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혜공 (휘 연원)

충혜공 연원 휘 양위 묘소
소재지: 경기도 김포시 통진면 옹정리

묘 표 석


충혜공 배위 묘표석

충혜공 신도비(유형문화재 제146호)


 

충혜공 비각(유형문화재 제146호)


소재지: 경기도 김포시 통진면 옹정리


領議政靑川府院君忠惠公諱連源神道碑銘竝書
國朝卿相越自高麗勳德名家以至于今彌遠彌昌者指不多屈至於蟬聯蟬赫有非他姓所可垺感則吾於靑松沈系見之矣有遠祖諱龍顯于麗代贈門下侍中至諱德符趾美侍中封靑城伯入我 朝爲左政丞襲封舊號諱溫領議政府事諡安孝篤生 昭憲王后諱澮繼長政府策翊戴佐理勳封靑松府院君諡恭肅諱湲官至內資寺判官贈議政府左贊成諱順門官至議政府舍人贈領議政聘司憲府監察申永錫之門贊成以下用公貴推恩監察鼻祖崇謙爲麗祖統合元功二姓媲德寔毓四鳳公序最長諱連源字孟容自在髫齕端重穎出逈異凡兒逮遘家禍遂失所怙頼母夫人提曉義方志學不懈舅氏署令申援固奇士器公之爲大加誘進及長質業於慕齋金公益加講明時慕齋量定籍田于陪都公樂於從師竟歲不返才識大進聲聞藹鬱丙子中生員選首入泮宮三舍莫不敬慕願交公愈謙下自晦于時士習趍競成風公旣以爲過中及其敗黜亦不加訾壬午釋褐初屬承文院權知未旣遷入藝文館爲檢閱序陞待敎奉敎以事左叙副司正踰年復授奉敎陞司憲府監察遷工曹佐郞改禮曹移侍講院司書吏曹佐郞尋擢重試坐事見罷旋授典籍陞吏曹正郞俄丁外憂廬墓三年服闋授禮曹正郞時 仁廟在儲宮僚極一時之望公亦選帶文學雖轉夏官兼帶不改竟授本院文學陞軍器僉正遂入政府爲檢詳復陞舍人會外舅金公拜贊成以親嫌移司僕僉正嶺南大侵餓莩相望公受命賑救首講便策不加威怒事克辨集適所至顚連尤甚公不俟朝報發倉均哺一道得以全活及竣回轉副正尋陞軍器寺正時用事者以好惡升黜人物公獨介立不屈嘗在銓曹時所好者不一追薦坐誣斥者力加辨釋會濟州牧使有缺薦公陞秩以行其實排擠公怡然不設難色及過海風浪掀簸舟人莫不危慄公據胡床如在齋閣至州撫禦之外兼督農政四境大熟又能不鄙遠俗躬率以禮朔望拜闕之儀春秋釋菜之奠未嘗告替大修黌舍榟刊四書古文眞寶等書課習蒙士民多嚮學至有請入國學者任滿內授禮曹叅議移成均館大司成吏曹叅議承政院同副承旨以事罷俄授僉樞己亥春充進香使朝京師遷敦寧都正仍歷戶刑吏三曹叅議轉司諫院大司諫復爲兵曹叅議未幾進秩嘉善出按慶尙公以勸學乃風化之本力奬儒伸又勤於剸決務祛積滯竟以是告病遞授上護軍拜工曹叅判司憲府大司憲復爲大司成居數年訓誘之功終始不倦育材之效比前煩多遷刑曹叅判兼帶副摠管又遷同知中樞兼帶義禁同知乙巳由戶曹叅判超陛資憲拜戶曹判書叅鞫獄事盡得其情以正刑書又加正憲時中仁兩廟繼涉吊冊之使前後四起支調大詘公審度用費使公私兩濟人皆稱便公觧華語衣冠趍履亦倣華制張行人承憲還道黃州公受餞慰之命酬對之際不假古人語皆條暢行人嘆服用是常滯司譯院提調以病觧劇授知中樞拜議政府左叅贊兼知經筵都摠管改禮曹判書又帶同知春秋擢拜右贊成仍轉爲左復錄乙巳叅鞫功特賜推誠定難衛社功臣之號封靑川君戊申冬用爰立之命拜議政府右議政進封靑川府院君己酉秋陞左議政庚戌命復立兩宗公以異端之興大屢聖治率百官廷爭不得時公論不無異同公獨力恃堅懇至於累旬雖不廻天朝野韙之冬辭病不允辛亥秋陞領議政癸丑秋景福宮大內災上下警遑 上命公摠任繕葺公務以不廢舊貫不侈後觀戒督公程時僅再閱功乃告訖 上嘉悅賞賚之典實從異等蓋此宮開創之始靑城伯實摠成之功又以首相復收重新之功祖孫管工勞勩茂著人皆異之乙卯冬以病再辭丁巳又至四辭語雖益懇竟不允公雖以辭病爲名實擢盛滿秋冊封春宮又監其公儀物之制務極講究以別等衰人皆服其得軆特賜鞍馬以嘉之時勑使將至公已嬰疾知難供職上狀乞觧再三瀝懇 上諭以在平日不宜輕許今則勅使所視不可使相臣有缺故勉從所請左議政尙震啓曰宿德元老其去留足爲朝廷輕重請仍任待瘳 上遣史官諭公曰昨遞遞職予不獲已今左右相同辭啓留是乃公議卿其仍任調治公每以久病保位爲貪戀故釋位則若沈病去軆冀朝夕可追及聞仍任病勢頓劇不復上辭乃具疏極陳乞骸之情 上御筆答曰頃日許卿辭退是予之失左相之啓亦是衆情玆不允所請公又祈觧不已遂條上六事勤學從諫親賢遠侫恤民愼常語甚諄切 上以書下政院曰任老成雖切於爲國許頤養亦重於保臣其諭于左右相兩相知公乞觧之切啓曰某 先朝舊臣非無故欲退曠職經時故欲釋重任耳臣等前日請仍豈料其至今彌留乎今雖許辭待痊復用亦有故事且其辭病之疏條上嘉言不忘進戒願上優納且特降敎書以答其意 答曰勉副其願觧授領樞答疏敎書亦可制諭初公欲進疏具草子弟以勞傷諫止公答曰吾雖病不入侍未嘗一日忘 君一朝奄忽雖欲效其微誠得乎我曾覩大臣病劇遣官問疾兼訪後事則只稱 上恩至重然一言及於時政豈病不可爲欲言而不得歟吾所惓惓不已者欲及心神未亂庶盡平昔之抱也公病後以不仕受祿於義未安故戒家人勿受至是兩相請令有司具送其第 上自聞公病革遣內醫御藥鎭留治療又別遣官顯良醫候視日三書啓乃命左承旨沈慶慶問疾又遣中使賜御札曰觀卿六條陳戒可見愛君憂國之誠予甚嘉焉然卿累朔在告未安故爲保安計勉副情願又賜薄物東宮亦再遣輔德問疾 上尋遣右承旨鄭宗榮問所欲言公令加服伸書啓曰臣之所懷前於六條已盡之矣但願政事之際存心忠厚務從寬大使人心固結國祚靈長上復遣注書答慰公祗謝如初及夜遂卒 上震悼命有司 喪輟視朝三日四殿亦進素膳 坤殿擧哀以禮爲製祭文遣中使別祭皆近世未有之異數也公生于弘治辛亥十月十九日卒于嘉靖戊午六月十九日春秋六十有八太常易名曰忠惠事君盡節曰忠寬裕慈仁曰惠是年八月十二日禮窆于通津某山先塋下坐艮向坤之原用治命也公性雅靜詳愼行己接物簡約平怒濟之以剛柔平居人樂其寬和遇事人畏其勁正故皆不敢于以私宿尙儉素聲色之娛奢靡之習痛加屛絶雖貴顯已極罕見候謁車馬之鬧淸約一如未貴之時燕坐一室未嘗去書不觀言笑又寡不許女侍近前居常樂善愛士必欲奬與培植故士論倚以爲重其爲文辭典實瞻敏每遇諮議務以約言取裁不喜辭費入侍講章必究理道引兪時宜人始知其長於文而深於學也公自少恬默不喜趍營自辛卯以後國是靡定朝廷人物追退不常而毁譽未嘗及公故自號曰保庵蓋亦寓意也公當官雖不憚勞務盡其職至於權要之地輒避不居近來兩銓缺長則必謀諸台鼎然後乃定有來咨禀公輙艴然曰自當擇可注擬吾何敢言雖固請終不言先是士林間假論推引朋附漸廣識者憂其害政公於經幄婉辭開陳摘尤貶斥俾不返秋人情乃安公深痛先考非命哀傷之念恒棘于中平生未嘗過東市之街又不與人歡謔宴會之所每當直忌之月自朔初素食以至諱日祭必號哭以洩罔極或夢接儀容垂泣終日朔望必躬廟奠雖値初度亦不喜聲樂之壽雅篤友愛嘗在海外聞仲弟之訃悼惋倍劇髮爲衰白撫其遺孤無異已出諸弟有疾躬視醫藥不廢晨夕宗族有窮寡死亡者必加賙給子姪羣集廚供常不下十餘人公每以盛滿爲戒敎子弟必以謙謹爲先故名諸孫俱以謙字命之公久爲首相主張廟謨心無適莫動必主善衆論競陳委已從是略無吝色議所難斷能以一言折衷聞者莫不帖服公於事必深究强記 中朝彊域我國封界瞭然如目擊身履人或問質辨答無碍耽羅山川險夷要害靡不圖寫作爲一軸乙卯倭奴寇擾南邊多陷城鎭耽羅尤當衝要公按圖策應如指諸掌人皆服某先見公自初屬疾未嘗語及家事及其危篤兩相來省公便引接與訣從容酬若宛如平昔臨絶精爽不亂與子弟談話不已夜艾子弟知不救悉屛婦人易簣東首乃翛然而逝嗚呼如公得正而終世豈多見哉公娶左贊成金公璫之女賢而克相凡生一男三女男曰鋼卽國舅領敦寧府事靑陵府院君嘗中癸卯司馬女長適主簿李元賓夫妻皆先公歿次適典籤尹健次適右侍直李仁健靑陵娶縣令李薱之女生二女八男女長卽今 坤宮男長曰仁謙中戊午司馬次曰義謙中乙卯司馬次曰禮謙次曰智謙次曰信謙次曰忠謙次曰孝謙次曰悌謙主簿生一男曰韶繕工監役典籤生三男二女男長曰起禎次曰起祥餘皆幼仁謙娶佐郞李拔之女義謙娶都事韓興緖之女生一女禮謙娶郡守鄭潚之女生一女智謙 事李霽之女生一男信謙娶叅奉鄭麟壽之女忠謙娶宗室岏之女李女適叅判任說之子榮老生一女旣襄事靑陵推世分使來屬銘士龍自惟受知於公最深又同年紀誼不敢辭第公之德業表著人耳目者所不暇掎摭得於覩記者亦不爲少而文謬思躓不能揄揚只据公季冬卿沈公通源狀爲之銘銘曰
生材係運興替攸配晋實用楚足以無對麗季多壘授鉞靑城迪我 聖祖救禍黎氓槐棘佐新疏封泝源沙麓效祥作柏配尊繼繼復始數丁于公稷下媚學有聞卽隆摘髭策名遍歷升揚內贊外庸望孚廟廊三事告猷百度仰成人莫敢扳物莫敢攖持約勝煩用靜鎭劇旣勤匡毗又罄謀畫調維之力上下交頼舍見用衆於道爲最位踐上台緖屬中壼處之大耐造請寔遠宜受謙益友戾必壽奕世傳載可並不朽螭首屹左我最公德百世在後過者其式
湖陰 鄭士龍 撰

영의정청천부원군충혜공휘연원신도비명병서(번역문)

심연원 신도비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46호
소재지:경기도 김포시 통진면 옹정리 산14-2

 
조선 명종 때 영의정을 지냈던 보암 심연원(保庵 沈連源, 1491∼1558)의 신도비이다. 신도비는 종2품 이상의 신하나 훌륭한 학자에게 허용되었던 것으로 무덤의 남쪽 가까이에 세웠다. 심연원은 영의정을 지낸 심회의 증손자이며, 사인 심순문의 아들이다. 김안국(金安國)의 문인으로 과거에 합격한 뒤, 승문원권지정자(承文院權知正字)를 거쳐 예문관에 들어가 검열직에 있었다. 제주도에 탐라부사로 있을 적에 지도를 잘 그려두어 이후 해적 침입을 격퇴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이후 의주부사, 예조참판을 거치며 진향사(進香使)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와 대사간, 대사성, 한성부윤, 호조참판을 역임하였다. 이후 감춘추관사(監春秋館事)로 「인종실록」편찬에 참여하였다. 우의정, 좌의정을 거쳐 1551년에는 영의정에 올랐다. 세상을 떠난 후에는 명종 묘정에 배향되었으며, 시호는 충혜(忠惠)이다. 심연원 신도비는 묘역에서 산 아래쪽으로 약 80m 떨어진 곳에 있다. 신도비의 모양을 보면 2단에 지대석 위에 거북이 모양의 귀부가 있고 귀부 위에는 대리석의 비몸이 있다. 비몸위에는 용모양의 이수가 있다. 비문은 정사룡(鄭士龍)이 쓰고, 송인(宋寅)이 글씨를 썼으며 심연원의 조카 심전이 전액을 썼다. 비문에는 심연원 선조들의 약력과 심연원의 약력이 새겨져 있다.

본국 조정의 대신으로 멀리 고려로부터 훈업과 덕망의 명가로서 오늘날까지 이어와서 원대하고 크게 번창한 집안은 손가락을 많이 꼽을 수 없으니 연이어 혁혁하여 타문에서는 따를 수 없도록 융성함은 우리 청송 심씨 계통에서만 볼 수 있다. 먼 조상에 이름 용(龍)이란 분이 있었는데 고려 때에 현달하여 증직이 문하시중(門下侍中)이고 이름 덕부(德符)에 이르러서 시중으로서 훌륭하여 청성백(靑城伯)에 봉하였고 조선조에 들어와서 좌정승(左政丞)이 되어 구호(舊號)를 승습하였다. 이름 온(溫)은 영의정부사로서 시호가 안효공(安孝公)이며 소헌왕후(昭憲王后)을 낳으셨다. 이름 회(澮)는 이어 정부의 으뜸 관작으로 익대좌리공신(翊戴佐理功臣)이며 청송부원군(靑松府院君)에 봉하여 시호가 공숙공(恭肅公)이다. 이름 원(湲)은 벼슬이 내자시판관(內資寺判官)인데 증직이 의정부 좌찬성(議政府 左贊成)이고 이름 순문(順門)은 벼슬이 의정부 사인(舍人)인데 증직이 영의정(領議政)이고 사헌부 감찰(司憲府 監察) 신영석(申永錫)의 집에 장가들었다. 찬성 이하의 증직은 공의 직위가 높아 추은(推恩)①된 것이며 감찰은 시조가 숭겸(崇謙)인데 고려 태조가 삼국을 통합할 때 으뜸공을 세웠다. 두 성씨가 덕스러운 배필로서 봉 같은 네 아들을 길렀으니 공의 서열은 장남이며 이름은 연원(連源)이고 자는 맹용(孟容)이다.
이를 갈 나이부터 단중(端重)하고 영출하여 여느 아이들보다 뛰어났으나 가화(家禍)를 만나 아버지를 여의고 어머니에 의해 옳은 방도를 배웠으며 뜻하는 학문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외숙부인 서령(署令) 신원(申援)이 진실로 특이한 그릇으로 알고 공의 큰 인물됨을 더욱 촉진시켰다. 거의 자라서 모재 김공(慕齋 金公:김안국)에게 수업하여 더욱 밝게 강구(講究)하였다. 이 때 모재께서 배도(陪都)②에서 적전(籍田)③을 측량하고 설정하는데 공이 스승을 따라 다니며 해가 바뀌어도 돌아오지 않으니 재예와 식견이 크게 늘어서 풍성한 소문이 들렸다. 병자(丙子:1516)년에 생원시(生員試)에 합격하고 으뜸으로 뽑혀 성균관에 들어가니 삼사(三司)④에서 경모하고 사귀고자 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공은 더욱 겸손하여 스스로 낮추어서 학사들과 독습하였으나 극성스러운 풍습을 맞아 공이 이미 허물을 쓰고 밀려나게 되었으나 또한 비방하지 않았다.
임오(壬午:1522)년에 처음 관복을 입고 승문원(承文院)에 권지(權知)⑤로 배속되었다가 오래지 않아 예문관 검열(藝文館 檢閱)로 옮기고 차례대로 대교(待敎)와 봉교(奉敎)로 올랐으나 사건으로 인하여 부사정(副司正)으로 좌천되었다가 이듬해에 다시 봉교로 환원했고 사헌부 감찰로 승직한 다음 공조좌랑(工曹佐郞)으로 옮기고 예조좌랑으로 바뀌었다가 시강원 사서(侍講院 司書)를 거쳐 이조좌랑이 되었다.
얼마 뒤 중시(重試)⑥에서 장원하였는데 사건에 연좌되어 파직당했다가 다시 전적(典籍)이 되고 이조좌랑으로 승급한 뒤 얼마 안 되어 어머니상을 당하여 여묘(廬墓)⑦ 3년을 치르고 복이 끝난 뒤 예조좌랑이 되었다. 이 때 인종께서 동궁으로 있을 때라 한 때 궁료(宮僚)를 선망했었는데 마침 공께서 문학(文學)으로 뽑혀서 예조정랑과 겸직하게 되었으나 부득이 시강원 문학으로 있다가 군기시 첨정(軍器寺僉正)으로 승급되고 드디어 의정부 검상(檢詳)으로 들어갔다가 다시 승급하여 사인(舍人)이 되었는데 때마침 장인이신 김공께서 찬성(贊成)을 배수하였으므로 이를 꺼려서 사복시 첨정(司僕寺 僉正)으로 옮겼다.
영남에 큰 흉년이 들어서 굶주리는 자가 너무 많았으므로 공이 구휼하는 명을 받았는데 먼저 편리한 계책을 강구하고 잘 타일러서 사리를 능히 분별하였다. 이재민을 알맞는 곳에 집결시켰으나 사정이 지나치게 곤란하여 공이 조정에 보고할 겨를도 없이 곧바로 창고를 열고 골고루 먹이고 도민이 온전하게 살아났다. 일을 다 마치고 돌아오자 부정(副正)으로 전근되고 얼마 안 되어 군기시정(正)으로 승진되었다.
이 때 관리관이 자기 기분대로 기준없이 진급도 시키고 쓸만한 인물을 내치기도 하여 공이 홀로 굽히지 않고 정당하게 맞섰다. 일찍이 이조(吏曹)에 있을 때는 좋아하는 사람들이 한 둘이 아니고 추천할 계제에는 무고로 인해 밀린 자들이 힘껏 변명해 왔다. 마침 제주목사(濟州牧使)가 결원이 생겨 공이 천거에 의해 승진 발령되어 떠나게 되었으나 내용인즉 배제를 당한 것이다. 공은 아무렇지 않게 난색도 짓지 않았고 바다를 건널 때 풍랑으로 인해 배가 키질하듯 흔들려서 뱃사람들이 떨고 두려워하지 않는 이가 없었으나 공은 의젓하게 의자에 기대어 여느 집에 있을 때와 같았다. 제주에 부임하여 주민들을 어루만져 기르고 불법을 막는 외에 농정을 겸해서 독려하니 도내 전체가 풍성해졌다. 또한 해도의 지방 풍속을 업신 여기지 않고 몸소 예절을 가르치고 크게 글방을 수축하여 《사서(司書)》와 《고문진보(古文眞寶)》 등을 간행하여 모르는 사람들을 과습시키니 백성들 가운데 공부하고자 하는 자가 많아졌고 국학에 뽑아 넣은 자도 있었다.
임기가 만료되어 내직으로 예조참의(禮曹叅議)에 제수(除授)⑧되었다가 성균관 대사성(成均館 大司成)으로 옮기고 이조참의와 승정원 동부승지(承政院 同副承旨)에 이르러 사건으로 인해 사표를 냈으나 곧이어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가 되었다. 기해(己亥:1539)년 봄에 진향사(進香使)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왔고 돈녕부 도정(敦寧府 都正)이 되었다가 호조 형조 이조의 3조 참의를 거쳐 사간원 대사간(司諫院 大司諫)이 되었으며 다시 병조참의를 맡은 뒤 품계가 가선대부(嘉善大夫)에 오르고 경상도 안찰사(按察使)가 되었다.
공이 근학(勤學)으로써 풍화(風化)의 근본을 삼고 힘써 유학을 장려하며 또한 꼭 해야 할 일은 부지런히 끝내고 누적된 일을 거두어 처리하니 마침 이로써 병이 되어 상호군(上護軍)으로 교체되었다가 공조참판(工曹叅判)에 오르고 사헌부 대사헌(司憲府 大司憲)이 되었다가 다시 대사성이 되었다. 수년 동안에 훈유(訓誘)하는 공력을 끝내 게을리하지 않고 인재를 양성하는 효험이 종전보다 훨씬 많았다. 형조참판으로 옮겨 부총관(副摠管)을 겸대했고 다시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에 의금부 동지(義禁府 同知)를 겸했다.
을사(乙巳:1545)년에 호조참판을 거쳐 자헌대부(資憲大夫)로 뛰어오르고 호조판서(戶曹判書)가 되어 국옥(鞠獄)⑨에 참여했고 사건마다 그 정상을 확실히 파악하여 형사사건을 바로 잡았다. 다시 정헌대부(正憲大夫)에 올랐는데 이 때 중종과 인종께서 이어 국상(國喪)이 나고 새로운 임금께서 즉위하는 절차가 전후 네 번이 일어나고 국비 조달이 크게 줄었다. 공이 정도에 맞춰 알맞게 쓰고 국리민복으로 이끌었으니 사람들이 모두들 편리했다고 하였다.
공이 중국어를 해득하여 의관복식을 중국제도에 따르고 장행인 승헌(張行人 承憲)이 황주(黃州)에서 돌아왔을 때 공이 돈을 주고 위로했고 그와 수작하는 명을 받았을 때 통역을 쓰지 않고 유창하게 대화하니 행인이 탄복했다. 이 때문에 항상 사역원의 제조(提調)를 겸대했으나 병으로 그만두고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에 의정부 좌참찬(左叅贊)과 지경연 도총관(知經筵 都摠管)을 겸했다. 다시 예조판서에 춘추관 동지사(春秋館 同知事)를 겸하였고 우찬성(右贊成)으로 발탁되었다가 좌찬성으로 전직했다.
을사(乙巳)년 국옥에 참여한 공으로 특별히 추성정난위사공신(推誠定難衛社功臣)의 호를 하사받고 청천군(靑川君)에 봉해졌다. 무신(戊申:1548)년 겨울에 개각(改閣)의 명령으로 의정부 우의정(議政府 右議政)이 되고 나아가 청천부원군(靑川府院君)에 봉해졌으며 다음해 가을에 좌의정으로 승진되었다.
경술(庚戌:1550)년에 다시 양종(兩宗)⑩을 세우라는 명이 내리자 공께서 이는 이단(異端)⑪의 일로서 어진 정사에 누가 된다고 백관을 거느리고 논쟁이 있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공론이 통일되지 못하여 공이 홀로 버티고 수십 일을 간절히 만류하였으나 관철하지 못하고 조야(朝野)에서도 불필요하다고 했다. 겨울에 병들었다며 사직했으나 윤허받지 못하고 신해(辛亥:1551)년 가을에 영의정에 올랐다.
2년 뒤인 계축(癸丑:1553)년 가을에 경복궁 안에서 큰 불이 나서 상하가 놀라고 당황하였다. 상감이 공에게 총임을 맡겨 복구하도록 하니 공이 힘써 옛 관습을 폐하지 않고 뒷사람에게도 사치스럽지 않게 감독하였다. 공정이 근 2년이나 걸려서 완공됨을 보고하니 왕이 기뻐하시며 포상을 후하게 하시니 실로 특이한 일이었다. 본래 이 궁궐을 처음 개창(開創)할 때 청성백(靑城伯)께서 총관하여 이룬 공역인데 또다시 수상께서 복구중신(復舊重新)하는 공을 세움으로서 같은 조상과 자손이 함께 공사를 관리하는 노고가 성대하게 드러났으니 사람들이 다들 이상한 일이라고 하였다.
을묘(乙卯:1555)년 겨울에 두번째 병으로 사양하고 다시 네 번씩이나 사양하며 말씀이 더욱 간절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으시니 공이 비록 병을 핑계삼았으나 이것은 명분이고 실상은 너무 성만(盛滿)함을 피하고자 함이었다. 가을에 세자책봉(世子冊封)이 있었는데 또다시 공께 맡겨 의전문물의 절차를 감독하게 하여 지극히 강구(講究)하는데 힘쓰고 특별히 대접하니 사람들이 그의 체통에 탄복했다. 특별히 말과 안장을 하사하여 포상하였다. 이 때 명나라에서 칙사가 오는데 공이 병들어서 접대하기 어려울 것을 알고 상소하여 재삼 해임시켜 달라고 빌었으나 왕께서 윤허하지 않으셨고,
『평소에도 쉽게 허락하지 못할 것인데 이번에는 칙사가 지켜보는 터라 상신(相臣)들이 결근하지 못하는 고로 내 청대로 따르라.』 하였다.
좌의정 상진(尙震)이 여쭈어 말하기를,
『덕이 높은 원로대신은 그의 떠나고 머무는 것을 조정의 형편에 맞추니 청하옵건대 공의 뜻에 맡겨 병을 조리하게 하소서.』 하니,
왕이 사관을 공에게 보내어 해임을 허락하셨다.
『어제 만류시킨 것을 다시 바꾸어 주니 과인인들 어찌하리오. 오늘 좌우정승이 이구동성으로 쉬도록 하니 이는 공의(公議)라. 경은 편안하게 조리하도록 하라.』
공이 항상 지병으로도 직위를 보전하며 걱정을 하는 까닭에 해임하여 주면 오랜 병이 나을 것 같아 조석으로 기다렸다가 허락을 받자 뜻대로 되었으나 병세가 갑자기 더해져서 다시는 사임간청을 아니하고 극진히 해임해 준 것으로 사은하니 왕이 친필로 비답하였다.
『지난날 경의 사퇴를 허락한 것은 과인의 실수이다. 좌상(左相)의 계청은 역시 여러 명의 정(情)이나 이에 경의 사직은 허락할 수 없다.』
공이 해임을 바랐으나 마지 못하여 여섯 가지 조항을 적어 올리니 근학(勤學)과 종간(從諫)과 친현(親賢)과 원녕(遠侫)과 휼민(恤民)과 신상(愼常)이니 말들이 심히 순후하고 절실하였다.
이어 왕이 글로 써서 정원(政院)에 내렸다.
『늙으신 분의 소임이 비록 나라를 위해 간절하나 요양하도록 허락함이 또한 신하를 소중히 여기는 것이니라.』
좌·우정승이 공이 해임을 바람이 간절한 것을 알고 여쭈었다.
『심모(沈某)는 선조구신(先朝舊臣)으로 이유 없이 퇴직하고자 함이 아니고 자리를 비우며 시간을 허비하는 까닭에 중책을 벗고자 하는 것입니다. 신(臣)등의 전일(前日)의 청이 어찌 오늘날 더욱 머물게 함이리오. 오늘날 비록 사임을 허락하고 병이 나은 뒤에 다시 씀이 또한 고사에도 있으니 그의 사병(辭病)의 상소문에 아름다운 말과 더욱 경계하는 등은 잊을 수 없으니 원하건대 가납하여 주소서.』
왕이 특별히 교서를 내려 그의 뜻에 대답하였다.
『경의 소원에 부응하고자 하여 해임하고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를 제수한다.』
교서에 따른 상소를 다시 올렸으나 또 타이르시고 말았다. 처음에 공이 상소를 올리고자 초고를 잡았을 때 자제들이 피로하고 어려우시니 그만 두시라고 간했다.
『내가 비록 병으로 오래 입시하지 못했으나 일찍이 하루도 군왕을 잊은 적이 없었는데 일조에 그만두면 비록 작은 정성이라도 어찌 얻어 받들 수 있겠는가. 내 일찍이 보니 대신들이 병이 심하면 관리를 보내서 문병을 하고 겸해서 뒷일을 살펴주는데 다만 왕은(王恩)이 지중하나 한마디 말이 시정(施政)에 미치지 못하면 이것이 병으로 인해 하고 싶은 말 한 마디를 못하는 것이 아니냐. 내가 정성을 다해 말하지 못하는 것은 심신을 가다듬어 평소의 포부를 펴고자 함이다.』
공이 병이 난 뒤에 봉사하지 못하고 국록을 받는 것은 의리상 편하지 못한 까닭에 가인(家人)들에게 받지 말라고 일어두었는데 이같이 양상(兩相)이 명령을 내려 유사(有司)를 공의 집에 보내온 것이다. 왕께서 공의 병이 많이 나았느냐고 물으시며 내의원과 어약을 보내고 머물러서 치료해 주라 하고 또 별도로 관리와 양의(良醫)를 보내서 하루 세 번씩 둘러 보도록 하고 글을 써서 좌승지 심경(沈慶)에게 명하니 경이 문병하였으며 또 중사(中使)를 보내어 어찰(御札)을 주시며 말씀하셨다.
『경의 六조문의 경계 내용을 보니 가히 애군우국(愛君憂國)의 정성이 엿보여 내 심히 가상하게 여기오. 그러나 경이 여러 달 동안 휴가중임에 미안스러워 편안하게 해주기 위하여 청원을 들어준다.』
이어 선물을 하사하였고 세자 역시 다시 보덕(輔德)을 보내어 문병하였다. 왕께서 얼마 뒤 우승지 정종영(鄭宗榮)을 보내어 하고 싶은 말을 물으니 공이 더욱 감복하고 계장(啓狀)을 올렸다.
『신이 품고 있던 뜻은 전에 올린 6조문에서 이미 다 아뢰었습니다. 다만 원하옵건대 정사하시는 즈음에 마음은 충후(忠厚)하게 두고 일처리는 관대하게 힘쓰고 사람으로 하여금 마음을 굳게 결속하면 나라와 백성에게 복이 됩니다.』
임금께서 다시 주서(注書)를 보내어 비답하고 위로하니 공이 정성껏 사은함이 처음과 같았다. 이날 저녁에 드디어 운명하니 임금께서 크게 슬퍼하시며 유사를 시켜 상례(喪禮)를 비호하고 3일간 조회를 아니보고 사전(四殿)⑫에서도 간소한 찬으로 드리게 했다. 곤전(坤殿)에서도 슬픔을 표시하고 예에 따라 제문을 지어서 중사(中使)를 시켜 별도로 제사를 올리니 모두들 근세에 없던 특이한 예우였다. 공이 신해(辛亥:1491)년 10월19일에 태어나서 무오(戊午:1558)년 6월19일에 마치니 춘추(春秋)가 68세이다. 태상관(太常館)에서 시호(諡號)를 충혜(忠惠)라고 하니 임금을 섬김에 충절을 다하는 것을 충이라 하고 관유하고 더욱 어진 것을 혜라 한다. 이해 8월12일 상례를 통진(通津)에 있는 선영 아래 간좌곤향(서남 방향)의 언덕에 정했으니 어명에 따른 것이다.
공의 성품이 단아하고 조용하며 자세하고 삼가며 행동과 접물이 간명하고 온화하며 강유를 겸비하여 평소에 사람들이 그의 관대하고 화평함을 좋아하였으니 일을 당했을 때 사람들은 그의 굳고 곧음을 두려워하는 까닭에 모두들 감히 사사로이 거들지 못하였다. 검소한 것을 숭상하고 성색(聲色)의 즐김과 분수에 넘치는 습관을 모질게 끊었다. 비록 귀하고 현달함이 극에 달했으나 문후하러 오는 거마(車馬)의 요란함은 보기 드물었고 청한하고 간략함이 한결같았다. 귀하게 되기 전에는 한가롭게 한 집에 모여서 한 번도 서책을 외면하는 법이 없었고 큰 소리로 웃고 떠드는 것을 보지 못하고 항상 절약하게 하고 여자들이 가까이 모시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며 평상시 선행을 즐겼다. 선비를 사랑하며 반듯하게 장려하여 인재를 기르고자 하였으므로 선비들의 공론이 소중하게 여겼고 그 문사됨이 옛날의 사실들과 잘 어울려 늘 자문받고 의론할 때 힘써 간략하게 말을 하고 결재 때도 쓸데없이 말이 많은 것을 즐기지 아니하고 입시(入侍)하여 문장을 강론할 때는 반드시 도리를 연구하여 시의(時宜)에 맞게 비유하니 사람들이 비로소 그 문장이 장하고 그 학문이 깊음을 깨달았다.
공이 어릴적부터 조용하고 묵중하여 왔다갔다 하는 것을 좋아 아니하니 신묘(辛卯:1531)년 이후부터 국시(國是)를 정하지 못하여 조정의 인물들의 진퇴가 떳떳하지 못하고 잘잘못이 공에게 미치지 못한 까닭에 스스로 호를 보암(保庵)이라고 하였으니 대개 속뜻이 있어서이다. 공이 관직에 있을 때는 비록 수고롭지 않아도 힘써 그 직분을 다하고 권력과 요직에는 문득 회피하고 있기 싫어했다. 근래 양전(兩銓)⑬의 책임관이 결원일 때도 반드시 좌우정승에게 의논한 연후에 결정하고 누가 자문 받으러 오면 공이 반갑지 않게 말하곤 하였다.
『당연히 스스로 옳게 가려서 적용할 것이지 내가 어찌 감히 말하겠는가.』
그리하여 비록 진실로 간청하여도 끝내 말하지 않았다. 먼저번에 사림(士林)간에 오고간 말에 인책이 되어 친구 사이가 점차 멀어져서 지식인들이 그로 인해 정사에 해가 될까봐 우려한 적이 있었다. 공이 경연(經筵)에서 순한 말로 설명했는데 마침 위축이 되어 잘 어울리지 않다가 가을에서야 인정이 겨우 안정되었다.
공이 선친의 비명을 몹시 원통하게 여겨 슬프고 서러운 생각이 항상 마음에 걸려서 평생토록 동쪽 시가지를 지나가지 않았으며 남들과 더불어 연회 때에도 즐겁게 농담해 본 적도 없었다. 매양 기제일이 다가오면 월초부터 거친 음식을 먹고 기일(忌日)에는 반드시 호곡(呼哭)하며 망극한 정에 눈물을 흘렸다. 혹시 꿈 속에서 선친의 얼굴을 보게 되면 종일토록 눈물을 닦고 삭망(朔望)⑭ 때는 몸소 사당에 나아가서 잔을 올리고 비록 초도일(初度日)⑮을 당하고도 역시 기쁜 소리로 즐기지 아니했다.
수를 누리면서 우애가 돈독하여 일찍이 해외에서 중제(仲弟)의 부음을 듣고 슬픔이 지나쳐서 머리털이 희게 쇠하였으며 그의 어린 조카를 어루만지며 친자식과 다름이 없었다. 여러 동생들 가운데 병에 걸린 아이가 있으면 몸소 의약을 돌보며 밤낮을 가리지 않았고 일가중에 몹시 궁핍하거나 초상이 나면 꼭 진휼(賑恤)하여 주고 자녀들이 무리지어 모이니 주방에는 항상 십여 명의 음식을 장만하였다. 공이 매양 가득차면 안된다고 경계하여 자제들에게도 반드시 겸손하고 삼가는 것을 먼저 해야 한다는 것으로 가르친 까닭에 손자들의 이름에 겸(謙)자로 갖출 것을 명하였다.
공이 오랫동안 수상직에 있으면서도 조정에서 주장하는 계책이 마음에 맞지 않더라도 동요하지 않고 반드시 최선책을 주장하고 중론이 다투고 억지 쓰며 자신을 버리더라도 인색한 표정이 없이 옳은 쪽으로 따르며 공론이 결단짓기 어려울 때는 능히 한 말씀으로 절충시키니 듣는 이들이 모두들 감복하였다.
공이 모든 일에 깊이 연구하고 기억력이 강해서 중종 때의 국토와 우리 나라의 국경을 환하게 다 둘러보고 몸소 밟았으니 사람들이 혹 물으면 답변에 막히는 것이 없었다. 제주도의 산천이 험하고 아름다운 곳과 요새와 위해한 것을 골고루 그림으로 그려서 한편 축으로 만들었다. 을묘(乙卯:1555)년에 왜구(倭寇)가 침범하여 남해안이 많이 침범당했는데 제주도의 성진을 구축하여 더욱 요충지가 되었다. 공이 계책을 고안하여 관장하고 적응하게 하니 모두들 복종했다.
공이 처음 병이 났을 때부터 집에도 말하지 않다가 급기야 위독해져서 양정승이 문병하니 공이 인접하고 떠날 때까지 조용히 수작함이 완연히 평상시와 같았고 임종시에도 정신이 불란하고 자제들과 담화를 하였으나 밤이 깊어감에 따라 자제들이 구명하지 못할 것을 알고 부인들까지 모두 둘러앉은 다음 자리를 옮겨 머리를 동쪽으로 한 다음 홀연히 떠나시니 아, 공과 같으신 분은 정당하게 살다가 세상을 마치니 어찌 흔히 볼 수 있으리오.
공이 좌찬성 김당(金璫)의 딸에게 장가들었으니 어질고 능히 공을 내조하였다.
1남3녀를 낳았으니 아들은 강(鋼)인데 곧 국구(國舅)⑯로서 영돈녕부사 청릉부원군(領敦寧府事靑陵府院君)으로 일찍이 계묘(癸卯)년 사마시(司馬試)에 급제했다. 맏딸은 주부(主簿) 이원빈(李元賓)에게 시집갔으나 내외가 모두 공보다 먼저 죽고, 둘째 딸은 전첨(典籤) 윤건(尹健)에게 시집갔고 셋째 딸은 우시직(右侍直) 이인건(李仁健)에게 시집갔다.
아들인 청릉이 현령(縣令) 이대(李薱)의 딸에게 장가들어 2녀8남을 낳았는데 맏딸은 곧 지금의 중전(中殿)이시고, 맏아들은 인겸(仁謙)이니 무오(戊午)년에 사마시에 급제하고, 둘째 아들이 의겸(義謙)이니 을묘(乙卯)년 사마시에 급제하고, 셋째 아들이 예겸(禮謙)이고, 넷째 아들이 지겸(智謙)이고, 다섯째 아들이 신겸(信謙)이고, 여섯째 아들이 충겸(忠謙)이고, 일곱째 아들이 효겸(孝謙)이고, 여덟째 아들이 제겸(悌謙)이다. 주부가 1남을 낳으니 이름이 소(韶)인데 선공감역(繕工監役)이다. 둘째 사위인 전첨이 3남2녀를 낳으니 맏아들이 기정(起禎), 다음이 기상(起祥)이고 나머지는 다 어리다.
맏손자인 인겸이 좌랑 이발(李拔)의 딸에게 장가들고, 둘째 손자인 의겸이 도사(都事) 한흥서(韓興緖)의 딸에게 장가들어 딸 하나를 낳고, 셋째 손자인 예겸이 군수 정숙(鄭潚)의 딸에게 장가들어 딸 하나를 낳고, 넷째 손자인 지겸이 경력(經歷) 이제(李霽)의 딸에게 장가들어 아들 하나를 얻고, 다섯째 손자인 신겸이 참봉 정인수(鄭麟壽)의 딸에게 장가들어 딸 하나를 낳았다.
장례를 마치고 청릉이 세의(世誼)⑰를 쫓아 찾아와서 비명을 부탁함에 사룡(士龍)이 공을 가장 깊이 알고 또한 나이 같은지라 정분상 감히 사양하지 못했다. 공의 집 덕업에 있어 사람들의 이목에 드러난 것을 다 모아서 기록할 수도 없고 일찍이 직접 보고 기억하는 것도 적지 않으나 무장력이 없고 생각이 흐트러져서 능히 찬양하지 못하고 다만 공의 막내 동생인 동경(冬卿)⑱ 통원의 가장에 의거하여 명을 삼았다.
명(銘)에 이르기를,
인재는 천운에 따라 태어나니 흥쇠에 배합(配合)했도다. 진나라의 명실을 초나라에서 쓰니 족히 대적하지 못하였다. 고려 말엽에 성루가 많았는데 청성공에게 부월(斧鉞)⑲을 주었다네. 우리 성조(聖祖)⑳께 나아가서 백성들을 구원하고 삼공육경(三公六卿)(21)이 새롭게 도왔으니 모든 제도 혁신했네. 효험이 산천에 미쳤으니 사당을 세워 높이 받들었네. 연속하여 다시 시작하니 공이 여러 번 감당했네. 사직 아래 좋은 학문 융성하게 소문나고 어엿하게 훈명(勳名)을 기록하니 두루 거쳐 높이 솟았네. 안으로 돕고 밖으로 용납하니 조정에서도 우러러보고 삼사의 좋은 계책 백 가지가 훌륭하니 감히 받들지 않는 이 없고 느껴서 영향받지 않는 물건이 없었네. 간략으로 번거로움 이겨내고 조용히 극성함을 진압하니 부지런하고 밝게 다루어 하는 일마다 두드러졌네. 조절하는 힘을 상하가 힘입으니 대중에 치우치고 뽐내지 않았네. 정도에 최선을 다하니 작위 재상에 이르고 실마리 중전에 이어지니 크게 감내할 처지일세. 원대함을 기약하니 겸손 더욱 마땅하고 우애가 수고(壽考)에 닿았다네. 대를 이어 전해 실으니 아울러 영원하고 용두비석(龍頭碑石) 높이 솟아 공의 덕망 으뜸일세. 백대가 이어지니 모두들 본받으리.
호음 정사룡이 지음.
註① 추은(推恩):미루어서 베푸는 은혜. 본인의 영귀로써 상 삼대에게 추증하는 벼슬. 모든 증직은 다 추은임.
② 배도(陪都):수도 이외의 도시. 지금의 위성도시 및 부수도.
③ 적전(籍田):국왕이 몸소 경작하던 전답. 여기서 얻은 곡식으로 제사함.
④ 삼사(三司):조선 때 사헌부 사간원 홍문관을 합쳐서 부르던 말.
⑤ 권지(權知):문과에 급제한 사람에게 시보 같은 형식으로 실무를 익히게 하는 제도. 지금의 수습행정원 따위.
⑥ 중시(重試):하급관리들을 위하여 10년에 한 번씩 실시하는 승급시험. 이 시험에 합격하면 당상관이 됨.
⑦ 여묘(廬墓):부모상을 당했을 때 묘 옆에 여막(움집)을 짓고 3년간 시묘함.
⑧ 제수(除授):벼슬을 줌.
⑨ 국옥(鞫獄):왕이 직접 다루는 옥사.
⑩ 양종(兩宗):조계종과 천태종, 즉 교종과 선종으로 승려에게 베푸는 과거 시험.
⑪ 이단(異端):조선 때 유교 이외의 타 종교를 통틀어 이르는 말.
⑫ 사전(四殿):대전, 중궁전, 동궁전 및 대비전. 여기서는 대비전을 이른 말.
⑬ 양전(兩銓):이조(吏曹)와 병조(兵曹).
⑭ 삭망(朔望):초하루와 보름.
⑮ 초도일(初度日):처음 태어난 날. 여기서는 환갑날.
⑯ 국구(國舅):임금의 장인.
⑰ 세의(世誼):대대로 교분이 깊은 사이.
⑱ 동경(冬卿):6조의 하나. 공조판서.
⑲ 부월(斧鉞):전장에 출전하는 장수에게 부여하는 도끼. 국운의 상징.
⑳ 성조(聖祖):여기서는 이태조를 이름.
  (21)삼공육경(三公六卿):3정승 6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