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산상공(휘 수현)사적 |
지산상공 휘 수현 묘소 묘 표 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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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재지: 경기도 파주시 광탄면 우랑동 |
議政府領議政止山相公諱壽賢事蹟
1663(현종 4)~1736(영조 12).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청송(靑松). 자는 기숙(耆叔), 호는 지산(止山). 약한(若漢)의 손자이고, 응교(應敎) 유(濡)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동지중추부사 조석윤(趙錫胤)의 딸이다. 1704년(숙종 30) 춘당대문과에 병과로 급제하고, 이어 1706년 설서(說書)가 되었다. 같은해 지평을 거쳐 이태좌(李台佐) 등 16인과 함께 홍문록에 올랐다. 이듬해 수찬을 역임한 뒤 부수찬이 되었다. 그뒤 1708년 강원도 암행어사로 파견되어 통천군수 이정영(李挺英), 철원부사 이원명(李元命), 양양부사 성석기(成碩夔), 회양부사 남택하(南宅夏) 등을 징계하고, 영월부사 박중규(朴重圭), 울진현령 김세형(金世衡), 낭천현감 김현(金晛), 평창군수 이영(李瀅), 흡곡현령 신후재(申厚載) 등에게는 표상을 내리게 하였다. 이듬해에는 부교리가 되고 이어 지평을 거쳐 다시 부교리가 되었는데, 이해 평안도 강변의 七읍에서 무재(武才)를 뽑을 때 어사로 파견되어 이를 감독하였다. 곧 돌아와 헌납이 되고 이듬해는 의주부윤으로 나아갔다. 1714년에 다시 양양부사로 나아갔는데, 이때 선정을 베푼 것이 암행어사에 의해 밝혀져 포상받았으며 이 공으로 충청도관찰사에 승진되었다. 1716년 중앙으로 돌아와 승지가 되고 이어 형조참의가 되었다. 1719년에는 경상좌도균전사가 되어 도내의 양전에 따른 불균형으로 백성들의 불만이 심하다는 소를 올려 종전에 실시되었던 양전을 그대로 실행할 것을 관철시켰다. 1720년 다시 승지가 되고, 이듬해는 강화유수로 나아갔다가 중앙으로 돌아와 대사헌을 거쳐, 이조참판을 역임하였다. 1722년(경종 2)에는 공조판서로 승진되고, 1724년에는 병조판서가 되었다. 이어 판의금부사로 숭록대부에 가자되었다. 이듬해 지중추부사를 거쳐, 1727년 병조판서를 역임하였다. 같은해 지경연사·판의금부사를 역임한 뒤 우의정이 되어 진주사(陳奏使)로 청나라에 다녀왔다. 다음해 사신으로 청나라에서 돌아와 양사로부터 국가를 욕되게 하였다는 탄핵을 받고 문외출송되었다. 그런데 양사에서는 문외출송만으로는 처벌이 경미하다 하여 부사와 서장관과 같이 절도로 귀양보낼 것을 청하였으나 왕의 비호로 문외출송에 그쳤다. 얼마 뒤에 다시 우의정으로 복직되었으며, 1733년(영조 9)에는 영의정이 되었고, 이듬해 노병을 칭하여 사직을 청하였으나 허락되지 않았다. 그뒤 1736년에 판중추부사로 있다가 죽었다. 어려운 시기에도 정세에 휩쓸리지 않고, 노환이 심한데도 판단력이 정확하여 영상으로서의 구실을 훌륭히 해내었다고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