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헌부집의공(휘 유행)묘갈 |
집의공 휘 유행 묘소 묘 표 석 |
十三世祖 贈議政府左贊成 司憲府執義 沈公 諱 儒行 墓碣
公姓沈氏諱儒行字汝修號醉醒堂靑松人也鼻祖諱洪孚仕麗朝文林郞衛尉寺丞生諱淵閤門祗侯生諱龍吏曹正郞追封門下侍中靑華府院君生諱德符號虛江三重大匡左侍中靑城郡忠義伯入 李朝特進左議政錄功靑城伯靑城府院君辭勳不受 贈諡定安生諱溫領議政 贈諡安孝誕生 昭憲王后靑川府院君生諱澮領議政靑松府院君 贈諡恭肅連三世秉勻生諱湲內資寺判官 贈左贊成生諱順門議政府舍人 贈領議政生諱逢源號曉窓同知敦寧府事休官養靜 贈左贊成於公爲高祖也曾祖諱鍵號警省軒承文院正字 贈領議政祖諱喜壽號一松左議政靑城府院君 贈諡文貞考諱昶號霞谷溫陽郡守孝 贈吏曹判書 妣贈貞夫人豊山金氏察訪諱命賢之女繼妃 贈貞夫人南陽洪氏進士諱瑮之女 宣祖丙午生于堤川郡衙判書公出宰之時初妣金氏生也公之禀性仁孝襟懷和坦絶不爲詭遇矯激之行以求和於人丙戌初除 長陵叅奉冬登別試文科選補槐院戊子除侍講院說書秋歷兵曹佐郞持平己丑監星山縣冬坐事罷叙復騎省自是歷校理修撰輔德文學辛卯試掌嶺南壬辰以書狀赴燕丙申出守醴泉郡及歸有去思碑授司憲府執義家計窮約甔石屢磬而平生念不及産業待人御物不留表襮救災恤患一於誠實遇事不以規避爲意處朝常以苟容爲恥終身不遇於時位不稱德豈非天哉 顯宗庚子卒享年五十五封窆于高陽先塋下麓壬坐之原以子貴推恩 贈議政府左贊成配 贈貞敬夫人安東權氏父諱紞郡守祖諱睍正郞贈吏判曾祖諱悰贈判書外祖縣監安溱順興人也生于 宣祖丙午卒于顯宗庚子享年五十五墓祔窆生一男一女男梓女適吳始泰郡守同福人梓官至判中樞府事娶廣州李氏都事象乾女生三男三女男長最良判決事娶安東權氏牧使德徹女次仲良黃海監司娶全州李氏楨之女娶平康全氏縣監起漢女次季良同副承旨娶羅州丁氏進士道元女女長適丁道謙正字羅州人次適洪萬遂校理豊山人次適權益昌進士安東人餘不能盡記 崇祿大夫判中樞府事 不肖男 梓 謹撰 嘉善大夫掌隷院判決事 不肖孫 最良 敬書 13세조 증의정부좌찬성 사헌부집의 심공 휘 유행(儒行) 묘갈 공의 성은 沈씨요 휘는 유행(儒行)이요 자는 여수(汝修)요 호는 취성당(醉醒堂)이니 靑松사람이다. 시조의 휘는 홍부(洪孚)니 고려조에 벼슬하여 문림랑 위위시승(文林郞衛尉寺丞)이다. 휘 연(淵)을 낳으니 합문지후(閤門祗侯)요 휘 용(龍)을 낳으니 이조정랑(吏曹正郞)으로 문하시중 청화부원군(門下侍中靑華府院君)에 추봉되었다. 휘 덕부(德符)를 낳으니 호는 허강(虛江)이요 삼중대광 좌시중 청성군 충의백(三重大匡左侍中靑城郡忠義伯)인데 李朝에 들어와서 특별히 좌의정에 진급하고 청성백 청성부원군(靑城伯靑城府院君)을 봉군하였으되 훈업을 사양하고 받지 않았으며 정안(定安)의 시호를 내리었다. 휘 온(溫)을 낳으니 영의정으로 安孝의 시호를 내리고 소헌왕후(昭憲王后:世宗王妃)를 탄생하여 청천부원군(靑川府院君)이 되었다. 휘 회(澮)를 낳으니 영의정 청송부원군(領議政靑松府院君)이요 시호가 공숙(恭肅)이니 3世를 연하여 국권을 잡았다. 휘 원(湲)을 낳으니 내자시 판관(內資寺判官)으로 증직이 좌찬성이요 휘 순문(順門)을 낳으니 의정부 사인(議政府舍人)으로 증직이 영의정이요 휘 봉원(逢源)을 낳으니 호는 효창(曉窓)이며 동지돈녕부사(同知敦寧府事)로 휴관하고 한정(閒靜:조용히 지내다)을 하매 좌찬성을 증직 받으니 공에게 고조가 된다. 증조의 휘는 건(鍵)이요 호는 경성헌(警省軒)이니 승문원 정자(承文院正字)로 증직이 영의정이요 할아버지의 휘는 희수(喜壽)요 호는 一松이니 좌의정 청성부원군(左議政靑城府院君)이요 시호는 文貞이요 아버지의 휘는 창(昶)이요 호는 하곡(霞谷)이니 온양군수를 지내고 효행으로 증직이 이조판서요 어머니는 증 정부인 豊山金氏니 찰방 휘 명현(命賢)의 따님이요 계모는 증 정부인 南陽洪氏니 진사 휘 율(瑮)의 따님이다. 선조 丙午(1606)년에 제천군 관사에서 낳았으니 판서공이 군수로 계실 때이며 초비 김씨의 소생이다. 공의 성품이 인효금회(仁孝襟懷:어질고 효성스런 마음을 항상 가슴에 품음)하고 평탄하여 속임수와 과격한 행동을 해서 남에게서 영화를 구하는 일은 절대로 하지 않았다. 丙戌(1646)년에 처음으로 장능(長陵:仁祖의 능) 참봉을 제수하고 겨울에 별시문과에 급제하여 괴원(槐院:承文院)에 보직되었고 戊子(1648)년에 시강원 설서를 제수하고 가을에 병조 좌랑과 지평을 거치었으며 己丑(1649)년에 星山현감이 되었다가 사고가 있어서 파면됐다. 풀리어 기성(騎省:兵曹)에 복직 되었으니 이로부터 교리, 수찬, 보덕, 문학 등의 직을 지냈다. 辛卯(1651)년에 영남에 가서 향시(鄕試:지방에서 보는 시험)를 맡았고 書狀官으로써 중국에 다녀왔다. 丙申(1656)년에 예천군수가 되었다가 돌아올 적에 거사비(去思碑:공적을 감사하여 주민들이 세운 비)가 있으며 사헌부 집의(司憲府執義)를 제수했다. 가계가 빈궁하여 담석(甔石:양식단지)이 자주 절핍(絶乏:아주 없음)함이 있으되 평생의 생각이 산업에 미치지 않았으며 사람을 대하고 물건을 접함에 머뭇거리지 않고 밖으로 드러내지도 않으며 재앙과 환란을 구제하되 한결같이 성실있게 했다. 일을 당하여 회피함으로 뜻을 삼지 않고 조정에 있어서는 항상 구차하게 용납함으로써 부끄러움을 삼았다. 몸이 마치도록 때를 만나지 못하고 직위도 덕에 맞지 않았으니 어찌 천명이 아니겠는가? 顯宗庚子(1660)년에 돌아갔으니 향년이 55세이다. 高陽선영의 하록 壬坐의 언덕에 안장했으며 아들의 貴함으로 은전을 입어 의정부좌찬성(議政府左贊成)을 증직했다. 배위는 증정경부인 安東權氏이니 父의 휘는 紞으로 군수이고 조의 휘는 현(睍)이니 정랑이고 증직이 이조판서요 증조의 휘는 종(悰)이니 증직이 판서요 외조는 현감 안진(安溱)이니 順興사람이다. 宣祖 丙午(1606)년에 출생하여 顯宗 庚子(1660)년에 돌아갔으니 향년이 55세이다. 묘소는 합폄이다. 1男 1女를 두었으니 아들은 재(梓)요 딸은 同福吳始泰에게 시집갔다. 재(梓)는 벼슬이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에 이르고 광주 이씨 도사 상건(象乾)의 딸에게 장가들어 3男 3女를 두었으니 장남은 최량(最良)인데 판결사(判決事)요 안동권씨 목사 덕철(牧使德徹)의 딸에게 장가들었고 다음은 중량(仲良)이니 황해감사요 전주 이씨 정(楨)의 딸에게 초취하고 平康全氏 현감 기한(起漢)의 딸에게 재취했다. 다음은 계량(季良)이니 同副承旨요 나주 丁氏 진사 道元의 딸에게 장가들었다. 맏딸은 나주 丁道謙에게 시집갔으니 정자요 다음은 풍산 洪萬遂에게 시집갔으니 교리요 다음은 안동 權益昌에게 시집갔으니 진사이다. 나머지는 다 기록하지 못한다. 숭록대부 판중추부사 불초 아들 재(梓)는 삼가 지음. 가선대부 장례원 판결사 불초 손자 최량(最良)은 공경하여 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