익효공(휘 강)신도비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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上 사인공 휘 순문 中 충혜공 휘 연원 下 익효공 휘 강 묘소 전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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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산부부인이씨의 표석 영돈녕 익효공 휘 강 표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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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 각 신도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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領敦寧翼孝公諱鋼神道碑銘竝書
公諱鋼字伯柔系出慶尙之靑松府遠祖諱德符麗季位侍中封靑松伯入本朝爲議政府左議政德符生諱溫議政府領議政溫生諱澮領議政封靑松府院君寔公高祖曾王父諱湲內資寺判官贈議政府左贊成王父諱順門議政府舍人贈領議政考諱連源再擢文科官至領議政贈諡忠惠配享 明宗廟娶左贊成金璫之女金乃新羅後裔也正德甲戌二月壬寅生公公生而穎異年五,六,歲時儼然若成人不與群兒遊戱惟好讀書年未弱冠誦盡經書常整坐終日且讀且思其志未嘗專在於擧業也 明廟爲大君時 中廟擇德門以公長女配焉公以布衣與王室爲婚悚懼不寧如有所失癸卯登進士遊太學取友必端同學之士亦皆服公恭遜知其終爲受福之器婚禮時以公不可無冠帶行事特授活人署別提雖爲官人常閉戶講誦不輟欲由科第發身將大有爲於斯世乙巳明廟卽祚依例授領敦寧府事靑陵府院君命下惶駭失措累日不食雖兄弟親戚不敢相對若負罪者然如是者久戊申拜五衛都摠府都摠管辛亥 仁順王后幸于公私第設宴以壽父母及祖父母公之父子皆爵位已極寵眷亦隆諸父昆弟亦多貴顯門闌之盛世所共榮而公尤用兢惶若無所容戊午忠惠公遘疾公親嘗藥餌廢寢食者累月及至不諱毁戚過中葬祭一依朱文公家禮廬墓三年非省母不入于京庚申服闋復拜領敦寧府事兼都摠管公以義與國同休戚憂國之念未嘗暫忘于懷雖不干預於朝政其所以贊襄于內納君無過者不爲無功公婦弟得志於一時引進憸小頗有害政之漸公每戒之而略不悛改權勢益熾嫁禍士林於是公論上徽卽命斥去公亦以義勝私不爲容貸仍致朝廷安靜士論多之辛亥順懷世子誕生公以保養之方每達於 明廟及癸亥秋世子薨公上愍國事下切私慟憂傷之念愈久愈劇至甲子秋遂成心疾日加沉痼醫藥莫效是年冬母夫人卒公已不能省事而人若語及先妣必含淚嗚咽孝心不衰如是丙寅 仁順王后出幸視疾公不能言但俯伏號哭秋子義謙陞堂上冠帶以謁垂淚欷歔如有感懼之意時朝廷復有所憂懼倚公如喬嶽而有疾殆不興莫不憂悶冀其少延歲月而天不慭遺丁卯正月二十日卒于正寢享年五十四訃聞上震悼賻贈及官庀之事有加於例太常易名曰翼孝謀慮深遠曰翼慈仁愛人曰孝越三月十八日葬于通津縣治之南瓮井里艮坐坤向之原忠惠公墓下與夫人同域異室公性醇謹朴直慈祥沉重內守剛正勇於爲善處已應物一以忠信富貴已極謙抑愈至危懼之心造次不弛痛絶紛華不喜與人交遊事親至孝務養其志甘旨亦必躬奉每遇令節必設壽宴並邀宗戚以悅親心公始疾遇先君忌日欲躬行其祭母夫人止之公曰病不至重安忍不與以廢如在之誠乎朔望必躬奠有事必告待諸妹極其親愛凡有得必分與撫其孤如已子事諸父極盡猶子之道敦睦宗族不棄久要死喪窮乏必賙焉公卒之日莫不奔走來哭敎子有法必親授以書使力學謹行少有過必勅曰吾旣不敏恐墜先業汝又不思自立忝我祖先耶諸子皆端穎善良由於庭訓所養者如是公之德行只行於一家不得設施於朝廷之上爲可少然贊輔內治扶護士林國家倚以爲重其德豈少補哉古人所謂自古受命帝王及繼體守文之君非獨內德茂也盖亦有外戚之助焉者此也公娶贈戶曹叅判李薱之女卽孝寧大君之後有賢德事公無違治家有法封完山府夫人歲己未先公卒公生二女八男女長卽 仁順王后男長仁謙戊午生員溫陽郡守次義謙乙卯進士壬戌文科歷敭淸顯爲司憲府大司憲次禮謙庚午生員成川府使次智謙副司勇次信謙通政富平府使次忠謙甲子生員壬申文科壯元官至兵曹判書兼世子左副賓客次孝謙丙子進士鴻山縣監次悌謙丙子進士水運判官女一適任榮老再捷文科宗簿寺正側室生一女適宗室秋溪守 仁謙娶佐郞李拔之女無子以義謙之子 爲後義謙娶經歷韓興緖之女生二男一女男長 禁火司別坐次 生員司圃署別坐女適進士尹暄禮謙娶僉正鄭潚之女無子以忠謙之子悅爲後智謙先娶經歷李霽之女生男憬後娶察訪許鐸之女信謙娶僉正鄭麟壽之女生三男三女男長慄進士次恪次怡皆志學女長適洗馬柳希發次適學生鄭善繼餘幼忠謙娶王子鳳城君岏之女生三男二女男長忻藝文館待敎次悅藝文館檢閱次悰方志學女長適學生趙玲次適監役李劼孝謙先娶郡守南應瑞之女後娶學生李磬之女生二男二女男長愊方志學女長適學生金天龍餘幼悌謙娶監察愼思遠之女生三男三女男長愉生員次恊女長適學生尹珙餘幼任榮老生四男三女男長奕方志學次兗進士次章進士次商女長適進士李溭次適學生尹應聘次適學生李承尹秋溪守生一男靑城監希舜惀娶生員尹棐之女生一男幼娶判書具思孟之女生四男四女男長光世次挺世女長適學生柳煇餘幼尹暄生一男幼憬娶忠義衛朴世光之女生三男幼慄娶縣監李興畯之女生二女幼恪娶學生金時省之女生二男幼怡娶學生唐慜之女柳希發生一男一女幼鄭善繼生一男幼忻娶判官韓孝胤之女生一男二女男廷和女長適學生趙琦餘幼悅先娶府尹南彦徑之女後娶進士兪涵之女悰娶學生金鏡淸之女生一男幼李劼生三男幼愉先娶叅議許茂之女生二男一女幼後娶宗室義成正鋼之女商娶忠義衛許鼎之女生二女幼奕娶翰林趙擴之女生二男一女幼兗娶進士鄭惟誠之女生二男一女幼章娶學生黃廷愼之女商娶學生申說之女李溭生三女幼尹應聘生一男二女幼李承尹生一男二女幼萬曆丙申夏府使禮謙來告守慶曰先考之歿閔議政箕撰墓誌而墓道之文則因家故連仍歲久闕焉公與先考同登蓮榜交道亦篤世之知先考者唯公在矣願公觀墓誌之文而記實以銘之守慶辭以非文翰手衰老又甚見聞皆失何足以稱揚盛德辭之再三終不獲已則敢据誌文略加點竄而爲之序系以銘銘曰 靑松閥閱相家白眉一國之舅舊生賢哲入主坤儀是我 王后惟公忠烈富貴不移確然有守壼化淸潔實公之爲粤考無咎姻婭作孼公不庇之士林稱口謙恭折節國耳忘私厥初斯厚位齋台列胡不慭遺有德無壽蘭玉詠美螽斯天報在後餘慶不絶雲仍可期福履悠久貞珉如鐵刻以銘詞垂之不滅 領中樞 沈守慶 撰 영돈녕익효공휘강신도비명병서(번역문)
공의 이름은 강(鋼)이요, 자는 백유(伯柔)이니 경상도 청송부의 출신이다. 먼 조상이신 덕부(德符)께서 고려 말엽의 시중벼슬에 계실 때 청성백(靑城伯)에 봉작되었다. 조선 때 의정부좌의정을 지내신 덕부께서 아들 온(溫)을 낳으니 의정부영의정이고 온이 아들 회(澮)를 낳으니 또한 영의정으로서 청송부원군에 봉했으니 이분이 공의 고조부이시다. 증조부의 이름은 원(湲)이니 내자시판관으로 의정부좌찬성의 증직을 받고 조부의 이름은 순문(順門)이며 의정부사인으로 증직이 영의정이다. 아버지의 이름은 연원(連源), 문과에 두 번 뽑히고 관작이 영의정이고 시호가 충혜(忠惠)공이고 명종의 사당에 배향(配享)①되었다. 좌찬성 김당(金璫)의 딸과 결혼하니 김씨는 곧 신라의 후예이다.
갑술(甲戌:1514년 2월 임인일에 공을 낳으니 공은 나면서부터 특이하게 빼어나 나이 5, 6세 때 엄연히 어른 같아서 뭇아이들과 함께 놀지 않고 오직 글 읽기만 좋아 하더니 나이 20세가 채 못 되어 경서를 다 외우고 늘 정좌하여 종일 글을 읽고 또 생각하니 그 뜻이 반드시 과거에 있었음은 아니다. 명종께서 대군으로 있을 때 중종께서 덕 있는 집안을 간택하여 공의 장녀를 배필로 삼았다. 공이 평민으로서 왕실과 혼인을 하게 되니 송구하기 그지없고 무엇인가 잘못된 듯 여겼다. 계묘(癸卯:1543)년에 진사에 오르고 태학관(太學館)②에서 공부할 때 반드시 단정한 벗을 취하고 함께 배우는 선비들은 모두들 공께 공손하게 복종하며 종국에는 큰 복을 누리는 그릇임을 알았다. 혼례 때 공께서 벼슬과 관계 없이 행사에 임하게 됨이 옳지 않다고 여겨 특히 활인서별제(活人署別提)③의 벼슬을 제수하였다. 비록 관리가 되었으나 항상 문을 닫고 강송을 끊지 않으니 과거로써 출세하여 장차 당세에 크게 보람을 두고자 함이다. 을사(乙巳:1545)년에 명종께서 즉위하자 관례에 따라 영돈녕부사 청릉부원군을 제수하시니 왕명이 내리자 황공하고 놀라며 몸둘 곳을 모르고 여러 날 식음을 잊었으며 비록 형제친척일지라도 감히 상대하지 않고 죄지은 사람 같으니 이와 같이 오래하였다. 무신(戊申:1548)년에 오위도총부도총관(五衛都摠府都摠管)④에 제수되고 신해(辛亥:1551)년에 인순왕후께서 공의 사가에 거동하시어 친가의 부모와 조부모의 만수무강을 비는 잔치를 베푸니 공의 부자분은 다 벼슬이 극에 이르고 사랑하고 권고하심이 또한 융숭하였다. 아버님들과 형제들이 모두 귀하게 현달(顯達)⑤하니 집안의 융성함이 한 세상에서 함께 영화로우나 공은 더욱 조심하고 황공하여 용납할 곳이 없는 듯하였다. 무오(戊午:1558)년에 아버지 충혜공께서 병드시니 공이 친히 약제와 음식을 맛보며 침식(寢食)⑥을 그만둔 지 여러 달만에 드디어 돌아가시니 몸 상하고 슬퍼함이 지나쳤으며 장사와 제사 범절을 한결같이 주자가례(朱子家禮)⑦에 따랐다. 집상과 시묘 3년 동안 한 번도 어머니를 뵙지 않고는 경사에 들지 않았다. 경신(庚申:1560)년에 복상이 끝나자 다시 영돈녕부사 겸 도총관을 배수하니 공이 의로써 나라와 더불어 기쁨과 슬픔을 같이하고 나라의 걱정을 잠시라도 마음 속에 잊지 못하였다. 비록 조정일을 간여하지는 않았으나 안으로 군왕을 도와 선정을 꾀했으며 임금께서 허물이 없게 이끌었으니 그 공이 작다 할 수 없다. 공의 처남이 한 때 뜻을 얻어 간교한 소인배를 이끌고 점차 정사를 해롭게 함에 공이 늘 경계하나 조금도 고쳐지지 않고 권세가 더욱 성하여 그 화가 사림(士林)⑧에 미침에 이에 공론이 위로 올라 곧 몰아내라는 명이 내리니 공께서도 의(義)로써 사(私)를 눌러 용서하지 않고 조정의 안정을 이루니 선비들의 공론이 좋았다. 신유(辛酉:1561)년에 순회(順懷)세자가 탄생하자 공이 보양하는 방도로써 늘 명종의 궁전에 갔으나 계해(癸亥:1563)년 가을에 세자가 세상을 뜨니 공께서 위로는 국사에 민망하고 아래로는 사사로운 아픔이 절실하여 슬픈 마음이 더욱 오래 가고 모질었다. 갑자(甲子:1564)년 가을에 드디어 마음병을 얻어 날로 병이 더 심하여 의약으로도 효험이 없고 이해 겨울에 어머니께서 돌아가시니 공께서 일을 보살필 능력이 없고 남들이 어머니 말씀을 하게 되면 눈물을 흘리며 흐느끼니 효심이 지극함이 이와 같더라. 병인(丙寅:1566)에 인순왕후께서 거동하여 문병할 때 공께서 말 한마디 못하고 엎드려 울기만 하였다. 가을에 아들 의겸(義謙)이 당상관(堂上官)⑨에 올라 관대를 갖추고 뵈올 때 눈물을 흘리며 탄식하니 감탄하고 두려워하는 뜻이 엿보였다. 조정에서 다시 걱정거리가 있자 공을 의지함이 높은 산봉우리 같으니 병이 들어 일어날 수 없으니 근심되지 않을 수 없고 조금이라도 더 지탱하기 바랐으나 하늘이 더 머물러 두지 않으니 정묘(丁卯:1567)년 정월 20일 거처하던 곳에서 세상을 뜨니 향년 54세이다. 부음을 듣자 왕께서 크게 슬퍼하시고 부조와 관의 비호가 관례보다 더했다. 태상관(太常館)⑩에서 시호를 익효(翼孝)라 하니 도모하는 생각이 깊고 먼 것을 익(翼)이라 하고 인자하게 사람을 사랑하는 것을 효(孝)라 한다. 한 달 걸러 3월 18일 통진현의 외곽 남쪽 옹정리 간좌곤향의 언덕에 장사 지내니 충혜공의 묘 아래이고 부인과 같은 곳이나 무덤이 다르다. 공의 성품이 순후하고 근엄하며 순박하고 곧고 자상하며 침중하니 안으로는 강정함을 지키고 착한 일에 용감하였다. 처신과 사물을 대할 때 한결같이 충신하고 부귀한 것이 이미 극에 달하였으나 겸허함이 더욱 지극하고 두려워하는 마음을 조금도 풀지 않으며 분잡하고 호화로움을 모질게 끊고 사람들과 교유함을 즐기지 않으며 어버이를 섬김에 지극히 효도하고 그 뜻을 힘써 기르며 맛있는 음식을 몸소 받들며 늘 명절 때는 축수하는 잔치를 벌여 일가친척을 맞아 어버이 마음을 즐겁게 하였다. 공의 병이 시작되고 부친의 제삿날을 맞았을 때 몸소 제사를 올리고자 하니 어머니께서 말리시니 공이 대답하였다. 『병이 위중하지 않은데 어찌 참여하지 않고 살아 계실 때와 같은 정성을 드리지 아니하겠습니까?』 삭망(朔望)⑪ 때는 반드시 몸소 드리며 무슨 일이 있을 때마다 꼭 아뢰고, 여러 누이를 대접함에 친애를 다하며 무엇이든 생기면 고루 나누어 주었다. 외로운 사람을 어루만지기를 친자식같이 하며 삼촌들을 모실 때는 조카의 도리를 다하고 종족 간에 돈목하여 요긴한 것은 버리지 않고 흉사에 어려울 때는 기민(饑民)⑫을 먹이니 공이 운명하던 날엔 분주히 달려와 울지 않은 이 없더라. 자식은 법도 있게 가르치고 친히 서책을 주며 힘써 배우고 삼가 행하도록 하였다. 자그마한 허물이 있으면 꼭 경계하여 말하였다. 『내가 이미 불민하여 선업을 실추할까 두려운데 너희들이 또한 자립할 것을 생각하지 않고 우리의 조상에게 욕되게 하지 말아라.』 모든 자식들이 단아하고 선량하니 가정교훈의 기른 바에 연유했고 공의 덕행이 다만 한 가정에 이행하고 조정에까지 시행되지 못함이 자그마한 것 같으나 안을 다스림에 도움이 되고 사림(士林)을 보호하고 국가에서 본받아 중하게 여기게 되면 어찌 조금만 도움이 되리오. 옛사람이 이르기를 예로부터 제왕이 명을 받다 체계를 잇고 문학을 지키는 군왕은 유독 덕치의 성함만이 아니라 또한 외척의 도움도 있는 것이 바로 이것이다. 공께서 증직이 호조참판인 이대(李팾)의 딸과 혼인하니 곧 효령대군의 후손으로 어진 덕을 두었으며 공을 섬김에 잘못함이 없고 집을 다스림에 법도가 있으니 완산부부인으로 봉했으나 공보다 먼저 별세하였다. 공께서 2녀8남을 낳으니 맏딸이 바로 인순왕후(仁順王后)이시고 맏아들 인겸(仁謙)이 무오년에 생원이 되어 온양군수이고, 둘째 아들 의겸(義謙)이 을묘년에 진사 임술년에 문과에 급제하였는데 맑고 현달하여 사헌부 대사헌이 되고, 셋째 아들 예겸(禮謙)이 경오년에 생원이며 성천부사이다. 넷째 아들 지겸(智謙)은 부사용이며, 다섯째 아들 신겸(信謙)은 통정으로 부평부사이고, 여섯째 아들 충겸(忠謙)은 갑자년에 생원이 되고 임신년에 문과에 장원하여 관직이 병조판서 겸 세자좌부빈객(世子左副賓客)⑬이다. 일곱째 아들 효겸(孝謙)은 병자년에 진사가 되고 홍산현감(鴻山縣監)이다. 여덟째 아들 제겸(悌謙)은 같은 해 진사가 되고 수운판관이다. 둘째 딸은 임영로(任榮老)에게 출가하니 문과에 두 번이나 뽑혀 종부시(宗簿寺)⑭의 책임관이다. 측실에서 딸 하나를 낳아 종실 추계수(秋溪守)⑮ 벽(鼊)에게 출가하였다. 맏아들 인겸이 좌랑 이발(李拔)의 딸에게 장가들었으나 자식이 없어 의겸의 아들 엄으로 뒤를 삼았다. 둘째 아들 의겸은 경력 한흥서(韓興緖)의 딸과 혼인하여 2남1녀를 낳으니 맏아들 논(惀)은 금화사별좌이고 둘째 아들 엄은 생원으로 사포서별좌이고 딸은 진사 윤훤(尹暄)에게 시집갔다. 셋째 아들 예겸은 첨정 정숙(鄭潚)의 딸과 혼인하고 아들이 없어 충겸의 아들 열(悅)로 뒤를 삼았다. 넷째 아들 지겸은 먼저 경력 이제(李霽)의 딸과 혼인하여 아들 경(憬)을 낳고 찰방 허탁(許鐸)의 딸을 둘째 부인으로 맞았다. 다섯째 아들 신겸은 첨정 정인수(鄭麟壽)의 딸과 혼인하여 3남3녀를 낳으니 맏아들 율(慄)은 진사이고, 둘째 아들이 각(恪), 셋째 아들이 이(怡)인데, 모두 학문에 뜻을 두었다. 맏딸은 세마 유희발(柳希發)에게 시집가고, 둘째 딸은 학생 정선계(鄭善繼)에게 출가하고, 셋째 딸은 아직 어리다. 여섯째 아들 충겸은 왕자 봉성군 완(岏)의 딸에게 장가들어 3남2녀를 낳으니 맏아들 흔(忻)은 예문관 대교, 둘째 아들 열(悅)은 예문관 검열, 셋째 아들 종(悰)은 공부중이며, 맏딸은 학생 조령(趙玲)과 결혼하고 둘째 딸은 감역 이할(李劼)에게 시집갔다. 일곱째 아들 효겸의 첫부인은 군수 남응서(南應瑞)의 딸이요, 둘째 부인은 학생 이경(李磬)의 딸인데, 2남2녀를 낳으니 맏아들 핍(愊)이 공부중이고 큰 딸은 학생 김천룡(金天龍)에게 시집가고 나머지는 아직 어리다. 여덟째 아들 제겸은 감찰 신사원(愼思遠)의 딸에게 장가들어 3남3녀를 낳으니 맏아들 유(愉)는 생원이고 둘째 아들은 협(恊)이며 맏 딸은 학행 윤공(尹珙)에게 시집가고 나머지는 다 어리다. 둘째 사위인 임영로가 4남3녀를 낳았는데 맏아들 혁(奕)은 학문에 뜻을 두고 둘째 아들 연(兗)은 진사이고, 셋째 아들 장(章)은 진사이며, 넷째 아들은 상(商)이며, 맏딸은 진사 이즉(李溭)과, 둘째 딸은 학생 윤응빙(尹應聘)과, 셋째 딸은 학생 이승윤(李承尹)과 각각 혼인하였다. 추계수가 한 아들을 낳으니 청성현감 희순(希舜)이고 논이 생원 윤비(尹棐)의 딸과 혼인하여 아들을 낳았으나 어리다. 손자인 엄이 판서 구사맹(具思孟)의 딸과 혼인하여 四남四녀를 낳으니 맏 아들이 광세, 둘째 아들이 정세이고 맏 딸은 학생 유휘(柳輝)에게 시집가고 나머지는 아직 어리다. 손주사위인 윤훤이 한 아들이 있으나 어리고 경은 충의위 박세광의 딸에게 장가들어 아들 셋을 낳았으나 다 어리다. 율(慄)은 현감 이흥준의 딸과 혼인하여 딸 둘을 두었으나 어리고 각(恪)은 학생 김시성의 딸과 혼인하여 아들 둘을 낳았으나 어리고 이(怡)는 학생 당민의 딸과 혼인했다. 유희발이 1남1녀를 두었으나 어리고 정선계도 1남을 두었으나 어리고 흔(忻)은 판관 한효윤의 딸과 혼인하여 1남2녀를 낳으니 아들은 정화이고 딸은 학생 조기의 처이며 다음은 어리다. 열(悅)은 부윤 남언경의 딸과 혼인하고 진사 유함의 딸과 재혼하였다. 종(悰)은 학생 김경청의 딸과 혼인하여 아들 하나를 두었으나 어리고 이할은 3남을 두었으나 어리다. 유(愉)는 첫 부인인 참의 허무의 딸과 결혼하여 2남1녀를 두었으나 어리고 둘째 부인은 종실 의성정(義城正) 강의 딸이다. 협(恊)은 충의위 허정의 딸과 결혼하여 딸 둘을 낳았으나 어리고 혁(奕)은 한림학사 조확의 딸과 결혼하여 2남1녀를 두었으나 어리고 연(兗)은 진사 정유성의 딸과 혼인하여 2남1녀를 낳았으나 어리다. 장(章)은 학생 황정신의 딸과 혼인하고 상(商)은 학생 신열의 딸과 혼인했다. 이즉은 딸 셋을 두었으나 어리고 윤응빙은 1남2녀를 두었으나 어리다. 이승윤은 1남2녀를 낳았는데 다들 어리다. 병신년 여름에 부사 예겸이 수경에게 찾아와 말하였다. 『아버지께서 돌아가신 뒤 민정승 기(箕)께서 묘지(墓誌)⑯를 지으셨으나 묘비의 글은 우리 집에 상고가 잇따라 오랜 세월 동안 이루지 못했습니다. 귀공께서는 우리 선친과 함께 공부하시고 벼슬에 같이 오르셨으며 사귐이 또한 돈독하시니 이 세상에서 아버님에 대해 잘 아시는 분은 오직 귀공 뿐이오니 원하옵건대 이 묘지문을 보시고 사실대로 비명을 기록하여 주십시오.』 『본인은 글솜씨가 없으므로 사양하며 몹시 늙고 견문을 다 잊어버려 어찌 만족하게 그분의 성덕을 말씀드리리오.』 두 번 세 번 사양하였으나 마지 못하여 감히 묘지문에 의거하여 약간 내용을 가감하여 서문을 짓고 이어서 비명을 쓰니 명(銘)에 가로되, 청송땅 벌열(閥閱)⑰한 가문에 재상가의 으뜸이시여, 한 나라의 국구(國舅)로서 옛부터 어진이 많으셨네. 입궁하여 중전을 맡으시니 이 분이 우리의 왕후이고 오직 공의 충렬은 부귀(富貴)로써 변함이 없었네. 확연하게 부덕을 지켜 내전의 교화 맑았으니 사실상 공의 도움이 깊이 고려되어 허물이 없었네. 인아척당 허물지어 공이 비호 아니하니, 사림에서 칭선하고 겸공 또한 예절에 맞네. 나라 위해 사사로움 없고 처음부터 후덕하니 직위 상렬(相列)⑱에 걸맞아 어찌 아끼지 않으리오. 덕을 쌓았으나 수를 못하니 후손들이 잘 자라고 종사편(螽斯篇)⑲ 읊조리니 하늘이 뒤를 도와주네. 남은 경복 한이 없어 후손들에 기약하고 후복이 무궁하니 옥돌비석 강철 같네. 명사(銘詞)⑳를 돌에 새겨 드리움 끝없으리. 영중추 심수경이 지음. 註① 배향(配享):함께 제사를 받드는 것. ② 태학관(太學館):조정에서 준재들을 뽑아 공부시키는 곳. 곧 성균관. ③ 활인서별제(活人署別提):조선 때 병자를 치료하던 기구의 종六품직. ④ 오위도총부도총관(五衛都摠府都摠管):조선 때 군무를 총괄하던 기구의 최고군직인 정2품. ⑤ 현달(顯達):덕망과 지위가 높아지고 이름이 드날림. ⑥ 침식(寢食):잠자고 식사하는 것. ⑦ 주자가례(朱子家禮):송나라 주희(朱喜)가 만든 관혼상제집. ⑧ 사림(士林):선비들의 모임. ⑨ 당산관(堂上官):조선 때 관계를 2분한 계제(階第:계급). 정3품관 이상. ⑩ 태상관(太常館):나라의 제사와 시호를 맡아 보던 관청. ⑪ 삭망(朔望):매월 초하루와 보름. ⑫ 기민(饑民):흉년이나 재란을 당한 백성, 또는 그러한 이에게 먹을 것을 주는 것. ⑬ 세자좌부빈객(世子左副賓客):세자시강원의 정2품직, 좌우 빈객이 있었음. ⑭ 종부시(宗簿寺):왕실의 계보를 만들고 왕족의 허물을 살피던 관아. ⑮ 추계수(秋溪守):왕실의 친인척에 내리는 작호. 대군, 군, 정, 수 등. 성종왕자 무산군(茂山君 悰)의 손자. ⑯ 묘지(墓誌):죽은 사람의 신분, 행적 등을 주로 돌에 새겨 무덤 옆에 묻는 기록 문. ⑰ 벌열(閥閱):나라에 공적을 쌓고 벼슬 경력이 많은 것. ⑱ 상렬(相列):상신의 서열. ⑲ 종사편(螽斯篇):시전의 편명. 자손들의 번성함을 읊은 글. ⑳ 명사(銘詞):운을 달아 적은 시체의 글. 비문 따위에 새기는 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