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의위(휘 흠)묘갈명

충의위공 휘 흠 묘소
소재지: 청송군 파천면 덕천리(요동)

묘 표 석


十三世祖 忠義衛 靑松沈公 諱欽 墓碣銘竝書
墓之以石爲儀而鋟之事行者以其風雨不能磨推而傳之久遠故也日沈生相舜奉其先祖通訓大夫忠義衛公遺事而來謁余以墓銘遺事卽其傍後孫寢郞相光君之所述也此足以當銘而胡更求之於耄獘不能文者也相舜復起而斂袵曰專持平日賜愛之淚而如是煩之伏願丈丈更思之無己則乃案遺事而叙之曰公諱欽字士敬貫靑松高麗文林郞靑己君諱洪孚爲始祖是生諱淵閤門祗侯生諱龍典理正郞靑華府院君生諱元符靑城伯德符之弟官典理判書號岳隱社屋罔僕我 鮮入杜門洞享杜門院生諱天潤令同正 太宗朝褒忠孝閭歷三世諱遜號月軒集賢學士 光廟受禪棄官歸鄕慷慨以終於公五代以上也高祖曰弼倫副護軍曾祖曰鶴齡號道谷宗簿寺主簿遊蘇齋盧先生守愼門大考曰淸進士號九松有勳除訓鍊奉事 賜亭號碧節壬亂殉節島山考曰應濂玉果訓導妣淑人龍宮金恂鍊女 光海辛亥公生于德川里第序居季貌端才敏甫上學能解字義大人公甚愛以器之稍壯受庭命就學于玉山權公斗經門多師友推詡壬申甲午兩年連遭外內艱慽易備至伯仲叔公哀痛中亦憐而重之制閭袍念進就潛居求志與三兄無猶式好怡然恰做來楊家故事暇以登碧節亭見亭下南川之邊有浦廣浦川沙洋溢土厚草蕪開拓爲田則可得大平而救濟累百農戶乃出家財賑貧民而使役之均平原濕防川築洑大雨酷旱俱無憂慮遂分與居民而畊食之民依國典頌納公謝却之曰我本爲民非爲身也壬子九月十六日終于正寢享年六十二於乎公早抱經國之志命與世違堪守林樊未嘗見用於國而施游億兆晩以忠義衛升通訓階是只虛啣而己壽亦不稱於德何其惜哉然隆彼南川浦農作之民感誦思德欲報萬一歲一墓祭欣供庶羞而會貧之迄于今二百餘年而愈勤愈誠如是而公之澤之遠與浦無窮也耶是外微行細事遺箱失燹雖無片隻之傳抑其家譜邑誌略採猶或爲影響其萬一哉墓在德川之堯谷先塋局內枕酉之阡配淑夫人丹陽禹希敬女熟愼男萬休女金龍漢十一世嗣孫聖燮其諸後孫煩不盡錄銘曰
勳悅雙親之誠可驗於聯設長嫚恭兄友弟而克敦渾密之和樂也經濟一世之志亦著於開拓荒浦築洑成平而以爲民氏之利益也賞秩未幾仁壽胡忽窃彼堯麓君子攸歾民至今慕式祭歲墓我銘未信視厥狀註
歲癸卯春王正月 日
速咸後人 朴世煥 謹撰   
鵝洲後人 申基鳳 謹書   

13세조 충의위 청송심공 휘 흠(欽) 묘갈명병서
무덤의 石物에 사실과 행적을 새기는 것은 비바람에도 마모(磨耗)되지 않고 오래동안 전하게 하기 위한 까닭이다. 하루는 沈生 상순(相舜)이 그 先祖 통훈대부 충의위공의 유사(遺事)를 가지고 나를 찾아와서 묘갈명을 지어달라고 하였다. 유사를 보니 즉 그 방후손(傍後孫) 參奉 相光君이 지은 것으로 족히 묘갈명에 합당하는데 어찌 다시 늙어서 글을 하지 못하는 사람에게 요구하는가 하였더니 상순이 다시 일어나서 옷깃을 여미고 말하기를 평소에 깊이 사랑하여 주심을 오로지 믿고 이와같이 부탁드리오니 삼가 원하옵건대 존장(尊丈)께서는 다시 생각하여 달라고 끊임없이 말하므로 유사를 상고하여 서술(叙述)하니 다음과 같다.
공의 휘는 흠(欽)이요 자는 사경(士敬)이며 관향은 청송이다. 고려조에 문림랑 청기군 휘 홍부(洪孚)가 시조요 이 분이 휘 연(淵)을 낳으니 합문지후(閤門祗侯)요 휘 용(龍)을 낳으니 전리정랑 청화부원군이며 휘 원부(元符)를 낳으니 청성백 휘 덕부(德符)의 아우로 전리판서요 호가 악은(岳隱)이며 고려조가 망하자 조선조에 벼슬하지 않고 두문동에 들어갔으므로 두문동 서원에 배향되었고 휘 천윤(天潤)을 낳으니 영동정(令同正)으로서 태종이 충효정려(忠孝旌閭)를 내렸고 3대를 지나 휘 손(遜)은 호가 월헌(月軒)이요 집현전학사로 세조가 수선(受禪)하자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와 의분(義憤)으로 슬퍼하다가 세상을 마쳤으니 공에게 5대이상의 조고(祖考)이다. 고조는 필륜(弼倫)으로 부호군이요 증조는 학령(鶴齡)으로 호가 道谷이요 종부시주부(宗簿寺主簿)였으며 소재(蘇齋) 노수신(盧守愼)선생의 문인이었고 할아버지는 淸으로 진사요 호가 구송(九松)이며 훈공(勳功)이 있어 훈련원 봉사에 제수 되었고 임금이 벽절(碧節)이란 호를 내렸고 임진왜란 때 도산성(島山城) 싸움에서 순절(殉節)하였으며 아버지는 응렴(應濂)으로 옥과훈도(玉果訓導)요 어머니는 숙인(淑人) 용궁 김순련(龍宮金恂鍊)의 따님으로 광해조 신해년에 덕천리 집에서 공을 낳으니 막내아들이다. 용모가 단정하고 재주가 영특하고 민첩하여 겨우 공부를 시작하면서 능히 글자의 뜻을 아니 아버지가 매우 사랑하고 귀여워하였다. 차차 자람에 玉山 권공(權公) 두경(斗經)의 문에서 학문을 배우니 많은 사우(師友)들이 칭찬하였다. 壬辰年 甲午年 두 해에 연달아 부모의 상을 당하여 형들과 같이 슬퍼하며 예를 다하여 상제노릇을 다하고 진취(進就)할 것을 생각하였으나 숨어살며 뜻을 구하는 것은 세 형과 같지 아니하였다. 태연하게 양씨(楊氏)집의 故事를 모방하여 한가할 때 벽절정(碧節亭)에 올라 정자 아래 南川의 가를 보니 포구(浦口)가 넓어 모래가 땅을 덮어 풀이 무성하니 개척(開拓)하여 전답을 만들면 큰 평야를 얻어 수백 농가를 구제할 수 있을 것 같아 가재(家財)를 털어 가난한 백성을 구제하고 사역(使役)을 균등하게 시켜 평원(平原)의 습지(濕地)에 내를 막아 보를 만드니 큰 비나 심한 가뭄도 걱정하지 않아도 되니 드디어 거민(居民)에게 나누어 주고 경작하여 먹게하니 백성들이 나라의 법에 의하여 돈을 내자 공이 사양하고 물리치며 말하기를 내가 원래 백성을 위한 것이지 내 몸을 위한 것이 아니라고 하였다. 壬子年 9월16일 정침(正寢)에서 돌아가니 향년이 62였다. 아아 공은 일찍 나라를 다스릴 뜻을 품었으나 명(命)과 세상이 어긋나 임천에서 살며 일찍이 나라에 쓰이지 못하고 백성에게 베풀었고 만년(晩年)에 충의위로써 통훈계(通訓階)에 올랐으나 이것은 다만 빈 벼슬일 뿐이고 수(壽) 또한 덕에 맞지 아니하였으니 어찌 애석하지 아니하리오 그러나 저 南川의 포구에서 농사짓는 백성들이 공의 덕에 감사하여 만에 하나라도 보답하려고 제수를 차려 세일제(歲一祭)를 흔쾌히 지낸지 지금까지 2백여년에 더욱 정성을 드림이 이와 같아 공의 덕이 원대(遠大)함은 포구와 더불어 무궁하리로다. 이밖에 작은 일도 상자에 남아 있었으나 兵火에 잃어버리고 비록 종이 조각도 남지 아니하였으나 다만 그 족보나 읍지(邑誌)에서 대략 찾아내면 혹 그 만에 하나도 영향(影響)이 있지 않을까 한다. 묘는 덕천 요곡(德川堯谷) 선영국내(先塋局內) 酉坐의 언덕에 있고 배위는 숙부인 단양(丹陽) 우희경(禹希敬)의 따님이요 아들 하나를 두었으니 세번(世蕃)이요 세번이 두 아들을 두었으니 윤대(潤大)와 신대(愼大)요 신대의 아들은 만휴(萬休)와 만석(萬碩)이며 사위는 김용한(金龍漢)이고 11세 사손(嗣孫)은 성섭(聖燮)이며 그 나머지 후손은 번거로워 다 기록하지 못하고
 명은 다음과 같다.
 공훈으로 부모를 기쁘게 한 것을 증험할 수 있고 형제간에 우애하여 혼연(渾然)히 화락(和樂)하였도다.
 한 세상을 경제(經濟)하는 뜻이 또한 황포(荒浦)를 개척하는데서 나타났고
 보를 만들어 평야를 이루고 백성에게 이익을 주었도다.
 상으로 벼슬이 내리기도 전에 인수(仁壽)는 어찌 그리 갑작스러웠나
 그윽한 저 요록(堯麓)은 군자의 무덤이로다.
 백성들이 지금까지 사모하여 제사를 지내도다.
 내 명을 못 믿겠거든 그 행장을 보라.
계묘년 춘정월
속함후인(速咸後人) 박세환(朴世煥)이 삼가 짓고
아주후인(鵝洲後人) 신기봉(申基鳳)이 삼가 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