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호조참판공(휘 유훈)묘갈명 |
증호조참판공 휘 유훈 묘소 |
公姓沈氏諱儒訓字君佩號獨醒齋靑松人也鼻祖洪孚仕麗朝文林郞衛尉寺丞生諱淵閤門祗侯生諱龍吏曹正郞追封門下侍中靑華府院君生諱德符號虛江三重大匡左侍中靑城郡忠義伯入 李朝特進左議政錄功靑城伯靑城府院君辭勳不受 贈諡定安生諱溫領議政 贈諡安孝誕生 昭憲王后靑川府院君生諱澮領議政靑松府院君 贈諡恭肅公連三世秉勻生諱湲內資寺判官 贈左贊成生諱順門議政府舍人 贈領議政生諱逢源號曉窓同知敦寧府事休官養靜 贈左贊成於公爲高祖也曾祖諱鍵號警省軒承文院正字 贈領議政祖諱喜壽號一松左議政靑城府院君 贈諡文貞考諱昶號霞谷溫陽郡守以孝 贈吏曹判書妣 贈貞夫人豊山金氏察訪諱命賢之女繼妣 贈貞夫人南陽洪氏進士諱瑮之女 宣祖丁酉生公初妣金氏出也自幼奇偉巖重言笑有度只務孝悌之道小無戱謔之習王考文貞公鍾愛常讚曰爾必他日異秀丁未丁母憂致哀盡禮無異成人早襲庭訓厥有成就人皆遠大器之金判書諱振先奇愛以其女妻之夫人淸道金氏多有婦德稱以法家光海庚申初除 英陵參奉壬戌以逸擧諮議幷皆不就勤省侍側之所奉養備至五月遭文貞公喪事執喪盡禮戊辰二月丁判書公憂執喪過制幾至滅性庚午五月奉王母貞敬夫人歸隱於忠州之霞谷丙子二月遭王母喪事承重居憂喪祭一依家禮 仁祖戊寅再擧進善亦以不就盖公之素性淸遠簡重自處不羈雍容淡泊切有傷時之歎每盈滿自戒曰知足無憂有求貽禍入孝出悌晝耕夜讀君子所戒吾門闌世閥繼世彌昌以此知足更無所求寓於林泉樂於琴書靜居閑處常對羲易鄕黨子弟挾書請學日與諸生推誠致敬講明道義所與交遊一時聞人淸陰金公擇堂李公旅軒張公愚伏鄭公深加敬重許眉叟金沙溪宋同春朴潛冶諸先生爲道義交有時杖屨放浪於山水初翫俗離樂以忘返再遊金剛經歲而還逍遙一世以爲終老焉 顯宗十四年癸丑(一六七三)十二月得寒疾卒于正寢享年七十有七也甲寅(一六七四)三月庚子奉窆于忠州郡南沙里浦面矢項里壬坐之原焜 贈戶曹叅判之恩典有三男六女男長彬通德郞配晋州柳氏判官溥之女配慶州金氏判官重鉉之女次男 統制使歷捕將止刑曹判書不起配昌原孔氏纘之女配旌善李氏副司果聖鎰女次男根通德郞配晋州河氏濟允之女女長適李時馝全州人次適元振澤文科叅議原州人次適白昌門武通政明川府使水原人次適李萬林文科兵曹正郞全州人次適崔萬峙慶州人次適李廷彬永川人彬無子取姪佐良爲後直長配晋州姜氏府使必遇女配全州李氏漢相女樸 有三男五女男長處良中部參奉配平山申氏僉正命義女次彙良僉中樞府使配南陽洪氏通德郞叙行女次就良通德郞配昌原黃氏水使震文之女女長適李商任武科全義人次適南武僉知宜寧人次適朴奎章密陽人次適柳仁昌文化人次適李萬奇全州人根有二男男長佐郞出系伯父彬後次遇良武楚山府使配永川李氏重炯之女也古來賢人之偉德盛行托之辭勒之石宜爲不朽焉大載出入公之門庭不可謂不知公者略叙公之德行是爲作銘銘曰
以松生縣盤根靑松恩天雨露蔓延海東友松分立一松鬱蒼賴有淵源獨醒齋昌盈滿自戒自處不羈再徵不就先能知止遯跡霞谷有志林泉窮究性理羲易在前斯文吾道雖不自任勸勉致誠務植士林一世慕仰百代流芳錦峰嵬嵬琹湖洋洋初翫俗離再遊金剛淸靜仙緣樂以返忘高出塵世偉蹟蔚然矢項之原幽竁萬年直筆在石與地與天 輔國崇祿大夫吏曹判書兼知義禁府事五衛都摠府都摠管權大載撰(號蘇川安東人) 資憲大夫兵曹判書兼知 經筵弘文館提學藝文館提學 知義禁府事春秋館成均館事吳載純書(號醇菴海州人) 13세조 증호조참판 심공 휘 유훈(儒訓) 묘갈명 공의 성은 심씨요 휘는 유훈(儒訓)이요 字는 군패(君佩)요 호는 독성재(獨醒齋)니 靑松사람이다. 시조의 휘는 홍부(洪孚)니 고려조에 벼슬하여 문림랑위위시승(文林郞衛尉寺丞)이 되었다. 휘 연(淵)을 낳으니 합문지후(閤門祗侯)요 휘 용(龍)을 낳으니 이조정랑으로 門下侍中 靑華府院君에 추봉되었고 휘 덕부(德符)를 낳으니 호는 虛江이요 삼중대광좌시중(三重大匡左侍中)으로 청성군충의백(靑城郡忠義伯)이며 이조에 들어와서 특별히 좌의정에 진급하고 청성백 청성부원군(靑城伯 靑城府院君)에 책봉하매 훈공을 사양하고 받지 않았으며 정안(定安)의 시호를 내리었고 휘 온(溫)을 낳으니 영의정으로 안효(安孝)의 시호를 내리고 소헌왕후(昭憲王后)를 탄생하여 靑川府院君이 되었다. 휘 회(澮)를 낳으니 영의정으로 靑松府院君을 봉하고 공숙(恭肅)의 시호를 내리었으니 3世를 연하여 국권을 잡았다. 휘 원(湲)을 낳으니 내자시판관(內資寺判官)으로 증 좌찬성(左贊成)이며 휘 순문(順門)을 낳으니 의정부 舍人으로 증직이 領議政이며 휘 봉원(逢源)을 낳으니 호는 효창(曉窓)이요 동지돈녕부사(同知敦寧府事)인데 휴관양정(休官養靜:벼슬을 하지 않고 글을 가르치며 조용히 사는 것)하였고 증직이 좌찬성이니 공에게 高祖가 된다. 曾祖의 휘는 건(鍵)이요 호는 경성헌(警省軒)이요 승문윈정자(承文院正字)인데 증직이 영의정이요 할아버지의 휘는 희수(喜壽)요 호는 一松이니 좌의정 靑城府院君이요 文貞의 시호를 내리었다. 先考의 휘는 창(昶)이요 호는 하곡(霞谷)이니 온양군수를 지냈으며 孝行으로 이조판서(吏曹判書)를 증직하고 어머니는 증 貞夫人 豊山金氏니 찰방 휘 命賢의 따님이다. 계모는 증 정부인 南陽洪氏니 進士 휘 율(瑮)의 따님이다. 선조 丁酉(1597)년에 공을 낳았으니 초취 어머니 김씨의 소생이다. 어릴 때부터 奇偉하고 엄중하여 말과 웃음이 법도가 있고 다만 효도하고 공경하는 도리를 힘써서 조금도 희롱하는 습관이 없으니 할아버지 文貞公께서 심히 사랑하여 항상 칭찬하여 이르기를 「네가 반드시 뒷날 훌륭하게 될 것이라」고 했다. 丁未(1667)년에 어머니 상사를 당하여 슬픔을 다하고 예절을 다함이 成人과 다름이 없었다. 일찍부터 가정교훈을 답습하여 성취함이 있으니 사람들이 다 원대할 것이라 기대했으며 김판서 휘 진선(振先)이 기이하게 여기고 사랑하여 사위를 삼으니 부인 淸道金氏가 많은 부덕이 있어서 법가로 일컬어졌다. 光海庚申(1620)년에 처음으로 영능참봉(英陵參奉:世宗의 능참봉)을 제수하고 壬戌(1622)년에 은일(隱逸)로 자의(諮議)에 천거되었으나 아울러 나가지 않고 부지런히 부모의 곁에 모시어 봉양함이 갖추어 이르렀다. 오월에 文貞公의 상사를 당하여 집상하매 예절을 다 하였다. 戊辰(1628)년 2月에 판서공의 상사를 당하여 집상함이 예에 넘쳐서 거의 멸성(滅性:생명을 잃음)에 이르렀다. 庚午(1630)년 오월에 할머니 정경부인을 받들고 충주 하곡(霞谷)으로 낙향하여 살다가 丙子(1636)년 2月에 할머니 상사를 당하여 승중손(承重孫)으로 상제 노릇함에 상사와 제사를 한결같이 가례에 의거했다. 인조 戊寅(1638)년에 두 번째 進善에 천거되었으나 또한 나가지 않았으니 대개 공의 성품이 청원간중(淸遠簡重)하여 자유로 거처하고 매이기를 즐겨하지 않으며 화평한 용모로 담박하여 간절이 시대를 감상하는 탄식이 있었으며 매양 영만(盈滿)을 스스로 경계하여 이르기를 「족한줄을 알면 근심이 없을 것이요 구함이 있으면 화를 끼칠 것이니 들어와서 효도하고 나가매 공경하며 낮에는 밭갈고 밤에는 글 읽음이 君子가 힘쓸 바이다. 우리 집의 문벌이 대를 이어 더욱 창대하였으니 이것으로써 족함을 알고 다시는 구한바가 없다」고 하였다. 임천(林泉:山水를 말함)에 우거하면서 거문고와 글을 즐기고 고요하고 한가롭게 거처하여 항상 주역을 즐겨 읽었다. 향당(鄕黨)에 자제들이 서책을 끼고와 배우기를 청하면 날마다 諸生을 가르치는데 성의를 다하고 공경을 이르고 도의를 밝게 강(講)하였다. 더불어 교유한 사람이 다 일시에 유명한 사람인데 정음김공(靖陰金公:이름은 尙憲) 택당이공(澤堂李公:이름은 植) 여헌장공(旅軒張公:이름은 顯光) 우복정공(愚伏鄭公:經世)이 깊이 공경하고 소중히 여기었으며 허미수(許眉叟:이름은 穆) 김사계(金沙溪:이름은 長生) 송동춘(宋同春:이름은 浚吉) 박잠야(朴潛冶:이름은 知誠) 여러 선생은 도의의 벗이 되었다. 때로는 장구(杖屨:지팡이와 신발이니 나이와 덕망이 있는 자가 사용함)를 이끌고 山水에 방랑하여 처음에 속리산을 구경하매 즐거워 돌아올 것을 잊기도 하고 두 번째 금강산에 유람하여 해를 지내어 돌아오매 한 세상을 노닐어 써 늙어 마치려했다. 현종(顯宗) 14年 癸丑(1673) 12月에 감기로 인하여 정침(正寢)에서 돌아가니 향년이 77세이다. 이듬해 甲寅(1674)년 3月 庚子에 충주군 남사리 포면 시항리 임좌(忠州郡 南沙里 浦面 矢項里)의 언덕에 안장하고 戶曹叅判에 증직되었다. 3男 6女를 두었으니 장남은 빈(彬)이니 通德郞이요 배위는 晋州柳氏니 判官 부(溥)의 딸이요 재취 배위는 慶州金氏니 판관 중현(判官 重鉉)의 딸이다. 다음 아들은 박(樸)이니 統制使로 捕盜大將을 거치어 刑曹判書에 임명되었으나 나가지 않았고 배위는 昌原孔氏 찬(纘)의 딸이요 재취부인은 旌善李氏 부사과 성일(副司果 聖鎰)의 딸이다. 다음 아들은 根이니 通德郞이요 배위는 晋州河氏 제윤(濟允)의 딸이다. 장녀는 全州 이시필(李時馝)에게 시집가고 다음은 原州 원진택(元振澤)에게 시집갔으니 문과로 참의요 다음은 水原 白昌門에게 시집갔으니 문과로 通政明川府使요 다음은 全州 李萬林에게 시집가고 다음은 慶州 최만치(崔萬峙)에게 시집가고 다음은 永川 이정빈(李廷彬)에게 시집갔다. 彬은 아들이 없어서 조카 佐良을 양자 했으니 直長이요 배위는 晋州姜氏이니 부사 필우(必遇)의 딸이요 재취 배위는 全州李氏 漢相의 딸이다. 박(樸)은 3男 5女를 두었으니 장남은 처량(處良)이니 中部參奉이요 배위는 平山申氏니 첨정명의(僉正命義)의 딸이요 다음은 휘량(彙良)이니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요 배위는 南陽洪氏니 통덕랑 서행(叙行)의 딸이요 다음은 취량(就良)이니 통덕랑이요 배위는 昌原黃氏이니 수사진문(水使震文)의 딸이다. 장녀는 全義李商任에게 시집갔으니 무과에 급제하고 다음은 의령남전(宜寧南)에게 시집갔으니 무과로 첨지요 다음은 밀양 박규장(密陽朴奎章)에게 시집가고 다음은 文化柳仁昌에게 시집가고 다음은 全州李萬奇에게 시집갔다. 根은 2男을 두었는데 장남은 佐良인데 백부 彬의 후로 양자가고 다음은 우량(遇良)인데 무과초산부사(武科楚山府使)요 배위는 永川李氏 중형(重炯)의 딸이다. 옛적으로부터 내려오매 어진 사람의 위대한 덕망과 성대한 행실을 글에 의탁하고 비석에 새기어 마땅히 후멸되지 않기를 위하여 크게 기재했다. 내가 공의 門庭에 출입하였으니 가히 공을 알지 못한다고 말할 수가 없다. 대강 공의 덕행을 서술하여 이와 같이 銘을 지으니 명에 이르기를 솔로써 고을이 생기었으니 靑松沈氏의 뿌리가 서리었네. 은혜로운 하늘에서 비와 이슬이 내리니 바다 동쪽 나라에 만연(蔓延) 되었네. 友松이 分立하고 一松이 울창하였네. 연원(淵源)이 있으매 독성재(獨醒齋)가 창대하였네. 영만(盈滿)함을 스스로 경계하여 자유롭게 거처하고 벼슬에 매이지 않았네. 두 번이나 불러도 나가지 않았으니 먼저 능히 그칠바를 알았네. 하곡(霞谷)에서 증직을 감추었으니 林泉에다 뜻을 두었네. 性理學을 연구하매 복희씨(伏羲氏)에 周易이 앞에 있었네. 사문(斯文:儒學者)은 우리 도이니 비록 자임하지 않았으나 권면하여 성의를 이루었네. 선비를 힘써 심으매 한세상에서 사모하고 우러르니 백세에 분방(芬芳)이 흐르리라. 금봉(錦峰)은 높고 높은데 금호(琴湖)는 洋洋이 흐르고 있네. 처음에는 속리산을 구경하고 두 번째 금강산에 놀았네, 맑고 고요한 신선의 인연을 즐기어 돌아올 것을 잊었네. 높이 티끌 세상에 나왔으니 위대한 사적 창성하기도 하네. 시항(矢項)의 언덕에 아늑한 묘소 만년이나 무궁하리라. 직필(直筆)로 써서 비석에 실었으니 하늘과 땅으로 더불어 같이 보전하리라. 보국숭록대부 이조판서 겸 지의금부사 오위도총부 도총관 權大載 지음 자헌대부 병조판서 겸 지경연 홍문관제학 예문관제학 지 의금부사 춘추관사 吳載純 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