 송병운 오성술 이강산 모천년 강무경 이영준, 뒷줄 왼쪽부터 황두일 김원국 양진여 심남일 조규문 안계홍 김병철  강사문 박사화 나성화.


사람은 생명(生命)으로써 보배를 삼는 것이 아니요 의기(義氣)로써 보배를 삼는 것이라 足히 생명을 버리면서도 굳이 그 의기(義氣)를 살리는 것이니 그럼으로 범상(凡常)한 사람은 일신(一身)의 작은 영행(榮幸)만을 貧하지마는 현명(賢明)한 사람은 오직 대의(大義)에 살고 대의(大義)에 죽어 그 이름을 천추(千秋)에 전(傳)하는 것이다. 여기 一生을 조국수호(祖國守護)의 제단(祭壇)에 바친 의병대장심씨(義兵大將沈氏)의 名은 수택(守澤)이오 號 남일(南一)이오 본관(本貫)은 청송(靑松)이니 여말절신둔재계년(麗末節臣遁齋繼年)의 17代孫이요 둔운처사의봉(遁雲處士宜奉)의 3男으로서 고종팔년신미(高宗八年辛未) 西紀 1871年 2月10日에 전남함평군월야면산정리(全南咸平郡月也面山亭里)에서 태어나 어려서부터 천성(天性)이 총명(聰明)하고 재질(才質)이 뛰어난 위에 성경(聖經)과 현전(賢傳)을 배워 충효(忠孝)의 뜻을 깨달아 자기의 갈 길을 定하고 병서(兵書)와 역학(易學)을 읽어 무술(武術)의 묘법(妙法)을 익힘으로써 來日의 국란(國亂)에 시비(侍備)하더니 乙未年 西紀1895年 日本人의 손에 국모(國母)가 살해된 뒤 의병운동(義兵運動)이 일어났을 때 公은 25歲의 청년으로서 비분(悲憤)한 뜻을 참지 못했고 10年이 지난 뒤 이른바 을사매국조약(乙巳賣國條約)이 체결(締結)되자 公은 산업(産業)을 폐(廢)하고 오직 왜적(倭賊)을 내어쫓고 국권(國權)을 되찾기 위한 경륜(經綸)에만 몰두(沒頭)하더니 다시 2年뒤 丁未年에 高宗皇帝의 폐위(廢位)와 함께 군대(軍隊)마저 해산되므로 公은 비로소 의병(義兵)을 일으켜 함평신광산중(咸平新光山中)에서 훈련(訓練)을 거듭하며 各道에 격문(檄文)을 전하고 왜적을 따르는 빈이배(貧利輩)들에게 경유문(警喩文)을 뿌렸든바 數月동안에 各處로부터 모여든 의병들이 무릇 5?6百名을 넘었다. 이듬해 戊申年 38歲 되던 해 3月初7日 第1次 강진오치전투(康津吾峙戰鬪)에서 왜적 數10級을 목배고 그로부터 무릇 3年동안에 前後15回를 싸웠는데 장흥곽암(長興藿巖)과 신풍(新豊)과 남평장담원(南平長淡院)과 거성동(巨聲洞)과 릉주노구두(綾州老狗頭)와 석정(石亭)과 풍치(豊峙)와 영암사촌(靈岩沙村)과 라주반치(羅州盤峙)와 해남성내(海南城內)와 보성웅치(寶城熊峙)와 천동등(泉洞等)에서 왜적의 날카롭고 數많은 군대와 마주 싸우며 어느 때는 기이(奇異)한 계책(計策)으로써 또 어느 때는 무서운 담략(膽畧)으로 오즉 전승무패(全勝無敗)한 의병대장(義兵大將)이오 엄격한 규률중(規律中)에서도 언제나 부하와 함께 甘苦를 같이 했으며 민중(民衆)을 사랑하고 어루만지므로 누구나 公을 따르지 않은 이가 없었건마는 때는 이미 다 되어 쓸어 지는 나라를 떠받들길 없고 의병해산의 조서(詔書)까지 내려 사기(士氣)마저 꺾이므로 公은 앙천호곡(仰天號哭)하기를 말지 못했었다. 그러다 己酉年 8月26日에 릉주풍치(綾州豊峙)에서 적에게 잡혀 광주감옥(光州監獄)에 갇혔으되 왜장(倭將)을 꾸짖는 름름(凜凜)한 자세는 자못 泰山에 비길 만 했고 이듬해 五月에 大邱로 이송(移送)되어 왜의 법정(法廷)에서도 대의(大義)를 들어 웅변(雄辨)하고 온갖 고난(苦難)에도 굽히지 않은 기백(氣魄)은 열일(烈日)에 견줄만 했으며 마침내 庚戌年 西紀1910年 9月1日에 적의 교수대(絞首臺)에서 享年40歲로써 태연자약(泰然自若)하게 순국(殉國)하신 것은 완전한 시사여귀(視死如歸)의 모습이라 우리는 오늘 여기 公의 뜻과 행적(行蹟)을 돌에 새겨 길이 길이 傳하고 자주독립로선(自主獨立路線)으로써 우리 민족(民族)의 갈 길을 삼으려 한다.
西紀 1971年 12月 日
日後學 李殷相 謹撰
辛鎬烈 書
義兵大將 南一沈公 殉節碑建立委員會 竪