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해군수공(휘 능무)행장실기


謹按行錄公姓沈諱能武字君善號野隱靑松人卽我朝靑城伯諡定安公諱德符之從弟吏曹判書諱之浦十七世孫判書公生諱春雨官牧使是生諱道赫進士是生諱重山進士是生諱有略官叅議是生諱聖孫生員是生諱根枝官嘉義是生諱椿杰官叅奉是生諱慶善官叅奉是生諱尙立上壽資至嘉義始居定平是生諱孝達武科官嘉義是生諱斗昌武科官通政是生諱夢贊武科官司果寔公之高祖也曾祖諱萬海武科官司果祖諱明東處士考諱亨之武科官折衝龍驤衛副護軍妣慶州金氏箕一女也公生于純祖癸未十一月十七日憲宗戊申武科哲宗己酉陞薦其歷官也司果出陸內職二爲叅上守門將三爲訓鍊院主簿判官僉正高宗乙丑左相金炳學氏薦爲平海郡守同六月殿最江原監司朴承輝褒啓曰况値灾荒益加策勵同十二月褒曰軍伍無闕浦戶皆頌丙寅六月褒曰廨修精欽糶捧務精同十二月監司曹錫輿褒曰政淸訟簡頌播四隣同月丁外艱戴星奔喪哀毁過禮己巳設養士齋試士居接濟濟多士同年設金津江橋舟契通濟病涉咸曰公德庚午設養武廳試武居接赳赳武夫同十二月加資辛未二月興宣大院君薦爲咸鏡北道兵馬虞侯中軍營將兼討捕使同六月北兵使金箕錫褒啓虞侯曰製錦餘手何有佐幕又以討捕褒曰收刷也明無撗懲之弊詗察也嚴無竊發之患是白齊同十二月移除惠山鎭兵馬僉節制使邊地壬申以老母年滿七旬辭單投印歸寧終孝咸服其孝癸酉洪水靈谷大堤潰決成川被害生民慘其形狀與本倅趙贄顯協議捐助申飭民間通一面衆力完築堤防居民安堵實賴公力也甲戌前監察李悅同心協議與本倅趙贄顯贊成興學契儒化大行天下整遺丁亥正月十三日奄告捐館衣履之藏文山面德化里考妣墓右麓壬坐原碑銘曰地鍾靈傑天挺英豪忠孝一心文武全才公之世葬阡神道碑銘左相金弘集撰文略曰惠山君父子賢爲北方之傑戊子後輩士子武夫另設一契勒石頌德銘曰公之作人術得幷用儒化克闡武藝蔚興學皆琢玉射亦穿楊石難盡載千秋不忘建祠祭文曰淸正仁孝本然天資北邊壯略東郡善治興儒養武一鄕先師樂育英才韻餘風遺云云也三綱錄畧曰天性仁孝初任平海時承父凶音戴星奔喪哀毁逾節三年泣血爲平生之遺憾矣後任惠山恨未及老母之終養投印辭歸州郡服其孝晩以興儒養武爲事鄕里勒石以頌之建祠以享之公平素明吾道興斯文爲己任矣公之長胤江華判官宜琬不幸先逝次胤鍾城郡守宜瑢繼述公之志事己丑與本倅具然八刱設興武契捐金與公之己說養士養武二所財産及公之祠宇享需金各里義捐金幷爲合資丙午創設私立闡明學校承認敎育卒業進步者前後相望往往傑出都是公之父子繼開作述之功也故遠近士林咸曰先生百世模範一代師表此乃公之實行信蹟旣如許卓絶儒林之崇慕尊奉又若是深切也公娉于全州李氏達濟女生四子長曰宜琬官江華判官移平海郡守兼鬱陵島鎭兵馬僉節制使邊地次曰宜瑢官洪原郡守轉移鍾城郡守三曰宜琡淑陵콷奉四曰宜璇再試鄕解鍾城之長胤承訓郞前主事寅澤抱其公之行錄要余徵文以若管見末學安敢贊一辭然固辭不獲謹述如右以竢立言之君子焉
崇禎紀元后五庚申春王正月日
皇明報壇콷班儒生 延安 車鍾斗 謹狀

20세조 평해군수 혜산공 휘 능무(能武) 행장실기
삼가 행록(行錄)을 살펴보건대 公의 성은 沈이요 휘는 능무(能武)이며 자는 군선(君善)이고 호는 야은(野隱)이요 靑松人이니 즉 우리 朝鮮朝의 청성백 시호 정안공 휘 덕부(德符)의 종제(從弟) 이조판서 휘 之浦의 17세손이다. 판서공이 휘 春雨를 낳으니 벼슬이 목사(牧使)요 이 분이 휘 도혁(道赫)을 낳으니 進士이며 이 분이 휘 重山을 낳으니 進士이고 이 분이 휘 유약(有略)을 낳으니 參議요 이 분이 휘 성손(聖孫)을 낳으니 生員이며 이 분이 휘 근지(根枝)를 낳으니 벼슬이 가의(嘉義)이고 이 분이 휘 춘걸(椿杰)을 낳으니 參奉이요 이 분이 휘 경선(慶善)을 낳으니 벼슬이 참봉이며 이 분이 휘 상립(尙立)을 낳으니 수직(壽職)으로 벼슬이 가의에 이르렀고 처음으로 定平에서 살았다. 이 분이 휘 孝達을 낳으니 무과에 급제하여 벼슬이 가의요 이 분이 휘 斗昌을 낳으니 무과에 급제하여 벼슬이 通政이며 이 분이 휘 몽찬(夢贊)을 낳으니 무과에 급제하여 벼슬은 사과(司果)였고 이 분이 公의 고조이다. 증조의 휘는 萬海이니 무과에 급제하여 벼슬이 사과요 할아버지의 휘는 明東이 處士이며 아버지의 휘는 亨之이니 무과에 급제하여 벼슬이 절충장군(折衝將軍) 용양위(龍驤衛) 부호군(副護軍)이었고 어머니는 경주김씨 기일(箕一)의 따님이다. 公이 순조(純祖) 癸未(1823)년 11월 17일에 낳아 헌종(憲宗) 戊申(1848)年에 무과에 급제하였고 철종(哲宗) 己酉(1849)년부터 벼슬을 지낸 것은 사과(司果)에서 6품 벼슬에 올라 내직(內職)으로 들어간 것이 두 번이요 참상(參上):六품이상 堂下 삼품까지의 관직을 이르던 말)이 되어 守門將을 세 번 지냈고 훈련원(訓鍊院) 주부(主簿) 判官 첨정(僉正)이 되었고 高宗 乙丑(1865)년에 좌의정 金炳學氏가 平海郡守로 천거하였고 同年 6月에 전최(殿最‥관찰사가 매년 6월과 12월에 관하 고을 수령이 치적(治績)을 심사하여 중앙에 보고하던 일)하는데 강원감사(江原監司) 박승휘(朴承輝)가 칭찬하여 아뢰기를 항차 흉년을 만났는데도 더욱 채찍질하여 격려(激勵)하였다 하였고 동년 12월에는 군대가 빈틈이 없으니 포호(浦戶)가 다 칭송(稱頌)하였다 하였으며 丙寅(1866)년 6월에는 칭찬하여 말하기를 창고를 지키는 것이 청렴결백하니 쌀을 내어 파는데 힘써 정성을 들인다 하였고 동년 12월에는 감사 조석여(曺錫輿)가 칭찬하여 말하기를 정치를 맑게하니 송사(訟事)하는 일이 없어지고 칭송하는 소리가 사린(四隣)에 퍼졌다 하였다. 同月에 아버지 상을 당하여 밤을 낮에 이어 달려와서 슬퍼함이 禮에 지나쳤고 己巳(1869)년에 양사재(養士齋)를 설치하여 선비를 시험하는데 잠시 몸을 의탁하여 거주하는데 많은 선비들이 모였고 동년에 금진강(金津江)에 배다리를 설치하여 강을 건너는데 괴로움이 없게 하니 모두가 말하기를 公의 덕이라 하였다. 庚午(1870)년에 양무청(養武廳)을 설치하여 무사(武士)를 시험하는데 잠시 몸을 의탁하여 거주하는데 씩씩한 무사들이 많이 모였다. 동년 12월에 벼슬이 올랐고 辛未(1871)년 2월에 흥선대원군(興善大院君)이 천거하여 함경북도 병마우후(兵馬虞侯) 중군영장(中軍營將)겸 토포사(討捕使)가 되니 동년 6월에 北兵使 김기석(金箕錫)이 우후를 칭찬하여 아뢰기를 비단을 만들고도 솜씨가 남았으니 보좌(補佐)하는 관리로서 무슨 어려움이 있겠습니까 하였고 또 토포사를 칭찬하여 말하기를 세금을 거두어 들이는 일이 분명하여 멋대로 징수(徵收)하는 폐단이 없고 남모르게 살핌이 엄격하니 도둑당할 근심이 없습니다 하였다. 동년 12월에 혜산진병마첨절제사변지(惠山鎭兵馬僉節制使邊地)에 옮겨 임명되었다. 壬申(1872)년에 老母의 나이 70이 넘자 사직하고 돌아와서 효성을 다하니 모두 그 효성을 칭찬하였다. 癸酉(1873)년에 洪水로 영곡(靈谷)의 큰 제방이 무너져 내를 이루고 백성들이 해를 입어 참혹한 형상이 되니 본 고을 수령 조지현(趙贄顯)과 협의하여 誠金을 내어 돕고 백성에게 타이르니 通一面에서 힘을 모아 제방을 완축(完築)하므로 사는 백성들이 안도(安堵)하였으니 진실로 公의 힘에 힘입은 것이다. 甲戌(1874)년에 전 감찰(監察) 이열(李悅)과 동심협의(同心協議)하여 본 고을 수령 조지현과 더불어 흥학계(興學契)를 만드니 유교의 덕화가 크게 행하여지고 한사람도 빠짐없이 학문을 일으키는데 힘썼다. 丁亥(1887)년 1月 13日에 갑자기 돌아가니 묘소는 文山面 德化里 고비묘(考쯼墓) 우록(右麓) 임좌이다. 비명(碑銘)에 이르기를 땅이 영걸(靈傑)을 낳았고 하늘이 영웅호걸을 내려 忠孝에 한결같은 마음이요 文武를 모두 갖추었도다 하였고 公의 세장천 신도비명에 좌의정 김홍집이 지은 글에 간략하게 말하기를 혜산군의 父子는 어질어 北方의 호걸이 되었다 하였고 戊子(1888)년에 후배 士子 무부(武夫)가 특별히 노력하여 일계(一契)를 만들고 비석에 새겨 송덕(頌德)한 비명(碑銘)에 말하기를 公의 인재를 양성하는 술책(術策)은 유교의 덕화를 병용(幷用)하고 능히 무예(武藝)를 천명(闡明)하며 학문이 성하게 일어나 모두 아름답고 활 쏘는 것도 또한 능하였다. 기재하기 어렵고 千秋에 잊지 못하겠다 하였고 사당을 세우고 제사지낸 글에 말하기를 맑고 정직하며 인자하고 효성스러움은 本然의 하늘에서 내린 資質이요 북변(北邊)에서의 장한 計略과 東郡에서의 잘 다스린 것. 유교를 일으키고 무사를 양성한 것은 일향선사(一鄕先師)가 즐겁게 영재(英才)를 육성한 나머지의 운치(韻致)와 후세에 끼친 풍속이라 하였으며 삼강록(三綱錄)에서 대략 말하기를 천성이 어질고 효성스러워 초임(初任)으로 平海에 부임하였을 적에 아버지의 부음(訃音)을 듣고 밤을 낮에 이어 달려와서 슬퍼함이 지나쳤고 3년동안을 피눈물을 흘려 울고 평생의 유감(遺憾)으로 삼았더니 뒤에 혜산(惠山)에서 근무할 적에는 노모를 끝까지 봉양하지 못함을 한탄하여 벼슬을 그만두고 돌아와서 봉양하니 고을 사람들이 그 효성에 感服하였다. 晩年에 유교를 일으키고 武士를 양성함을 내 임무를 삼으니 鄕里에서 비석을 세워 송덕(頌德)하였고 사당을 지어 제사지냈으니 公은 평소에 우리 도를 밝히고 유교의 학문을 일으키는 것을 내 임무로 삼았다. 公의 맏아들 강화판관(江華判官) 의완(宜琬)은 불행히 먼저 죽었고 다음 아들 종성군수(鍾城郡守) 의용(宜瑢)이 公의 뜻을 이어 己丑(1889)년에 본 고을 수령 구연팔(具然八)과 더불어 흥무계(興武契)를 創設하고 연금(捐金)과 公이 이미 창설한 양사(養士) 양무(養武)두 곳의 재산과 公의 사우(祠宇) 향수금(享需金)과 各里의 의연금(義捐金)을 모두 합하여 丙午(1906)년에 사립천명학교(私立闡明學校)를 창설하여 승인을 받고 교육하여 졸업을 시키니 進步하는 사람이 前後에서 많이 나왔고 이따금 傑出한 사람도 있었으니 이것이 모두 公의 부자가 작술(作述)함을 이어 개척한 공이다. 그러므로 원근의 士林에서 모두 말하기를 선생은 百世의 模範이요 1代의 사표(師表)라 하였으니 이는 公의 實行과 신적(信蹟)이 이미 이렇게 뛰어나고 儒林에서 존경하고 사모함이 또 이와 같이 깊고 간절한 것이다. 公은 전주 이씨 달제(達濟)의 따님을 맞이하여 4子를 두었으니 장남은 의완(宜琬)이니 벼슬이 강화판관에서 평해군수 겸 울릉도 진병마절제사 변지에 옮겼고 2남은 의용(宜瑢)이니 벼슬이 洪原郡守에서 鍾城郡守로 옮겼으며 3남은 의숙(宜琡)이니 숙릉 참봉이요 四남은 의선(宜璇)이니 향시(鄕試)를 두 번 보았다. 의용의 장남 승훈랑(承訓郞) 前主事 인택(寅澤)이 公의 행록을 가지고 와서 나에게 글을 지어달라고 하니 나와 같이 좁은 識見과 천박한 학문으로써 어떻게 감히 지으리오마는 굳이 사양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아 삼가 위와 같이 짓고 훌륭한 군자의 교정을 기다린다.
숭정기원후 五 庚申 1920년 봄 정월에
황명보단(皇明報壇) 참반유생(參班儒生) 연안 차종두(延安 車鍾斗)가 삼가 지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