합문지후공묘갈

입구표석

묘갈명

 

유허비

지후공 유허비
소재지:경남 산청군 금서면 특리(덕촌)


소재지: 전북 익산시 함열읍 남당리 산 64-1


二世祖 閤門祗侯公諱淵墓碣
於戱我靑松沈氏我東大姓鼻祖麗朝文林郞衛尉寺丞諱洪孚寔生公公諱淵官閤門祗侯公之生卒行蹟夫人姓貫皆無傳焉公墓實在湖南之咸悅縣而世寢遠莫知所在累世訪求不獲歲乙酉宗人圭遇礪山人金璘於高山相款甚話間璘曰子之先有官閤門祗侯乎圭曰然曰知墓所乎曰不知曰吾先墓在咸悅傍有古墓墓有碣石某官姓某諱某字某字畫甚明可認圭以告諸宗徃詰之璘父應三貳其辭盖應三自其先窃公墓地葬已數世璘特年稚不詳所諱脫口之言若天誘焉後孫叅判檀等乃辨于官村民有觀於金之葬者言應三穿古墓傍得一石如斗大相與窃議恐此石有後端秘藏之人不識其處至是璘黨尤堅諱且毁公墓碣無從可以鉤得不肖孫仲良適守潭州竭誠購問得遇瞷知其事者璘黨果嘗得公誌投於水中矣遂卽告官以 上之四十一年乙未春決水拯奉誌石石長八寸廣四寸許書三行中書閤門祗侯沈某之墓左書屹山下南堂辰坐戌向右書 洪武十年丁巳九月十二日葬字刻宛然無訛璘等遂輸情不敢隱遂悉移其冒葬者檀仲良尙尹尙鼎與京外諸宗改封上下墓皆像馬鬛仍舊制而碣已毁不可得考妣位無徵不敢辨乃立碣間於兩墓瘞舊誌於牲石底嗚呼公之墓兆不幸不傳於家乘灑掃之缺于今二百餘禩遂爲鄕人所侵占剗斵夷毁殆不可識辨曾未有曼父之母之言秦 之卜而乃能得隱情於逆旅造次之間發幽誌於泥沙沈沒之後若有陰相而冥䆃之者此皆公積德累仁不泯於永世終使衣冠之藏 而復顯理之不昧有如是者夫豈藐爾雲仍區區微誠所能致也嗚呼異哉公一男龍吏曹正郞正郞二男長德符左侍中封靑城伯入我 朝辭勳不受次元符靑城七男曰仁鳳都摠制曰義龜判事曰繼年牧使曰澄府尹曰溫領議政靑川府院君曰淙靑原尉曰 都摠制靑川誕生 昭憲王后靑川之後靑陵府院君鋼誕生 仁順王后靑陵之後靑恩府院君浩誕生 端懿王后外派之 母儀一國亦十三后溫生澮爲領議政自靑城連三世秉勻連源通源喜壽悅之源俱登第入相安義益顯爲都尉濬決光彦忠謙諿詻之溟曁我先君梓俱躋正卿澄璿岱銓義謙友勝演澤命世枰檀宅賢俱躋亞卿此外文學忠節之士銀緋臺省之官接武前後不可큁記義謙六世孫壽賢按湖西具牲石之源外孫湖南伯李㙫與咸悅宰崔祥相役誠謹祥亦外裔也畧記事蹟顯之碑陰
十三世孫通政大夫守黃海道觀察使兼巡察使兵馬節度使仲良謹撰
十五世孫通訓大夫行兵曹正郞兼春秋館記注官埈書
崇禎後再庚子 月 日立我 肅宗大王四十六年
尋墓山事實
咸悅山所中間失傳將近二百餘年而爲同邑金姓鄕班所偸葬也京鄕子孫遍尋而不得盖知山所之在南堂而不知南堂之有山也但求於南堂村里以此久未得焉

2세조 합문지후공휘연묘갈(번역문)
아! 우리 청송 심씨(靑松 沈氏)는 우리 동방의 대성(大姓)이다. 비조(鼻祖)인 고려조(高麗朝)의 문림랑위위시승(文林郞衛尉寺丞) 휘(諱) 홍부(洪孚)가 공을 낳으니 공의 휘는 연(淵)으로 벼슬이 합문지후를 지냈다. 공의 생졸(生卒)①과 행적(行蹟)과 부인의 성관(姓貫)②이 모두 전하지 아니했다. 공의 묘는 실은 호남(湖南)의 함열현(咸悅縣)에 있었는데 세월이 오래되어 있는 곳을 알 수 없었다. 여러 대 동안 찾아 다녔지만 찾을 수 없었다. 을유(乙酉:1705)년 종인(宗人)③ 규(圭)가 여산(礪山) 사람 김인(金璘)을 고산(高山)에서 만나 서로 매우 정이 깊었다.
이야기를 하는 사이에 인(璘)이 말하기를
『그대의 조상의 벼슬에 합문지후가 있는가?』
규(圭)가 말하기를
『그러하다.』
다시 인이 말하기를
『묘소(墓所)를 알고 있는가?』
규가 말하기를
『알지 못한다.』
인이 말하기를
『나의 선대의 묘소가 함열에 있는데 그 옆에 고묘(古墓)가 있고 묘에는 갈석(碣石)이 있어 벼슬이 무엇이며, 성은 무엇이며, 휘는 무엇이며, 자는 무엇이라고 쓴 자획이 매우 분명하므로 알아 볼 수 있다.』
규(圭)가 모든 종친(宗親)들에게 고하여 가서 찾아보니 인(璘)의 아비 응삼(應三)이 그 말을 다르게 했다. 대개 응삼이 스스로 그 조상이 공의 묘소를 절취하여 이장한 지 이미 수세(數世)가 되었으나 인이 특히 나이 어려서 숨기는 일에 능하지 못해 입에서 잘못 나온 말인데 마치 하늘이 이끌어 준 것과 같았다. 후손인 참판(叅判)으로 있는 단(檀) 등이 관청에 알려서 조사하게 하였으니 촌민(村民) 가운데 김가의 장사지내는 것을 본 사람이 있어 말하기를 응삼(應三)이 고묘를 파자 그 옆에 있던 돌이 나왔는데 크기가 말만하였다.
서로 더불어 가만히 상의하기를 「이 돌은 후단(後端)④이 있을까 두려우니 비장(秘藏)⑤하여서 사람들이 그 곳을 알지 못하게 하자.」라고 하였다 하니 이 때 와서 인의 무리가 더욱 굳게 숨기고 또한 공의 묘갈을 훼손하여 버려서 어디서도 찾을 수 없게 하였다.
불초손(不肖孫) 중량(仲良)이 그 때 담주군수(潭州郡守)로 있었는데 정성을 다해 구문(購問)⑥하는 가운데 그 일을 간지(瞷知)⑦한 사람을 만나서 들어보니 인의 무리가 과연 일찍이 공의 지석(誌石)을 찾아서 물 가운데 빠뜨린 사실을 알아냈다. 바로 관에 고하여 금상(숙종) 41년 을미(乙未:1715)년 봄에 물을 따라내고 지석을 건져 모시니 돌의 길이는 팔촌(8寸)이요, 넓이는 사촌(4寸)쯤 되는데 글씨가 세줄로 쓰여 있었다.
중간에 「합문지후 심모(沈某)의 묘」라 쓰여 있고 좌측에 흘산(屹山) 아래 남당(南堂)으로 진좌술향(辰坐戌向)이라 쓰여 있으며 오른쪽에 홍무십년(洪武十年:1377) 정사구월십이일(丁巳9月12日) 장사 지냈다고 쓰여 있어 자각(字刻)⑧이 완연(宛然)하여 속일 수가 없었다.
인등(璘等)이 드디어 사실을 자백하고 감히 숨기지 못했다. 이리하여 그 모장(冒葬)⑨한 것을 옮기게 한 사람은 단(檀)과 중량(仲良)과 상윤(尙尹)과 상정(尙鼎)인데 서울밖에 있는 모든 종친들과 더불어 상하의 묘를 개봉(改封)하고 모든 마렵(馬쫖)⑩의 상(像)을 옛 그대로 하였으나 갈명(碣銘)은 이미 훼손되어 찾을 수가 없어 고위(考位)와 비위(쯼位)를 증명할 수가 없었다. 하는 수 없이 묘갈을 두 묘 사이에 세우고 옛 지석을 생석(牲石)⑪ 밑에 묻어 두었다.
아! 공의 묘에 대한 사연이 불행하게도 가승(家乘)에 전해지지 아니해서 새소(灑掃)의 예를 빠뜨린지 지금까지 이백여 년이나 되니 드디어 마을 사람들에게 침점(侵占)⑫되고, 잔착(剗斲)⑬되고, 이훼(夷毁)⑭되어 거의 식변(識辨)할 수 없게 되었으나 일찍이 아버지와 어머니의 말씀을 멀리하지 아니하여 진짐(秦誗)⑮의 점에 숨겨진 사실을 역려(逆旅)⑯에서 밝혀내고 조차(造次)⑰ 사이에 유지(幽誌)⑱가 진흙 속에 침몰된 뒤에 찾아낸 것을 음상(陰相)⑲이 있어 가만히 인도해 준 것과 같으니 이것은 모두 공의 적덕루인(積德累仁)⑳함이 영원히 세상에서 없어지지 아니하고 마침내 의관(衣冠)이 장비(藏閟)(21)된 곳에서 다시 나타나게 하니 이치의 밝음이 이와 같은 것이지 어찌 막연하게 자손들의 작은 정성으로 이루어진 것이라 하겠는가.
아! 기이하구나 공의 외아들 용(龍)은 이조정랑(吏曹正郞)이었고, 정랑은 두 아들이 있는데 맏은 덕부(德符)로 좌시중(左侍中)을 지내고 청성백(靑城伯)에 봉해졌으며 아조(我朝)에 들어와서 공훈을 사양하고 받지 아니했고, 둘째는 원부(元符)다.
청성백에게는 칠남(七男)이 있는데 인봉(仁鳳)은 도총제(都摠制)요, 의구(義龜)는 판사(判事)요, 계년(繼年)은 목사(牧使)요, 징(澄)은 부윤(府尹)이요, 온(溫)은 영의정청천부원군(領議政靑川府院君)이요, 종(淙)은 청원위(靑原尉)요, 정(泟)은 동지총제(同知摠制)이다. 청천부원군은 소헌왕후(昭憲王后)를 탄생하였고, 청천의 후손에는 청릉부원군(靑陵府院君) 강(綱)이 인순왕후(仁順王后)를 탄생했으며, 청릉의 후손인 청은부원군(靑恩府院君) 호(浩)는 단의왕후(端懿王后)를 탄생하였다.
외파(外派)의 모의(母儀)(22)도 일국에서 십삼후(13后)가 나왔다. 온(溫)은 회(澮)를 낳았는데 영의정이 되었고, 청성(靑城)으로부터 삼세를 이어서 병균(秉勻)(23)하였다. 연원(連源)과 통원(通源)과 희수(喜壽)와 열(悅)과 지원(之源)은 모두 등제(登第)하여 입상(入相)했고 안의(安義)와 익현(益顯)은 도위(都尉)가 되었으며 준(濬)과 결(決), 광언(光彦)과 충겸(忠謙)과 즙(諿)과 액(詻)과 지명(之溟)에서 나의 선군(先君) 재(梓)에 이르도록 모두 정경(正卿)(24)을 지냈다. 징(澄)과 선(璿)과 대(岱)와 전(銓), 의겸(義謙)과 우승(友勝), 연(演)과 택(澤), 명세(命世)와 평(枰), 단(檀)과 택현(宅賢)은 모두 아경(亞卿)(25)을 지냈다.
이 밖에도 문학과 충절의 선비와 은비(銀緋)(26)와 대성(臺省)의 관원이 앞뒤로 이어졌으므로 다 기록할 수가 없다. 의겸(義謙)의 6세손 수현(壽賢)이 호서(湖西)의 안찰사(按察使)가 되어 생석(牲石)을 구비하였고 지원(之源)의 외손인 호남백(湖南伯) 이집과 함열재(咸悅宰) 최상(崔祥)이 서로 역사에 정성을 다하였는데 최상도 또한 외손이다. 대략 사적(事蹟)을 기록하여 비음(碑陰)에 표시한다.
13세손 통정대부 황해도 관찰사 겸 순찰사 병마절도사로 중량(仲良)이 짓고, 15세손 통훈대부 병조정랑 겸 춘추관기주관 준(埈)이 썼으며, 숭정후(崇禎後) 재경자(再庚子)에 세우니 즉, 우리 숙종대왕 46년(1720)이다. 묘산(墓山)을 찾은 사실.
함열(咸悅)의 산소(山所)는 중간에 실전(失傳)하여 이백여 년이 가깝도록 지나갔는데 같은 고을에 사는 김가성을 가진 향반(鄕班)이 투장(偸葬)한 때문이다. 경향(京鄕)의 자손들이 두루 찾아 다녀도 찾지 못했는데 그것은 산소가 남당(南堂)에 있다는 것은 알았지만 남당이 산이라는 것을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 다만 남당이란 촌과 리(里)를 찾았기 때문에 오래도록 얻지 못한 것이다.

註① 생졸(生卒):태어나고 죽음. 즉, 생년과 졸년.
② 성관(姓貫):성(姓)씨와 관향(貫鄕).
③ 종인(宗人):일가친척. 즉, 종친(宗親).
④ 후단(後端):잘못을 저질러서 숨기려고 했는데 그것을 밝힐 후일의 단서(端緖).
⑤ 비장(秘藏):비밀스럽게 감추어 둠.
⑥ 구문(購間):돈을 쓰면서 비밀을 캐고 다님.
⑦ 간지(瞷知):남의 은밀스러운 일을 탐지하여 알아내는 일.
⑧ 자각(字刻):글자를 돌에 새긴 형태 또는 모양.
⑨ 모장(冒葬):남의 묘 위에 몰래 장사 지냄.
⑩ 마렵(馬鬣):마렵봉(馬鬣封). 말의 목덜미 같은 무덤의 형태.
⑪ 생석(牲石):묘비.
⑫ 침점(侵占):침탈(侵奪)과 점거(占據). 즉, 빼앗김.
⑬ 잔착(剗斲):깎이고 갈림. 무너져서 형체도 잘 보이지 않음.
⑭ 이훼(夷毁):심하게 훼손됨.
⑮ 진짐(秦誗):남을 해하기 위해 감언이설로 속임.
⑯ 역려(逆旅):여관(旅館) 또는 객사(客舍).
⑰ 조차(造次):별안간. 눈 깜작할 사이 또는 창졸간.
⑱ 유지(幽誌):숨겨진 지석(誌石).
⑲ 음상(陰相):은밀한 도움.
⑳ 적덕루인(積德累仁):덕을 많이 쌓고 어진 일을 많이 함.
(21)장비(藏閟):문안에 감추어 놓듯 세상에 나타나지 아니한 일.
(22)모의(母儀):국모의 의도(儀度). 즉 국모.
(23)병균(秉勻):정권을 잡음. 즉 정승이 됨.
(24)정경(正卿):판서(判書).
(25)아경(亞卿):참판(콷判).
(26)은비(銀緋):은빛 비단. 고급관리의 옷. 즉 고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