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령현감(휘 의진)묘표명


현감공 휘 의진 묘소
소재지: 파주시 광탄면 창만리 금병산 고곡리


현감공 묘소 전경


十八世祖 贈吏曹參判 宜寧縣監公 諱 毅鎭 墓表銘
坡州之東錦屛山之岡有枕亥而窆者卽故翊衛沈公之藏也公歿後十二年嗣子敦永狀其德謁不侫爲銘曰墓而無誌懼無以傳信願藉公爲不朽不侫屢辭而懇愈摯於是感其純孝謹撰次而序之曰公諱毅鎭字致弘靑松人以高麗文林郞諱洪孚爲初祖三傳至諱德符入 本朝封靑城伯又三傳至觀察使諱璿棄官自靖於 光廟之世扁亭以忘世世比生六臣忘世公有孫左參贊諱光彦受業于靜庵趙先生爲時賢卿參贊公有玄孫領議政諱之源不仕昏朝爲 孝顯兩朝名臣德業俱著寔公高祖也曾祖諱益成縣監 贈吏曹判書祖諱廷最知中樞考諱師民直長妣韓山李氏通德郞弘重之女牧使秉鼎其祖也公以 純廟辛酉中司馬庚午補 懿陵參奉遷  宗廟署副奉事尙瑞院副直長義禁府都事北部令敦寧府判官司宰監僉正廣興倉守翊衛其選也外而爲宜寧楊口比安縣監癸巳二月二十四日考終于社洞里第距其生戊子十月十六日爲六十六歲四月二十一日葬從先兆也配光山金氏通德郞斗榮之女忠貞公雲澤之曾孫生與公同年歿先公五十年年纔過而婦德夙就稱士女墓在同岡午坐繼配咸安趙氏宇鎭之女承旨重明之孫生先公一年歿先公十七年閨範貞淑墓在同岡庚坐三配潭陽田氏郡守德顯之女府使光濂之孫生後公二十八歲歿先公十一年始權窆于汾水院後祔公墓亦有淑質至行宗黨咸誦其德俱無育取族子敦永爲嗣前弘文館校理有男女幼公質純器厚自齠齔儼若成人而直長公身敎甚嚴不使洞閈追逐惟許從好禮者遊公恪遵庭訓循蹈繩墨乙巳罹內艱有終身慕己未直長公嬰天行之症公亦患斯疾而强病侍湯嘗糞甛苦躬親扶持靡極不至至遭喪殫竭誠信終事無憾居憂盡禮侍奠靈筵守制墓廬而毁瘠幾滅性事繼妣朴夫人盡孝先意承順供浟瀡資衣線恐不及時到老彌篤有異味未嘗先口必取而獻之臨簀以罔克終孝掩抑茹恨焉常洞屬于奉先四時展墓不以衰病而廢塚飾家奠務盡志力親檢濯漑致極蠲潔俎豆所需必點記分排罔或遺漏具不備雖鬻器用而必辦焉齋沐不設惰容未曾以疾故攝及病革而値喪餘匍匐詣廟侍者力挽公曰雖病不與祭卽如不祭仍嗚咽流涕其至諴追遠類此敎穉弟正趍向遂成偉器有霜妹愍其同室共爨而庭無間言及終躬尼喪具恔心而後已治家有法度恩不掩義禮以節和臨事慮患防於未然始若無驗輒久而徵焉敎子先以不欺曰汝事叔母如母近俗偸薄門庭中鮮保恩義願汝之勿效也喜施予與親戚共甘苦濟其貧病婚喪如不及以逮窮鄕踈屬是故至者如歸暇日設花樹會陳饋以娛之恩愛篤摯溢於談笑居官以不欺君爲第一義爲政務持大體其在比安捐쬎賑饑均分而腆給一境頼不塡壑民到于今稱之雅好山水公餘觀東海賞楓嶽有遺世獨立之想素不營産業家人或有勸者公輒解以貧富有命以故典三邑十年田宅無所增環堵蕭然處之晏如也公天賦凝重濟以謙抑任眞坦蕩而亦不以鄙俚加人人皆敬服素性寡欲聲色紛華若無覩焉噫公至性質行宜受天祐吉無不利而惜乎有才無命位不稱德是不能無憾於神理而嗣子文學聞望克紹先休妙齡蜚英進塗大闢報施之天於是焉定是不可以無銘銘曰
維靑松沈氏奕世名胄篤生我公哿矣仁厚爲政于家本之孝友澹泊寧靜用全厥守薄試割鷄成績純茂遺愛三郡民呼父母惜未揚庭克展抱負獨葆其眞不獲滋垢報在不食丕隆堂構于以揭美昭穆之阜我薦石章圖垂永久
崇禎紀元後四甲辰
唐城 洪直弼 撰   

18세조 증이조참판 의령현감공 휘 의진(毅鎭) 묘표명
파주(坡州)의 동쪽 금병산(錦屛山) 언덕 해원(亥原)에 무덤이 있으니 바로 故 익위(翊衛) 沈公이 묻힌 곳이다. 公이 돌아가신지 12년 뒤에 사자(嗣子) 돈영(敦永)이 그 德을 적어와 나에게 명(銘)을 지어달라고 하며 말하였다.
『묘를 만들고도 지(誌)가 없으니 사실이 전(傳)해지지 않을까 두렵습니다. 원컨대 그대의 힘을 빌어 불후히 전하고자 합니다.』라 하였다. 나는 여러차례 사양했으나 더욱더 간절하기에, 그 순수한 효성(孝誠)에 감동하여 삼가 차서(次序)를 짓고 서(序)를 쓴다.
公은 휘(諱)가 의진(毅鎭)이며, 字는 치홍(致弘)이니 靑松 사람이다. 고려 문림랑(文林郞) 휘(諱) 홍부(洪孚)를 시조(始祖)를 삼는다. 3대를 내려와 휘(諱) 덕부(德符)에 이르러 조선에 들어와 청성백(靑城伯)에 봉해졌다. 또 3대를 내려오면 관찰사(觀察使) 휘(諱) 선(璿)에 이르러 관직을 버리고 단종(端宗) 때에 스스로를 닦았다. 정자(亭子)에 「忘世」라 편액하니 세상 사람들이 생육신(生六臣)에 비하였다. 망세정공(忘世亭公)에게는 손자가 있으니, 좌참찬(左參贊)을 지낸 휘 광언(光彦)이다. 정암(靜庵) 조광조(趙光祖) 선생에게서 배워 당시의 어진 재상이 되었다. 참찬공(參贊公)은 현손(玄孫)이 있으니, 영의정(領議政)을 지낸 휘 지원(之源)이다. 광해조(光海朝)에 벼슬하지 않고 효종(孝宗), 현종(顯宗) 두 조정에 걸쳐 名臣이 되어 德과 업적(業績)이 모두 드러났으니 이 분이 公의 고조(高祖)이다.
증조(曾祖)는 휘(諱)가 익성(益成)이니, 현감(縣監)을 지내고 이조판서(吏曹判書)에 추증되었다. 祖父 휘(諱)가 정최(廷最)이니,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를 지냈다. 고(考)는 휘(諱)가 사민(師民)이니 직장(直長)을 지냈다. 비(妣)는 한산이씨로, 通德郞을 지낸 휘 홍중(弘重)의 따님이며, 목사(牧使)를 지낸 휘 병정(秉鼎)이 그 조부이다.
公은 순조(純祖) 辛酉年(1801)에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했고, 庚午年(1810)에는 의릉참봉(懿陵參奉)에 제수되었다. 자리를 옮겨 종묘서부봉사(宗廟署副奉事), 상서원부직장(尙瑞院副直長), 의금부도사(義禁府都事), 북부령(北部令), 돈녕부판관(敦寧府判官), 사재감첨정(司宰監僉正), 광흥창수(廣興倉守), 익위(翊衛) 등에 선발되었다. 외직(外職)으로는 의령(宜寧), 양구(楊口), 비안(比安)의 현감(縣監)을 지냈다. 癸巳年(1833) 2월 24일에 사동리(社洞里) 집에서 돌아가셨으니, 태어난 戊子年(1768) 10월 16일과는 66년의 차이가 난다. 4월 21일에 선조(先兆)를 좇아 장사지냈다.
배위는 光山金氏로, 통덕랑을 지낸 휘 두영(斗榮)의 따님이며, 충정공(忠貞公) 운택(雲澤)의 증손이다. 公과 같은 해에 태어나 公보다 50년 먼저 돌아가셨다. 나이가 겨우 15세를 넘었는데도 부덕(婦德)이 일찍 이루어져 女士로 칭송되었다. 묘는 같은 언덕 오좌(午坐)에 있다. 둘째 부인은 함안조씨(咸安趙氏)로, 우진(宇鎭)의 따님이며, 승지(承旨)를 지낸 중명(重明)의 손녀이다. 公보다 1년 먼저 태어나 公보다 17년 먼저 돌아갔다. 여자가 지켜야 할 법도가 정숙(貞淑)했다. 묘는 같은 언덕 경좌(庚坐)에 있다. 셋째 부인은 담양전씨(潭陽田氏)로 郡守를 지낸 덕현(德顯)의 따님이며, 부사(府使)를 지낸 諱 광렴(光濂)의 손녀이다. 公보다 28년 뒤에 태어나 公보다 11년 먼저 돌아갔다. 처음에는 분수원(汾水院)에 임시로 장사지냈다가, 후에 公의 묘에 합장했다. 역시 현숙(賢淑)한 자질(資質)과 지극(至極)한 행실(行實)이 있어 문중에서 모두 그 德을 칭송하였다. 모두 자식이 없어 친족의 아들인 돈영(敦永)으로 후사(後嗣)를 삼았는데, 前 홍문관교리(弘文館校理)이다. 아들과 딸이 있지만 모두 어리다.
公은 자질(資質)이 순수하고 도량(度量)이 두터워서 어릴 때부터 成人처럼 의젓하였다. 직장공(直長公)이 몸소 가르치되 매우 엄하여서 마을 아이들과 함부로 놀지 못하게 하였고, 오직 예를 좋아하는 이들과 사귈 수 있도록 하였다. 公은 집안의 가르침을 준수하고 법도를 따라 행동하였다. 乙巳年(1785)에는 모친상(母親喪)을 당하였는데, 죽을 때까지 추모하였다. 己未年(1799)에는 직장공(直長公)이 유행병에 걸렸는데, 公도 이 병에 걸렸지만 병을 무릅쓰고 약을 달이며 대변이 달고 쓴지 맛보았고, 몸소 모시며 극진함을 다하지 않음이 없었다. 상을 당하여서는 정성과 신의를 다하여 일을 마칠 때까지 유감이 없도록 하였다. 상을 치를 적에는 예를 다하였고, 제사를 지낼 때에는 법제(法制)를 지키니, 삼년상을 치르고는 몸이 상하고 말라 목숨을 잃을 지경이었다.
계모인 朴夫人을 섬김에는 효성을 다하여 그 뜻을 미리 짐작하여 받들었다. 음식을 올리거나 옷을 바칠 때에는 때맞추어 하지 못할까 두려워하며 늙어서는 더욱 독실히 하였다. 맛있는 것이 있으면 먼저 맛보는 법이 없었고 반드시 가져다가 바치곤 하였다. 돌아가시자 효도를 마치지 못함을 여한으로 여겼다.
항상 조상을 받드는데 신경써서 사계절의 제사를 지냄에 늙거나 병들었다고 해서 성묘를 그만두지 않았다. 집에서 제사지낼 때에는 뜻과 힘을 다하여 몸소 깨끗한지를 살펴 매우 정갈하게 하였다. 제사상에 올릴 것은 반드시 하나하나 따져 늘어 놓아 혹 빠뜨리는 일이 없도록 하였다. 갖추어지지 않은 것이 있으면 비록 일용품(日用品)이라도 팔아서 반드시 마련하였다. 목욕재계(沐浴齋戒)하며 소홀한 낯빛을 보이지 않았고 병들었다고 해서 대신하게 한 일이 없었다. 병이 심하고 상을 당한 후인데도 기어서 묘당(廟堂)에 이르자 모시고 있던 이가 힘써 말렸는데 公이 말하기를, 『비록 병이 들었더라도 제사에 참여하지 않는다면 곧 제사를 지내지 않는 것과 같다.』라 하고 오열(嗚咽)하며 눈물을 흘렸다. 지성(至誠)으로 조상을 추모하는 것이 이와 같았다.
어린 아우를 가르쳐 바른 길로 가게 하여 마침내 큰 그릇이 되도록 하였다. 과부가 된 여동생이 있어 그 외로움을 불쌍히 여겨 같은 집에 살았는데, 집안에 나쁜 말이 없었다. 그가 죽자 몸소 상구(喪具)를 갖추는데, 마음에 흡족하게 한 뒤에야 그만두었다. 집안을 다스리는 데도 법도가 있었으니, 은혜 때문에 義를 어김이 없도록 하였으며 예로 절제하면서도 화합하게 하였다. 일을 당하여서는 우환을 헤아려 미연에 방지하였는데, 처음에는 효험이 없는 듯하였으나 오래되면 반드시 징험(徵驗)되었다. 아들을 가르칠 때에는 우선 경박하지 않도록 하며 말하기를, 『너는 숙모 모시기를 어머니와 같이 하여라. 근래에는 습속(習俗)이 부박(浮薄)해져서, 한 집안에서도 은의(恩義)를 보존하는 자가 드물다. 너는 이를 본받지 말아라.』고 하셨다. 남에게 베풀기를 좋아하여 친척(親戚)들과 즐거움과 괴로움을 함께 하였으며, 가난하고 병들거나 혼인과 상을 당한 이를 도와주는데 혹시 모자라지 않을까 걱정하였는데 궁벽(窮僻)한 곳에 있는 먼 친척에게까지 미쳤다. 이런 까닭에 오는 이가 마치 돌아오듯이 여겼다. 한가한 날에는 화수회(花樹會)①를 열어서 음식을 차려놓고 즐겼는데, 은혜와 사랑이 돈독하고 극진하여 담소(談笑)가 흘러 넘쳤다.
관직(官職)에 있을 때는 임금을 속이지 않는 것을 가장 중요시하였으며, 정무(政務)를 보는 데는 대체(大體)를 잡는데 힘썼다. 비안(比安)에 있을 때에는 창고의 물건을 덜어서 굶주린 이들을 진휼(賑恤)하되 골고루 나누어 주면서도 많이 지급하여, 한 고을이 이에 힘입어 굶어죽지 않아, 백성들이 지금까지도 칭송한다.
山水를 좋아하여 공무를 마친 여가(餘暇)에는 東海를 보거나 금강산을 구경하였는데, 세상을 버리고 홀로 서고자 하는 마음이 있었다. 평소 재산을 늘리려 하지 않았는데 집안 사람 중에 혹 그것을 권하는 자가 있으면, 공(公)은 그때마다 『빈부(貧富)에는 천명(天命)이 있다.』는 말로 설명하곤 했다. 때문에 세 고을을 맡았던 十년 동안 땅과 집은 늘어난 것이 없으며, 집안이 쓸쓸하였으나 편안하게 지냈다. 公은 나면서 받은 자질이 침착하여 본성에 따라 겸손하고 자제하였다. 마음이 넓어 남을 비리(鄙俚)하다고 하지 않으니, 사람들이 모두 공경하고 복종하였다. 본래 성품(性品)이 욕심이 적어, 좋은 음악이나 아름다운 여자를 보아도 보지 못한 듯이 하였다.
아아, 公의 지극한 성품(性品)과 질박(質朴)한 행실(行實)은 마땅히 하늘의 보답을 받아야 할 것이요, 吉하여 이롭지 않음이 없어야 할 것이지만, 안타깝게도 재주는 있으나 天命이 없었고, 지위가 德에 걸맞지 않았으니, 하늘에 유감이 없을 수 없겠다. 그러나 후사를 이은 아들이 文學으로 명망(名望)이 있어 선조의 아름다움을 밝게 드러내었으며, 묘령(妙齡)의 나이에 뛰어난 재주로 벼슬길을 크게 열었으니, 하늘의 보답은 여기에서 정해진 것이다. 이에 명(銘)이 없을 수 없는 것이니,
 명(銘)은 다음과 같다.
 靑松沈氏는 누대(累代)의 명주(名胄)②인데,
 독실한 우리 公이여 어질고 두터움을 겸하였네.
 집안을 다스림은 효성과 우애를 근본으로 삼았고,
 담박(澹泊)과 평정(平靜)으로 마음을 지켰다네.
 박하게도 할계(割鷄)③를 맡았지만 업적은 무성했다.
 세 고을에 사랑을 남기니 백성들은 부모(父母)로 불렀네.
 애석히도 집안을 빛내고 포부(抱負)를 펼치지 못하였다.
 참됨만을 기를 뿐 홍진(紅塵)에 물들지 않았네.
 보답이 불식(不食)④에 있어 가문을 일으켰네.
 아름다움 찬양함이 소목(昭穆)⑤의 언덕에 있구나.
 내 비문(碑文)을 써서 영원히 드리워지기를 기다리노라.
숭정(崇禎) 기원(紀元) 후 네 번째 갑진년(甲辰年:1844)에
당성(唐城) 홍직필(洪直弼)이 삼가 쓰다.

주(註)
① 화수회(花樹會):꽃과 나무를 감상하는 모임. 종족 간의 모임을 의미한다.
② 명주(名胄):명문(名門)의 후대(後代)라는 의미.
③ 할계(割鷄):자유(子游)가 무성(武城)을 맡아서 예악(禮樂)을 제창하였는데, 공자(孔子)가 이를 보고 『닭 잡는 데 어찌 소잡는 칼을 쓰겠는가(割鷄焉用牛刀)』라고 했다는 데서 유래하여 현령(縣令)을 가리키는 말로 사용된다.
④ 불식(不食):백이(伯夷), 숙제(叔齊)가 주(周)나라의 음식을 먹지 않았다는 데서 전(轉)하여 청렴(淸廉)하다는 의미로 사용된다. 혹은 문장이 빼어나게 아름다워서 보통의 것과 다름을 가리키는 말로도 사용된다.
⑤ 소목(昭穆):종묘(宗廟)에서 신주(神主)를 모시는 차례. 태조(太祖)를 중앙에 모시고 왼쪽의 2, 4, 6대는 소(昭)가 되고, 오른쪽의 3, 5, 7대는 목(穆)이 된다. 여기서는 가묘(家廟)의 뜻으로 쓴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