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조판서공(휘 단)묘지명 |
十四世祖 判中秋府事兼 吏曹判書 致仕奉朝賀 諱 檀 墓誌銘竝序
公諱檀字德輿靑松之沈自高麗文林郞衛尉寺丞諱洪孚再傳而至諱德符再爲高麗侍中靑城伯入聖朝特進領三司辭乃以舊爵就第卒諡定安歷領議政諱溫領議政諱澮判官諱湲舍人諱順門修撰諱達源觀察使諱銓進士諱友俊平市令諱諝至諱光沔寔公之考也後以公貴追 贈考領議政祖吏曹判書曾祖吏曹參判議政公娶海南尹氏卽孤山先生禮曹參議忠憲公諱善道之女以我 憲文大王二十三年乙酉六月六日生公于海南之白蓮洞三歲而孤忠憲公撫敎之幼而克莊嶄見頭角十八成進士二十九釋楬先是忠憲公論邦禮忤黨人至是時議屈公付成均館乙卯薦拜承政院注書俄陞典籍敭歷臺省丁巳入弘文館拜修撰時天官郞缺銓長意有屬以公故難之公聞卽陳疏乞出外便養朝議又以內輕奏 上猶特許之拜肅寧縣監縣弊甚公約束科條使猾吏不得肆於是政成凡事齒上營營之胥徒例驕悍然嚴憚公奉行惟勤雖他邑賂遺輒逡巡曰愼無聞於肅寧知縣也後以微事坐罷上特命仍其任異數也然竟辭遞戊午敍拜修撰移吏曹佐郞己未移校理復入吏曹由佐郞陞正郞庚申由議政府檢詳陞舍人移應敎夏國有大獄黨人又乘間入公謫配西邊之陽德先時有謗書之變首相許積入言于 上公曰旣是匿名不過是妖言不可取信至是黨人者捃摭公言截去首尾反謂驚動上聽請竄啓十上不許旣而筵臣有力擠者故有是命己巳宥叙拜校理召還朝公十年居謫備諳凋瘵多所陳白 上皆嘉納尋移副應敎夏除水原府使時有 坤殿出宮之變李參知后定抗章極言爲喉司阻搪乃嘅然貽公書曰國事到此只自喑啞流涕三司伏閤百官庭籲一日便停寧有是哉公答曰臣子未能血誠匡救貽累 聖德只得成就朴泰輔一人李公之於公素相許云冬拜吏曹參議庚午 特旨擢授兵曹參判移都承旨卽陞嘉義階拜大司諫移大司憲啓曰今長城縣民田爲新生大君宮所橫奪亟宜還給 上從之秋出拜平安監司爲政嚴而惠務收人心法旣正矣雖關宮禁事一切不貸未朞貨藏盈裕而民胥悅壬申罷俄拜大司諫白 上發儲儲賑兩西飢民癸酉出拜京畿監司甲戌遞乙亥丁大夫人憂丁丑服除己卯除三陟府使俄而棄歸至辛巳爲死囚閔彦良所誣于斯時也 國有喪紀壺儀虛而後宮張氏方廢爲嬪譌言動而民志惑或謂嬪旣曾毋臨服制合與諸嬪不同至有疏請者公嘅曰士大夫不可爲後宮陳疏况禮意有大不然者乎至是彦良則死中圖生惟援引衆多祈中時旨乃曰有一種者聚謀將疏請復位正宮而沈某亦與知旣而鞫彦良無實獄官相顧曰沈某之唾罵服制疏人共誦傳况復位疏耶遂白 上勿問後臺章操持不置謫配海南縣癸未移寧海甲申夏憫旱疏釋幽寃諸臣同辭請放乃宥還築于端門之外藥峰下扁曰追尤辛卯有叙命癸巳拜同知中樞府事己亥陞資憲階庚子拜知中樞府事例入耆社 景廟元年辛丑拜吏曹判書促 命召辭不許 側席而竢公之入公感激洪造黽勉造朝頎然鶴髮觀者加額時秉局者惟汲汲然得失是患易力湥嚌必欲擊去 上下批誨責曰吏判之心只在寅協有何可疵今艱虞溢目 宗社將危朝廷不思共濟爻象不佳豈不寒心哉 嚴敎屢下臺啓始停俄聞 王世弟夜接宮僚言閹竪匈圖事公急趨求對曰逆閹逼我 貳君一日不誅 宗社有一日之憂宜卽正法以洩神人之慣大臣諸臣師錫曰檀言是也 上命斬之公仍陣戒曰宦寺驕橫必亡之兆况今交亂兩宮不但驕橫而己惟 殿下益加友愛嚴加隄防退又上章微勉爲喉司所阻凡八召不起大臣箚陳公不起狀以逆許遞壬寅拜禮曹判書時有名會議私親追報斥大臣議略曰謹考璿源譜略私親名號以嬉嬪書臣之美易 睿覽今據此爲正恐無不可自春秋四妾母以下不過隆於私親者惟漢章與晉明也晉明尊所生爲建安君然程伊川論濮王典禮云先朝之封豈陛下之敢易爵秩之命豈 陛下之敢加據此則晉明所處亦不當引矣我朝 元宗大王之未追崇也定遠之下只加大院改郡夫人爲府夫人 先朝封爵未敢易此恐無異例也然疑若別有殊稱如大院之例而旣無稱情之文則不當臆以忘加寧不如遵漢章故事只擧嬉嬪之號恐爲得當俄而寢會議之 命不果上歷大司憲拜判義禁府事陞崇政階移漢城判尹從來人不事事詞訟多滯或至三四十年之久公悉以久近爲錄循序奏決其權貴豪右之侵奪於民者一以法栽之數月而無留案屈者不敢怨又卹坊民均其役都下賴以安公方職兼 王世弟右賓客聞 東宮欲出閤蒼黃趨詣泣諫半日不得請公進曰 邸下不聽臣等之請老臣不復生出禁門 東宮亦嗚咽曰感賓客至意勉從之俄以微事罷冬叙拜右參贊移判刑曹兼管籌司白 上以逆家沒入財産賠畿民今年田租之半臺官有疎斥大臣者他相請罷臺官以安大臣心公白曰稱大臣之美易論大臣之過難今一語纔及輒從而罪之言路不幾塞乎時相愧謝癸卯又拜禮曹判書乞骸骨不報甲辰秋拜判尹 景廟昇遐禮多變節凡有疑輒質於公乃行仍管 殯殿都監敦匠事乙巳陞崇祿階判中樞府事 上幸山陵公承 命守宮有犯蹕者又有方萬規者上疏語逼東朝 上將親鞫時判義禁缺 上諭政官曰今擬判金吾不可如昨日爲也盖前此政官白公不可注擬而 上心非之故也公果拜判義禁仍促召公辭 上責之曰此豈人臣避嫌時時日己晩 上己臨帳殿公不得已入謝 上顧問曰壓沙之刑於法有諸公對曰無之臣不知刱自何代實非聖世象刑今 殿下斷廢之漢文肉刑之除不必專美 上卽命有司刊去永爲式獄畢 上曰判義禁來公進伏中階 上曰又進遂及 御座前 上曰近日事何如公曰臣耗矣無以仰答第伏聞 聖上責誨諸臣之敎諄諄以朋黨爲戒此國家之福破朋黨之道一公字而己公之不行久矣然在 殿下一心轉移間也仍陳建極之義 上嘉納俄而朝著變置大臣遞付判樞公例當降授知事政官以公被彈不得付職奏 上特命爲知事黨人又謂壬寅之獄移鞫本府意在鍛鍊請幷竄治獄諸臣移鞫之事實當時相臣之爲之也乃若公則方血訴 東宮朝而入日昃始出鞫己移矣今混而罪之抑獨何心初配窮北鏡城 上命改以西道遂謫朔州臺官又論喉司之不能繳還 上曰事事如此太阿之柄安在黨人見 上眷不衰持之愈急遂捃摭鄭宇寬誣招以爲勘宇寬者亦任獄之死罪也構引按治諸臣爲緩獄計旣而訊宇寬宇寬服至是輳成公案請拿 上曰毋貽我殺耆臣名旣又請鞫上曰因此起士林之禍國將安乎臺啓旣停復發 上曰甚矣凡累百啓不 許丁未天鑑快昭起公拜工曹判書公疏辨前後被誣 上答曰向日事予已洞燭觀卿疏尤覺曉然公見世路益險無意從宦遂寓矜陽村舍移刑曹判書辭不起大臣白曹務多滯上曰予知某之爲人年雖高剛且直非凡人也然而不來姑遞戊申又拜工曹判書進階輔國付判中樞仍判工曹又辭三月有逆變公馳赴 闕入對大臣言安民公曰先去虐吏大臣又言儲竭公曰務在節用及賊陷淸州殺帥臣長驅至金鳥坪都下鼎沸 上有憂色公進曰此不過羣盜嘯聚王師一出不啻如刈草菅然臣所湥憂惟 上心也 上心一動民志不可復定又曰 殿下仁慈有餘而或欠剛克必寬猛相濟可以折猖獗安反側 上嘉納夏 引見衆臣訪以良丁貢布之弊公對曰今昇平久生齒繁然軍額日縮此投冒夥也若搜括諸道私調者充其數更安有隣閭族屬之橫侵哉 上曰得無騷擾公曰臣曾典郡邑己驗之 上曰口達不如文字詳公退以餘意獻議大臣又請加鑄錢公進曰不可貪風起賄途啓盜賊熾富益富貧益貧皆錢之由其害不可毛擧臣愚謂舊錢亦宜亟罷况加鑄乎諸臣猶力請不許盖以公言也己酉因次對進曰一國土田元有地部定賦近來諸宮 衙法外私稅浸廣是以正供歲縮宜一切革去 上顧大臣曰何如僉曰然翌日 上手書命自內需司以下準法悉罷又拜判義禁上疏乞骸 上曰不可强以劇任 命遞庚戌又七疏乞益力批曰三朝舊臣予不忍許今陳懇至此特 允卿願遂以西樞致仕奉朝賀 賜七品祿月致酒肉國典也公肩輿詣闕謝 恩 上引見溫諭公進曰當今事無急於保嗇 聖躳周公作無逸獻成王以勤勞爲壽考之道其曰嚴恭寅畏不敢荒寧卽無逸之實而享國永年乃其效也然所謂勤勞不得其要則繁文節反有妨於頤養精神論語曰居敬而行簡敬則氣質日强簡則精神內凝所守者至約而能御煩所處者至靜而能制動今當辭退敢以此獻規 上爲之感嘆掖隸扶下陛道路觀者咸咨嗟太息云夏五月二十七日考終于追尤堂享年八十六訃聞 上震悼撤朝巷市賵賻如儀以是年十月十八日窆于長湍阿也谷辛坐之原公頎而晳眉眼炯炯顧眄煇如也氣度端整動止不苟孝友因心事大夫人服勤如童稚及居憂公己老矣猶衰麻不去身伯氏早夭事丘嫂誠摯凡出宰必奉輿與俱又於親族吉匈同患其孤而貧者爲之嫁娶遠邇親疎以公爲歸祭先一遵朱文公家禮雖耄期之後非疾病必躳親時節上墓不憚道遠先塋之廢祀者皆謀置祭田若守奴或世遠迷失則至誠求訪修兆竪碑凡同祖族姓莫不講信修睦以時歡會平居手不釋小學一部曰吾聞諸忠憲公做人樣子都在是雖公務鞅掌必投隙披翫終日端坐衣帶必飭人未嘗見其跛倚性儉不樂豊侈又不曾過約干譽居官盡職若莅家事生平所尊仰惟許文正公穆而己人雖一世之望不以虛譽而肯貸也公之許身五十有七年而從仕不滿一紀亦未嘗坐廟朝施爲然臺輿之誦名慕德久而不替識務者以爲方今奉國勤民惟沈尙書一人也夫人廣州李氏遁村先生集之後高祖諱德馨官領議政諡文翼世所稱漢陰先生者也曾祖諱如圭官判決事祖諱象乾官都事考諱允元官別檢別檢娶礪山宋氏諱孺孝之女以戊子正月初八日生夫人自幼秉志淡泊於玩好無所屑也十四而孤宋夫人自刃夫人獨於昏夜號泣救護 喪具無不手辦人稱壯男子所不及十七于歸盡禮姑嫜敬愛長姒匕尺與共弊衣單裳常如韋布家人婢僕之賤未嘗加之箠楚而大小恪謹壺內肅如也甲申自寧海隨公歸道病革以六月初一日卒于眞寶驛舍享年五十八葬于漣川後遷以祔公塋公有四男三女男長得天承文正字早卒次得經生員出後伯父有學行亦早卒次得行佐郞次得成生員女長適李相琦次適進士柳泰章次適朴興新側室有二女長適吳海運次幼得經取族兄子埜爲後文科得行有一女適任珗得成有二女長適丁志聖次幼李相琦有一男善壽柳泰章有二男三女男完基最基女長適姜必東餘幼朴興新有一男二女男台甲女長適南穎老次適姜世東埜有一男三女皆幼丁志聖有一女幼李善壽有二男世翼世迪柳完基有一男二女幼朴台甲有一男幼南穎老有一男一女幼銘曰 君子憲憲亦旣令儀黃髮無諐來譽彰施循時益靖以聚以正而綱必綱如裘則領萃如引吉厥巋穼久需或險前利恒何咎彼翕而若風撼樹旣裕其行乃確乃守嶷嶷孤山夙仰攸服漣水淸淪我泝我濯受用有本路徑寬廓寤寐前修謂庶有得本末在是遇世何與余詩擧重用示來世 14세조 판중추부사겸 이조판서 치사봉조하 휘 단(檀) 묘지명 公의 휘는 단(檀)이요 字는 덕여(德輿)이니 靑松沈氏이다. 고려 文林郞公으로서 위위시승(衛尉寺丞)을 지낸 휘 홍부(洪孚)로 부터 비롯하였으며 2代를 전하여 휘 덕부(德符)께서는 고려시중(高麗侍中)을 두번 지낸 청성백(靑城伯)으로서 李氏朝鮮 초에 領三司로 특진 시켰으나 사양하고 이에 옛벼슬로써 집에 머물다가 마치니 시호가 定安이다. 영의정을 지낸 휘 溫과 영의정을 지낸 아들인 휘 회(澮)와 判官인 휘 湲과 舍人인 휘 順門과 修撰인 휘 達源과 관찰사인 휘 銓과 進士인 휘 友俊과 平市令 휘 서(諝)를 거쳐 휘 광면(光沔)에 이르렀으니 이 분이 공의 아버지인데 뒤에 공께서 귀하게 되어 추증으로서 아버지는 영의정 조부는 이조판서 증조부는 이조참판이 되었다. 議政公께서 海南尹氏에게 장가드셨으니 곧 孤山선생으로 예조참의이신 忠憲公 尹善道의 딸이다. 우리 憲文大王(인조) 23年(1645) 6月 6日 海南 白蓮洞에서 공을 낳았는데 3세 때 아버지를 여의자 외조부이신 충헌공께서 보살피고 가르쳤는데 어려서 부터 씩씩하게 두각이 두드러지더니 18세 때 進士가 되고 29세 때 문과에 급제하였다. 이에 앞서 충헌공께서 궁중예법을 논의할 때 반대 당인들에게 거슬림을 당한 터라 이에 이르러 당시의 의론이 공을 눌러서 성균관으로 밀어붙였다. 乙卯年(1675)에 천거로써 승정원 注書가 되고 얼마 안 되어 전적(典籍)으로 올랐다. 간관(諫官)들의 동정을 눈여겨 본 다음 丁巳年(1677)에 弘文館으로 들어가서 修撰이 되었는데 이 때 吏曹佐郞의 결원으로 이조판서께서 위촉하고자 하는 사람이 있었으나 公 때문에 어려움이 있었다. 공이 이 사실을 알고 즉시 소를 올려 외직으로 나가서 조정의 의론에 따르고자 내직을 가볍게 말씀드려 상감께서 오히려 특별히 윤허하여 숙녕현감(肅寧縣監)이 되었는데 고을의 폐단이 심함으로 공께서 여러가지 조항을 만들어서 교활한 관리들이 함부로 날뛰지 못하게 하였다. 이에 정사가 잘 이뤄지고 모든 일들을 관영으로 상신해 오게 되니 영내의 아전들이 종래대로 교만하고 모질게 공을 헐뜯었으나 공은 행정을 더욱 부지런히 하여 비록 타군에서도 뇌물을 주면 우물쭈물 망서리면서 숙녕현감에게 소문나지 않게 삼가도록 하였다. 뒤에 사소한 일로 물러나게 되었으나 상감께서 특명으로 유임하게 하였으니 특이한 예우였다. 그러나 끝내 사직하고 戊午年(1678)에 다시 수찬에 임명되었다가 이조좌랑이 되고 다음해에 校理로 옮겼다가 다시 이조로 들어가서 좌랑으로부터 정랑이 되고 庚申年(1680)에 의정부 검상(檢詳)에서 舍人으로 오르고 應敎로 옮겼다. 여름에 나라에서 큰 옥사가 있었는데 반대당에서 또 틈을 타고 들어와서 공이 서변(西邊)①의 陽德으로 귀양가게 되었다. 이에 앞서 비방하는 글이 나도는 변괴가 있었는데 領相 허적(許積)이 입궐하여 상감께 말씀드렸으나 공은 말하기를 『이미 익명으로 날조 되었으니 이것은 요망한 말에 지나지 않으므로 취신할 바가 못 된다.』고 하였다. 그러다가 이번 기회에 당인들이 공이 한 말씀들을 주어 모아서 앞뒤를 잘라 버리고 도리어 경동케 하였으며 상감께서는 남들이 귀양 보내고자 계장(啓狀)을 열차례나 올렸으나 윤허하지 않았는데 이미 고관이 유력하게 배척하여 결국 이런 명을 내리게 되었었다. 己巳年(1689)에 죄를 용서하고 교리를 삼아 조정으로 불러드렸는데 공이 10年 귀양살이에서 깨달은 많은 병통을 모두 보고하여 상감께서 다 납득하셨다. 얼마 안 되어 副應敎로 옮겼다가 여름에 水原府使로 나갔는데 이때 중전께서 출궁 당하는 변이 일어났다. 참지 이후정(參知 李后定)이 극언으로 항변하는 글을 올렸는데 言官들이 가로 막아서 이에 탄식하며 공에게 글을 건네주며 이르기를 『국가가 여기에 이르렀으나 다만 벙어리가 되어 눈물만 흘리고 三司②에서는 합문 앞에 엎드리고 백관들은 궁정에서 울부짖으며 온종일 정체하니 정녕 이런 일이 있으리오』 고함에 공이 대답하였다. 『신하된 자가 능히 피와 정성으로 바르게 구원하지 못하고 성덕에 누를 끼쳤으며 다만 성취한 사람은 박태보(朴泰輔) 一人 밖에 없었다』 이참지는 공에게 평소 서로 허심하는 사이였다. 겨울에 吏曹參議가 되고 庚午年(1690)에 특별히 뽑히어 병조참판이 되었다가 都承旨로 옮겼으니 곧 가의(嘉義) 계위에 올라 大司諫이 되고 大司憲으로 옮긴 다음 계장을 올려 이르기를 『지금 장성현(長城縣)에서 백성의 토지를 새로 생긴 대군 궁소를 위하여 횡탈당했으니 빨리 돌려 줌이 마땅하다.』 하여 상감께서 허락하였다. 가을에 平安道監司가 되어 나갔는데 정사를 엄하게 다스려 백성에게 혜택을 입혀 인심을 얻고 모든 법을 바로 세웠다. 비록 궁궐과 관계되는 청탁이라도 일체 용납하지 아니하여 1年이 채 못 되어 재정이 넉넉하게 저장되어 관민이 모두 즐거워 하였다. 壬申年(1692)에 조금 쉬었다가 바로 대사간이 되었는데 상감께 아뢰어 그간 저장했던 창고를 열어 兩西③의 기민을 구휼하였다. 癸酉年(1693)에는 京畿監司가 되고 다음해에 교체되었으며 乙亥年(1695)에는 어머니 상을 당하여 삼년상을 마친 다음 己卯年(1699)에 삼척부사(三陟府使)로 나갔다가 바로 관직을 버리고 돌아왔다. 辛巳年(1701)에 사형수 민언량(閔彦良)의 무고 사건이 있었는데 이 때 나라에 국상이 있어서 중전이 비었는데 후궁인 張氏를 방금 폐위하여 빈(嬪)을 삼았으나 헛소문이 일어나서 백성들이 의혹하고 혹은 말하기를 장빈은 증조모의 복제에 임했으니 다른 빈궁과는 달리해야 된다고 소청한 자가 있어서 공이 개탄해 말하였다. 『사대부가 후궁을 위하여 소를 올림이 옳지 않거늘 하물며 예에 어긋남이 크게 있음이리오.』 이에 이르니 언량은 곧 죽음에서 살아나게 되고 구원해서 끌어 내기를 많이들 바라다가 당시의 뜻에 맞았으니 이에 말하였다. 『같은 뜻을 가진 자는 모이라. 장차 소청하여 정궁으로 복위를 도모함에 沈某 역시 함께 알고 있다.』 이미 언량의 취조에 실효가 없게 되자 옥관들이 서로 돌아보며 심모의 복제에 관한 소를 침뱉고 욕설함을 사람들이 함께 듣고 전했거늘 하물며 복위소일가보냐. 드디어 상감께 아뢰었으나 문책하지 않았다. 뒤에 대간(臺諫)의 정리가 조정이 되지 못하여 海南縣으로 유배되었다가 癸未年(1703)에 寧海로 옮겼는데 다음해 여름에 가뭄이 심하여 밝혀지지 않은 억울한 죄를 풀어주도록 소가 올라가고 모든 관원이 모두 방면할 것을 청원하여 풀려나게 되었으나 돌아와서는 端門밖 藥峰아래에 집을 짓고 현판을 추우(追尤)라 하였는데 辛卯年(1711)에 서용하는 명이 내렸으며 癸巳年(1713)에 知中樞府事가 되고 관례대로 기로사(耆老社)④에 들게 되었다. 景宗元年인 辛丑年(1721)에 이조판서를 배하여 재촉하여 불러들였으나 사양하니 허락하지 아니하고 상석을 비워놓고 공이 입궐하기를 기다리니 공이 크게 감격하고 힘써 조회에 나아가니 학발에 헌걸찬 모습을 모든 이들이 이마에 손을 얹고 보더라. 당시 요직에 있는 이들은 오직 부지런하게 득실을 근심하며 힘을 바뀌 깊이 생각하고 반드시 물리치고자 노력하니 상감께서 타이르시며 말씀하기를 『이판(吏判)의 마음은 다만 화합에만 있었으니 무슨 흠이 있으리오. 방금 어려운 일들이 눈앞에 넘치고 종사가 위태롭거늘 조정이 함께 구제됨을 생각하지 않으니 효상⑤이 좋지 못하여 어찌 한심하지 않으리오,』 하시고 엄한 말씀이 여러 번 내리자 대간의 상소가 비로소 멈추었다. 얼마 아니되어 王世弟께서 밤에 궁녀들과 어울렸는데 말하기를 환관들이 흉칙한 일을 꾸미고 있다는 소문을 듣고 공이 급히 나아가 독대를 청해 말하기를 『역적 환관이 우리의 둘째 임금을 핍박하니 하루 동안 뵈옵지 않으면 종사에 하루의 근심이 되니 마땅히 정법을 시행하여 神人의 분을 덜게 해야 됩니다.』 대신과 제신들이 공의 말이 옳다고 하여 상감께서 참하도록 명하였다. 공이 인하여 경계해 말하기를 『환관들이 교만하게 날뛰면 반드시 망할 징조이라 하물며 이제와서 양궁을 교란케하니 다만 방정 맞을 뿐만 아니라 오직 전하께서는 더욱 우애를 더하시고 엄하게 주위를 단속해야 합니다.』 물러난 뒤에 다시 글을 올리고 언관들의 방해함을 염려했다. 무릇 여덟번이나 불렀으나 불참하니 대신이 공의 불참함을 들어 문제를 삼아 거역했음으로 교체되었다. 壬寅年(1722)에 예조판서가 되었는데 이 때 회의를 열어 사친희빈(私親嬉嬪)을 추숭하라는 명령이 있었으나 대신들의 논의 끝에 배척되었으니 그의 대략 내용에 삼가 선원보략(璿源譜略)⑥을 상고하니 사친의 명호가 희빈으로 적혔으니 신의 대범한 견해로는 이제 이를 근거삼아 정당하게 하여 아마도 잘못됨이 없을 것입니다. 春秋로부터 사첩모(四妾母) 이하 사친을 높인데 불과한 것은 오직 한장(漢章)과 진명인데 진명은 소생을 높혀 建安君을 삼았으나 그러나 程伊川은 박왕전례에 이르기를 『앞조정에서 봉해 놓은 것을 이미 폐하께서 벼슬 서열을 바꾸도록 명령하니 어찌하여 폐하께서 감히 가작하리오』 하였으니 여기에 의거할 것인즉 진명의 처한바는 또한 인용을 잘못한 것입니다. 우리 조종에 元宗大王(인조의 생부)을 추숭하기 전에 定遠 아래에 다만 大院을 더하고 郡夫人을 고쳐서 府夫人이라 했으니 앞조정에서 봉작함을 감히 바꾸지 못했으니 이는 아마도 이례가 아닐 것입니다. 그러나 저같이 별다르게 특수 호칭하여 대원군이란 선례가 있었으나 이미 情을 지칭한 문서가 없으니 억지로 망녕되히 작위를 더하지 마시고 차라리 漢章의 고사에 따르는 것이 좋을 듯 하오니 다만 희빈이란 호만을 열거함이 아마도 온당하리이다. 이러고 얼마 후에 의론이 그치게 되고 이 안건을 상정하지 말도록 명하였다. 大司憲을 거친 다음 判義禁府事가 되어 崇政 계위에 오르고 漢城府尹으로 옮겼다. 종전부터 사람들이 일을 처리하지 않아서 송사 사건이 많이 밀려 있어서 혹 3, 40년씩 오래된 것을 공이 모두 오래된 순서대로 목록을 작성하고 순서대로 결제해 갔으며 아무리 지위와 권력의 침해가 백성을 탈취하더라도 한결같이 법대로 처리하니 두어달만에 남아있는 사건이 없어지고 청원한 자들도 감히 원망하지 못했다. 또한 궁한 사람을 구휼하고 부역을 고르게 매겨 모든 이들이 편안해졌다. 공은 지방관으로서 왕세제 右賓客을 겸하였는데 동궁께서 합문을 나가고자 한다는 소문을 듣고 정신없이 쫓아가서 울면서 이끌고 반나절을 간하였으나 고집을 부리기에 공이 만류하며 말하기를 저하(邸下)께서 듣지 않으시면 이 늙은 신하는 다시 살아서는 금문밖으로 나가지 않을 것이라고 하니 동궁 또한 흐느끼면서 빈객의 지극한 뜻에 감동했다고 하며 따라 들어왔다. 얼마 안 되어 사소한 일로 물러났다가 겨울에 右參贊이 되었으며 형조판서 겸 민원부서를 겸직하게 되었다. 상감께 아뢰어 범법자들의 몰수 재산으로써 경기도민에게 나누어 주게되니 한 해 세금의 반을 줄이게 되었다. 臺官이 소를 올려 대신을 배척함에 또다른 대신이 대관의 파직을 청하여 대신의 마음을 안정시켰으며 공이 이르기를 『대신의 장점을 칭찬하는 것은 대신의 허물도 거론하기 쉬우니 지금의 한 말씀이 어려우며 이에 따라 죄 주게 되면 언로를 거의 막지 못할 것이리라』 하니 당시의 재상이 부끄럽게 사과하였다. 癸卯年(1723)에 다시 예조판서가 되었는데 건강 때문에 보답할 수 없다고 빌었으며 이듬해 가을에 判尹이 되었는데 경종께서 승하하고 예도가 많히 변절되었으니 범절에 의문이 있을 때는 공에게 묻게 되고 공이 인해 빈전도감(殯殿都監)을 관장하게 되어 치산을 주관하였다. 乙巳年(1725)에 崇祿 계위에 오르고 判中樞府事가 되었다. 상감께서 산능에 행차하시고 공이 명을 받들어 궁궐을 수호했는데 궁궐길을 범한 자가 있었으며 또한 방만규(方萬規)란 자가 상소를 했는데 말이 東朝⑦를 핍박했는지라 상감께서 장차 친국할 때 당시 판의금부사가 결원이어서 상감께서 정원에 유시하기를 지금 판의금을 지난날과 같이 함이 불가하지 않느냐고 물었으니 대게 이에 앞서 정관들이 공에게 적용시킴이 불가하다고 아뢰었으나 상감의 마음은 그렇지 않은 까닭이었다. 공이 과연 판의금이 되고 인해 재촉하여 공을 불렀으나 공이 사양하니 상감께서 꾸짖으시며 이르기를 『이 어찌 신하로서 시기를 꺼리고 피하느냐. 시일이 늦어지지 않느냐?』고 하시며 대전에 임하여 기다림에 공이 부득이 입궐 사례하였다. 상감께서 돌아보시면서 물어 가로되 『압사(壓沙)의 형벌이 법전에 있느냐?』 공이 대답하기를 『없습니다. 신은 어느 대부터 시작되었는지 알지 못하나 실로 성대의 象形은 아니오니 전하께서 단폐하시게 되면 漢文帝의 肉刑을 제거함이 반드시 돋보이지 않을 것입니다.』 상감께서 즉시 유사에게 명하여 지워버리고 영원히 형법에서 없애 버렸다. 상감께서 판의금은 들어오라 하시어 공이 중간 뜰에 나아가 엎드리니 상께서 더 가까이 오라하여 드디어 어좌 앞에 이르니 상께서 말씀하시되 『근일의 일이 어떠하냐?』 공이 아뢰기를 『신이 쇠모하여 우러러 답변할 바 없아오나 엎드려 듣자오니 聖上께서 신하들에게 순순히 붕당(朋黨)⑧으로써 경계를 삼으시니 이는 국가의 복이요, 붕당을 혁파하는 도는 公자 하나 뿐입니다. 공도가 행하지 못한 지 오래이나 전하의 한마음이 옮겨오는 사이에 있나이다.』 인해서 지극한 의리를 세우도록 품신하여 상께서 가납하였다. 얼마 후에 조정에 인사 이동이 있어 대신이 바뀌어 判樞가 되고 공 또한 知事로 강등되었는데 정관이 공에게 탄핵하여 부득이 전직되었으며 상감께 아뢰어 특명으로 지사가 되었다. 당인들이 또다시 壬寅年의 獄事를 들고 나와 본부에 국청(鞫廳)을 옮기니 그 뜻이 단련을 시켜서 귀양을 보내고자 함이었으며 옥사를 다스리는 신하들이 옥청을 옮기고자 한 것도 실상 당시 정승들의 짓이었다. 이에 공같은 이는 바야흐로 눈물로 동궁에 호소하며 아침에 들어갔다가 해가 진 뒤에야 나오게 되니 혼란스럽게 죄를 씌우니 아니 이게 무슨 마음인가? 처음에는 궁벽한 북쪽 鏡城으로 귀양 갔다가 상감의 명으로 西道⑨로 옮기고 드디어 삭주(朔州)로 물러났다. 또다시 臺官들이 뒷말을 없애고 돌려오지 못하게 하자 상감께서 매사가 이같으니 태아(太阿:칼 이름)의 칼자루는 누구에게 있느냐고 함에 당인들이 상감께서 공을 권애함이 쇠하지 않았음을 보고 조치를 더욱 서둘러서 드디어 鄭宇寬을 잡아들여 무고로 문초하여 우관으로서 마감코자 했으니 역시 임인옥(壬寅獄, 辛壬士禍:王位 계승을 둘러싸고 老論과 少論의 朋黨싸움)의 죽을 죄였다. 얽어 끌어넣어 여러 신하들로 억눌러 다스리고 옥사를 누그릴 계획이며 이미 우관을 심문하여 승복을 받았음에 이에 이르러 공에게 안을 짜맞추어 잡아 들이도록 하니 상감께서 내게 노신하를 죽였다는 이름을 남기게 하지 말라 하였다. 이미 국문을 청하니 상께서 이르시기를 이로 인하여 士林의 화가 일어날 것이니 나라는 장차 어찌되는고 하여 대간의 계소(啓疏)가 일시 정지 되었다가 다시 일어나니 상께서 심하도다 하시고 무릇 여러 백번 계장을 올려도 허락하지 않으셨다. 丁未年(1727)에 들어 상감의 심기가 쾌소하여 공을 불러들여 공조판서를 삼았는데 공이 상소하여 전후의 무고하게 당했음을 변명하니 상께서 지난 일들은 내가 이미 통촉하고 경의 소를 살펴보니 더욱 확연히 깨닫겠도다 하셨다. 공은 세로가 더욱 험한 것을 보고 벼슬할 뜻이 없고 드디어 陽村 집으로 물러나서 형조판서로 옮겨주었으나 사양하고 나가지 않았다. 대신들이 6조의 정무가 많이 침체가 되었다고 아뢰니 상께서 내가 심모의 사람됨을 잘 안다. 나이 비록 많으나 강하고 또한 곧으니 비범한 사람이다. 그러나 나오지 않으니 교체 해야겠다. 戊申年(1728)에 다시 공조판서에 배하고 계위를 輔國으로 올리고 판중추부사를 부쳤으나 인해 공조판서와 판중추부사를 다 사양하였다. 3월에 이인좌의 난인 역적의 변이 있어서 공이 대궐로 달려가서 입대하였는데 대신이 안민에 관해 말하거늘 공이 이르기를 먼저 몹쓸 관리부터 정리하라 하였고 대신이 이르기를 절용에 힘쓸 따름이라 하였다. 드디어 적이 淸州를 함락하고 장수와 관리들은 살해한 다음 승승장구로써 金鳥坪에 이르니 모두들 솥 끓듯 하였으니 상감께서 근심하는 빛이 보임에 공이 이르기를 『이는 떼도둑이 합세한 것이니 조정의 군사가 한번 출정하면 풀대 베듯 할 것이로되 그러나 신이 깊이 우려하는 것은 전하의 마음이오니 상감께서 한번 흔들리시면 백성들이 겉잡을 수 없게 되나이다. 또한 전하께서는 인자하시고 여유가 계시나 혹 강인하심에 흠이 계시니 반드시 관유하시면서 맹렬하게 서로 구제하사 가히 창궐함을 꺾으시고 안정으로 돌려 놓아야 합니다.』 하니 상감께서 가납하였다. 여름에 상감께서 여러 신하를 불러들여서 良丁과 공포(貢布)에 관한 폐단을 물으심에 공이 대답하였다. 『오늘날 오래도록 태평했고 생민이 늘어나서 군비가 줄어들었으니 이는 과소비로 인한 것이오니 만일 각도에서 찾아 거두고 개인 납세자들이 그 액수를 채워주면 다시 어찌 이웃 간이나 일가 간에 서로 침해함이 있으리오.』 상감께서 소요 사건이 없게 하라심에 공이 이르기를 신이 일찍이 궁읍에서 시도해 보았음으로 이미 징험하였나이다. 상감께서 말로 하는 것이 글로 상세하게 기록하는 것만은 못하다고 하셨다. 공이 물러나서 나머지 의견으로써 의론을 드렸으며 대신이 또한 철전을 주조하기를 청원하였는데 공이 나아가서 이르기를 『발행해서는 안되며 이는 탐욕의 풍토가 생기고 재물이 길에 깔리게 되어 도적이 치열해지며 부익부하고 빈익빈은 모두 돈으로 연유될 것이니 그 피해는 한량없을 것입니다. 신의 우견으로는 옛돈 역시 빨리 숙함이 마땅하거늘 하물며 주전까지 더 만들 수 있겠습니까?』 하니 여러 관원이 오히려 불허토록 역청을 드니 대개 공의 말씀 때문이었다. 己酉年(1729)에 차례대로 어전에 나아가 이르기를 『한나라의 토지는 원래 지역별로 부세가 정해져 있으나 근래에 와서 여러 궁가와 아문에서 법정외의 사세로써 넓게 점유하니 이로써 정당하게 거두어 들이는 것이 해마다 줄어지니 마땅히 일률적으로 개혁해 버려야 된다.』고 하니 상감께서 대신들을 돌아보며 어떻게 된 것이냐고 물음에 모두들 그렇다고 하여 다음날 상감께서 손수 기록으로 명하시어 내수사(內需司)로 부터 다들 법에 따라서 혁파토록 하였다. 다시금 판의금에 배하였으나 상소하여 휴직하고자 한대 상께서 억지로 맡길 수는 없다 하여 체직을 명하셨다. 庚戌年(1730)에 다시 7회의 상소로써 극력히 빌었음으로 비답하시기를 셋 조정을 섬긴 구신에게 내 참아 허락할 수 없으나 이제 간절한 진정이 여기에 이르니 특별히 경의원을 윤허한다고 하고 드디어 판의금으로서 치사(致仕)하여 봉조하(奉朝賀)를 삼고 七품록을 주어 매월 술과 고기를 먹도록 하였으니 국법이었다. 공이 어깨로 메는 수레에 앉아서 궐내로 인도되어 사은인사를 드리니 상감께서 인견하시고 따뜻하게 위로하시니 공이 나아가 이르기를 『오늘날 국가와 전하를 보호함에 급한 일이 없아오나 周公께서 무일계(無逸誡)를 지어서 成王께 드려서 근로로써 장수를 누릴 수 있는 도를 삼았으니 내용인즉 근엄하고 공순하며 공경하고 두려워 하여 감히 황탄하고 편안해서는 안되니 곧 무일로서 실익을 삼아 영년토록 나라를 누리게 됨은 이에 그 효험이었습니다. 그러나 소위 근로가 그 요령을 얻지 못하면 문장과 내용만 아름다울 뿐 도리어 정신을 기르는데 방해가 될 수 있음으로 論語에 이르기를 공경스럽게 지내되 간명하게 행동하라 했으니 공경하면 기질이 날로 강해지고 간명하면 정신이 맑아지니 지켜야함은 지극히 간략하여 능히 번거로움을 다스리고 처하는 바는 지극히 고요하며 능히 움직임을 제어함이니 오늘날 사태에 즈음하여 감히 이로써 규범을 드리는 바입니다.』 상감께서 감탄하시고 하인들이 부축하여 섬돌에서 내려오니 길가에서 구경꾼들이 모두 한숨 쉬며 탄식하였다. 이 해 5월 27일 추우당(追尤堂)에서 고종(考終) 했으니 향년이 86세였다. 상감께서 부음을 들으시고 크게 슬퍼하시며 조회와 시장을 철폐하게 하고 부위를 의례대로 하였으며 이 해 10월 18일 장단아야곡(長湍阿也谷) 신좌의 무덤에 장사 지냈다. 공은 훤칠한 체구에 명석하고 미목이 빼어나면서 밝게 빛났으며 기도가 단정하면서 구애됨이 없었다. 효도와 우애는 진심에 기인 되었으니 어머님을 뫼실때는 항상 복종하고 어린이 같았다. 거상(居喪) 때는 공께서도 이미 늙었으나 상복을 벗는 법이 없었다. 백씨께서 일찍이 돌아가니 맏형수를 정성껏 돌봐 주었고 지방관직때는 반드시 수레로 함께 뫼셨다. 또한 친족 간에는 길흉사를 함께 걱정했고 외롭고 어려운 자들의 혼사를 돌봐 주었으니 원근친소가 공에게 몰려들었다. 봉제사는 한결같이 주자가례(朱子家禮)대로 하였고 비록 90세에 가까워도 질병이 아니고는 반드시 참제하였으며 절후 따라 성묘함에 먼길도 꺼리지 않았다. 제사를 못 올리는 선영에는 祭田을 마련했으며 만일 남을 시켜 수호하던 대수가 먼 분묘가 실전의 우려가 있으면 지성껏 찾아내어 사초하고 비를 세웠다. 무릇 같은 성붙이는 다들 가르쳐서 화목토록 하고 때때로 만나고 즐겼다. 평소에도 손에서 小學 일부를 놓지 않았으며 말하기를 내가 충헌공에게 들으니 인품을 기르고 모양을 갖추는 것은 모두 여기에 있다고 하셨다. 비록 공무 수행으로 몹시 바쁜중에도 반드시 틈을 타서 서책을 펼쳐 탐열하였다. 종일토록 단정히 앉아 있고 의대를 갖추었으며 한번도 비뚤어진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성품이 검소하여 유풍사치를 즐기지 않았으며 또한 일찍이 명예에 치우친 적도 없었고 관직수행을 가사 돌보듯 하였으며 평생토록 존경하고 우러러 본 분은 오직 文正公 허목(許穆) 선생 뿐이었다. 남들은 비록 한세상을 소망없이 살았다고 하나 단 한 차례도 헛된 명예로써 가식을 즐기지 않았으며 소신껏 57년을 지냈으되 벼슬한 것은 30년이 못 되어 또한 일찍이 조정에 앉아서 임의대로 처리한 것이 없었으나 그러나 대간의 여론이 이름을 기억하고 덕을 사모함이 오래도록 바뀌지 않았으며 정무를 아는 자가 근자에 나라를 받들고 백성을 돌본 분은 오직 沈尙書 한 분 이라고들 하셨다. 부인은 廣州 李氏이니 둔촌 이집 선생의 후손이요 고조부의 휘는 덕형(德馨)이니 영의정을 지내신 시호가 문익공(文翼公)으로서 세상에서 한음(漢陰)선생이라고 칭하는 분이며 증조의 휘는 如圭이니 관작이 判決事이고 조부의 휘는 상건(象乾)으로서 벼슬이 都事이고 아버지의 휘는 允元이니 別檢을 지냈다. 별검이 여산(礪山) 宋씨인 휘 유효(孺孝)의 딸에게 장가들어 戊子(1648)년 정월 초8일 부인을 낳았는데 어릴 적부터 뜻이 담박하여 처신에 지각이 있었다. 14세에 아버지를 여의고 어머님께서 자결을 하시니 부인께서 밤새 홀로 울부짖으며 구호하되 모든 상구를 손수 감당하였으니 남들이 씩씩한 남자라도 따를 수 없다고들 하였다. 17세에 시집을 왔는데 시부모에게 예절을 다하였으며 맏동서를 경애하고 수저와 잣대를 함께 사용하였다. 떨어진 저고리와 홋치마로서 늘 허술한 여염집 아낙네 같았으며 아무리 천한 비복일지라도 일찍이 회초리를 사용한 적이 없고 대소사에 정성과 삼가함을 다하니 규중이 엄숙하였다. 甲申년(1704)에 寧海에서 부군을 따라 돌아오던 도중에 병이 심하여 6월 초1일 진보(眞寶) 역관에서 마치니 향년이 58세였으며 연천(漣川)에 장사 지냈다가 뒤에 옮겨 공의 묘에 합장하였다. 공은 4남 3녀를 두었는데 맏이 得天은 승문원 正字였으나 일찍 죽었고 다음 得經은 生員이었으나 백부에게 양자갔는데 학행이 있었으나 또한 일찍 죽었으며 다음 得行은 좌랑이었고 다음 得成은 생원이다. 맏딸은 이상기(李相琦)에게 시집갔고 다음은 진사 유태장(柳泰章)에게 시집갔고 다음은 朴興新에게 시집갔다. 측실에도 두 딸이 있었는데 맏은 오해운(吳海運)에게 시집갔고 다음은 어리다. 得經은 족형의 아들인 야(埜)를 양자했는데 문과에 급제했고 得行은 딸 하나를 길러 임선(任珗)에게 시집보냈다. 得成은 2녀를 두었는데 맏은 정지성(丁志聖)에게 시집갔고 다음은 어리다. 이상기는 1남을 두었으니 선수(善壽)이고 유태장은 2남3녀를 두었는데 아들은 完基와 最基이고 맏딸은 姜必東에게 시집갔으며 나머지는 어리다. 박흥신이 1남2녀를 두었으니 아들은 태갑(台甲)이고 딸은 남영로 강세동(南穎老 姜世東)에게 각각 시집갔다. 야는 1남3녀가 있으나 어리며 정지성도 딸 하나가 있는바 어리다. 이선수의 2남은 세익(世翼)과 세적(世迪)이며 유완기가 1남2녀를 두었으나 어리고 박태갑이 1남을 두었으나 역시 어리고 남영로가 1남1녀를 두었으나 모두 어리다. 명(銘)에 이르기를 『군자로서 헌헌했으니 역시 거동이 훌륭했고 늙도록 허물이 없었으니 예찬이 빛났도다. 때를 따라 더욱 조용했으니 정도로 모였으며 그물에 벼리를 갖췄으니 의복에 동정을 달았도다. 길상만 모였으니 우뚝함이 장구하고 험한앞에 일을 맡아 이득 항상 웬 허물인가 거두어 주고 비방 당해 나무를 흔드는 바람이나 넉넉한 그 행실은 정확하게 지켰다네. 높고 높은 외로운 산 우러러서 복종하니 연천의 맑은 여울 기수(沂水) 물에 씻었다네. 으뜸길을 수용하니 넓고도 너그러워 밤낮으로 앞길 닦아 모든 것을 다 얻었네. 본말이 여기에 있으니 세상에서 어찌 여길고. 내가 시를 중하게 다뤘으니 후에 사람들이 살필지어다. 이는 성호 이익(星湖 李翼) 선생의 문집에 실린 글이다. (역자의 주) 주(註) ① 서변(西邊):평안도의 변두리. ② 삼사(三司):사헌부, 사간원, 홍문관의 통칭. ③ 양서(兩西):평안도와 함경도를 이름. ④ 기로사(耆老社):나이 많은 임금이나 현직에 있는 70세가 넘은 정2품 이상의 고관들이 모여 노는 곳. ⑤ 효상(爻象):좋지 못한 괘상. 나쁜 낌새. ⑥ 선원보략(璿源譜略):책명. 왕실의 계보. ⑦ 동조(東朝):태후나 대비가 섭정하는 어린 왕이 다스리는 조정. ⑧ 붕당(朋黨):당파로 갈려서 서로 헐뜯는 무리. ⑨ 서도(西道):서쪽이란 뜻으로 주로 평안도를 이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