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좌와공(휘 조)묘갈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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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좌와공 휘 조 묘소 (향토사적 제8호) |
十六世祖 贈大司憲 行 童蒙敎官 靜坐窩公 諱 潮 墓碣銘竝書
我東群賢繼世林立道學文明燦然極備而靜坐窩先生諱潮字信夫嘗曰吾東儒先中洞見大原者惟栗谷尤菴兩先生非但吾東盖朱子後洞見大原者惟此二人而己又繼之曰精微曲折處猶有遺憾南塘出而闡明之至此然後千古不盡傳之妙無復餘蘊矣嗚呼至哉先生之言也世道叔季學術蔑裂異說橫流以人之至貴之性降同物之性又倡氣質純善之說而驅賢愚於一科其媚獸流禍卒致今日之橫走猖獗善惡混沌慟哉此實二儀剖判後創有之變也惟先生見理分明憂患來世援證栗尤之訓立言而辨之按迹而決之明聖道於將晦醒淫邪於旣狂以人物理同性異賢愚性同心異之說壁立千仞而廓如也天之生我先生豈偶然乎哉 肅宗甲戌九月二十八日生靑松沈氏靑城伯德符靑川府院君溫靑松府院君澮領議政連源靑陵府院君鋼之后靑陵爲六世考壽鼎 贈左承旨妣光州鄭氏都事展昌女先生容貌岐嶷姿稟穎秀年甫童讀張旅軒著易學圖說大率妙契自是喜讀性理之書及長贄謁遂菴權先生遂翁叩其所蘊奬許以他日當爲師表同門不幸有射師者卞斥之不暇自遭哲萎抵書南塘韓先生曰盖自治任歸來仰門下若山斗尋常欲以所事先師者事之又語之曰南塘不世出之大賢也相宜道義每涵泳乎所己聞而益求其所未至軆驗乎所己知而益盡其所未能天人性命之原王覇治亂之本靡不窮究充然有得是所謂實用之學也林泉蕭冷淨掃室堂儼然端坐萬變順應審理使以經學啓請丁卯拜 敬陵叅奉又未幾月遷除童蒙敎官先生雖不以長往爲義而城市留連終未雅尙遂決意解紱杜門講書用功眞積著書立論日益富精其易象箚論義理梗槪四禮笏記虛靈說理氣互發說卞三淵說箚卞雜識內外篇與南塘陶蘶往復者先生之學問爛漫成章後之欲知先生之所以爲先生則不待智者而自明矣 英宗丙子七月十一日違和而只說虛靈知覺等語怡然考終葬于高蒼山負艮原配完山李氏公復女祔葬擧男樂賢司馬能世其學壽階同知敏賢女適李修亨縣監李運亨進士樂賢生銖文校理鉌銇進士女適尹載醇敏賢生釴女適姜雲會餘不錄嗚呼先生姿淸詳敏儀潔莊肅持論公平果敢通透灑落處事挈矩物我權衡不偏性命源委之論堅執佩服之義必求之白直實先生本自得之於天而自合於師門旨訣事親殫竭誠孝御家恩威幷至敎人諄復丁寧處官恪勤當務律身一遵家禮爲學知行兩進以誠敬爲本有不明不措之功與師友講說毫分縷柝究竟精確義利邪正卞之甚嚴不以威武挫其志不求一時之雌雄性又樂山水或泛舟長江携笻深山春蘭秋菊逍遙觴咏任其情趣焉若論先生之事功則祖述孔朱栗尤以遂塘爲正嫡其所學者積中發外庶幾爲任傳之重施德於不報流澤於無窮不可謂之無功於世道生民其果能達則兼善天下窮則獨善其身者歟章甫建山仰祠而妥靈以子壽職 贈大司憲遺書間關世故失守而今覓焉天其未欲喪斯文耶雲孫相弼謁余以解題文集又屬顯隧之文素所仰止不敢牢辭然其於先生之學問義理嶽峙河深入其中而茫茫實不知領略所向謹撮其大者系之銘銘曰 道之原出於天惟聖則之聖之言載於書其誰負荷苟千載集羣儒而大成者俟百世吾捨華陽而歸何寒水秋月照南塘高蒼山色並嵯峨源流直通于洙閩行止縱橫而無疴廓淸叛卒飜空滄波剖柝立論星光綺羅有道千秋功垂平和百世在後公私非阿 開天四千三百十一年戊午流火之吉 後學 恩津 宋貢鎬 謹撰 16세조 증대사헌 행 동몽교관 정좌와공 휘 조(潮) 墓碣銘竝書 우리나라의 여러 현인(賢人)이 계속해서 나와 도학과 문명이 찬연히 빛났는데 정좌와 선생이 일찍이 말하기를 우리나라 유학자(儒學者)의 선배로서 큰 근원을 환히 내다본 사람은 율곡(李珥)① 우암(宋時烈)② 두 선생 뿐이었다. 우리나라에서 뿐만 아니라 주자(朱子) 이후로 큰 근원을 내다본 사람은 이 두 선생 뿐이라 하고 또 이어서 말하기를 정밀하고 자세하며 내용이 복잡한 곳에서는 설명하지 못한 것이 있었으나 남당(南塘)③이 그 내용을 밝힌 뒤로 영원히 전하여졌다. 아아 지극하도다 선생의 말씀이여 세상이 말세가 됨에 학문의 일관(一貫)된 계통이 끊어지고 정도(正道)가 아닌 말이 횡행(橫行)하여 사람의 지극히 존귀한 성품을 다른 동물과 동일시(同一視)하고 또 본연의 성질에 대하여 후천적(後天的)으로 일어나는 다혈질(多血質)이 순수하고 착하다는 말을 퍼뜨려 어질고 어리석음을 혼동하여 짐승과 같이된 재앙이 마침내 오늘날과 같이 되어 바르지 못한 행실이 많아지고 옳고 그른 것이 혼동되니 슬프도다. 이것은 진실로 천지가 생긴 뒤로 처음 일어난 변괴(變怪)이다. 오직 선생이 이치를 분명하게 보고 내세(來世)를 걱정하여 율곡 우암선생의 가르침으로 증거를 삼아 변명하고 자취를 살펴 결정하여 성도(聖道)가 장차 어두워지는 것을 밝히고 음란하고 간사한 것에 미친 사람들을 깨우쳐 사람의 심리(心理)는 같고 성질은 다르며 어진 사람과 어리석은 사람의 심리는 같으나 성질은 다르며 어진 사람과 어리석은 사람은 성품은 같으나 마음이 다르다는 말로써 이치를 밝혔으니 하늘의 우리 선생을 낳음이 어찌 우연한 일이겠는가 甲戌(1694 肅宗)년 9월 28일에 公이 출생하니 靑松沈氏 청성백(靑城伯) 휘 덕부(德符)와 청천부원군 휘 온(溫)과 청송부원군 휘 회(澮)와 영의정 휘 연원(連源)과 청릉부원군 휘 강(鋼)의 후손이요 청릉부원군의 6世가 된다. 아버지는 휘가 수정(壽鼎)이니 좌승지에 증직되었고 어머니는 光州鄭氏 도사(都事) 전창(殿昌)의 따님이다. 선생의 용모가 빼어나고 영리하여 나이 어렸을 때 여헌(旅軒:張顯光의 호)의 역학도설(易學圖說)을 읽고 대략 묘한 이치를 깨닫고 이로부터 성리학의 책 읽기를 좋아하더니 장성하여 수암(遂菴:權尙夏의 號)에게 학문을 배움에 수암이 그 학문 쌓은 것을 물어보고 뒷날 모범이 될만하다 생각하였더니 同門에 불행하게도 사인(射人)의 長이 있어 물리치는데 겨를이 없었고 어진 사람이 점점 적어지면서부터 남당(南塘)에게 서신을 보내어 말하기를 任地에 돌아옴으로부터 문하생이 태산같이 믿었고 옛 스승을 섬기는 바로 섬기고자 하였다 하고 또 말하기를 남당은 뛰어나고 크게 어진 사람이라 하고 서로 도의로써 가깝게 지내고 늘 은혜를 입어 일게 되었고 이르지 못한 것을 더욱 찾았고 이미 안 것은 체험하여 그 능하지 못한 것을 찾는데 더욱 힘써서 사람이 제각기 가지고 있는 하늘이 준 성질의 근본과 왕패(王覇)④를 다스려지고 어지러워지는 것을 깊이 연구하여 얻는 것이 많았으니 이것이 이른바 실용적인 학문이다. 시골 쓸쓸한 곳에 집을 깨끗하게 청소하고 의젓하고 단정하게 않아 여러 가지로 변화하는데 순응하고 잘 살펴 경학(經學)으로 임금에게 글을 올리니 丁卯(1747)년 영조 23年 경릉참봉(敬陵參奉)에 임명되었고 또 몇 달이 안되어 동몽교관에 승진되었다. 선생이 비록 길게 머무는 것을 좋아하지 아니하였으나 저자거리에 있는 것을 끝내 좋아하지 아니하여 드디어 벼슬을 그만두고 집에 돌아가 문을 닫고 글을 읽으며 공을 들여 진실로 훌륭한 말을 저술(著述)함이 날로 더욱 많았다. 주역을 논한 의리의 대략과 사례홀기(四禮)⑤ 허령설(虛靈說)⑥ 이기호발설(理氣互發說)⑦ 삼연(三淵:金昌翕의 號)의 설차변(說箚卞)·잡식내외편(雜識內外篇)과 南塘·도암(陶菴:李縡의 號)·외암(巍巖:李東의 號)과 더불어 왕래한 글에 선생의 학문이 화려하고 찬란하게 문장이 이루어졌으니 후세사람들이 선생의 선생다움을 알려면 슬기로운 사람에게 묻지 아니하여도 자연히 알게 될 것이다. 영조 丙子(1756)년 칠월 십일일에 병들었어도 마음에 잡념이 없이 신성(神聖)·기묘(奇妙)·지각(知覺)등의 말만 남기고 天壽를 다하고 돌아갔으니 고창산(高蒼山) 간좌에 장사지냈다. 부인은 完山李氏 공복(公復)의 따님으로 묘는 합폄하였다. 큰아들 낙현(樂賢)은 사마시에 합격하였고 학문이 세상에 알려졌으며 수직(壽職)으로 동지중추부사였고 다음 아들은 민현(敏賢)이요 큰딸은 현감 이수형(李修亨)에게 출가하고 둘째 딸은 진사 이운형(李運亨)에게 출가하였다. 樂賢이 수(銖)를 낳으니 문과 급제하여 벼슬이 校理요 다음은 화(鉌)요 다음은 뢰(銇)니 진사시에 합격하였고 딸은 윤재순(尹載醇)에게 출가하였다. 敏賢은 익(釴)과 후()를 낳았고 딸은 강운회(姜雲會)에게 출가하였으며 나머지는 기록하지 않는다. 아아 선생은 모습이 맑고 빼어났으며 자상하고 민첩하며 행동거지(行動擧止)가 장중(莊重)하고 엄숙하며 주장하는 의견이 공평하고 과감하며 투철하고 깨끗하여 일을 처리함에는 엄숙하며 주장함이 편벽되지 않으며 義理를 굳게 마음에 새기고 잊지 않았으니 진실로 선생은 선천적으로 깨달았으며 스승의 문하생에 스스로 부합되었다. 부모를 효성을 다하여 섬기고 집안을 다스리는데 은혜와 위엄을 병행(竝行)하였으며 사람을 친절하게 타일러 가르치고 벼슬에 있을 때는 성실하게 일하고 몸을 닦는 것을 한결같이 가례(家禮)를 지켰으며 학문은 아는 일과 행하는 일 두 가지를 진취(進就)시켜 성경(誠敬)으로 근본을 삼고 분명하지 못하여 조치하지 못할 일이 있으면 스승·벗과 더불어 강구하고 자세하게 분석하여 정확을 기하고 의(義)·이(利)·사(邪)·정(正)을 분별하는데 매우 엄하여 권세가 있는 사람이라고 하여 뜻을 굽히지 않고 한 때의 우열(優劣)을 가리지 않으며 성품이 산과 물을 즐겨 더러는 긴 강에 배를 띄우는 일도 있으며 지팡이를 짚고 깊은 산에 올라가는 일도 있었다. 봄 가을로 술을 마시고 글을 읊으며 좋은 분위기로 흥미를 돋구었다. 선생의 사적과 공명을 논한다면 공자·주자·율곡·우암의 도를 이어받아 서술하는 일이고 수암과 남당으로써 정통을 삼아 후학을 가르치는데 있었다. 덕은 보답하지 못하는데 베풀고 은택은 무궁하게 전하니 세도(世道)와 백성에게 공이 없다고는 할 수 없으며 능히 통달하면 천하를 겸하여 잘 다스릴 것이요 곤궁하면 홀로 그 몸을 잘 다스릴 것이다. 선비들이 산앙사(山仰祠)를 지어 위패를 모셨고 아들이 수직을 받음으로써 대사헌에 증직되고 유서(遺書)는 세상이 험난하여 잃어버렸다가 지금 찾았으니 하늘이 유교를 없애려고 하지 아니한 것이리라 후손 상필(相弼)이 나를 찾아와서 문집풀이를 하여달라고 말하고 또 비문 지어줄 것을 부탁하니 본래 선생을 우러러 사모하였기 때문에 굳이 사양할 수 없었다. 그러나 선생의 학문과 의리가 태산같이 높고 하해같이 깊어 그 속에 들어가도 아득하고 멀어 그 대강만을 짐작할 뿐 뜻은 깨달을 수 없다. 이에 그 대강을 추렸고 명을 지으니 명은 다음과 같다. 도(道)의 근원은 하늘에서 나왔으되 오직 성인만이 본받고 성인의 말씀이 책에 기재되었으니 그 누가 계승할 것인가 진실로 천년을 두고 따져보아도 선비를 모아 크게 성공한 사람은 百世토록 우암을 버리고 누구에게 돌아갈 것인가 寒水의 가을 밤 달이 南塘에 비치고 고창산이 아울러 높도다. 근원은 바로 공자와 주자에 통하였네. 행동거지를 마음대로 하였더라도 병이 없었네. 배반하는 무리를 깨끗이 소탕하니 하늘은 깨끗이 개이고 바다에는 물결이 이네. 분석한 의론(義論)은 밤하늘의 기라성(綺羅星)같고 도를 천년토록 전하니 공(功)은 평화를 드리웠네. 백세의 뒤라도 公私間에 아부하지 아니하였네. 단기4311年 戊午 7월 初1일 후학 은진 송공호(恩津 宋貢鎬)가 삼가 지음 주(註) ① 栗谷李珥:德水人 字 叔獻 官 贊成 文衡 諡 文成 ② 우암(尤菴):宋時烈 恩津人 字 英甫 官 左相 諡 文正 ③ 남당(南塘):조선조 영조 때의 학자 한원진(韓元震) ④ 왕패(王覇):德으로 나라를 다스리는 것을 王이라 하고, 힘으로 다스리는 것을 覇라 한다. ⑤ 사례홀기(四禮笏記):冠禮, 婚禮, 喪禮, 祭禮의 홀기(笏記) ⑥ 허령설(虛靈說):明德이 靈妙하다는 설 ⑦ 기기호발설(理氣互發說):性理學의 心性論에서 情에 속하는 사단(四端)과 7情을 각각 理의 발현과 氣의 발현으로 구분하는 퇴계 李滉의 주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