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조참판(휘 성희)신도비명 |
公諱聖希字而天沈氏之籍靑松自高麗衛尉丞洪孚後世有諱德符佐我
太祖封靑城伯諡定安定安公子安孝公溫孫恭肅公澮仍三世爲相而 世宗昭憲后安孝公女也沈氏遂爲三韓巨閥恭肅孫舍人諱順門用直諫死燕山時舍人子修撰諱達源與趙文正諸賢忤權奸坐廢沈氏遂以名節著至禮曹判書孝簡公諱諿應敎諱東龜副提學諱攸三世以文章顯公于副學公曾孫也祖諱漢柱高陽郡守贈吏曹參議考諱鳳輝綾州牧使 贈吏曹參判妣洪氏禮曹參議柱國女也公以肅宗十年甲子生端好有遠器副學公奇愛之命小名曰文度弱冠選進士入掌太學議先是遂菴權文純公序市南兪文忠公所編家禮源流深斥尹拯背師至是拯黨方嚮用李眞儒發其事 肅宗命取序文火之公倡多士抗疏以爲焚坑禍將由是爲漸仍極論其儒之罪被嚴旨與諸生捲堂去未幾拜 翼陵參奉踰年遭母憂去今 上元年中增廣丙科以注書移 世子說書選入藝文館檢閱時群小復用事公以不行新薦削職尋敍陞慶尙都事不赴遷司諫院正言會逆寇甫平 上頗思用舊臣而士大夫得除 命輒逡巡不起譴斥相屬公乃上言日者在外諸臣奔走 國難來聚 輦下而其秉執之大義未嘗伸所被之罪名未見白情地危臲今猶前也迨夫大亂旣定各自引退亶出自靖之義而 殿下逆疑其爲黨 辭敎迫切無異奴隸之詬詈官爵羈縻殆同牛馬之縛束臣恐九經之義自今日廢矣不納久之拜 世子司書遷司憲府持平露章劾權詹縱賊犯闕坐觀成敗宜用軍律權益寬交通凶逆情狀昭著而徑請酌處其按獄諸臣宜置重勘李亮臣吳瑗尹得和慷慨言事投竄非罪並宜收還不納尋選入弘文館爲副修撰見權兇顓國上疏言殫忠盡節之臣騈戮於辛壬誣君禍國之言橫肆於戊申倫綱幾絶而僅續 宗社幾危而獲安此特幸耳謂宜君臣上下動心懲創而逆黨之鋤治者止於脅從附麗根祗不拔憂虞未艾臣竊危之疏入 命竄極邊頃之有以親老聞 特命放還居二歲始叙入館職凡五六遷而終不拜驟下 嚴敎督出以校理侍講引文義指切時政 上頗嘉納旣而與同僚上箚曰辛壬大臣之捨命殉國 聖明之所深隱故嗣服之初首擧愍典矣間因朝著進退追罪至及於泉壤是鏡虎雖誅其論尙行也及今餘孼造亂逆節畢露則四臣罪名理宜夬賜伸雪而廊廟之上兇論益肆上脅下制血戰公議使同事同禍之人或伸或否此其故何也盖以爲四臣皆伸則欺蔽搆誣之罪自有所歸故伸其二以少答公議留其二以爲自脫之地噫爵秩與奪何與於兩臣之朽骨而獨未知玆事屈伸關係於何地歟 上怒甚不 賜批公惶恐迸出城外會濟州饑 命公監賑公殫心賙濟所全活甚多歷條島民疾苦爲八艱圖以進 上嘉之尋遷司諫院獻納由吏曹佐郞轉正郞兼校書館校理漢學東學敎授歷執義司諫諸寺正丁牧使公憂服除由應敎擢拜承政院同副承旨出尹廣州治有聲時湖西伯缺公首剡薦 上曰沈某南漢之治甚異爲廣民且留之踰年入大司諫尋拜關東觀察使秩滿又入大司諫轉大司成振剔弊蠹以贍儒廩相臣請久任以責成效久之出觀察嶺南嶺南大藩簿訟塡委公剖斷如流必挈其要槩歲滿入參議戶曹進秩嘉善大夫觀察關北其治如嶺南明年入爲司憲府大司憲遷漢城府左尹同知 經筵義禁府以備局堂上勾管北道機務歷戶工曹參判都承旨充陳奏副使以病解旋拜吏曹參判被不悅者疏詆力辭遆由禮曹參判改大司憲未幾遇疾卒丁卯五月戊申也壽六十四 上悼甚曰沈某廉勤可惜 賜弔祭如禮葬于長湍長西里負子之原公性姿端良才識敏達內行甚篤牧使公鰥居多疾自衣服飮食必身檢其寒溫甘淡以時進常居牀簟下服勞如僮兒痛母氏之不卒養遇諱日輒衣母所縫裏衣以祭之哭泣之哀與祭者爲出涕寡嫂單居無依公爲賃一小屋迎其私親居之尋以冒入閭家當抵罪公曰吾爲嫂賃屋耳彼何罪使長子詣司敗首罪 上聞甚嘉之 命勿問季弟善病手檢藥物恒惴揣視若嬰兒宗族貧者爲擧其婚喪如治家事遠近咸歸之及卒皆相弔曰吾屬無祿矣孝簡公已下墓儀多缺公殫誠拮据置戶樹碣必自遠及昵曰不及吾有力懼子孫彌遠彌懈也祖妣李夫人兄弟窮不能家以田民之自李來者幷其券還之以助其祭始恭肅公幼遭家難逃養于嶺南康氏恭肅公事康氏如事父公按嶺南詢其塚改封以祭之立石紀其事孝簡公伯氏同阡而墓而無後不祀公以百金買田使庶弟尸其祀盖以父母祖考之心爲心而推而廣之無不盡其力焉待人子諒善恕慮事周密兼聽而能斷故屢典藩府多所與作而民不煩而事擧人服其器能在三司事有難平而人所囁嚅公則盡之至於屢躓而不之悔 上獨察其無黨始雖譴怒輒復收叙公亦感激知遇一心奉職爲方伯以宣化正俗爲先務名賢孝烈之塚宅在道內者悉加搜訪聞于朝而旌表之士論多之元配鄭氏進士重先女文翼公光弼之後端淑有令譽從 贈貞夫人祔公墓左二子長公獻進士賢希早歿有子曰念祖進士公猷佐郞出後公弟賢希二女適縣令宋文欽李善海繼配恩津宋氏學生來大女一女適金晉柱公卒十年公猷自爲狀屬余銘其墓道嗚呼余與公中表而昆弟乎余幼養于外氏事公於少而及于老情好之密同堂如也常自謂知公本末莫如吾詳且公甚愛吾文以吾銘公殆公之志也銘曰 沈發靑松 無競厥聲 有濯斯庸 有將斯嗚 來休滾滾 晩出如公 致身有基 推孝爲忠 抗章六館 昌言衛正 整笏三司 義色讋佞 弗隨弗激 皇覽厥衷 薄黜匪怒 顯簡俄膺 命以藩寄 邦有良翰 進之樞莞 國賴長筐 通材融度 左右具宜 胡不黃耉 而究厥施 刻此穹石 形公于詩 豈樂君子 曷日忘之 大提學 南有容 撰 直提學 李秉模 書 提 學 李命植 篆 17세조 이조참판공 휘 성희(聖希) 신도비명 公의 이름은 성희(聖希)요 자는 이천(而天)이니 沈氏의 본관은 靑松이다. 고려 위위시승 휘 홍부(衛尉寺丞 諱 洪孚)로부터 후세에 청성백 휘 덕부(靑城伯 諱 德符)께서 아조(我朝) 태조(太祖)를 보좌하여 청성백에 봉(封)하고 시호(諡號)는 정안(定安)이다. 정안공의 아들 안효공 휘 온(安孝公 諱 溫)과 손자 공숙공 휘 회(恭肅公 諱 澮)가 연달아 3世에 걸쳐 정승(政丞)이 되었으며 世宗大王의 왕비 소헌왕후(昭憲王后)는 안효공의 따님이시다. 심씨가 드디어 삼한(三韓)의 훌륭한 문벌(門閥)이 되었다. 공숙공 휘 회의 손자 사인공 휘 순문(舍人公 諱 順門)이 바른 말로 간언(諫言)을 하다가 연산군(燕山君) 때에 사절(死節)하고, 사인공의 아들 수찬공 휘 달원(修撰公 諱 達源)이 문정공 휘 조광조(文正公 諱 趙光祖)등 여러분과 더불어 간신(奸臣)들의 비위에 거슬려 연좌(連坐) 파직되었다. 沈氏가 드디어 명예와 절개있는 가문으로 나타났다. 예조판서(禮曹判書) 효간공 휘 즙(孝簡公 諱 諿)과 응교공 휘 동구(應敎公 諱 東龜)와 부제학공 휘 유(副提學公 諱 攸)의 3代가 문장(文章)으로 이름이 있었다. 公은 부제학공 諱 攸의 증손이 되고 할아버지 휘 한주(諱 漢柱)는 고양군수로 증직이 이조참판(吏曹參判)이며 아버지 휘 鳳輝는 綾州牧使로 증직이 이조참판이다. 어머니는 홍씨(洪氏)이니 예조참의공 휘 주국(禮曹參議公 諱 柱國)의 따님이시다. 公은 甲子(1684 肅宗10年)생으로 단정(端正)하고 큰그릇으로 인정되어 부제학공 휘 유(攸)가 특히 사랑하고 어린이 이름을 文度라 지었다. 약관(弱冠:20歲)에 진사에 선발되고 성균관(成均館)의 장의(掌議)가 되었다. 이보다 앞서 수암 문순공 휘 권상하(遂菴 文純公 諱 權尙夏)가 서문을 쓰고 시남 문충공 휘 유 계(市南 文忠公 諱 兪 棨)가 편찬한 가례원류(家禮源流)에서 윤증(尹拯)이 스승을 배반한 일을 깊이 배척하였는데 이때에 이르러 윤증 일당이 바야흐로 이진유(李眞儒)를 임용하여 그 사실을 발설토록 하였는바 숙종(肅宗)이 명령을 내려 서문을 불사르도록 하였다. 公이 여러 선비에게 호소하고 항소(抗疏)하여 서문을 불사른 화가 장차 커질 것이라 말하고 이진유(李眞儒)의 죄를 논박하여 엄중한 王의 교지(敎旨)를 받아내어 성균관 유생들과 더불어 책을 치우고 사라졌다. 얼마 되지 않아 익릉참봉(翼陵參奉)에 임명되었는데 해를 넘겨 모친상(母親喪)을 당하여 집으로 돌아갔다. 今上元年(1720 景宗元年)에증광문과에 병과로 합격하여 주서로서 세자시강원설서에 자리를 옮겼다가 선발되어 예문관 검열(藝文館檢閱)에 들어갔다. 그때에 군소당(群小黨)이 다시 집권하게 되었는데 公은 새로 천거되지 않아 삭직(削職)되었다. 조금 있다가 복직되어 경상도사(慶尙都事)에 임명되었는데 부임하지 않았으며 이내 사간원정언(司諫院正言)에 등용되었다. 마침 역도(逆徒)가 겨우 평정되어 王이 구신(舊臣)을 임용키로 결심했는데 士大夫들이 제수(除授)의 명령을 얻고서는 문득 멀리 떠나고 부임하지 않아 견책이 서로 이어졌다. 公이 상소(上疏)하되 「일전에 밖에 있는 여러 신하들이 국난(國難)에 분주하였으며 王의 휘하에 모여들었는데 손에 잡은 대의(大義)가 입었던 죄명(罪名)을 신원(伸寃)하지 못하고 고백(告白)할 곳을 보지 못하니 위태로움이 전과 같습니다. 대란(大亂)이 평정됨에 이르러서도 각자가 은퇴하고 은둔생활을 내세우고 있는데 전하(殿下)께서는 역으로 그 당(黨)이 될까 의심하여 지시(指示)가 절박하여 노예를 꾸짖음과 다름이 없으며 고관대작들의 매임이 거의 소와 말을 속박하는 것 같으나 臣은 아홉 가지 경서(經書)의 참뜻이 오늘부터 폐지될까 두렵습니다.」라고 상소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오래 있다가 세자시강원 사서(世子侍講院 司書)에 배명(拜命)되었다가 사헌부 지평(司憲府持平)에 전직되었다. 소장(疏章)을 써서 탄핵하기를 「권첨(權詹)이 도적을 놓아주고 王의 자리를 범하고 그 성패를 관망하였으니 마땅히 군법을 적용하여 처벌하라」고 하였다. 「권첨은 더욱 역적과 교류하여 정상(情狀)이 분명히 나타남에 앞질러 참작하여 처분해야 한다」고 청원하였다. 「그 감옥을 지키는 신하는 마땅히 중죄(重罪)로 다스려야 하고 이양신(李亮臣) 오원(吳瑗) 윤득화(尹得和) 등이 분통한 일을 말한 것으로 귀양간 것은 죄가 아니니 모두 환수해야 된다」고 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조금 후 홍문관(弘文館)에 들어가 부수찬(副修撰)이 되었는데 권흉(權兇)이 국사를 제마음대로 하는 것을 보고 상소하여 말하되 「충성껏 절개를 다한 신하가 모두 신임사화(辛壬士禍:景宗1年)①에 죽고 王을 속이고 나라에 화근이 되는 말이 戊申(1728 英祖4)年에 횡행하게 되어 삼강오륜(三綱五倫)이 무너지고, 겨우 이어져 종묘사직(宗廟社稷)이 거의 위태롭다가 지켜지니 이는 특별한 다행입니다. 이를테면 君臣 상하가 노심초사하여야 되는데 반역자 무리들의 다스림은 한데 엉키어 뿌리가 빠지지 않고 근심걱정이 다스려지지 않으니 臣은 극히 위태롭게 생각합니다」라고 상소문을 내니 왕명으로 극히 먼 변두리에 귀양을 가게 되었는데 조금 후 어버이가 늙었다고 알려져 특명으로 석방되어 돌아왔다. 2년을 지난 다음 비로소 관직에 복직된 다음 5·6차 전직되는 명령이 있었으나 마침내 부임을 하지 않았다. 별안간 엄한 교지(敎旨)가 하달되어 교리(校理)겸 시강(侍講)에 나가라고 독촉을 받았다. 문의(文義)②를 인용하여 시정(時政)을 지적하니 王이 자주 받아들였다. 뒤에 동료와 더불어 상소문(上疏文)을 내어 이르되 「신임사화(辛壬士禍)에 대신들의 나라 위한 죽음은 人君께서 깊이 간직하시는 바입니다. 고로 즉위 초에 먼저 은전(恩典)을 베푸셨습니다. 그간에 부름을 받아 진퇴(進退)를 하고 나중에 죄준 일이 지하에 미쳤습니다. 이는 김일경(金一鏡)과 목호룡(睦虎龍)은 비록 죽었으나 그 논쟁(論爭)은 오히려 진행되고 있습니다. 지금에 이르러 잔당(殘黨)이 난을 조작하고 역절(逆節)하였음이 모두 드러나면 四大臣의 罪名을 마땅히 쾌히 신원(伸寃)해 주어야 합니다. 宮中에서 흉악한 논쟁 더욱 방자하여 王을 협박하고 신하를 제압하며 공론(公論)과 다투며 같이 일하고 같이 화를 당하는 사람으로 하여금 혹은 펴고 혹은 못하게 하니 이 연고는 어찌된 일입니까, 대개 말하기를 四大臣이 모두 신원이 되면 속이고 모함하는 죄가 자동적으로 돌아갈 곳이 있을 것입니다. 고로 그 두 사람을 신원하면 적은 것으로 공론에 대답하는 일이 되며 두 사람을 보류하면 스스로 이탈할 땅을 만드는 것이 될 것입니다. 오호라 벼슬을 주고 뺏는 것은 두 사람의 썩은 유골과 함께 참여하겠습니까. 유독 이 일을 알지 못하고 어느 곳에 굽히고 펴는 관계를 맺을까요」하니 왕이 심히 노하고 받아들이지 않으니 公이 황송하게도 성밖으로 축출 당했다. 마침 제주(濟州)에 기근(饑饉)이 있어 굶주림이 일어났다. 公에 命하여 백성을 구제하는 일을 감시토록 하였는바 公이 전심전력 구제에 힘써 완전하게 회생시킨 일이 심히 많았다. 도민(島民)의 질병 고난을 조목별로 열거하고 팔간도(八艱圖)③를 만들어 진상(進上)하니 王이 가상히 여겼다. 조금 후 사간원 헌납(司諫院獻納)에 옮겼다가 이조좌랑(吏曹佐郞)으로부터 정랑(正郎)겸 교서관교리(校書館校理)에 이어 한학동학교수(漢學東學敎授)로 전직하고 집의(執義) 사간(司諫)을 거쳐 여러 시(寺)에서 正 벼슬을 역임하였다. 목사공 휘 봉휘(牧使公 諱 鳳輝) 喪을 당하고 복(服)을 벗은 다음 응교(應敎)로부터 승정원 동부승지(承政院同副承旨)에 선발 제수되고 광주부윤(廣州府尹)으로 나가서는 훌륭한 치적으로 이름이 났다. 이때 호서백(湖西伯:忠淸道관찰사)이 결원이 되었는바 公이 첫 번째로 추천되었는데 王이 이르되 심공은 남한(南漢)의 치적이 매우 훌륭하니 광주 사람들을 위해 유임(留任)토록 하라고 하였다. 해를 넘겨 대사간(大司諫)으로 들어갔다가 조금 후 관동관찰사(江原道觀察使)를 배명(拜命)받았는데 임기만료로 또다시 대사간으로 들어가 대사성(大司成)으로 옮겨서 폐단을 깎아 내었다. 많은 선비들이 정승에게 품신하여 한자리에 오래 있으면서 실력을 발휘시키라고 요청했다. 그래서 오랫동안 있다가 영남관찰사(慶尙道觀察使)로 나갔다. 영남은 관할구역이 넓어서 송사(訟事) 문서가 가득했었으나 公이 심판함을 물 흐르듯 하고 반드시 그 요점(要點)을 잘 끌어냈다. 임기가 만료되어 호조참의(戶曹參議)로 들어가고 가선대부(嘉善大夫)에 진급되어 관북관찰사(咸慶道觀察使)가 되니 치적이 영남 때와 같았다. 다음해 사헌부(司憲府)에 들어가 대사헌(大司憲)이 되고 한성부 좌윤(漢城府 左尹)으로 옮겼다가 경연(經筵)과 의금부(義禁府)의 동지사(同知事)가 되고 비변사(備邊司)의 당상관(堂上官)으로서 北道의 정무(政務)를 관장하였다. 호조(戶曹) 공조(工曹)의 참판(參判)을 역임하고 진주부사(陳奏副使)에 충용(充用)되었다. 질병으로 해직(解職)되었다가 다시 이조참판(吏曹參判)에 배명(拜命)되었다. 좋지 않은 자의 비방을 입어 힘써 답변하였다. 예조참판(禮曹參判)으로부터 다시 대사헌(大司憲)으로 옮겼는데 미구에 질환(疾患)을 만나 丁卯(1747 英祖23)年 5月 19日에 돌아가시니 64歲를 살으셨다. 王이 심히 애도하고 이르되 沈公은 청렴하고 부지런하니 가히 애석하다고 전하며 부의(賻儀)를 하사하였다. 장단(長湍)의 장서리(長西里) 子坐에 예장(禮葬)하였다. 公은 타고난 자태가 단정하고 재주와 식견(識見)이 민첩하고 통달하며 心德이 매우 두터웠다. 목사공(牧使公)이 홀아비로 질환이 많았는데 의복과 음식으로부터 몸소 추위와 더위 그리고 달은지 싱거운지를 반드시 점검해보고 진상했다. 항상 상점(狀簟:거처하는 자리) 아래에 있으면서 모시는 것을 종과 같이 하였다. 어머니를 끝까지 봉양하지 못한 것을 애통하게 여겨 기일(忌日)을 당하면 어머니가 끝을 꼬매지 않은 옷을 입고 제사지냈으며 곡하며 눈물짓는 애통하는 모습이 참제자(參祭者)로 하여금 눈물을 흘리게 하였다. 형수가 홀로 살아 의탁할 곳이 없었을 때 公이 조그만 집을 전세내어 거처하게 하였다. 조금 후 민가를 침입했다고 죄를 받게되니 公이 이르되 나는 형수를 위해 가옥을 빌린 것인데 그것이 무슨 죄가 되느냐고 말했다. 장자로 하여금 사헌부(司憲府)에 그 죄를 면하게 하라고 했던 바 王이 듣고서 심히 가상히 여기고 문초하지 말라고 명하였다. 막내 아우가 병에 걸렸을 때 손수 약을 검진해보고 항상 어린 아해같이 돌보았다. 친척 가운데 가난한 자가 혼인이나 상례를 치르게 되면 자기 집을 다스리듯 하니 원근(遠近)에 사는 사람들이 모두 찾아 왔다. 公이 세상을 떠남에 이르러서는 모두가 서로 조문(弔問)을 하고는 우리가 복이 없다고 말했다. 효간공 휘 집(孝簡公 諱 諿) 이하가 오랫동안 石物이 없었는데 公께서 정성껏 힘써 상석(床石)과 묘갈(墓碣)을 설치하되 반드시 먼데서부터 가까운데 미치며 자신이 힘이 미치지 않으면 자손이 더욱 멀어지고 게을러질까 염려된다고 말했다. 할머니 李氏부인의 형제가 궁해서 집안살림을 못하니 李氏 집안에서 온 종을 문권(文券)과 함께 돌려보내 제사지내는 일을 도왔다. 처음에 恭肅公 諱 澮가 어려서 집안이 화를 당했을 때 영남에서 강씨(康氏)를 만나 양육되시어 恭肅公이 康氏를 양부로 섬겼다. 公이 영남지방에 안찰사(按察使)④로 나아가 그 무덤을 물어보고 봉축(封築)을 다시 하고는 제사지내고 立石하여 그 사실을 기록하였다. 孝簡公 伯씨 혜(譓)를 같은 언덕(즉 서울 봉천동)에 묘를 쓰고 후손이 없어 제사를 지내지 못했는데 公이 백금(百金)을 주고 位土를 사서 서제(庶弟)로 하여금 제사를 주관하도록 하였다. 대개 부모님과 할아버지의 마음으로 자기 마음을 삼고 밀어 올리고 넓혀서 그 힘을 다하지 않음이 없었다. 사람을 접대함에는 용서를 잘하며 일을 계획할 때에는 여러 말을 듣고서 주도 면밀하게 결단하는 고로 자주 안찰사로 나가 지방행정을 진흥시킴이 많아서 백성이 번잡하지 않는 가운데 사업에 정진하게 되니 사람들이 그 아량과 능력에 탄복하였다. 삼사(三司)에 근무할 때 사안(事案)이 수습하기 어려워 사람들이 말 못하는 바가 있으면 公이 곧 말을 하곤 했는데 꺾여도 후회하지 않았다. 王이 홀로 그의 편벽되지 않음을 살피시고 시초에는 비록 견책을 하였으나 문득 거두어 드리고 복직시키니 公도 또한 인정해 주는 것을 감격하고 한마음으로 봉직했다. 방백(方伯)이 되어서는 문화를 펴고 풍속을 교정하는 일을 급선무로 삼고 명현(名賢)과 효자 열부의 무덤이 도내(道內)에 있는 곳을 모두 방문 조사하여 조정에 알리어 정표(旌表)를 세우니 선비들의 칭송이 많았다. 초취 배위 동래정씨(東萊鄭氏)는 진사공 휘 중선(進上公 諱 重先)의 따님이며 문익공 휘 광필(文翼公 諱 光弼)의 후손이다. 단정하고 훌륭한 명예가 있었으며 남편 직위를 좇아 貞夫人에 추증되고 公의 墓의 왼쪽에 합장했다. 두 아들을 두니 장자는 進士公 휘 공헌(公獻)으로 현철하였으나 조몰(早歿)하였으며 아들의 이름은 염조(念祖)니 진사이다. 차자 좌랑공 휘 공유(公猷)는 公의 아우 증사복정공 휘 현희(贈司僕正公:諱 賢希)에게 出系하였다. 두 딸은 현령공(縣令公:諱 宋文欽)과 이선해(李善海)에게 출가하였다. 재취 부인은 은진송씨(恩津宋氏)로서 송래대(宋來大)의 따님이고 1女를 두니 김진주(金晉柱)에게 출가하였다. 公이 돌아 가신지 10年에 목사공 휘 공유(牧使公 諱 公猷)가 스스로 행장(行狀)을 만들어 나에게 묘도(墓道)에 세울 비문을 지으라고 부탁했다. 오호라 나는 公과 더불어 내외종간이 되고 아우가 된다. 내가 어려서 외가(外家)에서 부양되고 소시(少時)에 公을 섬겼는데 늙어서는 정분(精分)의 밀착이 한집 식구 같았다. 항상 스스로 이르기를 公의 본말(本末)을 알아주는 것은 나만 같지 못하다고 하였다. 또한 公은 나의 문장을 심히 사랑하고 나에게 公의 명(銘)을 지으라 했으니 모두가 公의 뜻이다. 명(銘)하건대 심씨는 청송(靑松)에서 출발하니 그 명성 다툴 자 없다. 깨끗함이 있어 등용되니 장차 이름이 날 것이다. 오는 복(福)이 강하게 흐르니 늦게 公같은 이를 出生했다. 몸의 행동 기본이 있어 孝를 미루어 忠을 했다. 육관(六館)에 상소문을 내어 도움말로 정도(正道)를 지켰다. 삼사(三司)에 재직하여 의(義)로운 빛이 간사한 행동을 막았다. 아첨않고 격하지 않으니 人君이 그 충심을 보시었다. 잠시 내치고 노하지 않으니 높이 평가되어 곧 불러드림을 받았다. 비방장관에 명하니 나라가 힘입어 길이 바로 섰다. 재주와 법도가 좌우로 갖추었도다. 어찌 90 상수를 하지 않고 저 제상으로 가셨나요. 큰돌에 글짜를 새겨 공의 명(銘)을 나타내니 화락한 군자여 어느 날인들 잊으오리. 대제학 남유용(南有容) 찬 직제학 이병모(李秉模) 서 제 학 이명식(李命植) 전서 주(註) ① 辛壬士禍:辛丑年 壬寅年에 일어난 사화로 소론이 노론의 4大臣을 몰아낸 사건을 말한다. ② 文義:글의 뜻. ③ 팔간도(八艱圖):여러가지 어려운 사항을 그린 그림. ④ 안찰사(按察使):지방 고을의 관리들을 치적과 비위를 검찰하는 관직.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