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균진사공(휘 대형)묘갈

 

진사공 휘 대형 묘소
소재지: 수원시 팔달구 이의동(산의실)

묘 표


十一世祖 贈吏曹參判 成均進士公 諱 大亨 墓碣
公諱大亨字而正考諱巖登武科爲水軍節度使娶宗室蓬山令之女生男四人公於第居三後伯父司評贈左承旨諱嶐妣曰羅州朴氏進士琯之女公以隆慶元年丁卯六月十二日生萬曆辛丑陞上舍壬寅十二月丁承旨公憂明年年三十七
十一月十五日以毁從甲辰正月卜吉於龍仁舊山亥坐之原以葬夫人韓氏西原大姓考諱重謙 贈吏曹參判母李氏孝寧大君補之後台壽之女夫人生于隆慶壬申正月初六日年十五配于公及癸卯之艱哭泣成疾柴幾危乙巳六月初十日未終喪而終享年三十四八月祔于公墓公天姿端粹儀度溫雅勤學而修行莊重而簡默與人羣未嘗爲戱笑輩流敬憚之壬辰之亂承旨公壽已七十公之所以敬扶持備忠養於流離顚沛之際者靡不至亂弭十年家益窘親益老而誠孝愈篤於兄弟盡悌友之道敎子課業甚嚴然而不表著以自見棄世又早故知者盖寡焉夫人性寬裕溫良而又方嚴有法度雖處閨房毅然若宏量君子其懿德茂行隱而不露者何可悉數也公疾旣病語夫人曰吾守善而無祿卒死於是命也幸而有三子演學幾成澤其質篤實可無憂渾又秀如得長也必做是吾與若將不朽矣公卒之二十四年崇禎丙寅演捷文科壯元會榜有言罷不用明年丁卯旋登甲科第二名拜嶺南觀察使得推恩三世澤登乙亥別科擢授湖南觀察使於是人知公臨歿之言爲前知而天報善之道不僭也歲癸巳湖南公謂其從祖叔父大孚曰先君歿于今五十有一年而墓前無標吾兄弟常所痛恨今謹具石惟叔父叔之曰吾兄德行吾猶及見而知之其上世則吾父也吾祖也吾能言之遂略書之俾刻其陰以貽其來裔云

九月乙未脺從父弟前司諫大孚述


11세조 증이조참판 성균진사공 휘 대형(大亨) 묘갈
공의 휘는 대형(大亨), 字는 이정(而正)이다. 아버지의 휘는 암(巖)인데 무과(武科)에 급제하여 수군절도사(水軍節度使)가 되었다. 왕실인 봉산령(蓬山令)의 딸에게 장가들어 아들 넷을 낳았는데 공은 그 셋째로서 뒤에 백부인 사평(司評)으로서 증좌승지인 휘 융(嶐)에게 출계했다. 어머니는 나주박씨(羅州朴氏)로서 진사 관(琯)의 딸이다. 공은 융경 원년인 丁卯(1567)년 6月 12日에 태어나서 만력 신축(萬曆辛丑:1601)년에 생원 진사시에 합격하고 다음해 12月에 양부인 승지공의 상을 당하였는데 다음해인 계묘(癸卯:1603)年 11月15日 상중에 병을 얻어 생을 마쳤으니 나이 37세였다. 이듬해 正月 용인의 옛 산에 해좌의 무덤을 마련하여 장사 지냈다. 부인 한씨(韓氏)는 서원(西原:청주구호)의 대성으로 아버지인 중겸(重謙)은 증직으로 이조참판이며 어머니 이씨는 효녕대군(孝寧大君)의 후손인 태수(台壽)의 딸이다. 부인은 융경 임신(隆慶壬申:1572)년 1月6日에 태어나서 나이 15세에 공의 배우(配偶)가 되었는데 계묘년의 부군(夫君) 상사 때 슬피 울다가 병이 되어 몸이 바짝 마르고 여위어서 거의 죽게 되었더니 2年 뒤인 乙巳(1605)년 6月 10日 상복을 벗지 못한 채 마치니 향년이 34歲, 그 해 8月에 공의 묘소에 합폄되었다. 공은 모양새가 맑고 단정하여 거동이 온아하며 부지런히 배워서 수행에 힘썼다. 장중하면서도 말수가 적어서 여러 사람들과 더불어 웃고 희롱함이 없으니 동류들이 공경하며 어려워 하였다. 임진왜란 때 승지공께서 수가 이미 70세인지라 공께서 난리중 서로 흐트러져서 엎어지고 자빠질 때 공경스럽게 부축하고 정성스럽게 봉양해 갖추는 소행이 어지럽고 편안했던 10年 세월에 집은 더욱 궁색해지고, 어버이는 더욱 늙어졌으되 정성스러운 효도는 더욱 돈독했고 형제간에 공경하고 우애하는 도리를 다했다. 자식에게 공부를 가르침이 심히 엄했으나 세상에 드러내지 못했고, 스스로 세상을 떠남이 너무나도 빨랐으니 이를 아는 사람이 많지 않았다. 부인은 성품이 관유하면서도 온순하되 한편으로는 엄하고 법도가 있어서 비록 규방에 있으면서 의연하게 폭넓은 여중군자였으나 그 아름다운 덕성과 무성한 행실이 숨어 있고 나타나지 않음은 어찌된 까닭인가? 모두가 운수인 것이다. 공의 병이 이미 깊어지자 부인에게 이르러 말하였다.
『내가 최선을 다했으나 복록이 없어서 마침내 죽게 되니 이 또한 운명이다. 다행이 세 아들이 있어 연(演)의 학문은 거의 이뤄졌으며, 택(澤)은 바탕이 돈독하니 가히 근심하지 않아도 되고, 혼(渾)이 또한 빼어나게 장성하였으니 반드시 옳은 일을 하게 되어 나와 함께 영원하리라.』
公이 죽은지 24년째인 천계 병인(天啓丙寅:1626)년에 연(演)이 문과에 장원급제했는데 마침 발표에 말썽이 있어서 채택되지 않았으나 다음해인 정묘년에 곧바로 갑과(甲科)에 두 번째로 합격하여 영남관찰사까지 지냈으며 삼대추은(三代推恩)의 영광을 입었고 별과(別科)에서 장원하여 호남관찰사로 나가게 되니 이에 사람들이 공께서 임종시에 한 말이 과연 앞을 짐작했다고 하니 하늘이 어진 이에게 보답하는 도리가 어긋나지 않았다. 계사(癸巳:1653)년에 호남공이 그의 종숙부인 대부(大孚)에게 말하기를 저의 아버님이 하세하신지 금년이 51年만인데 묘 앞에 아무 표식이 없으니 우리 형제들이 항상 통한스럽게 여기다가 이제 와서 삼가 돌을 준비하였으니 숙부께서 글을 지어달라고 함에 나의 말이 우리 형님의 덕행은 내가 직접 보고 아는 바이며 그 윗대인 즉 나의 아버지이며 나의 조부이시니 나는 능히 말할 수 있다. 드디어 간략하게 써서 비석 뒷면에 새기도록 그의 후예에게 주었다.

을미년 9月 初3日
종숙(從叔) 전사간(司諫) 대부(大孚) 글 지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