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현도찰방(휘 흘)묘갈명 |
찰방공 휘 흘 묘소 묘 표 석 |
十三世祖 行省峴道 察訪 靑松沈公 諱 釳 墓碣銘竝書
公諱釳字子純號曉巒靑松沈氏也上祖諱洪孚麗朝文林郞衛尉寺丞靑己君傳四世而有諱元符號岳隱官典理判書麗訖入杜門洞合享七十二賢于松都長城兩祠又四世諱遜月軒 世宗朝集賢殿學士見 光廟攝政歸隱不出於公五世祖也曾祖諱鶴齡號道谷博學明經明廟朝除宗簿寺主簿祖諱淸號九松 宣祖朝進士後登武科及第就徐亂倡義赴敵以戰功除訓鍊奉事丁酉殉節島山賜號碧節考諱應濂玉果訓導妣龍宮金恂鍊之女生四子公居第三公賦質淳篤器識超凡隨事制行條理正當御家以孝友持己以淸儉經傅子集潛心玩繹求見古人旨意不而以俗尙浮靡之說膠擾靈府也盖其經綸志業之蘊畜足以賁飾洪猷而卒可大施以蔭行省峴道察訪普施惠澤令民見化立善政碑而有來何暮之頌及解紱歸棲息林泉以勸奬後進爲事仍與鄕中諸公創立屛岩書院寓慕先賢扶植風敎者實大有功於斯文伔晦之時也公生于萬曆戊申卒于 肅宗己亥享年五十二墓德川堯谷先塋左麓亥坐兄弟四位斧堂同在一局內祭享及修護之節以同日行之有永世規定盖體當友于之篤也配平昌李氏訓導得信之女庚戌生己巳歿墓公墓右癸坐無育以伯公第二子世勳爲嗣忠義衛有孫二男一女男長一大通德郞次希大司僕寺正女李東開一大生六男一女萬翕. 萬緝. 萬. 萬燮. 萬級. 萬曄女申必濟希大生三男一女萬里. 萬運. 萬遠女權煜餘不盡錄於乎惟公學識德行之嵬卓足爲後徒矜式而不幸巾箱遺墨盡爲界灰燼羨門舊碣亦不免風而剝淥展省難憑矣凡後承諸公孝思人也慨然歎傷函圖改竪而周澤甫使其從普澤齎書謁余而請銘自老洫手分不可執鄭重之筆而請益懇謹就本狀而略敍點次如右爲之以銘曰 赫赫世閥抑抑禀質種學績文衛道修業位未充才壽不稱德積厚施蔭天胡見嗇餘蔭未艾以綏後祿迺刻貞珉永示无極 檀紀四千二百九十三年三月 巴山後人 趙顯奎 謹撰 十一世孫 相坤 謹書 13세조 행성현도 찰방 청송심공 휘 흘(釳)묘갈명병서 공의 휘는 흘(釳)이요 자는 자순(子純)이며 호는 효만(曉巒)이고 청송심씨이다. 시조의 휘는 홍부(洪孚)이니 고려조에 문림랑위위시승이었고 청기군에 봉하여졌으며 四세 휘 원부(元符)는 호가 악은(岳隱)이요 벼슬은 전리판서로 고려가 망하자 두문동에 들어갔고 72현(賢)과 송도(松都)와 장성(長城) 양사(兩祠)에 합향(合享)되었다. 또 네 번 전하여 휘 손(遜)은 호가 월헌(月軒)이요 세종조에 집현전학사로 세조가 섭정(攝政)하자 고향으로 돌아가 나오지 않았으니 공에게 五세조이다. 증조의 휘는 학령(鶴齡)으로 호가 도곡(道谷)이요 학문에 정통하여 성인(聖人)의 경서(經書)를 익혀 알았고 明宗朝에 종부시주부(宗簿寺主簿)에 제수 되었고 할아버지의 휘는 청(淸)이니 호가 구송(九松)이요 선조조에 진사였고 뒤에 무과에 급제하여 임진왜란에 창의(倡義)하여 적과 싸워 공이 있었으므로 훈련원 봉사에 제수 되었고 정유재란에 도산성에서 싸우다가 순절(殉節)하여 벽절(碧節)이란 호를 임금으로부터 받았고 아버지의 휘는 응렴(應濂)이니 벼슬이 옥과현감(玉果縣監) 이었고 어머니는 용궁(龍宮) 김순련(金恂鍊)의 따님으로 네 아들을 낳았으니 공은 셋째이다. 공은 타고난 성품이 인정이 많고 재능이 뛰어나며 일을 따라 행동을 규제함에 조리(條理)가 정당하였고 집안을 효우(孝友)로써 다스리고 청백하고 검소함으로써 몸을 다스리며 경전(經傳)과 제자서(諸子書)를 마음을 가라앉쳐 생각하며 익히고 옛사람의 취지(趣旨)를 구하여보고 경박하고 시끄럽고 어지러운 모양으로 마음을 쓰지 아니하였으니 대개 지망(志望)하는 사업에 경륜(經綸)을 쌓아 족히 큰 계획을 아름답게 꾸미고 마침내 크게 시행할 수 있었으며 음직(蔭職)으로 성현도찰방(省峴道察訪)을 지냄에 널리 혜택을 베풀어 백성으로 하여금 교화(敎化)를 보게 하니 선정비(善政碑)를 세워 칭송(稱頌)하였다. 벼슬을 그만두고 임천(林泉)에 돌아가서는 후진(後進)에게 학문을 권장하는 것으로 일을 삼아 향중제공(鄕中諸公)과 더불어 병암서원(屛岩書院)을 창립하여 선현(先賢)을 사모하여 풍교(風敎)를 부식(扶植)시켜 유교(儒敎)가 침체(沈滯)될 때 큰 공을 세웠다. 공은 선조(宣祖) 戊申年에 낳아 己亥年에 졸하니 향년이 52요 묘는 덕천요곡(德川堯谷) 선영 좌록(左麓) 해좌(亥坐)에 있어 형제 네 분의 묘소가 다 선영의 한 국내(局內)에 있으므로 제향(祭享)과 수호(守護)하는 절차를 한날 행사하는 것을 영세규정(永世規定)으로 삼았으니 대개 우애를 독실하게 하기 위함인 것이다. 배위는 평창이씨 훈도 득신(得信)의 따님으로 庚戌年에 낳아 己巳年에 졸하니 묘는 공의 묘 오른쪽 계좌(癸坐)에 있고 무육(無育)이므로 백공제이자(伯公第2子) 세훈(世勳)으로 양자를 삼으니 충의위(忠義衛)요 2남1녀를 두었으니 장남은 一大니 통덕랑이요 차남은 희대(希大)니 사복시정이며 사위는 이동개(李東開)이다. 一大가 6남1녀를 두었으니 아들은 만흡(萬翕). 만집(萬緝). 만첩(萬). 만섭(萬燮). 만급(萬級). 만엽(萬曄)이요 사위는 신필제(申必濟)이다. 希大가 3남1녀를 두었으니 아들은 만리(萬里). 만운(萬運). 만원(萬遠)이요 사위는 권욱(權煜)이며 나머지는 다 기록하지 않는다. 아아 공은 학식과 덕행이 뛰어나 족히 후생(後生)의 모범이었으나 불행히도 상자에 들었던 유묵(遺墨)이 화재(火災)에 다 타버리고 墓道에 옛 비석도 또한 바람에 갈리고 비에 씻기어 글자를 알아 볼 수 없게 되었다. 모든 후손들이 효성스러워 개연(慨然)히 탄식하고 상심(傷心)하여 속히 고쳐 세우고자 하여 주택보(周澤甫)가 그 사촌 보택(普澤)을 시켜 행장을 가지고 나를 찾아와 묘갈명을 지어달라고 하니 늙은 사람으로서 외람되게 쓸 수 없다고 사양하였으나 요청함이 더욱 간절하였으므로 대략 위와 같이 짓고 명(銘)은 다음과 같다. 대대로 빛나는 문벌(門閥)이요 삼가고 조심하는 품질(禀質)이로다. 학문을 쌓아 도를 지키고 기예(技藝)를 익혔도다. 벼슬도 재주에 충족하지 못하였는데 수(壽)도 덕에 맞지 아니하였도다. 후하게 음덕을 베풀었는데 하늘은 어찌하여 수를 인색하게 주었을까. 남은 음덕 그치지 아니하여 후손이 편안하였도다. 이에 비석에 새기니 영원무궁토록 보게 될 것이로다. 단기4293년 3월 파산후인(巴山後人) 조현규(趙顯奎)가 삼가 짓고 11세손 상곤(相坤)이 삼가 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