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랑공(휘 척)묘비문 |
충신 증통정대부 이조참의 행정랑 휘 척 묘소(향토유적 제8호) 묘비석,안내판 |
十二世祖
忠臣 贈通政大夫 吏曹參議 行正郞沈公 諱 惕 墓碑文
公諱惕字惕若號歙谷靑松沈氏靑城伯德符靑川府院君溫靑松府院君澮領議政連源之后靑陵府院君鋼之孫扈聖原從功臣信川郡守贈吏曹參判孝謙之次子文元公金沙溪長生之門人也吏曹啓請廢朝十年被罪又學行儒生因賊臣跋扈未登庸人才竝擢敍用六品職上從之公拜六品職(王朝實錄卷之一癸亥)公被擢學行儒生直受谷縣監累遷至正郞崇禎九年丙子胡亂殉節于江都華摩尼山下英祖三年丁未四月疏請公宜配於江華忠烈祠加贈賜諡上優批嘉納史實收錄英祖大王實錄卷之十一是故頌公之節義賜忠臣旌閭贈吏曹參議又此史實收錄於一九九四年江華郡刊江華史二○○五年仁川廣域市刊忠烈祠誌黃澗縣監公監牧于江都時遭 虜亂其弟殉節于摩尼山下公當弟之殉節蓋無意於世丁丑忽然棄官歸終生以歎息又涕泣而作 哭弟 墓詩 詩云 萬若千辛白髮翁 忍看孤墓寄層峰 心如在側飜驚逝 耳似聞聲便覺空 淚有盡時悲不盡 生無逢日死應逢 若埋吾骨先塋下 香火連燒世世同 噫公不成雄志而 殉節寧無哀痛哉 公之憂國盡忠使 後孫不忘永世 開天四三三八年 月 靑松沈氏信川公派宗中 謹立 12세조 충신 증통정대부 이조참의 행정랑심공 휘 척(惕) 묘비문 공의 휘는 척(惕)이요 자는 척약(惕若)이며 호는 흡곡(歙谷)이고 청송심씨이다. 청성백 덕부(德符) 청천부원군 온(溫) 청송부원군 회(澮) 영의정 연원(連源)의 후손이요 청릉부원군 강(鋼)의 손자이고 호성원종공신 신천군수 증이조참판 효겸(孝謙)의 둘째아들이요 文元公 사계(沙溪) 金長生의 門人이다. 이조(吏曹)에서 임금에게 아뢴 일로 광해군 10년에 죄를 받았고 또 學行이 있는 유생(儒生)이라도 권세를 농락하는 사람은 任用하지 말고 인재를 고루 뽑아서 육품직(6品職)에 임명하소서 하니 임금이 그 뜻을 따랐다. 公은 6품직에 임용되었고 학행유생으로 발탁되어 바로 흡곡(歙谷)현감에 임명되었고 여러번 옮겨 정랑(正郞)에 이르렀고 숭정(崇禎) 9년 병자호란에 강화(江華)의 마니산(摩尼山) 아래에서 순절(殉節)하니 영조 3년 정미 4월에 강화 충렬사(忠烈祠)에 배향할 것을 상소(上疏)하였고 증직을 올려주고 시호 내릴 것을 아뢰니 임금이 윤허하여 가납(嘉納)하는 교지(敎旨)를 내렸으니 사실(史實)이 영조실록 11권에 수록(收錄)되어 公의 절의(節義)를 기리고 충신의 정려(旌閭)를 내렸으며 이조참의에 증직되었고 또 이 사실이 1994년 강화군간(江華郡刊) 강화사(江華史)와 2005년 인천광역시간(仁川廣域市刊) 충렬사지(忠烈祠誌)에 수록되었다. 황간현감(黃澗縣監)공이 강화의 수령으로 있을 때 병자호란을 당하여 그 아우가 마니산에서 순절한 것을 보고 세상에 뜻이 없어 바로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와 일생을 마쳤고 또한 아우의 죽음을 슬퍼하며 지은 시가 있으니 다음과 같다. 온갖 고생한 늙은이여 차마 외로운 무덤이 산봉우리에 있음을 볼 수 있으랴 마음은 곁에 있는 것 같으나 갑자기 없어지고 귀로 소리를 들은 것 같으나 그것은 헛소리였네 눈물은 말라도 슬픔은 다하지 않고 살아서는 만날 수 없으나 죽어서는 응당 만날걸세 만약 내 뼈가 선영아래 묻힌다면 제사를 대대로 같이 지내주겠지. 아아 공이 영웅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순절하였으니 어찌 슬프지 아니 하리오 공은 나라를 위하여 충성을 다하였고 후손으로 하여금 영원히 잊지 않게 하였도다. 開天4338년 일 청송심씨 신천공파종중에서 삼가 세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