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좌찬성공(휘 공헌)효자전 |
沈君公獻字士徵靑松人副提學攸之玄孫今吏曹參判聖希之長子也祖鳳輝牧使曾祖漢柱郡守沈氏故大家家世多公輔名士俱在余所爲孝簡公狀中君事父母孝年十七母鄭夫人疾 君齋沐名山登絶頂祭星斗升降涕泣山僧相其事者相語嗟歎鄭夫人歿事繼母宋夫人益致慤順起居衣食至微細無不用其極沒身如一日家人化之宋夫人愛君甚於己子初參判公不宜宋夫人宋夫人故多病恒臥不食君捧藥與食左右喩譬色婉而辭溫怡怡如也或不得意則退坐戶外亦涕泣不食晝夜不去病少已乃已每從容時切諫參判公參判公輒抱之泣曰使汝焦勞至此余之咎也繇是改悔宋夫人益安矣而君歿宋夫人號哭祈死曰吾何以爲生矣旣久矣語君必嗚咽泣下曰古孝子參判公曰吾不忍負吾兒之孝待宋夫人益厚參判公仕旣顯多賓客外事君悉任家政凡其親之所欲爲與所當須者無不先意裁置無所爲其親憂也宗族多窮困者百有求賴咸歸於君君莫不欣然喜聞鉅細有無必盡其心焉酬答迎送終日無倦色於故舊疏遠亦然嘗冬日著新衣見疏族有寒者卽解而衣之君生長華好矣獨好爲樸素之服食飮不問美惡其平居短屋敝席無佗什器蕭然而已終不以奉身之物有言於妻孥也人有餽賄必以義郤之分別臧否是非要爲明白不肯爲苟且詭隨之說君性端潔篤愼而寡私好義而遠利大抵如是其事參判公所以匡輔之者皆推此意爲之恐恐焉憂其或有過也有過未嘗不諫參判公或怒不聽君默少閒油然而笑復進其說必得而後退參判公嘗爲嶺南觀察使有侍妓欲畜之家君力言不可卒聽之今 上十八年君成進士將榮覲嶺南先上書言嶺南雄藩人皆屬目請一從簡約毋爲盤累是歲君卒於營中參判公於君襲斂及柩車皆不用錦綺曰以成吾兒之志君卒時年三十三有二子長者今十三歲次夭死贊曰
嗟乎人每言今人不及古人其然哉夫妃匹之際君不能得之臣父不能得之子而君乃能得之於父母古所謂喩父母於道者非耶本其行事 豈不誠仁愛惻怛可法於後世哉至其操持端潔篤於利物要皆可以受福于天者而卒夭死悲夫昔司馬遷傳荊軻也徵於侍醫文欽與君友二十年觀其志而察其安其言之可徵尙有賢於侍醫也夫君之與友也後己而先人謀事必忠不厭規戒能使其友樂告以善道噫斯亦古之道而不復見於今世也已矣 閑靜堂 宋文欽 撰 18세조 증좌찬성공 휘 공헌(公獻) 효자전 沈君의 이름은 공헌(公獻)이고 字는 사징(士徵)이니 청송인(靑松人)으로 부제학공 휘 유(諱 攸)의 현손(玄孫)이며 지금의 이조참판공 휘 성희(聖希)의 장자이다. 할아버지 휘 봉휘(鳳輝)는 목사이고 증조부 휘 한주(漢柱)는 군수이다. 심씨는 현달한 대가(大家)로서 집안은 대대로 고관(高官)과 명사(名士)가 많았으니 모두 내가 지은 효간공 휘 집(諱 諿)의 행장 가운데 수록되어 있다. 君은 부모님 섬기기를 효성으로서 했다. 17歲때 어머니 鄭夫人 병환이 위독하자 君이 목욕하고 名山의 정상에 올라 북두칠성(北斗七星)을 향해 제사지냈다. 오르내릴 때 눈물을 흘리니 이를 본 산승(山僧)이 있어 서로 말을 나누며 한탄하였다. 정부인이 돌아가시니 계모(繼母) 宋夫人을 섬기되 더욱 정성드려 순종했다. 의식주(衣食住) 생활에서부터 미세(微細)한 일까지 최선을 다하지 않음이 없었으며 죽을 때까지 하루같이 하니 가인(家人)이 본받아 동화(同化)되었다. 그래서 宋夫人 또한 君을 사랑함이 친자식보다 더했다. 당초에는 참판공 휘 성희가 宋부인을 마땅히 여기지 않았다. 宋부인이 이러한 연고로 질병이 잦아 항시 누워 있으며 밥을 제대로 먹지 못하니 君이 약을 달여서 먹이고 좌우에서 유순한 얼굴빛을 하며 따스한 언사로 타이르니 기뻐하는 듯 하였다. 혹 뜻을 이루지 못하면 문밖에 물러 안고 또한 눈물 흘리며 먹지 않은 채 주야로 떠나지를 않았다. 그러다가 병환이 조금 나아지면 이내 그만두었다. 매양 조용한 때에는 아버지 참판공에게 간절히 말씀드리니 참판공이 문득 안아주고 눈물을 흘리며 이르되 「너로 하여금 노심초사(勞心焦思)한 것은 나의 과실이다」라고 말했다. 이로 말미암아 잘못을 뉘우치니 宋부인이 더욱 평안해졌는데 君이 돌아가니 宋부인이 호곡하고 죽기를 바라면서 내가 어떻게 산단 말이냐고 말했다. 오래 되어서도 군을 말할 적에는 오열하고 눈물 흘리면서 옛날 효자였다고 말했다. 참판공이 이르되 차마 내 아이의 효(孝)를 저버릴 수 없다고 하고는 宋부인을 대우하기를 더욱 두텁게 하였다. 참판공(參判公)이 벼슬이 이미 현달(顯達)함에 손님 맞는 일과 바깥일이 많았는데 군이 집안 일을 모두 책임지고 어버이가 하고자 하는 바와 마땅히 구하는 바를 먼저 조치해 놓지 않음은 없어서 그 어버이에게 근심되게 하는바가 없었다. 친척 가운데 빈곤한 자가 많았는데 百 사람이 모두가 도움을 구해 찾아오더라도 군은 기꺼이 크고 작거나 있고 없고를 막론하고 듣기를 좋아하고 반드시 정성을 다하였다. 손님을 영접하고 음식 대접하는 일에 있어서는 오래된 친구나 소원한 자에게나 종일토록 싫은 얼굴빛을 보이지 않았다. 일찍이 겨울날 새 옷을 입었는데 먼 일가가 추워서 떨고 있는 자를 보면 즉시 옷을 벗어 입혔다. 君은 성장함에 따라 얼굴이 고왔는데 오직 소박한 의복을 좋아하고 음식은 맛이 있고 없음을 묻지 않았다. 평소 조그마한 집 떨어진 자리에서 살았으며 별다른 가구는 없고 숙연할 따름이며 종신(終身)하도록 몸을 가꾸는 물건을 처자에게 말하지 아니하였다. 사람이 뇌물을 보내는 일이 있으면 반드시 의(義)로서 되돌려 주었다. 선악(善惡)과 시비(是非)를 분별함이 명백(明白)하고 구차하거나 속이는 말은 즐기지 않았다. 君은 성품이 단정하고 독실하여 의리(義理)를 좋아하고 사리(私利)는 멀리하였다. 대체로 이와 같으니 참판공을 섬김에 있어서 올바르게 보좌한 것은 모두 이러한 뜻을 미루어 본다면 짐작이 될 일이다. 혹 과실(過失)이 염려되거나 과실이 있으면 일찍이 간(諫)하지 않음이 없었는데 참판공이 혹 노하고 듣지 않으면 군이 잠시동안 묵묵히 있다가 침착하게 웃는 얼굴로 다시 말씀을 드려 반드시 들어준 후에야 물러갔다. 참판공이 일찍이 영남관찰사가 되었을 때 몸종을 소실로 삼고자 하였는데 君이 힘써 불가하다고 말씀드려 마침내 허락 받았다. 금상(今上:영조18년 1742)에 君이 進士가 되어 장차 영남에 계신 아버지에게 뵈려 가려고 할 적에 먼저 글을 올려 말하되 영남은 큰 지역이기에 사람마다 눈을 돌리니 한결같이 일을 덜어서 간략하게 하고 실수를 하지 말라고 말했다. 이 해에 감영(監營)에서 죽으니 참판공이 염습과 상여를 모두 비단을 쓰지 않고 이르기를 이로써 아들의 뜻을 이루었다고 말했다. 君이 죽은 때에 나이가 33세였고 두 아들을 두었으니 장자는 지금 13세이고 작은 아들은 요사(夭死)하였다. 찬미하건대 오호라 사람들이 매양 말하되 지금 사람이 옛날 사람에 못 미친다 하더니 그러하도다. 무릇 배필하는 즈음에 인군은 능히 신하를 얻지 못하고 아비는 능히 아들을 얻지 못하였나 君은 이에 능히 부모를 얻으니 옛날의 소위 부모를 정도로 깨우쳐준 자 아니겠는가. 그 행사를 본받으면 실로 어질고 사랑하는 마음과 가엾게 여기고 슬퍼하는 마음 이 어찌 후세에 법도가 되지 않으리오. 그의 마음가짐이 단정하고 간결하며 이물(利物)에 도타운데 이르러서는 모두가 하늘로부터 복을 받은 것인데 젊은 나이에 죽으니 슬프도다. 옛날 사마천(司馬遷:중국의 史家)이 형가(荊軻:중국 위(衛)의 刺客)에게 전한 것을 시의(侍醫)한데서 징거를 보았다. 문흠(文欽)이 군과 더불어 벗을 삼은 것이 20년이다. 그 뜻을 보고 그 행동을 관찰해보니 그 언어의 징거될 것이 오히려 시의보다 어진 것이 있다. 무릇 君은 더불어 벗함에는 자기를 뒤에 하고 다른 자를 위선하면 꾀하는 일이 반드시 忠이 되고 규율을 싫어하지 않으며 능히 친구들로 하여금 즐거이 바르고 착한 도(道)를 고하게 하였다. 아! 슬프다 이것이 또한 옛날의 道이나 다시는 今世에 나타나지 않을 것이다. 한정당 송문흠 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