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경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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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경루 (경상북도유형문화재 제183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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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경루 현판 완문,비변사,순찰사(찬경루앞)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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讚慶樓記
宣德己酉仲春之日遵海而東而北至眞寶轉南行數十里漸見山勢起伏如龍騰而虎踞川流盤廻若欲去而復來松栢鬱乎蒼蒼煙霞촇其靄靄淸幽一洞依然仙境者乃靑松也俄而軍吏冠服擁道次郡守備儀仗迎 命白叟黃童鄕學校坊莫不歌詠盛德各有詩章旣禮訖登南樓自是民淳俗厚竟日無狀告者郡守河君澹斯文友也謂余曰是邑乃 王后之鄕嘗以縣陞郡第緣地僻使稀館舍未備往歲始募閑徒構廳堂曁此樓願名以記之余曰夫河嶽之靈異者必産其祥祖宗之積累者必流其慶靑原侍中公之先世分秀氣於二樂種仁厚於三韓培養其根本孕毓其精英迄今 坤德母儀玉葉金枝衍我朝鮮億萬世無疆之福登斯樓望其墓不得不爲之仰讚也故名之曰讚慶洪汝方記 찬경루기(번역문) 선덕(宣德) 기유년 중춘에 바다를 따라 동쪽으로 갔다가 북쪽으로 가서 진보(眞寶)에 이르러 다시 남쪽으로 되돌아와서 수십리쯤 가니 점점 가까워지는 산세(山勢)가 높아졌다 낮아졌다 하고 용이 오르는것 같고 호랑이가 쭈그리고 앉은것 같으며 냇물의 흐름은 빙 돌아서 가려고 하다가 다시 돌아오는것 같고 소나무와 잣나무가 빽빽하게 우거진 곳에 연기와 안개가 끼어있고 맑으며 그윽한 한 동네가 옛날과 다름없이 선경(仙境)을 이루고 있으니 그곳이 청송이다. 갑자기 군리(軍吏:군대에 속한 관리)가 관복(冠服)을 입고 길을 막아 호위한 다음 군수가 의장(儀仗:의식에 쓰는 무기)을 갖추고 나오면 맞이하여 늙은이와 어린아이 향학(鄕學) 교방(校坊)이 성덕(聖德:임금의 덕)을 노래로 부르며 각각 시의 장구(章句)를 지었고 그 예가 끝나면 남루(南樓)에 올라갔으니 이로부터 백성이 순박해지고 풍속이 후하여져서 해가 다가도 소장(訴狀)을 내어 고소하는 사람이 없었다. 군수 하군(河君) 담(澹)은 나와 유학(儒學)을 같이한 벗이다. 나에게 말하기를 이 고을이 곧 왕후의 고향으로 일찍이 현(縣)을 군(郡)으로 승격시켰으나 벽지로 사신의 왕래가 드믈어 관사(館舍)가 갖추어지지 아니하였더니 지난해 처음으로 청사(廳舍)와 이 누(樓)를 짓고 나에게 그 기(記)를 지어달라고 하니 그 기는 다음과 같다. 무릇 신령스럽고 뛰어나면 반드시 행복을 낳게 되는 것이요. 조종(祖宗:공있는 임금과 덕있는 임금)이 공덕(功德)을 쌓고 쌓으면 반드시 경사(慶事)가 오는 것이니 청성백의 선세(先世)는 빼어난 기운을 이락(二樂:위로 하늘과 아래로 사람에게 부끄러워할 것이 없는 군자의 두가지 즐거움)에서 나누어 어질고 후덕한 것을 우리나라에 심어서 그 근본을 북돋아 기르고 그 정영(精英)을 낳아서 길렀으며 지금까지 왕후와 왕족이 우리 조선에서 만세토록 끊이지 않는 복을 누리고 있으니 이 누에 올라 그 묘를 바라보면 저절로 우러러 찬사(讚辭)를 드리게 되기 때문에 찬경(讚慶)이라 이름을 지었다. 홍여방 지음
崇禎紀元後三壬子榴月上澣 西原 韓光近 記 찬경루중건기(번역문) 세상에 누관(樓觀:망루)이 대개 많으니 일 벌리기 좋아하는 사람이 조그만 언덕만 있으면 문득 나무를 얽어 쉬는 곳으로 만들고 고운 빨간 색깔의 흙을 칠하고 액자를 걸어 빛내어 자기 스스로 경관이 좋다고 하나 그것은 알지 못하는 것이다. 언덕위로부터 보면 바다위의 신기루가 높이 솟아 중천(中天)에 있는것 같으나 기뻐할만한 것이 아니고 조금 있다가 세속(世俗)의 티끌이 되는것 또한 근심할 것은 아니다. 오직 이 송학의 옛 고을은 소헌왕후의 고향이다. 고을의 남쪽에 문림공의 묘소가 있고 소나무와 잣나무가 빽빽하게 서 있으니 왕후께서 궁중의 내시를 보내어 심은 것으로 지금까지 그 그늘이 땅에 가득하고 묘소로부터 북쪽으로 수리(數里)쯤에 새가 두 날개를 편것처럼 넓은 누(樓)가 있으니 그 누에 올라가서 그 묘소를 바라보면 누구든지 큰 소리로 칭찬하며 아름답도다. 우리 왕후께서 이 땅에서 나시어 왕후가 되시고 경사를 나라에 길렀다고 아니하는 사람이 없을 것이므로 이름하여 찬경이라 하였으니 옛날 군수 하담(河澹)이 처음 지은 것이다. 영남 칠십주(70州)에 좋은 누대(樓臺)에 올라갔다 내려왔다 할 곳이 드믄 드믄 있었으나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이 누에 사양하였으니 대개 그 이름의 소중함이 있기 때문이다. 내가 승정원에 있다가 죄를 지어 이곳 군수로 나와서 재주가 없고 또 병들어서 능히 정사를 보기 어렵게 되어 스스로 근심하고 두려워하였더니 그 이듬해 초봄 신사에 바람불면서 불이 서북쪽에서 일어나 이백여 민가를 태우고 불을 끄지 못하자 관루(館樓)에까지 미쳤으니 아아 몇백년동안 높고 빛났던 것이 하루 아침에 다 불에 타서 초토(焦土:불에 타서 검게 된 흙)가 되었으니 그 군수가 덕을 잃어서 그렇게 된것이 아닌가 누(樓)가 여기에 있으니 비록 보통 노래하고 춤추며 노는 곳이라 할지라도 이미 지었다가 또 없어지니 사람들이 모두 아깝게 생각하고 다시 고쳐 지으려 하는데 하물며 누의 이름을 지은 뜻은 어찌할 것이며 또 하물며 방금 나라의 경사가 한없이 점점 커지고 안팎의 신하와 백성들이 몹시 기다리며 기리고 하례하는 자에게는 더욱 어찌할 것인가 오늘날 이 땅을 지키는 자 서서 불에 탄것만 구경하고 다시 짓지 아니하면 그 옳은 일이라 할 수 있겠는가 이에 목수와 미장이를 불러 설계하고 재목을 모으며 돌을 다듬으니 여러 백성이 부지런하게 힘써 일하였으므로 지난 四월 계축에 대들보를 올리고 윤달 계미에 일을 마치니 누가 장대(壯大)하고 미려(美麗)하여 옛것보다 더 넓고 아름다웠다. 누가 불에 타니 백성이 모두 한탄하며 이 누는 우리가 나라의 경사를 기리는 곳이니 감히 고쳐 짓지 않을 수 없다 하고 누가 완성되니 백성이 모두 즐거워하며 이 누는 우리가 나라의 경사를 기리는 곳인데 지금 다시 고쳐지어 면목을 일신하였다 하고 나에게 와서 옛날 시인(詩人)이 문왕의 덕을 기리며 주나라가 비록 오래되었지만 그 명(命)은 오직 새롭다고 말하였는데 지금 우리 땅에 이 누가 있은지 오래되었으나 또한 새로우니 어찌 이로써 우리나라의 경사가 새로워진 것을 다시 기리지 아니하리오 우리나라가 있으므로 이 경사가 있고 이 경사가 있으므로 우리의 누가 있으니 지금으로부터 몇천만년에 이르도록 새것이 묵은것이 되고 묵은것이 새것이 되어 산이 다 갈려서 없어져도 우리의 누는 잊으러지지 않고 바다가 말라서 티끌이 되어도 우리의 누는 없어지지 아니할 것이니 어찌 대수롭지 않은 망루가 잠깐 있었다가 잠깐 없어지는 것과 비교하여 말하리오 하므로 내가 옳다 옳다라고 대답하고 드디어 기를 지었다. 숭정기원후 세번째 임자년 五월 상순에 서원 한광근이 지음 讚慶樓重修記 靑松山邑也周房飛鳳諸鎭蜿蜒磅礡于其中儲精毓寶藏旣富文獻代興爲嶺之大府而其以土姓最著于國中者沈氏也昭憲仁順端懿三王妃出焉故尤庵宋文正公謂之 聖朝莘摯其始祖文林公之墓在是文林公之玄孫安孝公實誕昭憲自 朝廷謹祭祀守護之節旣劃位田而完給之又建祭閣而莊嚴之萬歲讚慶二樓是也萬歲則在墓下讚慶則在府中而大江流其間雨潦時漲不能至萬歲而將事於讚慶其爲慮深遠爾創修畧相先後而斯樓則世宗己酉河侯澹莅是府治公廨而於客館之南別爲傑構請觀察使洪公汝方名而記之其記有曰登斯樓而望其墓不得不爲之仰讚故名之以讚慶其意蓋以昭憲發祥于此爲國母儀以衍螽斯之慶者而可讚也今爲六百載之久矣其後戊辰德水李公東溟莅府重新之而尤庵宋文正公記之又其後丁卯再重修而叅奉李公中轍述樑頌皆極其顯揚而歲亦已久則風雨鳥鼠之患所不能無者其後孫諸公合謀而重創之視舊增輪奐焉工旣告訖相完相八甫來屬記於不侫顧膚淺蔑識不敢以文字之役幷名於往昔諸賢之列然其勤屬之意終亦不可負也玆撮舊記著其本末繼進一言曰在昔之時一瓦一桷皆出於宮則易爲力焉而今時則不然也費皆出於子孫而後得以成之時移事徃不能無今昔之感而由昔則足以爲子孫之榮由今則可以見子孫之誠然榮有時而衰歇實不足待也誠無所而不存是不可不思者也况子孫者愈久而愈衆誠而爲之夫何事之不成然則斯樓也其將永存於無窮矣豈不盛矣美矣哉是爲記 辛亥白露節 昌山 曺圭喆 記 찬경루중수기(번역문) 청송은 산고을이다. 주방(周房) 비봉(飛鳳)등 여러 명산이 꾸불꾸불 길게 뻗어나가서 그 가운데에 섞이어 하나가 되었고 정기(精氣)를 쌓아 길러낸 보고(寶庫)가 풍성하고 문헌(文獻)이 대대로 흥성(興盛)하여 영남(嶺南)의 큰 부(府)가 되고 그 토성(土姓)으로써 나라안에서 가장 나타난 성이 심씨이다. 소헌(昭憲) 인순(仁順) 단의(端懿) 세 왕비가 나왔으므로 우암(尤庵) 송문정공(宋文正公)이 성조신지(聖朝莘摯:주나라 때 문왕의 어머니) 태임(太妊)과 문왕의 왕비 태사(太姒)와 같다고 말하였다. 그 시조 문림공의 묘가 여기에 있고 문림공의 현손(玄孫) 안효공이 소헌왕후를 낳아 조정으로 부터 제사지내는 것과 수호하는 것을 잘하라고 위전(位田)을 주고 또 제각(祭閣)을 장엄(莊嚴)하게 지었으니 만세(萬歲) 찬경(讚慶) 두 누(樓)이다. 만세루는 묘 아래에 있고 찬경루는 부(府)의 가운데에 있어 큰 강(江)이 그 사이로 흐르므로 비가 많이 와서 강물이 불면 만세루까지 가지 못하고 찬경루에서 제사를 지내니 그 염려함이 깊고 멀도다. 창건(創建)은 대략 선후(先後)해서 지었는데 이 누는 세종 기유년에 하담(河澹)이 청송부사로 부임하여 관사(官舍)를 수리하고 객관(客館)의 남쪽에 따로 큰 집을 짓고 관찰사(觀察使) 홍여방(洪汝方)에게 청하여 창건기(創建記)를 지었으니 그 기(記)에 이 누에 올라 그 묘를 바라보면 우러러 기리지 아니할 수 없으므로 찬경이라 이름하였다 하니 그 뜻은 대개 소헌왕후가 여기에서 나시어 국모(國母)가 되었고 자손의 번성한 경사가 있어 기릴만하고 지금 육백년이나 되었다. 그후 무진년에 덕수이공(德水李公) 동명(東溟)이 부사(府使)로 와서 다시 지음에 우암 송문정공이 기(記)를 썼으며 또 그후 정묘년에 다시 중수(重修)하고 참봉(叅奉) 이공(李公) 중철(中轍)이 상량문(上樑文)을 지었으니 모두 그 이름이 세상에 나타났는데 세월이 오래되어 풍우(風雨)와 조서(鳥鼠)의 피해(被害)가 없지 아니하였으므로 그 후손들이 서로 합의하여 다시 지으니 전보다 더 크고 아름다웠다. 공사가 끝나자 상완(相完) 상팔(相八)이 와서 나에게 기(記)를 지어달라고 하니 돌아보건대 천박하고 무식한 나로서 글을 지어 옛날 군자 여러분의 반열(班列)에 이름을 같이 있게 한다는 것은 감히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사양하였으나 그 요청함이 너무 간절하여 끝내 저버릴 수 없어 옛 기(記)를 참고로 그 본말(本末)을 적으니 다음과 같다. 옛날에는 개와 한장 서까래 한개도 모두 궁중(宮中)에서 나왔으므로 일하기가 쉬웠는데 지금은 그렇지 아니하여 비용이 모두 자손에게서 나온 뒤라야 일을 할 수 있으므로 시일(時日)과 사물(事物)이 변천(變遷)되어 이제와 예가 너무 틀리는 것이 많고 옛날은 자손이 족히 번성하였으며 지금은 자손의 정성을 볼 수 있으나 번성함은 때로는 쇠퇴(衰頹)하니 기대할 수 없지만 정성은 어디에서나 할 수 있는 것이므로 가히 생각하지 않을 수 없거든 하물며 자손은 오래되면 더 많아질 것이며 정성을 다하면 무슨 일인들 이루지 못하리오. 그런즉 이 누가 장차 영원 무궁하리니 어찌 성대(盛大)하고 아름답지 아니하리오. 이에 기(記)를 쓰노라. 신해 백로절에 창산 조규철이 지음 讚慶樓重修後記 靑松 聖朝之莘摯也卽古昔王妃本鄕也樓名之讚慶者亦以此則廢而不修者不可之大者也况刱之者河公澹則以其子而不死其父者古誼然也有難詳言者矣德水李公東溟百宗辭禁液歸老于善山地 朝家惜其江湖之間從班也今年春畀以是府特免陛辭而自善徑赴焉公曰吏隱吾宿願也旣至視其屋宇故多支柱召匠施工亟以此樓爲先侈儉俱宜輪奐成度旣成而士民無不拭目改觀焉蓋惟此府去京師六百里所吉月令辰公將於此而北望宸極於雲天縹緲之間咸與士民慶祝 君上者無非本支百世如 仁憲聖妣之則其毓我邦家之慶福如何哉方今中外之禱鰲者實有所在而斯樓適成亦其宴會之一端歟公與河公皆善之人而相與終始焉其亦奇矣 崇禎著雍執徐戊辰日 德殷 宋時烈 記 찬경루중수후기(번역문) 청송(靑松)은 주(周)나라 문왕(文王)의 어머니와 문왕의 왕비(王妃)가 태어난데와 같은 곳이니 즉 옛날 왕비(昭憲王后)의 본향(本鄕)이다. 누(樓)의 이름을 찬경(讚慶)이라 한 것은 이 때문이니 허물어져도 고치지 않는 것은 크게 잘못하는 일이다. 하물며 이 누는 처음 지은 사람이 하공담(河公澹)이었는데 그 아들이 아버지가 못다한 일을 이어서 한것은 옛 정의상 그러하였기 때문이라고는 하나 자세하게 말하기 어려운 일도 있으리라. 덕수이공덕명(德水李公德溟) 백종(百宗)이 귀양살이에서 풀려나와 노년(老年)을 선산(善山)에서 보내려하니 나라에서 그가 시골에 묻혀있는 것을 아깝게 여겨 올 봄에 청송부사(靑松府使)로 임명하여 특별히 임금 뵙는것도 그만두라고 하자 선산에서 곧바로 청송으로 가서 부임하였다. 공이 말하기를 부득이 벼슬은 하고 있으나 본 마음은 숨어사는 것이 나의 오랜 소망이었는데 여기에 와보니 집이 허술해졌으므로 목수와 미장이를 불러서 시공(施工)하여 속히 이 누를 중수(重修)하는 것이 급선무라 하고 호화로운 것과 검소한 것은 모두 적당하게 조화시켜 크고 훌륭한 누를 완공하니 선비와 백성들이 눈을 비비며 그 아름다움을 보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대개 청송에서 서울까지는 육백리쯤 되는데 좋은 달 좋은 날에 공이 여기에 나와 아득히 먼 북녘의 궁궐을 바라보면서 선비들과 함께 임금에게 경축(慶祝)하니 본손 지손 할것없이 영원히 어진 소헌왕후의 법을 본받아 우리나라의 경복(慶福)을 기르면 어떠하겠나 지금 안팎으로 과거시험에 장원할 것을 비는 사람이 많은데 이 누가 마침내 중수되었으니 그 연회(宴會)의 처음 시작이 될것이 아닌가 한다. 공과 하공은 모두 선산사람으로서 시종(始終) 서로 같은 일을 하였으니 그것 또한 기이(奇異)한 일이로다. 숭정 무진년 무진일에 덕은 송시열이 지음 盡日閑吟倚柱邊諸賢傑句摠廬前兩山夾走疑無地一徑潛通小有天欲訪靑鳧今不見閑看白鳥政堪憐此地亦必蓬壺在不用丹邱仍羽仙 四佳亭 徐居正 하루종일 기둥에 기대고 한가로히 시(詩)를 읊으니 여러 군자의 뛰어난 글 솜씨가 모두 여기에 있네 두 산이 쭉 좌우로 뻗어나가니 땅이 없어졌나 의심스럽고 한 지름길이 여기로 통하였으니 하늘이 작아보이네 푸른 물오리를 찾고자 하였으나 지금 보이지 않고 흰 물새를 한가로히 바라보니 어여쁘고 사랑스럽네 여기에 봉래산(蓬萊山)이 있으니 단구(丹邱:신선이 사는 곳)나 우선(羽仙:날개달린 신선)이 다 소용없게 되었네. 사가정 서거정 樹杪華楹落照邊登臨高興把杯前川廻蘸却千尋磴山擁偸他一片天沙麓禎祥眞可記桃源物色政堪憐擡頭笑向棲霞客巢許從來未必仙 佔畢齋 金宗直 화려하게 꾸민 큰 집의 나무끝에 지는 해는 비치고 높은 곳에 올라가 고상한 흥취로 술을 마셨네 냇물은 흘러돌아가서 천길이나 되는 비탈길을 담그었고 산에 가리어서 하늘은 한 쪼각이 되었네 사록(沙麓:중국 춘추시대 晉나라의 사록산, 신령스러워서 산이 무너지자 성녀(聖女)가 나왔다고 함)과 같이 상서로워서 참으로 기록할만하고 선경(仙境)의 경치는 어여쁘고 사랑스럽네 머리를 돌려 웃으면서 서하객(棲霞客:唐나라의 은사(隱士) 서하)을 향하여 가니 소부(巢父)와 허유(許由:즉 두사람, 모두가 요임금 때의 덕이 높은 선비)도 반드시 신선이라고는 할 수 없네. 점필재 김종직 懸崖刻削枕堧邊幽澗喧豗繞館前西壑雪消泥沒馬東岡風捲樹參天淸宵短燭燒離恨薄暮孤碪擣暗憐 覺襄王非蕩子夢中雲雨亦神仙 朱溪君 深源 낭떠러지는 가파른데 빈 터에 이르니 산속 깊이 있는 시냇물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집앞을 둘러서 흐르네 서쪽 산골짝에 눈이 녹으니 말은 진흙에 빠졌고 동쪽 산등성이에 바람이 휘몰아치니 나무는 가지런하지 않네 맑게 갠 밤에 짧은 촛불로 이별의 슬픔을 불살랐고 땅거미질 무렵 들리는 다듬이 소리는 몰래 가련함을 두드리는 것 같네 갑자기 생각하니 초나라 양왕(襄王)은 주색에 빠진 사람이 아니니 꿈속에 남녀가 서로 사랑하는 것이 또한 신선이라고 하겠네. 주계군 심원 右三詩載於輿覽邑誌而獨樓無板揭抑年遠而破失歟此樓不可無此詩玆幷刻一板倣岳樓大書杜孟二詩之故事云爾 歲癸未榴夏 知府 延城 李德秀 書 위 세사람의 시가 여지승람과 읍지에는 실려 있으나 유독 이 누에만 판에 새긴 것이 없으니 또한 연대가 오래되어 부서져 없어진 것인가 한다. 이 누에 이 시가 없어서는 안되겠으므로 이에 한 판에 새겨서 악루(岳樓:즉 岳陽樓 중국 호남성 악양현에 있는 경치가 좋은 누)에 크게 두보(杜甫)와 맹교(孟郊) 즉 당(唐)나라 때 유명하였던 두 사람의 시를 새겨서 걸어놓은 고사(故事)를 모방하였노라. 계미년 5월에 지중추부사 연성 이덕수가 씀 無數風光到眼邊山居三面水居前媚巖芳桂宜晴日幕洞祥雲 半天眞訣未成靑鳥報殘生應被白鷗憐夜來怳借仙家宿却恐明朝不是仙 右拙翁洪公諱聖民之所製也萬曆庚辰菊月觀察使巡到本邑揭板于玆樓而累經回祿之災板本燒燼無傳但遺詩載於輿地及行錄其在傍裔之來者不勝慨恨之私玆謀顯刻重揭于此庶幾壽其傳於無窮也云爾 嘉慶丁卯9月 傍後孫 大溶 謹讚 수없이 많은 경치가 눈에 들어오니 산은 삼면으로 서 있고 물은 그 앞을 흐르네 미암의 아름다운 계수나무는 맑게 개인 날에 향기를 풍기고 월막동의 상서로운 구름은 하늘을 반쯤 가렸네 참된 도리를 깊히 연구하였으나 반가운 소식은 오지 않고 얼마 남지 않은 인생에 응당 흰 갈매기를 어여삐 여겨 주어야겠네 밤에 와서 황홀한 신선의 집을 빌려 유숙하게 되니 아마도 내일 아침 신선이 되는 것이 아닌가. 위 시는 졸옹(拙翁) 홍공(洪公) 휘 성민(聖民)이 지은 것이다. 만력(萬曆) 경진년 9월에 관찰사로서 순찰하다가 이 고을에 이르러 이 누에 시 지은 것을 판에 새겨 걸었더니 여러번 화재를 만나 판본은 불에 타서 없어졌고 다만 남은 시가 여지승람과 행록(行錄)에 실려 있을 뿐이니 방손(傍孫)으로서 와서 보는 사람이 개탄(慨歎)을 참을 수 없으므로 여기에 새겨서 다시 걸었으니 영원히 전하여져서 없어지지 않기를 바란다. 가경 정묘년 9월 방후손 대용이 삼가 찬사(讚辭)를 드림 窈深松府此樓高華篆分明讚慶褒大遯山西雲繞峀賢妃巖下水生濤南州太守傾車蓋一代騷人會錦袍猗我文林想像地聖朝恩數拜春醪 戊戌 重刊 文林公10代孫 鶴齡 謹題 그윽하고 깊숙한 청송부(靑松府)에 이 누가 높으니 화려하게 전자(篆字)로 분명히 찬경루라 쓰여 있네 대둔산(大遯山)의 서쪽에 구름은 산봉우리를 둘렀고 현비암(賢妃岩) 아래의 물에는 물결이 일렁이네 남녘의 고을 수령들이 수레를 멈추어 서로 인사하고 잠시 이야기 하다 가는 곳이요 한 시대의 유명한 시인들이 모여서 시(詩)를 지으며 놀다 가는 곳이라네 아름답도다 우리 문림공이 마음 속으로 그리던 땅이니 임금의 특별한 은혜가 있어 봄술을 마시며 즐겼네. 무술 중간 문림공10대손 학령이 삼가 지음 無數風光到眼邊山居三面水居前媚巖芳桂宜晴日幕洞祥雲 半天眞訣未成靑鳥報殘生應被白鷗憐夜來怳借仙家宿却恐明朝不是仙 觀察使 洪聖民(號拙翁 貫南陽 諡文貞 官大提學) 수없이 많은 경치가 눈에 들어오니 산은 삼면으로 서 있고 물은 그 앞을 흐르네 미암의 아름다운 계수나무는 맑게 개인 날에 향기를 풍기고 월막동의 상서로운 구름은 하늘을 반쯤 가렸네 참된 도리를 깊히 연구하였으나 반가운 소식은 오지 않고 얼마 남지 않은 인생에 응당 흰 갈매기를 어여삐 여겨 주어야겠네 밤에 와서 황홀한 신선의 집을 빌려 유숙하게 되니 아마도 내일 아침에 신선이 되는 것이 아닌가. 관찰사 홍성민(호졸옹 관남양 시호문정 벼슬 대제학) 靑松眞寶片時程走馬來朝冒霧行秋脫山容黃矗矗林收溪色碧盈盈先賢蓋示施爲述後學徒深景仰情途遠年芳難再得悠悠慚愧竟何成 僉正 黃孝獻(號玄翁 貫長水 官安東府使) 청송과 진보(眞寶)는 잠깐의 거리인데 말타고 내조(來朝:지방의 관원이 궁궐에 들어가 임금을 뵘)하는데 안갯길을 달렸네 가을이 되니 산모양은 누렇게 우뚝 솟아있고 숲속의 시냇물은 가득하게 흐르네 선현(先賢)은 대개 저술(著述)한 것을 보여 주었고 후학(後學)은 다만 그 덕을 사모하여 우러러 보았네 먼 길 가는데 꽃다운 나이 다시 얻기 어려우니 근심만 할 뿐 무엇을 이루리오. 첨정 황효헌(호 현옹 본관 장수 벼슬 안동부사) 倚空樓閣鶴汀邊琪樹丹崖擁後前川接十洲淸特地峽連三島秀彌天靑囊在肘身猶俗白雪盈簪我自憐吏隱倘爲眞隱者分山要作兩癯仙 都事 兪仲龍 누각(樓閣)은 학(鶴)의 물가에 하늘높이 솟아있고 아름다운 나무와 붉은 빛의 낭떠러지는 앞뒤에서 가리고 서 있네 냇물은 십주(十洲)에 이어졌으니 땅에서 가장 맑은 곳이요 산골짜기는 삼도(三島)에 연해졌으니 수려함이 하늘에 뻗쳤네 약주머니를 달고 다니니 속된 사람같고 흰 머리가 관복(官服)에 가득히 드리워졌으니 내 스스로가 가엾네 이은(吏隱:부득이 벼슬은 하고 있으나 본 마음은 숨어 살고자 함)이 아마도 참된 은자(隱者)일 것이니 산에서 따로 살며 두 야윈 신선이 되어야겠네. 도사 유중룡 馹路長川慣眼邊靑松依舊一樓前方坮列巘直淸界落瀑飛湍別洞天嶺峽詩篇吟更好風流御史老堪憐遊山飮別非難得莫道玆行望若仙 御史 柳 緩 역로(驛路)가 장천(長川)으로 통하였으니 낯익은 길이요 청송(靑松)은 옛날같이 누의 앞에 있네 방대산(方臺山)의 줄지어 서 있는 산봉우리는 맑고 깨끗한 지경이요 내려 쏟아지는 폭포수는 별천지의 선경(仙境)일세 산봉우리와 산골짜기는 시(詩)로 읊으기 좋고 풍류(風流)는 어사(御史)에게 오래되었어도 사랑스럽네 산에서 술마시고 놀다가 이별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나 이번 여행이 신선을 바란 것이라고는 말하지마오. 어사 유 완 仲任先啓慶太姒亦光前千古塗山境儲精別作仙 黜陟使 辛引孫(號石泉 貫靈山 官大提學 諡恭肅)
출척사 신인손(호 석천 관 영산 관대제학 시호 공숙공) 靑松八景中讚慶樓 山擁川廻是五城仙源故老說分明周家八百由天妹羅業千年始閼英鳧鳥無心非世變壁詩言志頌時平南州六十多樓閣應愧雷同浪得名 敎授 金宗裕 청송팔경중찬경루(번역문) 산은 가리어 서 있고 물은 돌아서 흐르는 것이 오성(五城:신선이 산다는 곳)이 바로 여기라고 옛날 선원(仙源) 김상용(金尙容)이 분명히 말하였지 주(周)나라 8백년은 무왕(武王)으로부터 비롯되었고 신라천년은 김알지(金閼智)로부터 시작되었네 물오리가 무심(無心)함은 세상의 변함이 아니요 벽에 걸어놓은 시(詩)에서 뜻을 말하였으니 태평시대를 칭송하였네 남쪽 육십고을에 누각이 많으나 응당 덩달아 이름 얻으려함이 부끄러웠을 것일세. 교수 김종유 象外乾坤別壺中境界眞塗山徵瑞彩沙麓聚精神婺影臨丹壺娥輝映紫宸螽斯歌揖揖獜趾詠振振蔚啓熾昌運瑞由積累仁崇封稱禮興開府煥縕綸讚慶樓題額侈恩頌在民河侯初結構洪伯後咨詢慳秘須明眼遭逢會盛辰揄揚三大字蹈舞一鄕人玉曆千年紀金莖萬葉春虞風猶皥皥周化尙親親松栢雲烟古桑麻雨露新官居似句漏俗習怳朱陳不被腥膻染無論寂寞濱谷深聞恠鳥潭淨數游鱗制錦踰過分眠紬媿老身宣城閑謝履彭澤岸陶巾盡日長封印經秋久絶賓憑欄遙望北登眺莫嫌頻 府使 梁克選 형상밖에 하늘과 땅이 따로 있고 별천지가 참으로 선경(仙境)일세 도산(塗山:중국 安徽省에 있는 산 우임금이 도산씨를 여기에서 娶하였음)처럼 상서로운 빛을 내었고 사록(沙麓:중국 춘추시대 晋나라땅 사록산이 신령하여 聖女가 나왔다함)에서 정신을 모았네 별빛은 내전(內殿)을 비치고 달빛은 궁궐을 비치네 자손이 많으니 태평성세를 노래하고 왕비의 덕을 진진하게 칭송하네 울연(蔚然)히 창성(昌盛)한 운수를 열었고 상서로움은 덕을 많이 쌓으므로 얻어지네 덕에 힘써 나라 다스리니 예절이 바로 잡히고 관청(官廳)을 개설하니 정치가 환하게 빛나네 찬경루라 간판을 써서 걸고 은혜를 많이 받으니 백성들이 칭송(稱頌)하였네 하담(河澹)이 처음 누를 짓고 홍여방(洪汝方)이 기(記)를 지었네 아끼고 감춘것은 여러사람이 보게 함이었고 만나는 것은 나라가 융숭할 때일세 찬경루 세글자를 크게 써서 걸으니 한 고을사람들이 몹씨 즐거워 춤추네 정월 초하루는 천년의 실마리요 태평성세(太平盛世)가 만대(萬代)에 이르겠네 요임금의 유풍(遺風)처럼 깨끗하고 주나라의 덕화(德化)처럼 새롭네 소나무와 잣나무에 구름과 연기가 어렸고 논밭에는 비와 이슬이 내려 곡식이 새롭게 자라네 벼슬자리에 있음은 도사(道士)가 마음과 몸을 닦는것 같고 풍습은 주진(朱陳:주진촌에서 주씨와 진씨가 대대로 살며 혼인을 함)의 의(誼)와 같네 더러운데 물들지 않고 적막(寂寞)하지도 않았네 골짜기가 깊으니 괴상한 새의 우는 소리가 들리고 못이 맑으니 물고기가 뛰며 노네 출세하는 것은 과분한 일이요 지각이 없으니 이 늙은 몸이 부끄럽네 남제(南齊)의 사조(謝朓)는 선성(宣城)군수였고 동진(東晉)의 도연명(陶淵明)은 팽택현령(彭澤縣令)이었네 진종일 봉인(封印:밀봉한 자리에 도장을 찍음)하였고 가을이 지나도록 오래동안 손님을 사절하였네 난간을 의지하여 멀리 북쪽을 바라보니 높은 곳에 올라가 바라보는 것도 싫치 않네. 부사 양극선 讚慶樓上樑文 木處顚土處病火餘民物之蕭條顧名思義 維玆白鶴淸都, 地名積善粤自高麗新羅朝開闢千年, 鳥斯革翬斯飛眼前館宇之突兀改舊圖新 竊念 厥有靑鳥靈兆, 天眷毓祥猗我昭憲端懿后本支百世, 賢峰光嶽之如拱如揖虎踞龍盤, 肆河侯起樓而志慶, 山之高水之長萬千氣像, 瞻彼松栢蒼蒼尙記聖母 聖子神孫之丕顯丕承鵲巢麟趾, 曁洪公作記而頌休, 前者呼後者應朝夕登臨, 宜爾子孫蟄蟄幾入詩人 之種植, 不意回祿之召灾彌天烈焰延燒二百餘民家, 太守之不能反風滅火誠有愧焉, 蓋是樓命名之義 之詠嘆, 遽驚飛쭒之被燬捲地狂颷蕩盡數十間官閣, 小民之不能安土奠居彼何辜也, 况今日同慶之辰 本非偶然 謀諸良匠若粟若米若麻若絲朝家之恤典屢降, 伐鼓鼕鼕靑雲梨田之驛夫奔走, 是謂 宜勿毁己 遂乃 涓玆吉辰自東自西自南自北營邑之工師咸超, 拓土槖槖雙溪水菴之僧徒後先, 果見 來者如雲, 可憐焦土始歎無地起樓, 南有樛木滿帶文林之遺風, 望美人兮渺渺更上一層玆陳短頌 成之不日, 相對層楹終驗自天有佑, 北拱楓宸倍切華封之深祝, 同我民兮祁祁皆呼萬歲助擧修樑 兒郞偉抛樑東 瑞日初生大海東 一朶紅光繞鳳鶴 聖人之母降吾東 兒郞偉抛樑西 葱籠佳氣未央西 千年慳秘多靈異 生聖吾鄕是岐西 兒郞偉抛樑南 坤化至今配二南 士女登樓日四拜 祝君之壽齊終南 兒郞偉抛樑北 樓在斗南辰在北 古栢千株蔭滿地 黃門昔日從天北 兒郞偉抛樑上 燕燕飛飛聲下上 若取須臾成百尺 峽民惟識愛君上 兒郞偉抛樑下 深深渤海經其下 願將屋角籌千萬 拜獻龍樓我殿下 伏願上樑之後 一樓改觀 紋牕繡戶幷雙光而增輝 百祿交華 玉葉金枝쨑萬世而垂蔭 華構翼翼 行人過客之咸嗟 寶籙綿綿 泰山盤石之永奠 崇禎紀元後三壬子榴夏上澣 知府事 韓光近 찬경루상량문(번역문) 나무는 쓰러지고 땅은 검게 타서 불이 난 나머지에 백성들이 쓸쓸하여졌다가 명예를 돌아다보고 의를 생각하였고 새가 날개를 편듯 꿩이 나는듯 훌륭한 집을 지으니 눈앞에 집이 높이 솟아 옛것을 고치고 새것을 만들었도다. 가만히 생각하건대 이 백학(白鶴)의 맑은 고을이 땅이 이름나고 착한 것을 쌓아서 신라 고려 때 부터 개벽(開闢)한지 천년에 높은 봉우리와 빛나는 산이 두 손을 마주 잡은것 같고 읍하는것 같으며 호랑이가 쭈그리고 앉은듯 용이 올라가는 듯하고 그 청조(靑鳥)의 신령스러운 조짐은 하늘이 돌보아 복을 길러 소헌(昭憲) 단의(端懿)왕후의 본손(本孫)과 지손(支孫)이 백세(百世)까지 성자(聖子) 신손(神孫)으로 크게 나타나고 크게 이어졌고 지위가 높으며 덕을 자손에게까지 전하였도다. 하담(河澹)이 누를 지어 축하하였고 홍여방(洪汝方)이 기(記)를 써서 칭송하였도다. 산은 높이 솟아있고 물은 길게 흐르니 천가지 만가지의 기상(氣像)이요 앞에서는 부르고 뒤에서는 대답하며 조석으로 높은 곳에 올랐도다. 저기 보이는 소나무 잣나무가 울창한 것은 왕후(王后)가 심은 것이요 자손이 많고 많아 시인(詩人)이 읊으며 감탄하였도다. 뜻밖에 불이 나서 화염(火焰)이 하늘까지 뻗치고 이백여 민가를 다 태웠고 갑자기 개와장이 날라가고 땅을 휘말아 부는 바람은 불을 몰아 수십칸 관각(官閣)을 태웠도다. 군수가 불을 끄지 못한 것을 진실로 부끄럽게 여겼고 백성이 이 땅에서 편안하게 살지 못하게 되었으니 그것은 누구의 죄인가 대개 이 누의 이름지은 것은 본래 우연함이 아니었었는데 하물며 오늘같이 축하하는 때에 마땅히 헐어지지 말게 함이리오 드디어 일 잘하는 목수와 미장이를 불러 공사를 시작하니 나라에서 곡식과 옷감을 내리고 좋은 날을 가리니 동서남북에서 공인(工人)이 모두 모였도다. 북을 치는 소리가 동동 울리니 청운(靑雲) 이전(梨田)의 역졸(驛卒)이 달려왔고 땅을 다지는 소리가 탁탁하고 나니 쌍계(雙溪) 수암(水菴)의 중들이 앞뒤를 다투어 왔도다. 사람이 구름처럼 모여들어 검게 타버린 땅을 처음에는 가엾게 여기고 한탄하다가 누를 세우는데 얼마 안되어 이루고 큰 기둥을 마주 서서 보니 끝내는 하늘의 도움이 있음을 증험(徵驗)하였도다. 남쪽으로 규목(樛木:가지가 늘어져 아래로 굽은 나무)이 있으니 문림공의 유풍(遺風)을 가득히 띠었고 북쪽으로 궁궐이 있으니 청화부원군을 깊이 축하함이 갑절이나 간절하도다. 저 군자는 아득한 곳 다시 올라가 짧은 시(詩) 읊었고 우리 백성은 모두 모여 만세 부르며 일을 돕고 대들보를 다듬었도다. 아랑위 대들보를 동쪽으로 던지니 상서스러운 해가 우리나라에 떠오르고 한 나무가지의 붉은 꽃이 봉학(鳳鶴)을 둘러싸니 왕후가 우리나라에 나셨네 아랑위 대들보를 서쪽으로 던지니 푸르고 선명하며 아름다운 기운이 다하지 아니하였고 천년동안이나 아끼고 숨겨놓아 신비스러우니 왕후가 이 고향에서 태어나셨네 아랑위 대들보를 남쪽으로 던지니 왕후의 덕화(德化)는 주나라의 태임 태사를 짝하였고 사녀(士女)가 누에 올라 네번 절하니 임금의 수(壽)가 종남산(終南山)과 같이 영원무궁하리 아랑위 대들보를 북쪽으로 던지니 누는 북두칠성의 남쪽에 있고 별은 북쪽에 있으며 잣나무 천그루의 그늘이 땅에 가득하니 궁궐은 옛부터 북쪽에 있었네 아랑위 들보를 위로 던지니 제비들은 하늘을 위 아래로 날며 지저귀네 만약 나라가 백척간두의 위기에 처하게 된다면 시골 백성들도 임금을 위하여 충성을 다할 것이로다 아랑위 대들보를 아래로 던지니 깊고 깊은 발해(渤海)가 그 아래로 지나네 원컨대 이 집이 영원무궁하기를 빌며 우리 임금에게 절을 드립니다 엎드려 원하옵건대 한 누가 면목을 일신하니 아름다운 창문이 쌍쌍으로 빛을 더내고 백가지 복록(福祿)이 서로 모이니 왕족(王族)에게 만세토록 그늘을 드리우소서 화려한 집이 산뜻하니 행인(行人)과 과객(過客)이 모두 감탄(感歎)하고 왕위(王位)가 끊이지 않고 이어지며 태산과 반석(盤石)처럼 영원무궁하소서. 숭정기원후 셋째 임자년 5월 상순에 지부사 한광근 讚慶樓重修時上樑文 一方編小之縣而郡爲府懿歟聖朝之自出崇封 完矣美矣 一代名臣 降魄于普光四 百世賜祀之樓而舊維新嗟哉時運之有關興替 輪焉奐焉 恭惟文林郞沈公 三韓華閥 毓祥于邦家三 尺坐辛其封 飛甍盡桷諸大君之向祝苦心 登樓顧望孰不景仰於二字華扁 隨毁隨補太守之擔夯非輕 妃位坤其德 拱栢環松列聖母之移孝惠澤 隔水漲揚從便展拜於四時腏享 宜藻宜蘋官隸之擧行成例 不意邇來屬公之擧 營葺久時會看棟宇之傾圮 豈無繼述具人 報本追遠之義固所自圖 詢于八域諸 何異中古回祿之災 管領無主其奈風月之凄凉 乃至更張涓吉 崇德尙賢之心孰不敢可 經之三農休 族財力優餘 功實不讓乎古侯河澹 朽者易傾者支堂室之間架仍舊 鶴在松而鳧泛波自消城市之念 時工役易就 事若有待乎今日相元 築之堅傳之遠繩尺之規矩愈新 燕賀樑而禽對語如聞絃誦之聲 與丹臒而共煇流峙增賁 山河殊異之歎多發於春風聽杜之夕 載陳短唱之詞 指縹緲而寓慕陟降如臨 世代遒遷之感益切於秋霜灌鬯之時 庸助呼邪之祝 兒郞偉抛樑東 瀧瀧紅日上蒼穹 金鷄啼送春消息 萬物方新造化中 兒郞偉抛樑西 分明淑氣古今齊 于光碧節亭斯在 溯韻雲仍路不迷 兒郞偉抛樑南 普嶽精英聖配三 遙拜釜堂瞻慕地 王家尊始庶民覃 兒郞偉抛樑北 放光雄嶽高而崱 丈夫氣像若如斯 拔類人間須作極 兒郞偉抛樑上 咫尺英靈應返往 不廢芬苾春復秋 亘天誠孝人皆仰 兒郞偉抛樑下 江回屋比桑麻野 管絃寂寞振遺風 容易繁華興感者 伏願上樑之後 籩秩興 花樹成會 千孫致勤誠之儀春秋灌薦 百靈盡呵噤之道風雨驅除 幸此日肯構肯堂 庶後人善繼善述 强圉單閼初夏習禮樂之粤旬 前將仕郞惠陵叅奉 眞城 李中轍 謹撰 찬경루중수시상량문 한 시골의 조그마한 현(縣)이 군(郡)이 되고 부(府)가 되었으니 나라에서 내린 은전(恩典) 크고 백세(百世)토록 제사지낼 제각(祭閣)은 오래되었으나 새로우니 시운(時運)의 흥쇠(興衰)와 관계가 있으며 완전하고 아름다우며 크고 빛나도다. 공손히 생각하건대 문림랑 심공은 일대(1代)의 명신이요 삼한의 갑족이로다. 보광산의 신좌원(辛坐原)은 그의 산소요 덕이 높으신 세 왕비(王妃)가 탄생하셨네 그림같은 누각(樓閣)은 팔대군(8大君)의 외가를 축하하는 정성이요 온 산에 울창한 송백(松栢)은 세 왕비의 효심일세 누에 올라 바라보면 누구인들 이 찬경 두 글자를 우러러 사모하지 않으리오 강물이 불면 사시(四時)의 제사를 여기에서 지냈네 허물어지면 보수(補修)하니 태수(太守)의 책임 가볍지 않았고 제수(祭需)를 장만하는 관속(官屬)의 일은 준례(準例)가 되었네 뜻하지 않게 근래 공유(公有)에 속하기도 하였고 중간에 어찌하여 화재까지 당하였던가 세운지 오래되니 서까래가 무너지고 관리하는 사람 없으니 보존함이 소홀하였네 어찌 보수(補修)할 사람 없을손가 좋은 날 택하여 공사를 시작하였네 근본을 잊지 않고 조상을 사모하는 의(義)는 진실로 도모하는 바요 덕을 숭상하고 어진이를 높이는 마음을 누가 감히 옳지 않다고 하리오 팔도(八道)의 여러 일가들에게 알리어 자금(資金)을 모았고 농한기(農閑期)를 이용하여 일을 시작하여 공사가 쉽게 이루어졌네 공은 진실로 옛 군수 하담(河澹)만 못할 것이 없고 일은 오늘 상원(相元)을 기대하였네 썩은 것을 갈고 무너진 것을 바로 잡으니 집은 옛 모양이요 견고(堅固)하게 짓고 오래 전하게 되니 규모가 더욱 새롭네 학은 소나무에 있고 물오리는 물결에 떠 있으니 성시(城市)의 염려가 스스로 사라지고 제비는 대들보에서 하례하고 새가 대화하니 글 읽는 소리를 듣는 것같네 단청(丹靑)을 하니 높이 솟은 산과 같이 더욱 빛나고 어렴풋이 사모하니 영령(英靈)이 강림(降臨)한것 같네 산하(山河)가 달라진 탄식은 봄날 두견새 우는 소리를 들을 때 많이 나오고 세대가 변천한 느낌은 가을에 제사지낼 때 더욱 간절하네 짧은 노래 불러서 상량을 축하하네. 아랑위 대들보를 동쪽으로 던지니 강물은 조용히 흐르고 아침햇살은 푸른 하늘로 떠오르네 금계(金鷄:하늘에 산다는 닭)가 울어 봄 소식을 전하니 만물(萬物)이 조화(造化)속에 바야흐로 새롭네. 아랑위 대들보를 서쪽으로 던지니 분명히 아름다운 기운이 예나 지금이나 같네 빛나는 정자가 여기 있으니 자손들이 찾아오는데 길을 잃고 헤매이지 않겠네. 아랑위 대들보를 남쪽으로 던지니 보광산의 정영(精英)에 세 왕비가 탄생하셨네 멀리 산소를 향하여 제사지내니 나라에서 베푼 은혜가 넓고 크네. 아랑위 대들보를 북쪽으로 던지니 방광산이 웅장(雄莊)하고 높네 장부(丈夫)의 기상이 만약 이와 같다면 가장 뛰어난 인간이 되겠네. 아랑위 대들보를 위로 던지니 지척에서 영령(英靈)이 왕래하는 것 같네 사시(四時)에 제사지내는 것을 폐(廢)하지 아니하니 하늘까지 뻗친 효성(孝誠)을 사람들이 모두 우러러보네. 아랑위 대들보를 아래로 던지니 강물은 동네를 돌아 평야(平野)로 흐르네 풍류로 조용히 유풍(遺風)을 진작(振作)하니 쉽게 번화(繁華)한 것을 흥겹게 느꼈네. 엎드려 원하옵건대 상량(上樑)한 뒤로는 제사를 경건하게 지내고 일가들이 모이며 여러 후손이 정성을 다하는 모습을 춘추로 제사지낼 때 나타내고 여러 신령(神靈)이 꾸짖어서 바람과 비의 피해가 없게 하시고 다행이 오늘 선조의 유업(遺業)을 이어 후손들이 잘 계술(繼述)하게 하옵소서. 정묘년 초여름 五월에 전 장사랑 혜능참봉 진성 이중철이 삼가 지음 讚慶樓重修記 山之放光自弁嶺起龍而來落爲靑松府主屹之鎭左抱右拱重重生生之脉淑氣鍾出直下山根成小邱陵大小公廨皆基于左右連墻相承是爲之中心部而四街繁華古今相地之術可知矣地勢漸布而下止于南川之岸其尖端處有若龍纏之狀臣巖伏地巖上爲層壁依壁之高低自然定礎立柱作二層高樓傑閣扁曰讚慶卽吾始祖文林郞公墓享之祭閣也墓在此西距五里許普光山枕辛之原古者四時墓享之需戶長辦費移奉于墓所雖有工曹匠祭物軍之命或値雨潦水漲難便之時望奠於此樓蓋昭憲聖母之篤誠八大君之毓祥於吾先祖爲外裔所以作也起樓之由重建之顚末前人之述備矣無庸架疊而言其始末以添今日之事則世宗戊申知郡事河澹以朝家之命創建 肅宗戊辰府使李東溟重修乙酉徐文徵重修丹雘 英祖甲子徐錫範又改丹雘 正祖壬子因火災韓光近重建樓傳於沙麓之鄕褒之以讚慶顧名思義則邦家之慶實基於此矣自戊申後三百年之間重葺改修之役特蒙王家命飭而樓因自如也及夫時事變遷樓因一時見奪於穢政其事實藏在宗箱自足焉待舊日之盛典歲在丙寅後孫相元翁詢議山下宗中大擧重修後四十六年辛亥相八宜泰相駿發議南方諸族又擧重建之役蓋歲久頹圮又經戰亂倒傾直前故也昨乙丑一月二十五日有形文化財第一八三號指定今距辛亥只不過二十年而不無上雨傍風之患幸得國費巨貲杗棟之傾者整之榱之朽者易之改以良質之瓦又新丹雘更築四墻及前後通門貨樓前數家垈地擴張周圍山下萬歲亦如此樓同樣改修兩樓一時重新吾宗盛事孰京於是是役也終始殫誠者大宗會長明求總務相弼使之通其要路擔其財出則國會議員明輔也總監督而察其工則宗有司基澤也分其勞而董其役則完澤也此兩樓鱗次起工於戊辰之秋閏七八朔工告訖繼而判事相明宗有司基澤完澤又得道費之巨額撤樓之北隅舊廚舍新建木造瓦葺一棟於其一列又受大宗會交付金添宗有司基澤積累別置之金建木造瓦葺一棟於其二列完矣美矣輪焉奐焉春秋祭享之時爲子孫齋宿之所又於花樹之會講孝悌之道叙敦睦之義中臺普光兩處祭需辦供於此祭閣之附設可謂具體制矣相弼留念始祖墓域淨化事業多年注力訴告于京鄕宗族去夏秋以來着工設窀籬石十二角以成封塋之完璧增築堦段以便子孫之序立碑移於墓庭還元改備大艾石床建文人石長明燈設也又爲祭物運搬新作路於墓前又周王山吾家點有管領者而甲午更張時失其權中年松窩翁禮之紫霞城越便巖壁上書周房洞天文林泉石使川隱公能昌刻之歲已久矣巖壁頹落今基澤完澤相日擇稍上流之壁若龜像之巖新刻依舊去天機使有以顯晦之時待其人之出而復顯人事亦有以興替之數以待天機之使而復興地理融會相通之理自有也抑亦天機有待於今日之幹事四五人之合手成也歟至辛未春大小工役皆告竣以宗議徵記於縉縉不敢於記者此非記文之體制故也蓋萬歲樓讚慶樓厨舍封陵淨化巖刻之事當分離各有記事而議發於同時之事貲出於同人之誠工成於同人之手使後之人知今日之事體得今幹事者力量世世保修永守勿替則可期與天地無窮矣 歲辛未寒食節 後孫 相縉 謹記
찬경루중수기(번역문) 방광산(放光山)의 산꼭대기에서 산줄기가 시작하여 청송부(靑松府)의 주산(主山)이 되고 좌우로 여러 산을 겹겹이 안고 끊임없이 이어져 맑은 기운이 모아나오고 산 아래로 내려와 크고 작은 언덕이 이루어졌으며 관사(官舍)가 모두 좌우에 터를 잡고 담장을 연하여 서로 이어지고 중심부가 되어 네거리가 번화(繁華)하니 고금(古今)의 땅 보는 방법을 가히 알겠도다. 지세(地勢)가 점점 퍼져 아래로 남천(南川)의 언덕에 이르러 그 뾰족한 곳에 용이 서리고 있는 것같은 큰 바위가 땅에 엎드려있고 바위의 위는 층벽(層壁)으로 되어 있으며 벽이 높고 낮음에 따라 자연스럽게 주춧돌을 놓고 기둥을 세워 이층의 높은 누 큰 집을 지었으니 찬경루이다. 즉 우리 시조 문림랑공의 묘사(墓祀)를 지내는 제각(祭閣)이요. 묘는 여기에서 서쪽으로 오리쯤되는 보광산(普光山)의 신좌(辛坐)에 있다. 옛날 네 계절(季節)에 지내는 묘사(墓祀)의 제수(祭需)를 호장(戶長:향리(鄕吏)의 우두머리)이 장만하여 묘소로 옮기는데 비록 공조장(工曹匠)이나 제물군(祭物軍)에게 명령한다 하더라도 혹 비가 많이 와서 강물이 불어나서 제물 옮기는 일이 어려울 때에는 이 누에서 묘소를 바라보고 제사지냈으니 대개 소헌왕후의 지극한 정성으로 팔대군(八大君)을 나시어 우리 선조(先祖)의 외손(外孫)이 되었기 때문이다. 누를 지은 유래(由來)와 중건(重建)한 전말(顚末)은 그전 사람들이 다 말하였으므로 다시 말할 필요가 없지만 거기에 오늘의 일을 첨가(添加)하여 말하면 세종 무신년에 군수 하담(河澹)이 나라의 명령으로 찬경루를 창건(創建)하였고 숙종 무진년에 부사(府使) 이동명(李東溟)이 중수(重修)하였으며 을유년에 서문징(徐文徵)이 중수하고 단청(丹靑)하였으며 영조 갑자년에 서석범(徐錫範)이 또 고쳐 단청하였다. 정조 임자년에 화재(火災)로 인하여 한광근(韓光近)이 다시 누를 중건(重建)하고 왕비가 탄생하신 고을이라 전하여 찬경루라 이름을 짓고 기렸으니 명예를 돌아보고 의를 생각하면 나라의 경사가 진실로 여기에서 기인(基因)된 것이다. 무신년이후로 삼백년동안은 특별히 나라에서 보살펴줌에 힘입어 누가 평상시와 같았는데 시사(時事)가 변천(變遷)되어 누가 한 때 왜정(倭政)에게 빼앗기어 그 사실이 종가(宗家)의 상자속에 보관되었으니 이로부터는 어떻게 옛날의 성전(盛典)을 기대하였으리오. 병인년에 후손 상원옹(相元翁)이 산아래 사는 여러 일가들과 상의하여 크게 중수한 뒤 46년 신해에 상팔(相八) 의태(宜泰) 상준(相駿)이 남쪽의 여러 일가들에게 발의(發議)하여 또 중건하였으니 대개 세월이 오래되어 무너지고 또 전란(戰亂)을 겪어서 넘어지기 직전이었기 때문이었다. 지난 을축년 1월25일 유형문화재(有形文化財) 제183호로 지정(指定)되었고 지금부터 신해년까지는 20년이 지나지 않았으나 바람의 피해(被害)로 염려가 없지 않았더니 다행히 거액(巨額)의 국비(國費)를 얻어 넘어진 서까래를 고치고 썩은 것은 새것으로 바꾸었으며 양질(良質)의 개와로 고치고 또 새로 단청하였으며 다시 담장 네개와 앞 뒤의 통문(通門)을 만들고 누 앞의 두어집 대지(垈地) 주변을 확장(擴張)하고 산 아래에 만세루(萬歲樓)를 이 누와 같은 모양으로 개수(改修)하여 두 누가 일시(一時)에 다시 새로워졌으니 우리 종중(宗中)의 성사(盛事)가 이보다 더 큼이 어디에 있으리오. 이 일을 처음부터 끝까지 정성을 다한 사람은 대종회장 명구(明求)와 총무 상필(相弼)이고 그 요로(要路)를 통하여 자금(資金)이 나오게한 사람은 국회의원 명보(明輔)요. 총감독을 하고 그 공사를 살핀 사람은 종유사(宗有司) 기택(基澤)이며 그 일을 나누어 감독한 사람은 완택(完澤)이다. 이 두 누를 무진년 가을 윤 7 8월에 기공(起工)하여 일을 마치고 이어서 판사(判事) 상명(相明)과 종유사 기택과 완택이 또 거액의 도비(道費)를 받아 누의 북쪽 모퉁이 옛 부엌자리를 헐고 그 자리에 목조와즙(木造瓦葺) 한 동(棟)을 일렬(一列)에 새로 짓고 또 대종회 교부금과 종유사 기택이 적립하여 별도로 예치(預置)한 자금을 합하여 목조와즙 한 동을 그 이열(二列)에 새로 지으니 흠이 없고 크고 아름다웠다. 봄 가을로 제사지낼 때 유숙하는 곳으로 삼고 또 화수(花樹)의 모임에 효도하고 우애하는 도를 강의(講義)하고 일가간에 돈목(敦睦)하는 의를 설명하고 중대산(中臺山) 보광산(普光山) 두곳의 제수를 이 제각의 부설(附設)에서 장만하였으니 체제(體制)를 갖추었다고 말할 수 있다. 상필이 시조묘역 정화사업에 유념(留念)하여 여러해동안 주력(注力)하고 경향(京鄕)의 일가들에게 호소(呼訴)하여 지난 여름 가을이래로 착공(着工)하여 둔리석(쪣籬石) 열두각(角)을 만들어 산소를 완벽(完璧)하게 봉축하고 계단을 증축(增築)하여 자손이 차례대로 서는데 편리하게 하였으며 비석을 묘정(墓庭)으로 옮겨 환원(還元)하고 대애석상(大艾石床)을 개비(改備)하였으며 문인석(文人石)과 장명등(長明燈)을 세웠다. 또 제물을 운반하는 신작로(新作路)를 묘앞에 만들고 또 주왕산(周王山)은 우리 집안에서 점유하여 권한을 가지고 감독하였는데 갑오경장(甲午更張) 때 그 권리를 잃었더니 중년(中年)에 송와옹(松窩翁) 예지(禮之)가 자하성(紫霞城) 건너편 암벽(巖壁)위에 주방동천문림천석(周房洞天文林泉石)이라 글씨를 쓰고 천은공(川隱公) 능창(能昌)을 시켜 거기에 새겼으나 세월이 너무 오래되고 암벽(巖壁)이 무너져서 지금 기택 완택 상일(相日)이 조금 상류(上流)의 암벽 거북 모양의 바위를 골라 옛것과 똑같이 새기니 천기(天機:모든 조화를 꾸미는 하늘의 비밀)는 밝았다가 어두어질 때가 있으므로 그 사람이 나오는 것을 기다려 다시 밝아지고 인사(人事)도 또한 성(盛)하였다가 쇠(衰)하는 수가 있어 천기의 작용(作用)하는 것을 기다려서 성하게 되니 지리(地理)가 융합(融合)하여 서로 통하는 이치가 자연스럽게 있는 것으로 또한 천기가 오늘날의 간사(幹事) 너댓사람을 기다려 이루어진 것이 아닌가 한다. 신미년 봄에 이르러 크고 작은 공사가 모두 끝나자 종의(宗議)로써 나에게 기(記)를 지으라 하니 내가 감히 기를 지을 수 없다는 것은 내 글은 기문(記文)의 체제(體制)가 아니기 때문이다. 대개 만세루 찬경루 주사(廚舍) 봉릉(封陵)의 정화사업과 바위에 새기는 일은 마땅히 분리(分離)하여 각각 기사(記事)를 써야하는데 의논이 한 때에 나오고 재정이 한 사람의 정성에서 나왔으며 공사가 한 사람의 손에서 이루어졌으니 뒷사람으로 하여금 오늘의 일을 알게 하고 지금의 간사의 역량(力量)을 몸소 체험(體驗)하여 얻게 하고 대대로 보수(保修)하게 하여 영원히 쇠하지 않도록 하면 천지와 더불어 무궁(無窮)하게 될 것이로다. 신미년 한식절에 후손 상진이 삼가 지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