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관공(휘 정세)묘지명 |
판관공 휘 정세 묘소 묘 비 석 |
十三世祖
贈參判 行判官公 諱 挺世 墓地銘
公諱挺世我沈系出於靑松 高麗朝文林郞衛尉丞諱洪孚之十二世孫也子諱淵麗朝閤門祗侯子諱龍麗朝門下侍中靑華府院君子諱德符麗朝輔國崇祿大夫左侍中忠義伯入我 朝拜左相不受仍封靑城伯諡定安公子諱溫大匡輔國崇祿大夫議政府領議政靑川府院君諡安孝公昭憲王后之考而謝恩上使入 明朝乘其時小人朴訔之譖 太宗遣使待鴨江渡江卽時押送水原賜死享年四十四意外酷被慘禍至寃極痛矣 太宗賓天 世宗入承大統卽爲伸寃復爵子諱澮定難翊戴佐理功臣大匡輔國崇祿大夫議政府領議政兼春秋館藝文館弘文館觀象監領事世子侍講院師靑松府院君諱恭肅公子諱順門文科議政府舍人 贈領議政子諱連源文科大匡輔國崇祿大夫議政府領議政諡忠惠公配享 明宗廟子諱鋼領敦寧靑陵府院君諡翼孝公 贈領議政 仁順王后之考而子諱仁謙溫陽郡守 贈通政大夫承政院左承旨子諱 以玉果縣監 贈領議政卽公之考也公生而聰明絶倫尙志超俗弘量志遠志在遠大以軍資監判官方欲助君澤民以達其志未展大志因延興府院君金悌男之婿被禍未免獄死當此之時 光海之暗暴奸臣李爾瞻之弄奸權柄流布延興廢 光海擁立永昌大君云而 光海殺永昌於江華誅延興而其子二人與婿同時投獄嚴刑不服癸丑五月二十四日遂賜死獄中享年三十五歲嗚呼痛哉 光海又廢母后於別宮以子廢母天下寧有是理罪惡貫天焉豈有長久乎天日復明 仁祖反正廢 光海誅爾瞻等而伸寃贈嘉善大夫戶曹參判同知義禁府事五衛都摠府副摠管配貞夫人延安金氏以延興之女早世繼配光山金氏父庶尹虎秀之女子諱榗以禍家餘生年玆十二無意於世流落靑川隱居不仕杜門謝客朝廷得失世間是非不欲聞知而一架琴書日趣自適累招不就以壽職嘉善大夫同知中樞府事五衛都摠府副摠管日與尤菴宋先生講道於華陽巖捿齋先生扁其堂號曰一閑堂子孫仍居焉也尙今無墓碑而儀物不成模樣古今玆立石感舊之懷不勝感愴也
檀紀四千三百二十年 丁卯 二月 日 13세조 증참판 행판관공 휘 정세(侹世) 묘지명 公의 휘는 정세(挺世)요 우리 沈氏는 계통이 靑松에서 나왔고 고려조의 문림랑위위승(文林郞衛尉丞) 휘(諱) 홍부(洪孚)의 12世孫이다. 아드님 휘 연(淵)은 고려조의 합문지후(閤門祗侯)요, 아드님 휘 용(龍)은 고려조의 문하시중 청화부원군(門下侍中靑華府院君)이며, 아드님 휘 덕부(德符)는 고려조의 보국숭록대부 좌시중 충의백이요 조선조에 들어와 좌상(左相)에 임명되고 청성백(靑城伯)에 봉해졌으며 시호는 정안(定安)공이다. 아드님 휘 온(溫)은 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 영의정이요 청천부원군(靑川府院君)이며 시호는 안효공(安孝公)이고 소헌왕후(昭憲王后)의 아버지요 사은 상사(謝恩 上使)로 明나라 조정에 들어가시자 그 때를 틈타서 소인 박은(朴訔)이 태종(太宗)에게 참소(慘訴)하여 사신(使臣)을 보내서 압록강에서 기다리게 하고 즉시 水原으로 압송(押送)하여 사사(賜死)하였으니 향년이 44요 뜻밖에 혹독하게 참화(慘禍)를 당하여 지극히 원통하더니 태종(太宗)이 승하(昇遐)하고 世宗大王이 대통(大統)을 이으므로 즉시 신원(伸寃)되고 복작되었다. 아드님 휘 회(澮)는 정난익대좌리공신 대광보국숭록대부(定難翊戴佐理功臣 大匡輔國崇祿大夫) 의정부 영의정 겸 춘추관 예문관 홍문관 관상감 영사 세자시강원사 청송부원군(靑松府院君)이요 시호는 공숙공(恭肅公)이다. 아드님 휘 순문(順門)은 의정부 사인(舍人)이요 영의정에 증직되었다. 아드님 휘 연원(連源)은 문과에 급제하였고 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 영의정이요 시호는 충혜공(忠惠公)이며 종묘(宗廟)의 명종 묘(明宗 廟)에 배향되었다. 아드님 휘 강(鋼)은 영돈녕 청릉부원군이요 시호는 익효공(翼孝公)이며 영의정에 증직되었고 인순왕후의 아버지이시다. 아드님 휘 인겸(仁謙)은 온양군수요 통정대부 승정원 좌승지에 증직되었다. 아드님 휘 엄(㤿)은 옥과(玉果)현감으로써 영의정에 증직되었으니 즉 공의 아버지이시다. 공은 나면서부터 총명하고 무리에 뛰어나 고상한 마음으로 속세를 벗어났고 도량이 크며 뜻이 원대(遠大)하였다. 군자감 판관으로써 바야흐로 임금을 돕고 백성을 은혜로 다스려 그 뜻을 통달하려 하였으나 큰 뜻을 펴지 못하고 연흥부원군(延興府院君) 김제남(金悌男)의 사위라는 이유로 화(禍)를 입어 옥사하였다. 이 때 광해군의 폭정에 이이첨(李爾瞻)이 농간(弄奸)하여 권세를 잡아 영흥부원군이 광해군을 폐위(廢位)하고 영창대군(永昌大君)을 옹립(擁立)하려고 한다는 말을 유포시켜 광해군이 영창대군을 강화도에서 죽이고 연흥부원군도 죽이며 그 아들 둘과 사위를 동시에 투옥하여 엄형으로 다스렸으나 불복(不服)하자 癸丑년 5月24일 옥중에서 사사(賜死)되니 향년이 35歲였다. 아! 슬프도다. 광해군이 또 별궁(別宮)에 폐모(廢母)하였으니 아들로써 어머니를 폐한다는 것은 천하에 어찌 이러한 이치가 있겠는가 죄악이 하늘을 뚫었으니 어찌 오래 가리오 하늘의 해가 다시 밝아져 仁祖가 反正하자 광해군을 폐하고 이이첨 등을 죽이며 신원(伸寃)되어 가선대부 호조참판 동지의금부사 오위도총부 부총관에 증직되었다. 배위는 연안김씨 연흥부원군의 따님으로 일찍 돌아가셨고 계배(繼配)는 광산김씨 서윤(庶尹) 호수(虎秀)의 따님이다. 아드님의 휘 진(榗)은 가화(家禍)의 나머지 겨우 열두살에 세상에 뜻이 없어 이리저리 떠돌아 다니다가 청천(靑川)으로 낙향하여 숨어살며 벼슬하지 않고 문을 닫고 객(客)을 사절하며 조정의 득실과 세간의 시비를 들으려고도 알려고도 하지 않고 한 시렁의 금서(琴書)에 날마다 취미를 부치고 스스로 즐기며 나라에서 여러 번 불렀으나 나가지 않았고 수직(壽職)으로 가선대부 동지중추부사(嘉善大夫同知中樞府事) 오위도총부 부총관(五衛都摠府副摠管)이 되었다. 날마다 우암(尤菴) 송선생과 더불어 화양암서재(華陽巖捿齋)에서 도(道)를 강론하니 선생이 그 당호(堂號)를 일한당(一閑堂)이라 지어주어 자손이 이로 인하여 살게 되었다. 아직도 묘소에 碑石이 없고 모양을 갖추지 못하였는데 지금에라도 비석을 세우니 지난날을 생각하면 감모(感慕)하는 마음이 움직이며 슬픔을 이루 다 말할 수 없도다.
단기4320年 丁卯 2月 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