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간현감공(휘 픽)묘갈명

현감공 휘 픽 묘소(향토유적 제8호)
소재지: 김포시 장기동 고창산하 선영하

묘 비 석


十二世祖 贈戶曹參判 行 縣監公 諱 愊 墓碣銘
石村沈公諱愊字去華生有異質長益嚴毅與世寡諧而居家有孝友接人油油然其自叙曰遇朱門甲第掩目而過之見陋巷蓬廬必徘徊眷顧若想見曲肱飮水之樂遇紆靑拖紫心實鄙之見任俠屠狗必揪然忍性庶幾見悲歌慷槪者此余所以見怪於流俗而余亦不能自知其爲何心也公之所師者龜峰沙溪兩先生所與遊者皆當時名流而如權石洲李竹西申玄軒最其神交者也盖觀於此等凡百可以知公之所存所守者而百世之下欽仰之心倍蓰矣生甫成童値壬辰倭亂隨親避兵于關西甲午還京旋歸金浦田廬力學不倦遭時光海斁倫謝絶功令 仁祖改玉首 除繕工監役歷主簿監察出監黃澗縣準法爲政吏服其威民歸其恩而 忤一臺官浩然歸鄕甲戌監牧于江都丙子遭虜難公之弟歙谷公殉于摩尼山下自是無意世路棄歸鄕庄甃池種蓮築塢栽菊吟哦徘徊於其間悠然有逸士之趣 顯宗癸卯十月五日屬纊焉距其生 宣祖戊寅十二月二十日享年八十六葬于金浦高昌山負壬原後推子恩 贈戶曹參判配淸州韓氏大護軍富吉之女淸川府院君伯倫之五代孫庚辰生丙申七月十一日卒墓同塋異室沈氏系出靑松麗衛尉寺丞諱洪孚爲鼻祖其後柱石勳臣磊落相踵如靑城伯諱德符靑川府院君諱溫恭肅公諱澮忠惠公諱連源靑陵府院君諱鋼是祖考以上考諱孝謙郡守 贈吏叅妣宜寧南氏應瑞女固城李氏磬女公李氏出也擧男廷逸同知廷哲廷傑同知廷賤廷漢廷豪女適李仁富宋泓尹陞廷逸生榎參奉女適李藎韓相廷哲生梣廷傑生 僉知棱奉直郞餘不錄噫跡公之狀出於公之玄孫靜坐窩公之錄足徵來世者也公之後孫協謀樹碣使相弼問銘于不侫窃念愚於靜坐窩先生景仰己久旣見此狀於文集中今之此役烏不協贊哉公之實行略撮於狀之中而窃有所深恨者狀文云其爲詩也渾厚贍敏文亦平舖典實有如大朴未散也所藏于家者凡十卷云今不得以見之嗚呼惜哉銘曰
觀其所友者知公之何難焉積之中經綸策世我違未展焉大朴未散之論孰其曰私親焉高昌山點佳城過下者肯式焉
開天四千三百二十四年 辛未重七日
前成均館典儀 恩津 宋貢鎬 謹撰

12세조 증호조참판 행 현감공 휘 픽(愊) 묘갈명
석촌 심공(石村 沈公)의 휘(諱)는 픽(愊)이오, 자(字)는 거화(去華)니 출생하면서 특이한 체질로 성장하고 성격은 더욱 엄격하여 세상사와는 접촉이 드물고, 집안에서는 효도와 우애가 극진하였으며 사람과 접촉하는 데는 화열하였다.
스스로 말씀하기를 높은 관원을 만나면 눈을 가리고 지나가게 되며 으슥한 곳의 초가집을 보면 반드시 서성거리며 돌아보게 되니 팔을 베고 물을 마시는 즐거움을 상상하여 볼만한데 높은 사람의 관복 입은 것을 만나면 마음으로 좋지 않게 여기고 약자를 돕고 강자를 억제하고자 하는 마음이 강하게 일고 짐승이라도 죽이는 것을 보면 측은한 마음이 생겨 슬프게 탄식하게 되니 이는 내가 세상 사람들에게 괴의하게 보일 것이나 나도 역시 내 마음을 무슨 마음인지 알지 못하겠다고 하셨다.
公께서 존경하는 분은 구봉(龜峰:宋翼弼)·사계(沙溪:金長生)의 두 선생이오, 어울려 놀던 벗은 모두 당대의 名士인 권석주(石洲:權韠)·이죽서(竹西:李敏迪)·신현헌(申玄軒:象村=申欽) 같은 이가 막역한 친구간이셨다. 대개 이러한 모든 것을 볼 때 公의 포부(抱負)를 알만하고 百世 후에서도 사모하는 마음이 더욱 간절하도다. 출생하여 성동(成童)시절에 임진왜란(壬辰倭亂)을 만나서 어버이를 따라 평안도(關西)로 피난갔다가 甲午(1594)년에 서울로 올라왔고 곧 김포의 옛집으로 돌아와 학문을 게을리 아니하는데 광해(光海)의 혼탁(混濁)한 정치를 만나서 벼슬을 사절하였고 仁祖反正(1623) 後에 선공감역(繕工監役)에 제수되었다. 주부(主簿) 감찰(監察)을 역임(歷任)한 후 황간현감(黃澗縣監)으로 부임하여서는 法에 따라 정치를 하니 관리는 그 위엄에 복종하고, 백성은 그 은혜에 감동되었는데 대관(臺官:司憲府官員)을 거스르게 되어 호연(浩然)하게 고향으로 돌아왔었다. 甲戌(1634)년에 강화감목(江華監牧)이 되었는데 병자호란(丙子胡亂:636) 때에 아우 흡곡공(歙谷公:弟諱惕이 마니산(摩尼山) 밑에서 순직하므로 이때로부터 세상에 뜻이 없어져 버리고 고향에 돌아와서 연못에 연(蓮)을 심고 언덕에 국화(菊花)를 심어서 가꾸며 그 사이에서 시(詩)를 읊으면서 배회(徘徊)하니 유연(悠然)한 일사(逸士)의 취미가 있었다. 현종 계묘(顯宗癸卯:1663)년 10月5日에 별세하시니 宣祖戊寅(1578)년 12月15日에 출생함으로부터 향년(享年)이 86歲이며 김포 고창산 임좌(金浦高昌山壬坐)에 안장하였다. 뒤에 아들이 귀하게 됨으로써 증직이 호조참판(戶曹參判)이 되었다.
부인은 청주 한씨(淸州韓氏)니 대호군 부길(大護軍富吉)의 따님이요, 청천부원군백륜(淸川府院君伯倫)의 오대손(五代孫)이며 庚辰生(1580)으로 丙申(1656)년 7月11日에 별세하시니 향년(享年) 77歲이며 묘소는 합폄 이실(同塋異室)이다.
沈氏는 관향(貫鄕)이 靑松인데 고려조(高麗朝)의 위위시승 휘 홍부(衛尉寺丞諱洪孚)를 시조(始祖)로 그 후에 나라의 공신(勳臣)이 계속되었으니 청성백 휘 덕부(靑城伯諱德符)와 청천부원군 휘 온(靑川府院君諱溫)과 공숙공 휘 회(恭肅公諱澮)와 충혜공 휘 연원(忠惠公諱連源)과 청릉부원군 휘 강(靑陵府院君諱鋼)은 조고(祖考) 以上이오, 부친(考)은 휘(諱)가 효겸(孝謙)이니 郡守로 증직이조참판이오, 모친(妣) 의령 남씨(宜寧南氏)는 응서(應瑞)의 따님이오, 고성 이씨(固城李氏)는 경(磬)의 따님인데 公은 李氏의 소생이다.
아들은 동지 정일(同知 廷逸)과 정철(廷哲)과 동지 정걸(同知 廷傑)과 정천(廷賤)과 정한(廷漢)과 정호(廷豪)요, 딸은 이인부(李仁富)와 송홍(宋泓)과 윤승(尹陞)에게 각각 출가하였다. 정일(廷逸)의 소생 가()는 참봉이오, 딸은 이신(李藎)과 한상(韓相)에게 출가하였다. 정철(廷哲)의 소생은 침(梣)이오, 정걸(廷傑)의 소생 현은 첨지(僉知)요, 릉(棱)은 봉직랑(奉直郞)이며 나머지는 모두 기록하지 않는다.
아아! 公의 행적은 公의 현손 정좌와공(玄孫靜坐窩公)의 행장(行狀)으로서 넉넉히 고증되는 것이다.
공의 후손(後孫)들이 비석(碑石)을 세우기로 합의하고 상필(相弼)로 하여금 나에게 비명(碑銘)을 부탁하는데 나는 정좌와선생(靜坐窩先生)을 이미 벌써 오래 전부터 사모하고 문집도 보았는데 公의 행장(行狀)이 문집(文集)에 기록된 것을 참고하여 이번 비문(碑文)을 기록하게 된 것이다.
公의 사적을 행장 속에서 약간 채택하였으나 깊이 느낀 바가 있으며 행장문에 이르기를 公의 시(詩)는 순수하고 풍부하며 문(文)은 역시 평탄하고 충실하며 순박한 것이 과연 그대로인데 집에 공의 문집 장서(藏書)가 무릇 10卷이라고 하였으나 지금 열람하지 못한 것이 아쉬운 것이다. 명하여 이르기를
公의 스승과 친구를 본다면
그의 포부를 알만 하도다.
마음속에 쌓인 경륜은
때를 만나지 못하여 펼치지 못 하였도다.
순박한 그대로의 논리는
누구인들 사욕(私慾)이 섞였다고 할 것인가?
고창산(高昌山) 묘소 앞에
지나가는 사람은 모두 높이 우러러 숭배할 것이다.
개천(開天) 4324年 신미(辛未) 7월 7일
전성균관전의 은진 송공호(恩津 宋貢鎬) 삼가 지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