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정공(휘 광렴)난화감모비

부정공 휘 광렴 묘소
소재지: 아산군 음봉면 산동리


부정공 휘 광렴 난화 감모비

감찰공 휘 해 배위 동래정씨 정려각


孺人東萊鄭氏 合窆山洞後山子坐
三歲兒時 母親殉節 七山海上
忠婢福伊 天佑神助 幸保血脈
宣祖

30年 정유재란당시(丁酉再亂當時) 副正公 휘(諱) 광렴(光濂)께서는 3歲 유아(乳兒)로서 父親 감찰공(監察公) 휘(諱) 해(諧) 자(字) 和伯 母親 동래정씨(東萊鄭氏)와 충비(忠婢) 福伊의 등에 업혀 世居地 果川과 通津을 떠나 외가댁인 전남 함평군 월야면 월악리(全南 咸平郡 月也面 月岳里)에 이르러 피난살이를 한 것으로 짐작됩니다. 앞서 5年전 壬辰年 4月 13日(1592년)에 왜적 四萬名이 釜山에 상륙 침공한지 30日만에 서울 도성이 함락되고 宣祖大王은 비빈신료(妃嬪臣僚)들과 함께 평양을 거쳐 의주까지 몽진하시게 되어 왜적 일부가 함경도까지 석권하게 되니 비참 처참한 전란에 민생은 도탄에 빠지고 국운은 풍전등화(風前燈火)와 같이 되었습니다. 이때에 明나라에서 구원병이 내도하여 李如松제독이 평양에서 왜적을 격퇴시키고 점점 왜적이 후퇴하여 京都를 탈출한지 1年6個月만인 癸巳年 10月에는 宣祖大王이 환도하게 되었으나 궁궐은 전부 타버렸습니다. 그동안 화의(和議)가 진행되고 왜적이 경상도 남해안지방으로 후퇴 둔취(屯聚)하고 있었는데 丁酉年 正月에 화의가 결렬되어 이번에는 호남지방을 강타 침공하기에 이르렀던 것입니다.
進士公 諱 友俊께서는 비문 기록을 보면 73세나 되는 老母를 모시고 혼자서 宗人들과 같이 保守하셨고 그때 46세이고 통진약산(通津藥山)에서 우거피난(寓居避難)하신 것으로 짐작되며 딴 가족들은 京畿일대가 적진중에 점령되었으므로 果川이나 통진이나 지척지간인데 견뎌낼 수 없기에 木船으로 호남 영광 함평(靈光咸平)으로 피난갔을 것으로 짐작되며 정유년 再亂이 갱발(更發) 하기까지 외가댁인 함평에서 居留하였을 것으로 짐작됩니다. 丁酉年에는 호남일대를 北上 침공하여 옴으로 함평에서 쫓겨나와 구갑포(九岬浦)에서 목선을 구해 타고 동래정씨 진주정씨(東萊鄭氏 晋州鄭氏) 가족과 동반하고 서울방면으로 북상하여 피난을 떠난 것이 9월 16일 이었습니다. 일기가 불순하고 풍랑이 심하여 임백도 재원도(林栢島 載元島)에서 몇일씩 체류하고 간신히 영광 칠산(靈光 七山)바다 묵방포(墨防浦)에 이르렀을 때에, 적선(賊船)에게 포위당하고 말았습니다.
벼락같은 위급한 찰라에 삼세아 광렴(三歲兒 光濂)을 늙은 충비 복이에게 안겨주며 오직 하나뿐인 沈씨댁 혈맥이니 정성껏 양육할 것을 부탁하며 왜적에게 욕을 당하느니 차라리 목숨을 던져 절개를 지키겠다 하시고 태연자약하게 바닷물에 뛰어들어 사생전절(捨生全節) 하셨습니다.
친정어머니 함양오씨(咸陽吳氏) 친정동생 권척처 정씨(權陟妻 鄭氏)등 12烈婦가 丁酉年 9月 27日 동일 동시에 앞을 다투어 투신해중 시사여귀 사생전절(投身海中 視死如歸 捨生全節) 하셨습니다. 아! 장하도다. 12烈婦의 추상열일(秋霜烈日)같은 장열한 節義는 萬古의 귀감(龜鑑)이 될 것입니다.
당시 창황(蒼黃)하고 비참 처참한 戰亂中에 충비 복이가 어떻게 적진을 탈출 하였으며 九死一生으로 기적적인 천우신조(天佑神助)와 천백세조영(千百世祖靈)의 음덕임을 뼈저리게 뉘우치고 毛骨이 송연할 뿐이오며 泰山보다 높고 河海보다 깊은 은공을 보답할 길이 없습니다. 앞으로 충비로서 존숭예우(尊崇禮遇)하는 것이 지은보은(知恩報恩)하는 도리이라고 명심하고자 합니다. 왕석국가(往昔國家)에서 충효열 삼강(忠孝烈 三綱)을 권장하는 뜻에서 신속삼강행실(新續三綱行實)에는 도서본(圖書本)에 그림까지 그리고 언해(諺解)까지 한글로 번역하였으며 肅宗大王實錄 卷11에도 12烈婦에 대한 기록이 소상히 나 있습니다.
 신속삼강 행실열여도권팔(新續三綱行實烈女圖卷八), 61페이지, 열부동익(烈婦同溺).
정씨 심해지처, 정씨 권척지처, 개경도인, 이씨 정함일지처, 박씨 함일지자, 경득지처, 이씨 함일차자, 희득지처, 처녀 정씨 함일지녀, 오씨 정운길지처, 이씨 정주일지처, 김씨 정절지처, 정씨절자 호인지처, 개 함평현인. 변씨 오광지처, 오씨 김한국지처 개 무장현인. 정유왜란 동선피적적추급십이절부 개투수이사상조정문(鄭氏 沈諧之妻, 鄭氏 權陟之妻, 皆 京都人. 李氏 鄭咸一之妻, 朴氏 咸一之子 慶得之妻, 李氏 咸一次子 喜得之妻, 處女鄭氏 咸一之女, 吳氏 鄭雲吉之妻, 李氏 鄭主一之妻, 金氏 鄭節之妻, 鄭氏 子 好仁之妻, 皆 咸平縣人. 邊氏 吳光之妻, 吳氏 金翰國之妻, 皆 茂長縣人. 丁酉倭亂 同船避賊 賊追及十二節婦 皆 投水而死上朝旌門). 먼저 충남 아산군 음봉면 산동리에는 숙종 19年 癸酉에 因 기손두상언특명 정문열녀 증 승훈랑 사헌부 감찰 심해지처 정씨지여수차 중수(其孫枓上言特命 旌門烈女 贈 承訓郞 司憲府 監察 沈諧之妻 鄭氏之閭數次 重修) 하였으나 古色이 창연(蒼然)하게 우뚝 서서 관천절의(貫天節義)가 유방백세(流芳百世)할 것이며 후손이 自作一村하여 거금(距今) 394年이나 世居하고 있고 숭고하신 절의를 永慕하고 있습니다.
한편 함평군 월야면 월악리에는 동래 진주 양정씨의 팔열각(東萊 晋州 兩鄭氏의 八烈閣)이 웅장하게 건립되어서 장열하신 절의를 永世不忘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권척처 정씨, 오굉처 변씨, 김한국처 오씨(權陟妻 鄭氏, 吳宏妻 邊氏, 金翰國妻 吳氏)는 12烈婦중의 인물임에는 틀림없으나 자손이 몰락함인지 알 수 없고 궁금하기만 합니다. 宣祖 31年 戊戌에 적괴 풍신수길(敵魁 豊臣秀吉)이 死去하니 왜적이 철귀(撤歸)하고는 칠년전란이 終末을 告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國運이 비색(否塞)하여 왜란이 종결한지 39年만에 仁祖14年 丙子 12月 9日 엄동설한에 호병삼만(嚴冬雪寒에 胡兵三萬)이 압록강을 건너 南下 침공하여 옴으로 王은 창황이 남한산성(南漢山城)으로 피신하였으나 1月30日에는 仁祖가 굴슬(屈膝)하고 항서(降書)를 올렸으니 왕욕국치(王辱國恥)에 통탄(痛嘆)할 뿐이며 丙子胡亂 당시의 가정사정을 살펴보면은 부정공 휘 광렴(副正公 諱 光濂)께서 3歲 乳兒로서 정유재란을 만나 모친이 순절함에 충비 복이의 保育으로 九死一生하여 일루의 생명만 겨우 보존하고 장성하여서 안정될만 하니까 42세때에 또 丙子胡亂이 돌발하여 北風寒雪에 적진을 피하여 남하하게 되고 牙山落鄕하여 定着居住하게 된 것으로 인정됩니다. 비통한 적개심과 원한을 품으신 채 파란만장한 일생을 牙山郡 陰峰面 山洞里에서 마치신듯 山東후록 子坐에 배위 東萊鄭氏와 합폄으로 봉안되어 계십니다. 근래 과열된 자유와 배금사조(拜金思潮)로 인하여 傳統美德인 崇祖敬神하는 기강마저 퇴색되어 가는 때를 당하여 未曾有의 國難인 壬辰倭亂 丁酉再亂 丙子胡亂 당시의 進士公 監察公 副正公등 連三代의 血淚로 얼룩진 간난신고(艱難辛苦)하신 형극(荊棘)의 역사를 탐구함으로서 萬世不變의 忠孝烈 三綱理念을 앙양고조(昻揚高調)하고 溫故而知新하기를 念願하는 바입니다.
時維庚午年 仲秋(西紀1990年)
靑松沈氏 山洞里 花樹會 謹立
都有司 十代孫 彦紹 泣血 謹撰 竝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