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장공(휘 사민)묘지

직장공 휘 사민 묘소
소재지: 파주시 광탄면 창만리 산 13(금병산 고곡)


十七世祖 贈吏曹參議 直長公 諱 師民 墓誌
惟我靑松之沈爲世甲族而肇于麗朝文林郞諱洪孚一傳而有諱淵閤門祗侯再傳而有諱龍靑華府院君三傳而有諱德符入我 朝官至左侍中靑城伯侍中生府尹諱澄府尹生判官諱石雋判官生觀察使諱璿 光廟元年退居豊壤搆亭扁以忘世人比之殉節諸臣觀察使生節度使諱安仁節度使生郡守諱濱郡守生左參贊諱光彦號鈍菴厚德雅望爲時碩輔參贊生監察 贈吏曹判書諱錦判書生府使 贈左贊成諱宗忱於公爲五代祖高祖諱偰監役 贈領議政曾祖諱之源號晩沙不仕昏朝爲世所重官遂顯至領議政祖諱益成縣監 贈吏曹判書考諱廷最號樂齋知中樞府事妣南陽洪氏都事諱灝之女繼妣坡平尹氏諱九榮之女贊成公第二子監役諱 子諱之淳子諱益謙以弟諱之灌子入繼子諱廷徽以郡守公長子安岳公諱光門五代孫監役諱壽堅子入繼配全州李氏諱絢之女繼配驪州李氏諱諝之女以 英廟壬戌四月十六日生公公諱師民字民表幼而容貌淸瀅見者異之乙亥繼知事公後竭力就養誠孝備至及庚辰戊戌丁內外艱內喪先焉癸卯陞庠己酉除 翼陵參奉官次於東部內資寺爲奉事金吾則三爲都事直長于司饔院 靖陵公爲郞廚院監燔造取柴于春川汾院所隸也有李尙度者宰是府憾其不與聞搆報濫斫道臣李秉鼎初不覈直聞于 朝公竟被行遣卽其邑也公季子幼有美質 上於輦路見甚奇之 命宥還公 恩數曠絶歲在 正廟丙辰己未正月十一日考終于第享年五十八三月十四日葬于坡州廣灘面錦屛山負亥原配韓山李氏通德郞諱弘重之女與公同庚九月二十七日生幼而聰慧德備貞簡逮于歸事舅姑一以愛敬待宗族本之睦婣撫子女御婢僕和嚴兩盡育一男二女 正宗乙巳正月二十六日終享年四十四三月上已祔公墓右繼配竹山朴氏諱聖伋之女 英廟乙酉十月十六日生婦道純備經紀內事奉先接賓一無所缺不肖嗣後在夫人晩年先妣已下世矣鞠育之撫養之以至通籍實介福所受也夫人自遭長胤喪癃疾添疚家計且剝落菽水難繼不肖徹陳情夫人執不肖手曰吾年將八十屢經險幸而生存享汝 惠養豈不貴乎百里專城吾與汝歌詠 聖化將有日矣不肖冥頑賦命最薄檄未及奉夫人遽以 憲宗辛丑十一月二十二日終終天之痛曷有其極嗚呼痛哉享年七十七翌年二月一日年未運利權奉于廣灘面汾水院先塋局內向丁原今 上二年辛亥三月二十五日遷祔于公墓左男長毅鎭翊衛 贈吏曹參判次敎鎭今縣監長女適延安李延保次適判書韓山李羲準毅鎭初娶光山金斗榮女後娶咸安趙宇鎭女三娶郡守潭陽田德顯女俱無育子族兄進士常鎭子敦永今府尹敎鎭初娶參判平山申獻朝女後娶豊壤趙錫永女生二女取族兄翼鎭子啓永子之女長適宜寧南世重次適海平尹戴善李延保繼子元明夭李羲準長男晋在前主簿次頤在夭次師在進士敦永娶恩津宋一斅女生一男一女男樂聖女幼啓永娶校理南陽洪在重女生二女幼樂聖娶郡守淸風金直善女公居敬而簡介潔其表根於所性惟孝友于敦睦兼之反身威不如令而閨闥之內肅若朝廷敎子弟必以規矩法於家者然也榮達非志晩補先蔭潔不汚己操履冞堅義苟所辭不以爵祿變其塞嗚呼公之高標懿行非後昆所敢妄議德之厚而嗇其報壽與位閼求之福善不能無憾然永壽斯傳範我來許玆豈非食報之可久可大也夫
崇禎紀元後四辛亥三月 日
不肖孫 通政大夫守慶州府尹兼慶州鎭兵馬節制使 敦永 謹書

17세조 증이조참의 직장공 휘 사민(師民) 묘지
우리 靑松沈氏는 세상에서 갑족(甲族)으로 고려 시대 문림랑(文林郞)을 지낸 휘 홍부(洪孚)로부터 시작한다. 한 세대를 지나 휘 연(淵)이 합문(閤門) 지후(祗侯)를 지냈고, 다음 세대에는 휘 용(龍)이 청화부원군(靑華府院君)을 지냈다. 또 四대에는 휘 덕부(德符)가 조선에 들어와서 관직(官職)이 좌정승 청성백(靑城伯)에 이르렀다. 府尹을 지낸 휘 징(澄)을 낳고, 府尹은 판관(判官)을 지낸 휘 석준(石雋)을 낳고, 판관(判官)은 관찰사(觀察使)를 지낸 휘 선(璿)을 낳았다. 世祖元年(1455)에 풍양(豊壤)으로 물러나서 정자(亭子)를 짓고 세상을 잊으며 살았다. 사람들은 그를 순절(殉節)한 여러 신하들에 비유하였다. 관찰사(觀察使)는 절도사(節度使)를 지낸 휘 안인(安仁)을 낳고, 절도사(節度使)는 郡守를 지낸 휘 빈(濱)을 낳고, 郡守는 좌참찬(左參贊)을 지낸 휘 광언(光彦), 호(號) 둔암(鈍庵)을 낳았다. 德이 두텁고 아망(雅望)이 있어 당시의 석보(碩輔)①로 여겨졌다. 참찬(參贊)은 감찰(監察)을 지내고 이조판서(吏曹判書)로 추증된 휘 금(錦)을 낳고, 판서(判書)는 부사(府使)를 지내고 좌찬성(左贊成)으로 추증된 휘 종침(宗忱)을 낳으니, 公에게는 5代祖가 된다.
고조는 휘가 설(偰)이며 감역(監役)을 지내고 영의정으로 추증되었다. 증조(曾祖)는 휘가 지원(之源)이며 호(號)는 만사(晩沙)이다. 光海朝에 벼슬하지 않았기 때문에 세상에 중히 여겨지는 바 되었다. 관직이 마침내 높아져서 영의정에까지 이르렀다. 祖父는 휘가 익성(益成)이며, 현감(縣監)을 지내고 이조판서(吏曹判書)에 추증되었다. 고(考)는 휘가 정최(廷最)이며, 호는 낙재(樂齋)이다.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를 지냈다.
비(妣)는 남양홍씨(南陽洪氏)이며 도사(都事) 휘 호(灝)의 딸이다. 계비(繼쯼)는 파평 윤씨(坡平尹氏)로 휘 구영(九榮)의 딸이다. 찬성공(贊成公)의 둘째 아들은 감역(監役)을 지냈으며, 휘는 석()이다. 아들은 휘가 지순(之淳)이며, 그 아들은 휘가 익겸(益謙)인데, 아우 휘 지관(之灌)의 아들로 입양되었다. 그 아들은 휘가 정휘(廷徽)인데, 郡守公의 長子 안악공(安岳公) 휘 광문(光門)의 오대손(五代孫), 감역(監役) 휘 수견(壽堅)의 아들로 입양되었다. 그 夫人은 전주이씨(全州李氏) 휘 현(絢)의 딸이다. 다음 夫人은 여주이씨(驪州李氏) 휘 서(諝)의 딸이다. 英祖 壬戌年(1742) 4월 16일에 公을 낳았다.
公은 휘(諱)가 사민(師民)이며, 자(字)는 민표(民表)이다. 어려서는 용모(容貌)가 맑고 빛나서 보는 이들이 기이하게 여겼다. 乙亥年(1755)에는 지사공(知事公)의 후사(後嗣)로 입양되었는데, 힘을 다해 봉양하여 정성과 효도가 모두 지극하였다. 庚辰年(1760)과 戊戌年(1778)에는 부친상을 당하였는데 어머니를 먼저 여의었다. 癸卯年(1783)에는 성균관에 올랐다. 己酉年(1789)에는 익릉참봉(翼陵參奉)을 제수받았다. 관직(官職)은 동부(東部)에서 봉사(奉事), 의금부(義禁府)에서 도사(都事), 사옹원(司饔院)에서 直長을 지냈다. 정릉공(靖陵公)은 사옹원(司饔院)에서 번조(燔造)를 맡게 되어 春川 장작을 구하였는데, 분원(汾院)에 딸린 것이었다. 이상도(李尙度)란 자가 이 府의 수령이었는데, 자기로부터 허가를 얻지 않고 어지러이 나무를 벤데 감정을 가졌다. 관찰사(觀察使) 이병정(李秉鼎)은 처음에 살피지 않고 바로 조정에 알리자, 마침내 공은 체포되어 그 고을에 보내졌다. 公의 막내 아들은 어리지만 아름다운 자질(資質)이 있었다. 임금께서 연로(輦路)②에서 보시고 매우 기이하게 여기고서 公이 돌아올 수 있도록 도우라고 명하였으니, 은혜가 세상에 드문 예라 하겠다. 이 때가 正祖 丙辰年(1796)이다. 己未年(1799) 1월 11일에 집에서 세상을 떠났다. 향년(享年)은 58세이다. 3월 14일에는 파주(坡州) 광탄면(廣灘面) 금병산(錦屛山) 해원(亥原)에 장사지냈다.
夫人은 韓山李氏로, 通德郞 휘 홍중(弘重)의 딸이다. 公과 같은 해 9월 27일에 태어났다. 어려서는 총명하고 지혜로왔으며 정숙하면서도 간략한 덕을 모두 갖추었다. 公에게 시집와서는 시부모를 섬김에 한결같이 사랑과 공경(恭敬)으로 했으며, 친족(親族)을 대할 때에는 화목함을 근본으로 하였다. 자녀를 기르고 종을 부릴 때에는 온화함과 엄함의 양면을 다하였다. 1남 2녀를 키웠다. 正宗 乙巳年(1785) 1월 26일에 돌아가니, 향년 44세였다. 3월 상사일(上巳日)에 公의 묘에 부우(祔右)하였다.
다시 竹山朴氏와 혼인했는데, 휘 성급(聖伋)의 딸이다. 英祖 乙酉年(1765) 10월 16일에 태어났다. 부녀의 행실(行實)을 순전(純全)하게 갖춰서, 집안일을 경영하고 기틀을 세웠으며, 조상을 모시고 손님을 접대함에 한 가지도 어그러지는 일이 없었다. 불초(不肖)가 후사(後嗣)를 잇게 된 것은 夫人 만년(晩年)의 일이요, 선비(先妣)는 이미 세상을 떠난 뒤이다. 키우고 길러서 벼슬에 오르게 한 것은 진실로 복을 받은 것이라 하겠다. 夫人은 長子의 상(喪)을 당한 이후로는 늙고 병든 데다가 마음 고생까지 더하였다. 가계(家計)가 또한 어려워져 변변치 못한 음식조차도 대기 어려워 불초(不肖)가 글을 올려 진정(陳情)하였다. 夫人은 불초(不肖)의 손을 잡으면서 말하기를, 『내 나이 곧 80인데, 여러 차례 나쁜 일을 겪고도 요행히 살아남아서 너의 고마운 봉양을 누리게 되니 어찌 귀하지 않겠느냐? 백리의 고을의 수령이 되어 나와 네가 성덕(聖德)을 노래할 날이 있을 것이라.』 하였다.
불초(不肖)는 어둡고 재주가 없으며, 팔자가 또한 기구하여 미처 받들어 봉양하기도 전에 夫人은 갑자기 헌종(憲宗) 辛丑年(1841) 11월 22일에 돌아가시고 말았다. 종천(終天)③의 아픔이 어찌 끝이 있겠는가? 아아, 슬프다. 향년(享年) 77세이다. 다음 해 2월 1일에는 아직 운(運)이 길하지 않다 하여, 광탄면(光灘面) 분수원(汾水院) 선영(先塋) 안의 정원(丁原)에 모셨다가, 금상(今上) 2년 辛亥年(1851) 3월 25일에 공의 묘 왼쪽으로 옮겨 합장하였다.
큰 아들은 의진(毅鎭)으로 익위(翊衛)이며, 이조참판(吏曹參判)으로 추증되었다. 둘째 아들은 교진(敎鎭)인데 지금은 현감(縣監)이다. 큰 딸은 연안(延安) 이연보(李延保)와 혼인했고 둘째 딸은 판서(判書) 한산(韓山) 이희준(李羲準)과 혼인했다.
의진(毅鎭)은 처음에 光山 김두영(金斗榮)의 딸과 혼인했고, 후에 함안(咸安) 조우진(趙宇鎭)의 딸과 혼인했다. 세번째로는 郡守를 지낸 담양(潭陽) 전덕현(田德顯)의 딸과 혼인했다. 그러나 모두 혈육(血肉)이 없어 족형(族兄)인 進士 상진(常鎭)의 아들 돈영(敦永)으로 후사(後嗣)를 삼았는데, 지금 부윤(府尹)이다.
교진(敎鎭)은 처음에 참판(參判) 平山 신헌조(申獻朝)의 딸과 혼인했고, 풍양(豊陽) 조석영(趙錫永)의 딸과 재혼하여 두 딸을 낳았다. 족형(族兄) 익진(翼鎭)의 아들 계영(啓永)으로 아들을 삼았다. 큰 딸은 의령(宜寧) 남세중(南世重)과 혼인했고, 둘째 딸은 海平 윤대선(尹戴善)과 혼인했다. 이연보(李延保)의 양아들 元明은 요절했다. 이희준(李羲準)의 큰 아들 진재(晋在)는 주부(主簿)를 지냈고, 둘째 아들 이재(頤在)는 요절했다. 셋째는 사재(師在)인데, 進士이다.
돈영(敦永)은 은진(恩津) 송일효(宋一斅)의 딸과 혼인하여 1남 1녀를 두었다. 아들은 낙성(樂聖)이고, 딸은 어리다. 계영(啓永)은 校理를 지낸 남양(南陽) 홍재중(洪在重)의 딸과 혼인했다. 딸을 둘 낳았으나 아직 어리다. 낙성(樂聖)은 郡守를 지낸 청풍(淸風) 김직선(金直善)의 딸과 혼인했다.
公은 경(敬)에 거(居)하면서 간엄(簡嚴)하였으며 그 모습은 곧고 깨끗하였으니, 天性에 근본을 두고 있는 것이다. 오직 효성과 우애가 있어 화목하였고, 늘 자신을 반성하였다. 엄하게 하되 명령하듯 하지는 않아서, 집안이 정숙(靜肅)하기가 조정(朝廷)과 같았다. 자제(子弟)를 가르침에는 반드시 법도가 있었으니 집안에서 본받아 그러한 것이었다. 영달(榮達)이 뜻한 바는 아니어서 만년(晩年)에 음서(蔭敍)로 관직에 올랐지만 깨끗한 처신으로 자신을 더럽히지 않았고 몸가짐을 굳건히 하여, 의(義)에 맞지 않으면 벼슬과 봉록(俸祿) 때문에 지조를 구차스럽게 바꾸지 않았다.
아아, 公의 높은 표상과 아름다운 행동은 후손(後孫)이 감히 망령되이 논할 바 아니지만, 두터운 德에도 불구하고 그 보답이 적어 수명(壽命)과 지위가 선한 일을 한 사람에게 복을 내림이 없었으니 서운하지 않을 수는 없다. 그러나 이처럼 전범(典範)이 영원하게 되었음은 우리가 말할 수 있겠다. 이는 어찌 보답을 받은 것이 오래 가고 크다고 하지 아니하겠는가?
숭정(崇禎) 기원(紀元) 후 네 번째 辛亥年(1851) 3월에
불초손 통정대부 수 경주부윤 겸 경주진병마절제사 돈영(敦永)이 삼가 쓰다.

주(註)
① 석보(碩輔):크게 임금을 보좌(輔佐)할 사람이란 뜻이니, 뛰어난 신하감이었음을 말한다.
② 연로(輦路):임금의 연(輦)이 통행하는 길.
③ 종천(終天):친상(親喪)을 이르는 말. 혹은 천수(天壽)를 다 누린다는 뜻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