효간공(휘 집)신도비명

효간공 휘 집 묘소
소재지:인천광역시 서구 공촌동 산8

묘 표 석


 

효간공 휘 집 신도비 (인천유형문화재 제32호)


正憲大夫禮曹判書諱諿神道碑銘竝書
沈氏舊爲靑松大家高麗時遠祖諱洪孚文林郞衛尉丞諱淵閤門祗侯諱龍吏曹正郞贈門下侍中諱德符入我朝左政丞封靑松伯諡恭靖諱溫領議政靑川府院君諡安孝寔生昭憲王后諱澮領議政靑松府院君諡恭肅三世袞袞承台鉉家聲烜爀諱湲內資寺判官贈左贊成高祖諱順門議政府舍人贈領議政曾祖諱達源己卯士禍以玉堂坐廢官止承文院判校贈吏曹叅判祖諱鎡繕工監僉正贈左贊成考諱友正以文科壯元官止驪州牧使贈吏曹判書尤以忠孝立名行李白沙恒福載事于碑妣貞夫人廣陵安氏牧使諱汝敬之女戶曹判書諱潤德之曾孫公其第三子生於隆慶己巳諱諿字子順號南崖聰明祥順七歲詩語驚人二十八丙申中第由槐院入翰苑箚論邪正之辨由是久遯于野丁外艱盡禮辛丑復入爲翰林歷數官出爲水原府判官時鄭公弘翼爲諫官公謂曰時議方誣牛溪成先生公平日挺然不苟今豈肯隨俗俯仰鄭公曰吾意已決矣鄭公旣黜而公亦出爲瓮津縣令吏懷民安以事罷叙爲禮曹正郞兼文學侍講春宮爲正言論劾銓官受命廉察畿輔黜權貴子弟之貪墨者以故又擯爲開城經歷改長興府使未上籌司啓移竹山俾保障南幾入爲宗簿正以掌令光海初論救諫臣之直言獲譴者遞職已而爲銀溪察訪秩滿除通判鏡城未赴任而罷復除海運判官移授諸寺正差御史試才于畿甸時庭試諸文士公以高等受晋錫又出監高靈縣時仁弘之黨充滿嶺外詆侮晦齋退溪兩賢意公不肯與同族臺官劾罷之叙爲湖南調度使幕職便宜從事民實頼之南民立石通衢以頌之又使覆審灾傷接待倭人入則置冗官丁已拜檢詳舍人兼弼善陞輔德在中書將議薦與時議逕庭被彈戊午兇徒脅百僚請廢 母后公屛趾江海間未嘗京邑辛酉都元帥韓公俊謙辟公自從先是有營建所敦匠勞錄陞通政階癸亥 仁祖大王反正卽除兵曹叅知以臺啓降公營建賞階翌日特旨旋還原職盖諸卿相同薦公宜擢用故 上欲亟用公也兼管宣惠裁省兩局盖將盡革弊改率由舊章事係官闈勳戚者一切裁抑猶爲當事者所制識者恨之一日夜諸大將來會闕下僞告以急警擧火南山而請開闕門盖欲試軍情離合也公堅不許門촻曰闕門不可以夜開諸將多不悅而 上甚嘉其得休也出關西接伴天將爲承旨嘗於夜對頗觸時諱勳貴尤側目甲子扈 駕公州還都賞加嘉善資歷驪州牧使判決事丁卯從難于江都兼金吾事以事置對削職未幾拜開城留守戊辰爲毛將文龍接伴使文龍恣欺 天朝誣陷我邦又徵責無厭擧國大窘公至誠開陳無其感悟其副將陳繼盛慕公忠信亦盡心周旋國家頼之 上嘉之特拜都承旨改禮刑曹叅判已而陞判刑曹公惧爵位隆重且爲便養乞郡得安邊奉慈輿以行尹八松煌以舍人具妓樂設餞宴歌管滿路都人嗟歎諸公又以仲氏都正公誢除淮陽密邇安邊大夫人幷享兩府榮養而公之胤東龜以玉堂官徃來有煒李東岳安訥以按使來與壽席執爵流涕曰繄我獨無因作詩以侈之越三年觧歸癸酉復以刑曹判書丁大夫人憂制除連長工刑曹丙子虜入寇 上將幸江都而賊已迫西郊公跪泣 駕前曰乞急向南漢城諸議皆然城纔受圍而虜請質求和大臣以宗室綾峯君儞稱 王弟以公稱大臣將行公請於大臣曰虜若問綾峯實親 王弟與否則將何對大臣曰丁卯媾時亦以原昌君玖稱親弟今當曰玖 俱是親弟可也前後不可異辭矣公危之曰玖之在虜中虜已熟知玖非親弟矣今當曰前是宗室而今則親弟云爾大臣則固欲前後並稱親弟公力爭其不可且曰富鄭公使虜柝見國書以行今所關甚重若從相公言則恐不免債事大臣曰某也必欲以玖爲非親弟事必不成矣及至虜營虜將出接公謂舌人曰彼是敵將之微者我是大臣何可抗禮舌人曰此是貴者公始起與相揖虜將曰兩國結爲兄弟而貴國不以牛酒相勞何也公曰今以干戈迫蹙戎馬蹂躪其敢曰兄弟之義乎寧不愧於心而敢發牛酒迎勞之說乎虜將無以對而因問曰此是 王子耶 王弟耶公曰王子年弱且遭國母喪豈有爲質之理且 王弟恩義之重視 王子無間今欲成媾何論弟與子耶虜將報于其帥則曰須 王世子出來乃可公曰 世子國之貳君我不敢以此言聞于 行朝只有干戈從事而已力爭移時終不相下自公將行時與大臣爭卞之說先已傳訛及復命因以爲陣前問答失誤致虜有 世子之請丁丑冬臺論追論請竄 上答曰若不原其本情則某死不瞑目矣久後只命門黜翌年疏恩己卯追加扈從資正憲入耆老社庚辰由知中樞拜禮曹判書力辭得免先是江都之陷仲氏都正公與其夫人宋氏立慬而沒及是公屛居江村不近醫藥曰七十之年苟延時日非達於命者吾與仲氏暮年相依今仲氏從容就義見先人於地下而我獨在世屢經宗國喪亂治病何爲甲申春器遠謀逆伏侏其黨爰辭以爲器遠欲與李時英同事嗾臺諫論遞時英閫任其時公胤子東龜方爲諫職時英發論實有其人而其人惧禍乞哀强以同發引避遂被謫而去公執手永訣曰亂賊近出古之王茂弘實獲我心因勉以行患難之道自是疾遂革口不能言只書思字於侍者之手盖念胤子也其九月二十八日年七十六而終于正寢訃聞命停朝市禮官致祭十一月十一日葬于衿川屹里頃先兆之下自器遠獄後胤子應敎公廢錮因循矣 孝廟壬辰諸公力請收用蒙叙數日 嚴旨忽下並追奪公官爵廷臣莫知所以自是言者不已而未廻 天意應敎日夜搥心泣血至於疽發而死死時自言我必視而衣瞑矣果衣瞑聞者莫不悲傷矣今 上辛酉筵臣上陳其誠孝 上問于諸大臣大臣皆曰信目言公虜營時顚末 上卽命復公官爵某月日諸子告于祠廟而改題其主公篤於孝親常和顔愉色順適其意自少至老如一日焉曁大夫人年齡益高則與都正公同居奉養兼盡湛樂之意雖夜兄弟迭起以省慈候未嘗觧衣自便良辰送喜置備物之享曾玄滿堂敎妓迭奏載笑載言極致慈顔之悅豫及其巨創兄弟白首執制彌固凡遇祀享夙齋預戒如見如在伯氏早歿育其二女而婚嫁以時終其祠墓至於遺戒子孫俾不殄其享又新造門閭以揭仲氏旌額曰吾兄雙節天地之紀也敦宗叙踈戶屨常滿賢者樂其義否者懷其惠居常訓誨子弟曰孝者百行之源小學之書節目俱備讀而存之力行於身又能推以忠君則雖曰不學吾必謂之學矣故其子孫惇行孝悌異於他族立朝五十年信道直行不肯隨世俯仰升沈寵辱一聽於天其在昏朝謇然介特金公德諴立節遠謫公出餞遠郊贐行甚厚爾瞻父子西儐王人要得送行詩公謝以不能其黨大恚思其奇中而公不願也 仁祖新化勵情求治每引而自近而國獘時艱不能展盡謨猷 上意盖將登庸而竟未果焉最愛漢陽江山每暇日嘯傲江亭襟懷淸曠有若遺落世事而愛君一念終始不큢仁祖末年長時違豫不能視朝公朝暮祈祝願聞無疾之音公可謂忠孝俱全者歟至其身後謫罰甚重而名公賢宰前後訟冤至于聖上更化之日竟蒙追雪光賁泉壤豈非忠孝素積誠信不欺之報歟夫人洪氏直提學宗祿之女有古女士風助成公孝敬淸愼之德其言行無不可爲婦母儀則後公六年而沒于崇禎己丑春秋七十七祔于公墓之左男卽東龜官應敎孫男敬攸轍儆長早亡仲嘗爲司諫叔季縣令縣監司諫男漢柱進士漢章漢瑞漢規轍一女儆男漢雄漢弼漢英漢明余旣銘應敎墓矣今司諫兄弟復謁公銘銘曰
赫赫沈宗世隆官位文行相承以致以遂惟公孝德實惟不匱施而罔虧視古無愧餘可傍達本旣立矣事兄睦親隨行義意出身事主恪勤其事洎乎昏朝丘園自賁癸亥改玉世道純粹聖主知公傾心任使公亦感噫一心無貳廷評雖急天眷無褫峻之卿月宗伯是畀惟是仲氏卓然殉義家敎愈大莫與爲比身後謫譴無妄焂至上穹尊嚴誰之敢揣有子而孝疽背血淚煩冤鬱塞死而猶視其後廷臣原白終始天日昭明洗衊濯膩子父之靈感泣泉裡是白善慶斯可視履我篆其事以勉後嗣
尤菴 宋時烈 撰

정헌대부예조판서휘집신도비명병서(번역문)
심씨는 오래 전에 청송의 대가(大家)가 되었다. 고려때 원조(遠祖)①인 이름 홍부(洪孚)는 문림랑위위승(文林郞衛尉丞)을 지냈고 이름 연(淵)은 합문지후(閤門祗侯)를 지냈으며 이름 용(龍)은 이조정랑을 지낸 뒤 문하시중(門下侍中)에 추증되었고 이름 덕부(德符)는 조선조에 들어와서 좌정승을 지낸 뒤 청성백(靑城伯)에 봉해지고 공정(恭靖)의 시호를 받았다. 이름 온(溫)은 영의정을 지내고 청천부원군(靑川府院君)에 봉해졌으며 안효(安孝)의 시호를 받았는데 이분이 소헌왕후(昭憲王后)②를 낳았다. 이름 회(澮)는 영의정을 지낸 뒤 청송부원군에 봉해지고 공숙(恭肅)의 시호를 받으니 3대가 연면히 이어가며 정승이 되어 가성(家聲)③을 크게 빛냈다. 이름 원(湲)은 내자시판관을 지내고 좌찬성에 추증되었다.
고조부의 이름은 순문(順門)으로 의정부 사인을 지낸 뒤 영의정에 추증되었고 증조부의 이름은 달원(達源)으로 기묘사화(己卯士禍)④때 옥당으로 있다가 연루되어 폐출(廢黜)⑤되어 벼슬이 승문원 판교에 그쳤으나 이조참판에 추증되었다. 조부의 이름은 자(鎡)로 선공감 첨정을 지내고 좌찬성에 추증되었으며 아버지의 이름은 우정(友正)으로 문과에 장원한 뒤 벼슬이 여주목사(驪州牧使)에 이르렀고 이조판서에 추증되었다. 더욱 충효를 가지고 이름과 행동을 세워서 백사(白沙) 이항복(李恒福)이 사적을 비문에 실었다. 어머니는 정부인(貞夫人) 광릉 안씨(廣陵 安氏)로 목사 여경(汝敬)의 딸이며 호조판서 윤덕(潤德)의 증손녀이다.
공은 셋째 아들로 융경(隆慶) 기사(己巳:1569)년에 태어났다. 이름은 집(諿)이요, 자는 자순(子順)이며 호는 남애(南崖)이다.
총명하고 자상하고 온순하여 7세에 시어(詩語)⑥로 사람을 놀라게 했고 28세가 되던 병신(丙申:1596)년에 문과 급제하여 괴원(槐院)에서 한원(翰苑)으로 들어가서 사(邪)와 정(正)의 구분을 차론(箚論)했다. 이 때문에 오래도록 야인으로 숨어 지냈다. 외간상을 당하여 예를 다했고 신축(辛丑:1601)년에 다시 들어와서 한림(翰林)이 된 뒤 여러 부서의 관직을 거치고 수원부 판관이 되었다. 그 때 정홍익(鄭弘益)이 간관(諫官)이 되었다.
『현시의 논의가 우계(牛溪) 성(成) 선생을 무함하고 있는데 공이 평상시에는 곧게 말을 하고 구차스럽게 피하지 아니하더니 지금에는 시속(時俗)의 눈치를 살피는가.』
공의 이 말에 정공이 단호히 대답하였다.
『내 뜻이 이미 결정되었네.』
그 뒤 정공이 쫓겨나자 공도 나와서 옹진(瓮津)현령이 되었다. 관리를 단속하고 군민을 안정시켰는데 일이 매듭지어지자 서용(叙用)되어 예조정랑이 되고 문학을 겸했다. 세자(世子)를 모시고 강론했고 정언(正言)이 되어서는 전관(銓官)을 탄핵했다. 경기도 안렴사(按廉使)의 보좌관이 되어서는 권귀(權貴)의 자제로 탐욕이 강한 자를 몰아냈다. 이 때문에 개성(開城) 경력으로 밀려났다가 장흥(長興) 부사로 옮겼다. 부임도 하기 전에 사간원의 진계(進啓)에 의해 죽산부사(竹山府使)로 옮겨서 남쪽의 방어를 보장하고 또 종부정이 되었다.
장령이 되어서는 광해군 초년에 간신(諫臣)의 직언을 논의로 구원하고 견책(譴責)⑦을 받아 체직(遞職)이 되었는데 얼마 뒤 은계(銀溪)찰방이 되고 만기가 되자 경성(鏡城) 판관이 되었으나 부임도 하기 전에 파직되었다. 다시 해운(海運)판관이 되고 제시(諸寺)⑧의 정(正)을 거친 뒤 어사로 차출되어 서울지역 선비의 과거 시험을 주관했다. 당시 모든 문사가 정시(庭試)⑨에 참여했는데 공이 좋은 성적으로 합격해서 진석(晋錫)⑩을 받았다. 또 고령(高靈)현감으로 나갔다. 그 때 정인홍(鄭仁弘)의 무리가 영남에 가득해서 회재(晦齋)와 퇴계(退溪)⑪의 두 현인을 헐뜯고 모욕하였는데 그들의 뜻에 공이 한패거리가 되기를 바라지 않으리라 생각하고 대관을 시켜 탄핵하여 파직시켰다. 뒤에 서용되어 호남조도사(湖南調度使)의 막직(幕職)⑫이 된 뒤 편의(便宜)한 대로 일을 처리하니 백성들이 혜택을 많이 입었으므로 사거리에 돌을 세워서 칭송했다. 또한 재해〔災害〕를 조사하게 하고 왜인(倭人)을 접대하게 했으나 조정에 들어가면 한직(閑職)의 자리에 두었다.
정사(丁巳:1617)년에 검상 사인이 되고 필선을 겸했다. 보덕에 승진하여 중서성(中書省)에 있었는데 장차 추천하려고 했으나 시의(時議)와 어긋나서 탄핵(彈劾)을 받았다.
무오(戊午:1618)년에 흉악한 무리가 백관을 협박해서 모후(母后)⑬의 폐출(廢出)을 청하자 공은 벼슬을 버리고 강해(江海) 사이에 자취를 감추고 한 번도 서울에 발을 들여놓지 아니했다. 신유(辛酉:1621)년에 도원수 한준겸(韓俊謙)이 공을 불렀으므로 따라 갔다. 이보다 앞서 건축하는데 공인(工人)을 감독한 공로로 통정계에 올랐다.
계해(癸亥:1623)년에 인조께서 반정하자 곧 병조참지가 되었다. 대간(臺諫)의 진계에 따라 건축의 공로로 승진된 계급을 강등시켰다가 이튿날 특명으로 원직(元職)⑭에 환원시켰다. 대개 모든 대신들이 입을 모아 공을 발탁해서 써야 한다고 추천했기 때문에 임금께서 공을 빨리 등용하고자 함에서였다. 선혜성(宣惠省)과 재성국(裁省局)의 두 곳마저도 겸해서 관리하게 하니 이것은 앞으로 구폐(舊弊)⑮를 개혁하는데 있어 지난날의 일을 상고하게 함에서였다. 일이 궁중에 국한된 일이므로 훈신(勳臣)이나 척신(戚臣)⑯은 일체 간여하지 못하게 하고 다만 당사자만이 처리할 수 있도록 하니 그것을 아는 사람들이 참여하지 못함을 한스러워하였다. 어느날 밤 모든 장수들이 궐하(闕下)⑰에 모여서 거짓으로 급한 경보를 발하고 남산 봉화대에 불을 들고 궐문을 열도록 청하여 군정(軍情)⑱의 이합(離合)을 시험하고자 했으나 공은 문을 굳게 닫고 허락하지 아니하였다.
『궁궐 문을 밤에는 열 수 없다.』
모든 장수의 마음에 들어하지 아니했으나 임금께서는 그가 원칙을 지킨 것을 매우 가상히 여겼다. 관서의 접반사(接伴使)⑲가 되어 명나라 장수들을 영접하고 돌아와서 승지가 되었다. 일찍이 밤에 왕을 뵙고 당시 말하기 꺼려하는 일을 서슴없이 말하니 옆에 있던 훈신이 더욱 곁눈질을 했다고 한다.
갑자(甲子:1624)년에 어가를 공주로 호위하였는데 돌아와서는 상으로 가선계로 승진되었다. 여주목사와 판결사를 지내고 정묘(丁卯:1627)년에 피난해서 강화로 갔는데 금오(金吾)⑳의 일을 겸했으나 일 때문에 삭직(削職)(21)되었다. 그러나 얼마 뒤 개성유수에 임명되었다.
무진(戊辰:1628)년에 명나라 장수 모문룡(毛文龍)의 접반사가 되었는데 문룡이 방자하게 명나라 조정을 기만해서 우리 나라를 무함(誣陷)(22)하고 책임을 추궁하여 그치지 아니하니 온 나라가 크게 군색(窘塞)(23)해졌다. 공이 지성으로 형편을 설득하여 감정이 없게 하니 그 부장 진계성(陳繼盛)이 공의 충신(忠信)을 사모하여 사태수습에 최선을 다하니 국가가 크게 득을 보았다. 임금께서 가상히 여겨 특별히 도승지를 시켰다가 예조와 형조의 참판으로 옮겼다. 얼마 후 형조판서가 되었다. 공이 벼슬이 높은 것을 두려워하여 문득 지방으로 나갈 것을 요청해서 안변부사(安邊府使)가 되어 어머니를 모시고 갔다. 팔송(八松) 윤황(尹煌)이 사인으로 있으면서 기악(妓樂)을 갖추어 전송연을 마련하였는데 노랫소리가 길에 가득하니 도시 사람들이 그것을 보고 애석하게 여겼다. 또한 둘째형 도정공(都正公) 현이 회양(淮陽)부사가 되어 안변과는 가까웠으므로 어머니께서 두 부(府)의 영양(榮養)(24)을 받게 되었고 공의 아들 동구(東龜)가 옥당관이 되어 왕래하여 빛을 냈다. 동악(東岳) 이안눌(李安訥)이 안찰사(按察使)가 되어 와서 수석(壽席)(25)에 참여하여 잔을 잡고 눈물을 흘리면서 말하였다.
『아아 나 홀로 의지할 곳 없으니 시를 지어 이 자리의 흥을 돕겠다.』
3년이 지나자 해임해서 돌아왔다.
계유(癸酉:1633)년에 다시 형조판서가 되었으나 어머니의 상고를 당해서 거상(居喪)을 마친 뒤 이어서 공조와 형조의 판서를 역임했다.
병자(丙子:1636)에 청나라가 침입하자 임금께서 강화도로 가려고 했었는데 적군이 이미 서교(西郊)(26)에 육박하고 있었으므로 공이 어가 앞에 꿇어앉아 울면서 고하였다.
『바라옵건대 급히 남한산성으로 행하소서.』
중신들의 의사도 그러했다. 성이 포위되자 적이 인질을 요구하면서 강화를 청했다. 대신(大臣)들은 종실의 능봉군(綾峯君) 이(儞)를 왕제공을 대신하여 가게 하니 공(公)이 대신(大臣)들에게 물었다.
『오랑캐가 만약 능봉군이 참말로 친왕제가 맞느냐고 묻는다면, 무엇이라고 대답해야 합니까?』
대신들이 대답하였다.
『정묘난 때도 원창군(原昌君) 구(玖)를 친동생이라고 했는데 지금도 당연히 구(玖)와 이(儞)는 모두 친동생이라고 해야 하며 말 뒤의 말이 달라서는 안됩니다.』
공이 위태롭게 여기면서 다시 물었다.
『구(玖)가 청에 있으니 청은 이미 구(玖)가 친동생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지금 또 전에 온 인질은 종친이고 지금 온 사람이 친동생이라고 하면 되겠습니까?』
대신들은 고집스럽게 구와 이가 모두 친동생이라고 하라고 하니 공이 그 불가(不可)함을 역설하였다.
『부정공(富鄭公)이 적국의 국서를 뜯어보고 지금 관계되는 일이 매우 중하다고 했는데 만약 상공(相公)(27)의 말을 따르게 되면 일이 잘못됨을 면할 수 없을 것입니다.』
대신들이 말하였다.
『공이 구를 친동생이 아니라고 하고자 하니 일은 반드시 성사되지 못할 것입니다.』
적의 진중에 이르자 적장이 나와서 마중했다. 공이 통역관에게 말하였다.
『저 사람은 적장 가운데서 계급이 낮은 자이나 나는 대신이다. 어찌 예를 갖추어 인사하겠는가?』
통역이 이에 답하였다.
『이 사람은 귀한 사람입니다.』
공이 그제서야 일어나서 서로 읍(揖)하니 적장이 공에게 말하였다.
『두 나라가 맺어서 형제가 되었는데 그대 나라가 술과 고기를 가지고 위로하지 아니함은 무슨 까닭인가?』
『지금 창과 칼이 서로 맞대이고 융마(戎馬)(28)가 온 땅을 유린하고 있는데 감히 형제의 나라라고 할 수 있는가? 어찌 마음에 부끄러움도 없이 술과 고기를 가지고 군을 위로하라는 말을 할 수 있단 말인가!』
공의 꾸짖음에 적장이 대답을 하지 못하더니 이어 물었다.
『이 사람이 왕자인가 또는 왕제(王弟)인가.』
『왕자는 나이 어리고 또 국모상(國母喪)(29)을 당했는데 어찌 인질이 될 수 있겠는가. 또한 왕제는 은의(恩義)의 중함이 보기에 왕자의 구별이 없는데 지금 화친을 맺고자 하면 무엇 때문에 왕자와 왕제를 구별해야 하는가?』
공이 반문하자 적장이 그 나라 장수에게 보고하여 대답을 받았다.
『왕세자를 데려와야 한다.』
『세자는 나라의 두번째 임금이시다. 내 감히 이 말을 가지고 행조(行朝)(30)에 보고할 수 있겠는가. 다만 싸움을 할 수 밖에 없다.』
공이 이렇게 주장하여 힘써 논쟁하기를 해가 질 때까지 계속했지만 끝내 서로 양보하지 아니했다. 공이 돌아오려고 할 때 대신과 언쟁한 말이 이미 와전(訛傳)(31)되었고 복명할 때 진전에서 문답한 말에 실수가 있어 적이 세자를 청하게 되었다고 했다. 그 해 가을에 대간이 그 사건을 추론(追論)(32)하여 귀양보낼 것을 청하니 임금께서 비답을 내리셨다.
『만약 그의 본정(本情)(33)을 살피지 아니한다면 그가 죽어도 눈을 감지 못할 것이다.』
오랜 시간이 지난 뒤 다만 문외출송(門外出送)(34)을 명했다.
이듬해 문출을 해제하고 기묘(己卯:1639)년에 호종공신(扈從功臣)에 추가하고 정헌계에 승진시키고 기로사(耆老社)(35)에 들어가게 했다. 경진(庚辰:1640)년에 지중추에서 예조판서에 임명되었으나 힘써 사퇴하여 면함을 얻었다. 이보다 앞서 둘째 형인 도정공이 그 부인 송씨(宋氏)와 함께 강화도가 함락될 때 순절(殉節)하였다. 이 때부터 공이 물러나와 강촌(江村)(36)에 살면서 의약을 가까이하지 아니했다.
『70년 간 구차스럽게 생명을 연장한 것은 오래 살고자 함이 아니라 내 둘째 형과 더불어 늙어서 의지하고자 함이었는데 지금 그 둘째 형이 조용히 의롭게 죽어서 선인(先人)을 지하에서 모시고 있는데 나홀로 살아서 여러 번 나라의 상고와 난을 겪고 있으니 병을 다스려서 무엇하겠느냐?』
갑신(甲申:1644)년 봄에 심기원(沈器遠)이 역모를 꾀하다가 그 무리가 모두 복주(伏誅)(37)될 때
『기원이 이시영(李時英)과 일을 같이 했다.』고 말하였다.
대간(大諫)을 시켜서 이시영을 교체시킬 것을 공이 건의했다. 그 때 공의 맏아들 동구(東龜)가 간직(諫職)에 있었는데 시영의 발론을 한 사람이 따로 있었으나 그 사람이 화(禍)를 입을까 두려워해서 억지로 같이 발의했다고 하라고 애걸해서 책임을 회피했기 때문에 드디어 귀양을 가게 되었다. 공이 아들의 손을 잡고 영결하며 말하였다.
『난적이 가까이에서 나오는구나. 옛날 왕무홍(王茂弘)이 참으로 내 마음을 안 것 같다. 힘써 환란의 길을 가거라.』
이 때부터 병이 깊어져서 입으로 말을 하지 못하고 다만 생각 「사(思)」자를 시자(侍者)의 손에 써 주었는데 이것은 아들을 생각하는 마음의 표시였다. 그 해 9월 28일에 76세를 일기로 정침에서 생을 마쳤다. 부음이 전해지자 조정과 시장의 철폐를 명하고 예관을 보내서 제사를 지냈다. 11월 11일에 금천(衿川)의 흘리(屹里)에 있는 선영 아래 안장했다.
기원의 역옥 뒤에 아들 응교공이 폐고(廢錮)(38)되어 세월을 보냈다. 효종 임진(壬辰:1652)년에 제공들이 힘써 서용(敍用)할 것을 청하여 수용이 되었으나 며칠만에 갑자기 엄지(嚴旨)가 내려 공의 관작까지 추탈(追奪)(39)해 버렸다. 조정의 신하들도 그 까닭을 알지 못했다. 이 때부터 말하는 사람이 그치지 아니했으나 임금의 뜻을 돌리지는 못했다. 응교가 밤낮으로 가슴을 치면서 피눈물을 흘리다가 종기가 나서 죽음에 이르렀다.
『내가 반드시 보고자 할 것이므로 옷이 눈을 가릴 것이다.』
과연 옷이 눈을 가렸으므로 듣는 사람이 슬퍼하지 아니함이 없었다. 금상(今上) 신유(辛酉:1680)년에 연신(筵臣)이 그의 성효(誠孝)를 아뢰었다. 임금께서 모든 대신에게 물으니 대신들이 이구동성으로 맞다고 아뢰었다. 또한 공이 청나라 영문에서 행한 전말을 아뢰니 임금께서는 즉시 공의 관작을 회복시키라고 명하니 날을 가려서 제자(諸子)들이 사당에 고유하고 그 신주의 명칭을 고쳤다.
공은 효도에 독실하여 어버이에게는 항상 온화한 빛과 부드러운 말로 그 뜻에 따라서 젊었을 때부터 늙을 때까지 하루와 같이 했다. 어머니의 연세가 더욱 높아지자 도정공과 함께 동거하면서 즐거움을 봉양에 다했다. 비록 밤이라도 형제가 번갈아가며 일어나서 어머니의 안후를 보살폈고 일찍이 옷을 벗어서 스스로 편함을 취하는 일이 없었고 명절이나 좋은 일이 있을 때 모든 물건을 구비하여 즐거움을 누리게 했다. 증손과 현손이 집안에 가득하고 가수들이 음악을 질주(迭奏)(40)하여 웃고 말하면서 어머니의 기쁨이 극치에 이르도록 하였다. 무슨 일을 할 때는 형제가 백수를 휘날리면서 직접 지휘했고 제사가 들면 미리부터 재계(齋戒)하여 눈 앞에 나타남을 보는 것같이 하였다. 큰 형이 일찍 죽자 그의 두 딸을 길러서 때맞추어 혼인시켰으며 그 제사와 묘소를 끝까지 받들게 했고 자손에게는 경계(敬戒)를 남겨서 자손들이 그 제사를 빠뜨리지 못하게 했다. 또 새로 문려(門閭)(41)를 지어서 둘째 형의 정액(旌額)(42)을 걸면서 말하였다.
『우리 형님의 두 가지 절개(節槪)는 천지 간의 모범이 된다.』
종족간의 친목을 두텁게 해서 원족까지 보살폈고 문 앞에는 방문객으로 인해 신발이 항상 가득했으니 어진 사람은 그의 의로움을 좋아했고 그렇지 못한 사람도 항상 은혜는 생각했다. 평상시에 자제를 이렇게 가르쳤다.
『효도란 백행(百行)의 근본이 된다. 소학에 그 절목(節目)이 자세히 구비되어 있으니 읽어서 마음 속에 간직하고 힘써 실천하여라. 이것을 미루어서 임금에게 충성한다면 비록 배우지 못한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나는 반드시 배웠다고 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 자손들이 효도와 공경을 실행하는데 용감해서 다른 문족과 달랐다. 조정에 들어가 五十년을 벼슬했지만 도를 믿고 바로 행해서 세속 따르기를 즐기지 아니했고 쳐다보고 내려다보고 올라가고 내려가고 영화롭고 욕됨을 하나같이 하늘에 맡겼다. 그가 혼조(昏朝)(43)에 있을 때도 바른 말하는 절개가 특별하니 김덕함(金德탂)이 절개를 지키다가 멀리 귀양갈 때 공이 먼 곳까지 나가서 전송하고 노자를 매우 후하게 주었다. 이이첨(李爾瞻)의 부자가 서쪽에서 왕을 맞이할 때 사람들이 송행시(送行詩)(44)를 얻고자 했으나 공이 능하지 못하다고 사양하니 그 무리가 크게 화를 냈다. 사람들은 공이 그들의 간계에 말려들까 걱정했지만 공은 돌아보지 아니했다.
인조께서 새로 등극하여 정치에 힘을 쏟아 다스림을 구하여 항상 인견하면 가까운 데서부터 나라의 폐단과 시국의 어려움을 말했으나 그의 계책을 다 쓰지 못하여 임금은 기회를 보아서 등용하고자 했지만 끝내 그 뜻을 이루지 못했다. 서울의 풍경을 가장 사랑해서 여가만 있으면 강정(江亭)에 마음껏 놀아 생각이 넓고 깨끗해지면 세상 일을 잊어버린 듯했으나 임금을 사랑하는 한 마음은 끝까지 약해지지 아니했다.
인조 말년에 오랫동안 병을 앓아 조회에 나가지 못하자 공이 아침 저녁으로 임금에게 병이 없게 해줄 것을 축원했다. 공은 참으로 충효를 모두 완전히 한 사람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 그가 죽은 뒤에 벌을 받은 것이 매우 중했으나 이름 있는 공경과 어진 재상이 전후에서 공의 어려움을 호소하여 임금께서 즉위한 뒤에 마침내 원통함을 씻고 광명이 저승에까지 비쳤으니 어찌 충효가 평소에 축적되어 진실하고 속이지 아니한 보답이 아닐는지.
부인 홍씨는 직제학 종록(宗祿)의 딸이다. 옛날 여사(女士)의 기풍이 있어 공이 효도를 성취하는 데 도움을 주었고 깨끗하고 삼가하는 덕이 있어 그 말과 행의가 부모(婦母)(45)의 행동이 되지 아니함이 없었으나 공보다 6년 뒤인 기축(己丑:1649)년에 별세하니 향년 77세였다. 공의 묘 좌측에 부장(쯊葬)했다.
아들은 곧 동구(東龜)로 벼슬이 응교요, 손자는 창(敞)과 유(攸)와 철(轍)과 경(儆)이다. 맏아들인 창은 일찍 죽고, 둘째 아들인 유는 지금 사간의 벼슬에 있고, 셋째 아들 철은 현령이요, 넷째 경은 현감이다.
둘째 아들인 사간의 아들 한주(漢柱)는 진사요, 나머지는 한장(漢章)과 한서(漢瑞)와 한규(漢規)이다. 셋째 아들인 철에게는 딸이 하나 있다. 넷째 아들인 경의 아들들은 한웅(漢雄)과 한필(漢弼)과 한영(漢英)과 한명(漢明)이다.
나는 이미 응교의 무덤에 명을 했는데 지금 사간 형제가 다시 찾아와서 공의 명을 청하였다.
 명(銘)하기를,
 혁혁(赫赫)한 심씨 문중이여, 대대로 벼슬이 높았었네.
 문장과 행실이 서로 이어지니 뜻도 이루고 소원도 이루었다.
 다만 공의 효성과 덕행만은 참으로 숨겨지지 아니할 것이다.
 베풀어도 이지러짐이 없고 옛 사람과 비교해 보아도 부끄러움이 없다.
 나머지 조건이 모두 옆에서 이루어진 것은 근본이 이미 서 있기 때문이다.
 형을 잘 섬기고 친척에 화목하며 정의에 따라 행동이 나타난다.
 몸을 다스려서 임금을 섬김에 그 일을 부지런함과 정성으로 처리했다.
 혼조(昏朝)를 당하여 고향으로 스스로 돌아갔으나
 계해(癸亥:1623)년에 반정이 이룩되자 세상 길이 순수해졌네.
 성주께서 공을 알아 보시고 마음을 기울여 일을 맡기셨네.
 공 또한 성주의 은혜에 감격해서 한 마음으로 섬길 뿐 두 마음이 없었다.
 조정의 비평이 비록 다급하나 임금이 돌보심 변함이 없었고
 높음이 경월(卿月)과 같아 종백(宗伯)의 자리를 주었네.
 다만 둘째 형께서는 탁연(卓然)히 의리에 죽었고
 집의 가르침이 더욱 커서 비교할 만한 곳이 없다.
 죽은 뒤에 귀양갔다가 무망(无妄) 사이에 갑자기 돌아왔다.
 위에 계시는 존엄하심을 누가 감히 헤아리겠는가.
 자식 있어 효도하여 등에 종기가 나도록 피눈물 흘렸다.
 번거롭고 원통함이 벼슬길 막아 죽으면서도 오히려 본다고 했다.
 그 뒤 조정의 신하들이 그 처음과 끝을 아뢰었다.
 하늘에 해가 분명히 떠오르고 더러운 때 깨끗이 씻었다.
 아들과 아버지의 영이 황천 속에서 감읍(感泣)할 것이다.
 이것이 좋은 경사라고 아뢰니 이것을 보고 실천할 수 있을 것이다.
 내가 그 일을 전각(篆刻)해서 그 후손들을 격려한다.
우암 송시열 찬

 註① 원조(遠祖):먼 조상. 시조 또는 선조.
② 소헌왕후(昭憲王后):조선 제四대 임금 세종대왕의 왕비.
③ 가성(家聲):한 집안의 명성.
④ 기묘사화(己卯士禍):중종 기묘(己卯:1519)년에 남곤(南袞)·심정(沈貞) 등이 신진 사류인 조광조(趙光祖) 등을 무함하여 일으킨 사림의 화.
⑤ 폐출(廢黜):쫓겨남.
⑥ 시어(詩語):시를 짓는 데 사용되는 어구.
⑦ 견책(譴責):일을 잘못 처리하여 책임을 추궁하여 문책함.
⑧ 제시(諸寺):관청의 명칭. 끝에 시(寺)자가 든 여러 관청.
⑨ 정시(庭試):과거의 명칭. 조고(朝考)와 전시(殿試).
⑩ 진석(晋錫):왕 앞에 나가서 하사품 또는 상품을 받음.
⑪ 회재(晦齋)와 퇴계(退溪):회재는 조선 중종 때 명현 이언적(李彦迪)의 호. 퇴계는 당시의 명현 이황(李滉)의 호.
⑫ 막직(幕職):막료. 현시의 보좌관.
⑬ 모후(母后):선조의 왕비, 즉 인목왕후(仁穆王后). 광해군에게는 어머니가 되므로 모후라 함.
⑭ 원직(元職):본래의 직책. 강등되기 전의 직책.
⑮ 구폐(舊弊):낡은 폐습. 관행으로 이어진 잘못된 습관.
⑯ 훈신(勳臣)과 척신(戚臣):공로로 봉작을 받은 신하와, 왕의 친척으로 봉작을 받은 신하. 정규 임용 과정을 밟지 아니한 신하.
⑰ 궐하(闕下):궁궐의 뜰 아래. 또는 궁문 밖. 궐외.
⑱ 군정(軍情):군의 동정, 군의 운영 상황.
⑲ 접반사(接伴使):사신을 접대하는 책임관리.
⑳ 금오(金吾):집금오(執金吾)의 준말. 왕의 호위병. 한(漢)나라 때부터 시작됨.
  (21)삭직(削職):삭탈관직(削奪官職)의 준말. 관작을 빼앗아 버림.
  (22)무함(誣陷):무고하여 모함함. 없는 사실을 조작하여 함정에 빠뜨림.
  (23)군색(窘塞):곤궁. 재물이 없어서 생활에 어려움을 겪음.
  (24)영양(榮養):영화스럽게 봉양함.
  (25)수석(壽席):헌수석. 환갑 또는 생일날 손님을 청해 대접하면서 장수를 축하하는 행사.
  (26)서교(西郊):서울의 서쪽. 지금의 김포, 강화 등지.
  (27)상공(相公):정승을 부를 때 쓰는 존칭.
  (28)융마(戎馬):전쟁에 쓰여지는 말. 전마.
  (29)국모상(國母喪):나라 왕비의 상고. 왕비를 국모라 부르기 때문에 왕비의 상사를 국모상이라 함.
  (30)행조(行朝):행궁에 있는 조정. 피란지에 있는 조정.
  (31)와전(訛傳):거짓말이 전해짐. 잘못 전해짐.
  (32)추론(追論):지나간 일을 다시 끄집어내서 거론함.
  (33)본정(本情):본심. 일이 변하기 이전의 마음 또는 상황.
  (34)문외출송(門外出送):문출. 도성에 들어오지 못하도록 하는 대신들에게 내리는 벌.
  (35)기로사(耆老社):조선 초기부터 2품 이상의 관직을 지내고 七十세가 넘은 노인을 우대하기 위해 만들어진 관변단체.
  (36)강촌(江村):시골 또는 강가의 마을.
  (37)복주(伏誅):죄를 짓고 죽음을 당함.
  (38)폐고(廢錮):폐출된 죄인으로 출입이 제한됨. 지금의 금고형.
  (39)추탈(追奪):관원이 죽은 뒤에 전에 죄가 인정되어 그 벌로 이미 주어진 관작을 취소함.
  (40)질주(迭奏):악기를 여러 가지로 번갈아가며 연주함.
  (41)문려(門閭):문 앞.
  (42)정액(旌額):나라에서 충신의 집을 표시하기 위해 임금이 직접 써서 하사하는 현판. 사액.
  (43)혼조(昏朝):광해군 시대. 광해군이 인륜과 도리를 저버린 흔암한 정치를 했다는 이유로 혼조라 함.
  (44)송행시(送行詩):어떤 사람이 부임이나 사신으로 떠나갈 때 친구와 동료들이 그의 전도를 축원해서 지어주는 시.
  (45)부모(婦母):며느리와 어머니. 현모양처의 다른 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