첨지중추부사(휘 확)묘갈명

첨지중추부사공 휘 확 묘소
소재지: 청송군 파천면 덕천리(요동)

묘 표


十三世祖 僉知中樞府事 靑松沈公 諱 鑊 墓碣銘竝書
公諱鑊字子和號琴墅姓沈氏貫靑松高麗靑己君諱洪孚爲上祖二傳而靑華府院君諱龍寔我 昭憲王后曾祖生諱元符典理判書號岳隱社屋罔僕于我 鮮享杜門洞書院生諱天潤令同正亦不就徵辟 太宗旌忠孝閭三傳而集賢殿學士諱遜光廟受禪棄官歸田里號月軒於公爲五世祖曾祖諱鶴齡宗簿寺主簿遊蘇齋盧先生門號道谷祖諱淸進士以壬辰亂軍功除訓鍊奉事 賜號碧節丁酉再亂殉節考諱應濂訓導始居靑松之德川妣龍宮金氏恂鍊女宣祖乙巳四月二十八日生公官通政大夫僉知中樞府事享七十七年壽而終辛酉十一月二十八日也葬德川堯洞酉坐原從先兆也於乎公之世遠文獻又鮮傳心法行治無以詳爲實後生之恨然窃圖放之公爲五昆第而序居二伯氏不幸爲早殤與三弟察訪鐺察訪釳忠義衛欽恨諸公友愛甚篤居不異几食必同案迨其季年不得己分戶則棟其沃壤爲先世祭田其次爲殤兄墓田分其餘四家均之仍文誡子姪母得以財傷和其曰和會文者是也觀於此一事可想仰公德行矣夫友本於孝友于 旣如此則其篤孝於親家知孝友旣篤則睦于族婣戚信於于 鄕黨亦可以推知也公旣享遊遐齡而位居三品可驗其仁必壽祿而子姓之居德川者連墻樓戶文學以相傳孝友以相勉瀜瀜有一家氣像者皆公懿訓之所及也遺澤之久而不斬有如是夫配咸陽朴氏軍資監奉事昌傑女墓在皇木洞酉坐二男世文通政世勳通政出女適蔣元栻金明胤金泰錫世文男必大戊申亂倡義旅次有大致大女適李煜世勳男一大希大女適李東開蔣男仁夏義夏禮夏智夏信夏女適李成厦趙大鳳金男海量女適朴泰昇朴萬夏金男白玉曾孫以下不錄而今來請銘者八代孫宜炁也銘曰
楊氏幃幔談笑薛包之皆同財業詎亶專美於古猗彩琴墅翁家法用銘于碣詔于億
永嘉後人 權相圭 謹撰
東萊後人 鄭輝喆 謹書
檀紀四二九三年庚子十月 日

13세조 첨지중추부사 청송심공 휘 확(鑊) 묘갈명병서
공의 휘는 확(鑊)이요 자는 자화(子和)며 호는 금서(琴墅)이고 성은 심씨요 관향은 청송이다. 고려조에 청기군(靑己君) 휘 홍부(洪孚)가 시조이고 두 번 전하여 청화부원군(靑華府院君) 휘 용(龍)이 우리 소헌왕후(昭憲王后)의 증조이다. 휘 원부(元符)를 낳으니 전리판서(典理判書)로 호가 악은(岳隱)이요 고려가 망하자 조선조에 벼슬하지 아니하였고 두문동서원에 배향 되었으며 휘 천윤(天潤)을 낳으니 영동정(令同正)으로서 또한 벼슬을 내려 불러도 나가지 않으니 태종이 충효정려(忠孝旌閭)를 내렸고 세 번 전하여 집현전학사(集賢殿學士) 휘 손(遜)은 세조가 등극하자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왔으며 호가 월헌(月軒)이니 공에게 5세조가 된다. 증조의 휘는 학령(鶴齡)이니 종부시주부(宗簿寺主簿)였고 소재노선생(蘇齋盧先生)의 문에서 수학하였으며 호가 도곡(道谷)이요 할아버지의 휘는 청(淸)이니 진사로서 임진왜란에 공이 있어 훈련원봉사에 제수(除授)되었고 임금이 벽절(碧節)이라 호를 내렸고 정유재란에 순절(殉節)하였다. 아버지의 휘는 응렴(應濂)이니 훈도(訓導)였고 처음으로 청송의 덕천(德川)에 살았다. 어머니는 용궁김씨(龍宮金氏) 순련(恂鍊)의 따님으로 宣祖 乙巳 四月 28일에 공을 낳으니 벼슬이 통정대부 첨지중추부사를 지내고 77년의 수를 누리고 辛酉 11월 28일 졸하여 덕천 요동(堯洞) 酉坐의 언덕에 장사지냈으니 선영(先塋)을 좇은 것이다.
아아 공의 세대가 멀고 문헌의 전한 것이 없어 행적(行蹟)을 자세히 알 수 없으니 이것이 진실로 후손의 한스러운 일이다. 가만히 생각하건대 공은 5형제에 둘째였고 백씨(伯氏)는 불행히도 일찍 돌아가서 세 아우 찰방 당(鐺). 찰방 흘(釳). 충의위 흠(欽)과 더불어 한탄하였고 제공(諸公)이 우애가 독실하여 따로 살지않고 한상에서 반드시 밥을 먹었고 말년에 부득이 분호(分戶)하게 되자 그 옥토(沃土)를 선세(先世) 제전(祭田)으로 삼고 그 다음은 돌아간 형의 묘전(墓田)을 삼고 그 나머지를 네 집이 고루 나누고 자질(子姪)에게 경계하여 재산을 가지고 화목을 상하지 말라 하였으니 서로 양보하여 분쟁을 하지 말라는 것이다. 이 일 한가지를 보더라도 공의 덕행을 우러러 상상할 수 있고 효도와 우애가 이미 이와 같았으니 친가(親家)에서 효도가 독실하였음을 알겠고 효우가 이미 독실하니 일가간에 화목하고 향당(鄕黨)에서 믿을만한 것을 또한 미루어 알 수 있도다. 공은 이미 장수(長壽)를 누리고 벼슬이 삼품(3品)이니 그 어진 사람이 반드시 수도하고 벼슬도 한다는 것을 경험하였고 자손의 덕천에 사는 사람들이 이웃하여 살며 문학으로써 서로 전하고 효우로써 서로 권면(勸勉)하여 화락(和樂)한 일가의 기상(氣像)이 있는 것은 모두 공의 아름다운 교훈이 미친 바요 은혜를 남김이 오래도록 끊이지 아니함이 이와 같도다. 배위는 함양박씨(咸陽朴氏) 군자감봉사(軍資監奉事) 창걸(昌傑)의 따님으로 묘는 황목동(皇木洞) 유좌(酉坐)에 있다. 두 아들을 두었으니 세문(世文)은 통정(通政)이요 세훈(世勳)은 통정이니 숙부에게 출계하였고 딸은 장원식(蔣元栻), 김명윤(金明胤), 김태석(金泰錫)에게 출가하였다. 세문의 아들 필대(必大)는 무신란(戊申亂)에 창의(倡義)하였고 다음은 유대(有大)와 치대(致大)요 딸은 이욱(李煜)에게 출가하였다. 세훈의 아들은 일대(一大), 희대(希大)요 딸은 이동개(李東開)에게 출가하였다. 장원식의 아들은 인하(仁夏), 의하(義夏), 예하(禮夏), 지하(智夏), 신하(信夏)요 딸은 이성하(李成厦)와 조대봉(趙大鳳)에게 출가하였다. 김명윤의 아들은 해량(海量)이요 딸은 박태승(朴泰昇), 박만하(朴萬夏)에게 출가하였다. 김태석의 아들은 백옥(白玉)이요 증손이하는 기록하지 않으며 지금 와서 비문을 지어달라고 하는 사람은 8대손 의기(宜炁)이니
명(銘)은 다음과 같다.
후한(後漢) 양진(楊震)이 장막에서 담소(談笑)한 것과 설포(薛包)가 재산을 모두 고루 나눈 것이 어찌 옛날에 오로지 아름다운 일이라고 하겠는가.
금서옹(琴墅翁)의 가법(家法)으로 비석에 새겼으니 영원 무궁하리라.
영가후인 권상규가 삼가 짓고
동래후인 정휘철이 삼가 씀
단기 4293년 경자 10월 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