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양군수공(휘 한주)묘갈명 |
十五世祖 贈吏曹參議 高陽郡守公 諱 漢柱 墓碣銘
肅宗甲子泮士爲宋尤庵先生論尼尹背師尹時黨援鼎盛士多逡巡畏避故郡守沈公方掌泮議倡同志抗疏聲其罪極嚴士曰公考副提學梧灘公當士禍初犯衆怒獨扶宋先生是不能爲是父子歟公諱漢柱字一卿梧灘公諱攸祖諱東龜號晴峯官應敎曾祖諱諿官判書沈氏出靑松我朝靑城伯德符以下三世皆議政毓慶沙麓其後舍人順門修撰達源亦顯名至判書公圭組奕世蔚爲名閥又爲文藝家公淸明簡重且襲家訓力學攻文辭華譽早聞士友甚相期許丁巳中進士游太學有聲乙丑除禁府都事戊辰序陞主簿尋丁梧灘公憂辛未壬人用事就家拜抱川縣監初非善意也虜使方入境促令辭陛公强起赴官不肯歷見三公被臺劾罷又因家僕語言大觸賊黯父子對吏幾不測適有言之者只削職甲戌拜戶曹佐郞親嫌遆俄授恩津縣歲荐飢公私赤立竱心賙恤一境無死亡隣民匍匐歸者如市亦發粟哺之道路皆騰頌有己巳兇相自南移謫沿道官吏供頓迎送皆甚盛公獨不爲禮其姻黨適爲按使嗛其事署公下考無何閔公鎭遠廉察湖西歸白公治最及按使挾私狀 上命罷按使職卽用末擬拜公燕岐縣以直之又 命召見奬厲己親病解復除金吾旋遭艱甲申由 東宮翊衛出義城縣令治理剛明屢被察擧陛守韓山大臣白還前任滿解入水曹庚寅授高陽郡翌年免歸公公車擅藝視一第如摘髭而卒蹭蹬無成縣邑棲遑己非本懷且其才志伉厲不肯爲巧宦知舊位卿宰者一未嘗私謁愛江榭靜僻閉戶看書殆若忘懷於用舍者孝親一於誠喪盡其節祭致其潔事妣李夫人老而益虔夫人司議命說之女判書坡谷公誠中曾孫也夫人年旣高公亦白首繞膝昕夕言笑辰節觴豆兄弟宗黨咸與助其娛三弟有廢病而鰥終身矜恤一不肯相離析産之饒美以爲業嫁遣其三女比己出此皆天性也歿以甲午七月二日距其生丙戌爲六十九葬長湍友謹里坐午岡祔曰 贈淑夫人慶州李氏也夫人祖考同知雪汀公忔考郡守壽翼自幼聰穎强記習聞內外先故曁先輩言行至老猶不忘時爲諸子孫誦道事姑孝謹姑在時已畀內治治皆合度先公一年生歿先二年一男鳳輝牧使女適校理金民澤郡守趙榮宗折衝鳳適側出也牧使男聖希參判推恩貤公職賢希有孝行早歿士希進士今縣監參判韓顯暮士人洪啓億女婿也曰進士公獻公猷侍直宋文欽進士李善海士人金晉柱妻參判出賢希取子公猷士希二男一女幼曩歲參判公托余銘公墓未幾參判又奄忽悲夫死生其可恃歟余方伏枕几几深一朝溘然與逝者負諾遂力疾泚筆而銘公曰 沈爲名族 文行傳家 鉶刃未剸 我爲公嗟 匪公之嗟 我嗟士論 公昔枉泮 風生義蘊 旣縻民杜 亦曰良吏 才高志亢 胡不大試 公應委祉 嗣者其昌 我銘昭示 湍水悠長 領議政 陶谷 李宜顯 撰 15세조 증이조참의 고양군수공 휘 한주(漢柱) 묘갈명 甲子(1684 肅宗10)年에 성균관의 유생(儒生)들이 우암 송시열 선생을 위하여 더러운 尹氏(尹拯)가 스승을 배반한 것을 논박하더니 尹의 무리들이 권력을 잡음에 선비들이 뒷걸음질치고 두려워하며 피하였다. 군수 沈公이 바야흐로 성균관의 논의(論議)를 장악하고 동지들에게 호소하여 항소(抗疏)하며 그 죄를 성토하였으니 극히 엄한 선비였다. 公의 아버지 부제학(副提學) 오탄공 휘 유(梧灘公 諱 攸)는 사화(士禍) 초기에 대중의 노함을 당하여 홀로 宋先生을 도와서 보호하였으니 이 불가능한 일을 하였음은 이 父子로다. 公의 이름은 한주(漢柱)요 字는 일경(一卿)이며 아버지 오탄공의 이름은 유(攸)요, 조부의 이름은 동구(東龜)이고 호는 청봉(晴峯)으로 벼슬은 홍문관 응교(弘文館 應敎)이다. 증조부의 이름은 즙(諿)이니 벼슬은 예조판서(禮曹判書)이다. 公은 沈氏이고 본관은 靑松이다. 조선조 청성백 휘 덕부(靑城伯 諱 德符) 휘 온(溫) 휘 회(澮) 3世는 모두 의정(議政)이시고 경사가 넘쳐 왕비(王妃)를 낳은 경사가 일어나고 그후 사인공 휘 순문(舍人公 諱 順門)은 의정부 사인이요 증 영의정 이시고, 수찬공 휘 달원(修撰公 諱 達源)은 또한 이름이 나서 증 이조판서에 이르렀다. 公은 훌륭한 인품을 지녀 세상에 이름이 났으므로 왕성하게 집안은 명벌(名閥)이 되고 또한 문예가가 되었다. 公은 청명 간중(淸明 簡重)하고 가훈(家訓)을 잘 지키며 학문에 힘썼으나 화려한 명예를 사양하니 일찍이 친구들에게 알려져 심히 서로 믿어주었다. 丁巳(1677 肅宗3)年에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하고 성균관(成均館)에 유학하여 명성이 있었다. 乙丑(1685 肅宗11)年에 의금부 도사(義禁府都事)에 제수되고 戊辰(1688 肅宗14)年에 주부(主簿) 벼슬에 승진되었는데 조금 후 아버지 오탄공(梧灘公)의 상을 당하였다. 辛未(1691 肅宗17)年에 간사한 사람들이 권세를 마음대로 부림에 집으로 돌아갔다. 포천현감(抱川縣監)을 배명 받았는데 처음에는 마음에 들지 않았으나 오랑캐가 국경을 침입하자 나라에서 영(令)을 재촉하며 폐하(陛下)에 신고하라 하니 公은 굳건히 일어나 부임하였으나 三公을 뵈옵기를 즐기지 아니하여 대간(臺諫)의 탄핵을 입어 파직되었다. 또한 집안 하인의 말로 인해 크게 역적죄에 저촉되어 부자가 형리(刑吏)앞에 대질하게 되니 거의 예측하기 어려운 지경에 이를 뻔하였다. 마침 잘 말해준 사람이 있어 다만 퇴직으로 끝났다. 甲戌(1694 肅宗20)年에 호조좌랑(戶曹佐郞)에 임명되었으나 친혐(親嫌:친척이 한 관청에서 근무하는 것)에 의하여 전직되었다. 조금 후 은진현감(恩津縣監)에 임명되니 세월이 흉년(凶年)이 들어 관청이나 민가에 식량이 부족한 상태였는데 전력을 다해 구제에 힘쓰니 온 고을에 굶주려 죽은자가 없었으므로 이웃 고을에서 기어서 돌아오는 자가 시장같이 많았다. 또한 좁쌀을 나누어 먹게 하니 도로마다에서 모두 칭송하는 소리가 들렸다. 기사환국(己巳換局:1689年 숙종15年) 다시 귀양살이하는 자가 남방으로부터 귀양살이 장소를 이동할 적에 연도(沿道)의 관리들이 물자를 제공하여 영송(迎送)함이 심히 성대하였는데 公만은 유독 예를 아니하였다. 그의 인당(姻黨)이 마침 안렴사(按濂使:천재지변과 재난이 있을 때 파천되어 백성을 안무하는 임시관직)가 되었는데 그 일을 혐의 삼아 公의 치적(治績)을 최하(最下)라고 적으니 어찌할 수 없었다. 민진원공(閔鎭遠公)이 호서지방(湖西地方)을 시찰하고 돌아가서는 공의 치적이 최상이라고 보고했다. 안렴사가 사장(私狀)을 제출함에 王이 명하여 안렴사직을 파면케 하고 말직에 임용하며 公에게는 연기현감(燕岐縣監)을 배명하니 이는 강직하였기 때문이다. 또한 하명하여 불러보시고 장려하셨다. 이미 親病이 쾌차함에 의금부(義禁府)에 다시 등용되었는데 어려움을 당했다. 甲申(1704 肅宗30)年 동궁(東宮:王世子) 익위(翊衛) 벼슬에서 의성현령(義城縣令)으로 나가서 행정방침이 강명(剛明)하여서 자주 감찰의 천거를 받아 韓山郡守가 되었다. 大臣이 전임이 만기가 되었다고 보고하여 공조(工曹)에 들어갔다. 庚寅(1710 肅宗36)年에 高陽郡守에 제수되고 다음해 면직되어 귀가했는데 소장(疏狀)의 글 솜씨가 똑바르고 순서가 수염 가르듯 정연했으나 마침내 실직되고 뜻을 이루지 못하여 현읍(縣邑)이 썰렁함은 본의가 아니었다. 또 재주와 뜻이 높아 아첨하는 관리되기를 즐기지 아니하였다. 친구가 정승의 자리에 있는 자를 한번도 사적으로 찾은 일이 없었다. 강을 좋아하여 고요한 벽지에 정자(亭子)를 지어 놓고 문닫고 책을 읽으니 거의 집안 일에 대한 회포를 잊은 듯 하였다. 父母에 孝道하기를 오직 정성으로 하고 초상(初喪) 때에는 예절을 다하고 제사 때에는 정결함을 이루었다. 어머니 淑夫人 李氏을 섬김에는 늙도록 더욱 공경을 다하였다. 어머니는 장례원 사의(掌禮院 司議) 이명열(李命說)의 따님이고 호조판서(戶曹判書)를 지낸 파곡공 성중(坡谷公 誠中)의 증손이다. 어머니가 고령이 되고 公도 또한 흰머리가 무릎에 닿았다. 朝夕으로 정답게 말하며 생신 날에는 술상을 벌리니 형제와 친척들이 모두 모여 그 즐거움을 도왔다. 셋째 아우가 질병이 있어 홀아비가 되었는데 종신토록 불쌍히 여기고 한번도 서로 떠나기를 좋아하지 아니하였으며 가산(家産) 가운데 좋은 것을 나누어주어 생업을 유지케 하고 셋째 아우의 딸을 시집 보낼 때는 자기가 낳은 딸과 같이 했으니 이는 모두가 天性이었다. 甲午(1714 肅宗40)年 7月에 별세하니 丙戌(1646 仁祖24)年에 출생부터 69歲를 살았다. 장단 우근리(長湍 友謹里) 午坐의 언덕에 장례 지냈으며 증숙부인(贈淑夫人) 慶州李氏와 합장이다. 부인의 할아버지는 동지 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 설정공 흘(雪汀公 忔)이요, 아버지는 군수 수익(壽翼)이시다. 부인은 어렸을 때부터 총명하였으며 안팎의 일과 선배의 언행을 기억하고 익히 들어서 늙어서도 오히려 잊지 않은 채 여러 자손을 위해 전달해 주었다. 시어머니 섬김에 효근(孝謹)하고 시어머니 생존시에 이미 배워서 집안 다스림이 모두 법도(法度)에 맞았다. 公보다 1年 먼저 출생하고 2年 먼저 별세하였다. 외아들 봉휘(鳳輝)는 목사(牧使)이고 따님은 교리 김민택(金民澤) 군수 조영종(趙榮宗)에게 각각 출가하였으며 절충장군 봉적(折衝將軍 鳳適)은 소실 소생이다. 목사의 장남 성희(聖希)는 참판(參判)인바 公의 관직에 증직(贈職)을 받게 하였다. 차남 현희(賢希)는 효행이 있었으나 일찍 죽고 3男 사희(士希)는 진사로 현재 현감(縣監)이다. 女는 참판 한현모(韓顯暮)와 사인 홍계억(洪啓億)에게 각각 출가하였다. 진사 공헌(公獻)과 공유(公猷) 그리고 시직 송문흠(宋文欽) 진사 이선해(李善海) 사인 김진주(金晋柱)에게 각각 출가하였고 이상이 참판의 소생이다. 현희(賢希)는 공유(公猷)를 양자로 삼았으며 사희(士希)는 2男1女를 두었으나 모두 어리다. 참판공이 나에게 공의 비명(碑銘)을 부탁하고 미구에 세상을 떠나니 슬프도다. 死生은 가히 믿어야 되는지 내가 베개에 누워보니 심히 두렵기만 하도다. 하루아침에 별세한 자에게 승낙한 것을 저버릴까 걱정되어 드디어 힘껏 먹물을 찍어 公의 비명을 지었다. 沈氏는 이름 있는 명족이고 문행(文行)의 집안으로 전한다. 사리는 내 마음대로 결단하지 못하나 나는 公을 위해 몹시 한탄한다. 公을 한탄함이 아니고 나는 사론(士論)을 한탄한다. 公이 옛날 성균관에 있을 때 學風이 생기고 義理가 쌓였다. 이미 國民과 國家를 위해 일하니 또한 양리(良吏)라 칭했다. 재주 좋고 뜻도 높았지만 어찌 크게 시험하지 못했는가. 公은 응당 복을 끼치고 자손을 창성케 하니 나의 명문(銘文)은 밝게 나타나고 장단(長湍)의 물은 길게 흘러가네. 영의정 도곡(陶谷) 이의현(李宜顯) 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