첨지중추부사(휘 세문)묘갈 |
첨지중추부사공 휘 세문 묘소 묘 표 석 |
十四世祖 僉知中樞府事 靑松沈公 諱 世文 墓碣銘竝書
德川之堯洞沈氏族葬阡也負元嶝而連崇三封爲望前曰訓導諱應濂卽歲德川始家之基祖次後曰僉樞諱鑊晩年與諸弟均分田宅是公祖三考也又其後十數武入脉處酉坐卽公之葬也公諱世文字士郁號肯齋壽通政大夫僉知中樞府事生以 仁祖甲申二月二日卒以丙午正月六日壽八十三始祖諱洪孚 高麗文林郞靑己君生諱淵閤門祗侯見事退居山淸有望京臺遺虛碑生諱龍典理正郞門下侍中靑華府院君生諱元符號岳隱 麗季入杜門洞享杜門洞書院四傳而諱遜集賢學士號月軒莊光之際掛冠歸田再傳而諱鶴齡宗簿寺主簿號道谷師事盧蘇齋先生生諱淸進士壬亂以軍勞除訓鍊奉事賜亭號碧節丁酉再亂殉節島山於公爲曾祖也妣咸陽朴氏軍資監奉事昌傑女配江陵金氏士人璞女水淸亭子洞午坐生有三男必大戊申倡義爲參謀有大致大一女適李煜通政必大嗣男行五二女申重建金正秋有大三男萬翼萬奎萬迪一女安衡峻致大一男萬斗三女朴璋金道鐸申亨模李男龍彩司僕正龍雲餘不錄於乎繼祖之宗於群從年又最長時先公無恙四棣同局幷沾蔭會幃幔怡翕群房仲季俊秀文雅經夕進退閨門雍肅公上而承歡下而表率則所行乎家而衆責完全華矣所莅乎身在衆善固悉備而無後萎降微響己沉無由得模寫眞面目是可恨然仁壽善慶聖言明訓年望大耋爲家優老晜仍漸盛布萬鄕井報施之天耶今行先兆石役方謀顯刻族祖宜洛宜炁族叔瑄澤鏞澤以門長分責余以銘督之不己迺敢采先公析著時私會文及詩先蹟可以傍照者披實撰次如右極知僭踰恭手而銘曰克裝忠君家篤恩倫宜乎望質之美德之純而煒壽連昌復承信乎其善之澤仁之徵墓從先兆堯洞之原死生不異父子祖孫是君子家花勿斲不侍用示來于煌煌 從九世孫 相恪 謹撰 東萊後人 鄭揮喆 謹書 檀紀四千二百九十三年 庚子 十月 日 14세조 첨지중추부사 청송심공 휘 세문(世文) 묘갈명병서 덕천의 요동(堯洞)은 심씨 가족장(家族葬)하는 언덕이다. 원 산등성이를 지고 이어서 세 무덤이 있으니 앞에 바라보이는 것이 훈도(訓導) 휘 응렴(應濂)의 산소로 덕천에 처음 집터를 정하고 사신 할아버지요 그 뒤는 첨추(僉樞) 휘 확(鑊)의 산소로 만년(晩年)에 여러 아우와 고루 전답을 나누었으니 이 분들이 공의 할아버지와 아버지이고 또 그 뒤로 열두어 발짝 가서 산줄기로 들어가는 곳의 유좌(酉坐)는 즉 공의 산소이다. 공의 휘는 세문(世文)이요 자는 사욱(士郁)이며 호는 긍재(肯齋)이니 수직(壽職)으로 통정대부 첨지중추부사였다. 仁祖甲申(1644) 2월2일에 낳아 英祖丙午(1726) 정월6일 졸하니 수가 83이다. 시조의 휘는 홍부니 고려조의 문림랑이요 청기군(靑己君)에 봉해졌고 휘 연(淵)을 낳으니 합문지후(閤門祗侯)였고 명예와 영리를 버리고 山淸으로 물러나 살았고 망경대(望京臺)와 유허비(遺虛碑)가 있으며 휘 용(龍)을 낳으니 전리정랑(典理正郞) 문하시중이었고 청화부원군(靑華府院君)에 봉하여졌고 휘 원부(元符)를 낳으니 호가 악은(岳隱)이요 고려말에 두문동에 들어갔고 두문동 서원에 배향되었다. 네 번 전하여 휘 손(遜)은 집현전학사로 호가 월헌(月軒)이요 端宗, 世祖연간에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와 살았다. 두 번 전하여 휘 학령(鶴齡)은 종부시주부(宗簿寺主簿)요 호가 道谷이고 노소재(盧蘇齋)선생에게 師事하였다. 휘 淸을 낳으니 진사였고 임진왜란에 군공을 세워 훈련원봉사에 제수 되었고 정호(亭號)를 벽절(碧節)이라 임금이 사호(賜號)하였으며 정유재란에 도산성(島山城)의 싸움에서 순절(殉節)하였으니 공에게 증조가 된다. 어머니는 함양박씨(咸陽朴氏) 군자감(軍資監) 봉사 창걸(昌傑)의 따님이요 배위는 강릉김씨(江陵金氏) 士人 박(璞)의 따님이다. 묘는 東谷 정자동(亭子洞) 午坐이고 3남1녀를 두었으니 장남 必大는 戊申年에 창의(倡義)하여 참모(參謀)가 되었고 다음은 有大와 치대(致大)이며 딸은 이욱(李煜)에 출가하였다. 통정 필대의 사자(嗣子)는 行五요 딸 둘은 신중건(申重建)과 김정추(金正秋)에게 각각 출가하였다. 유대가 3남1녀를 두었으니 아들은 만익(萬翼), 만규(萬奎), 만적(萬迪)이요 딸은 안형준(安衡峻)에게 출가하였다. 치대가 1남3녀를 두었으니 아들은 만두(萬斗)요 딸은 박장(朴璋)과 김도탁(金道鐸)과 신형모(申亨模)에게 각각 출가하였다. 이욱의 아들은 사복시정 용채(龍彩)와 용운(龍雲)이고 나머지는 기록하지 않는다. 아아 할아버지의 종손으로서 사촌이 여럿이고 나이도 가장 많으며 그때 아버지가 무병(無病)하여 4형제가 같은 장막에서 회합(會合)하여 화기애애하게 담소(談笑)하였고 둘째 아들과 셋째 아들이 준수(俊秀)하여 文事에 능하며 조석으로 문안을 하고 집안이 和樂하여 공은 위로 부모를 즐겁게 해드리고 아래로 가솔(家率)을 잘 거느렸으니 집에서 행하여야할 일을 완전히 다 하였다고 할 수가 있도다. 벼슬에 있을 때 모든 善行을 다 갖추었을 터인데 사실을 알 수 없어 진면목(眞面目)을 모사(模寫)할 수 없으니 한탄스럽다. 그러나 90을 바라보는 연세에 집안이 넉넉하고 자손이 점점 번성하여 향중(鄕中)에 가득하니 하늘이 보답하는 것이로다. 지금 비석을 세우려함에 족조(族祖) 의락(宜洛), 의기(宜炁)와 족숙(族叔) 선택(瑄澤), 용택(鏞澤)이 文長으로써 나에게 비문을 지으라고 하니 참람된 줄을 알지만 삼가 위와 같이 지었고 명은 다음과 같다. 나라에 충성하니 임금의 은혜가 두터웠도다. 바탕이 아름다웁고 덕이 순수하여 명성이 빛났도다. 수를 하고 자손이 번성하니 풍속이 아름다운 곳을 택한 징조로다. 묘는 선영 요동(堯洞)의 언덕을 좇았으니 死生에도 다르지 않도다. 부자조손(父子祖孫)이 군자의 집이니 깍지말고 모시지 않을손가. 여기에 새기니 영원히 빛나리로다. 단기4293년 경자 10월 일 종구세손 상각이 삼가 짓고 동래후인 정휘철이 삼가 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