훈련원판관공(휘 탁)사적 |
判官沈君鐸者字振遠靑城伯德符七世孫也自是閥閱名聞不絶父光寶宣務郞娶于贊成尹任之門雅有高操行義修潔親歿執喪踰禮啜粥三年又服明宣二聖喪素食終祥乙巳之禍婦家覆焉光寶不欲隨世俯仰因築詠歸亭以自適壽八十而終君生而氣宇秀異少讀書習藝年幾二十始業武擧膂力過人兼善射御登萬曆戊子科未幾授宣傳官兼備邊郞盖其極選也壬辰夏倭寇猝至列郡瓦解朝廷聞李鎰敗於尙州遂以判尹申砬爲三道巡邊使禦賊時承平日久民不知兵砬只率麾下及應募者數百以行中外憂之君獨慷慨不已乃自請於上曰臣雖微賤嘗思奮不顧身以徇國家之急臣之畜積也適當大寇願至申砬軍中自效以示主辱臣死之義 宣祖壯而嘉之特陞爲訓練院判官仍賜戰馬資裝以送君卽陞辭與父母泣訣謂其弟錪曰吾己受君命義不得顧家汝須奉親西歸以避賊行未至聞砬兵敗於健川車駕出行平壤復從統禦營申砬退守臨津硈砬之弟也必欲渡江背水以戰君爭曰今無韓信而爲背水陣恐非兵法所宜硈不聽乃趣衆渡江我師在北岸者望之以爲必勝皆踊喜君榮其必敗與平山武士洪承烈赴水以脫承烈謂君曰官軍全沒我輩徒留無爲也不如歸見父母再圖義兵君曰吾旣受命於君况元師以下尙在此乃吾死所也願君歸告吾父母兄弟以明鐸必死無還心君家聞其生命奴持衣服尋君於臨津則賊兵渡江君己戰死實是年五月二十七日也時年三十有一妻閔氏亦賢招魂立主竟以錪子宗迪爲后
潘南朴世采曰太史公云非死者難也處死者難當上在平壤君隨臨津軍中不死於申硈智也死於賊渡江之日勇也惟如此然後庶幾遂其初志而表君臣之大義然首赴大難身膏艸莽訖未蒙旌異之典又奚以爲臣子勸哉悲夫 11세조 훈련원판관공 휘 탁(鐸) 사적 판관 심탁(沈鐸)의 字는 진원(振遠)인데 청성백(靑城伯) 덕부(德符)의 7世孫이다. 이 때부터 문벌(門閥)①의 명성과 영예가 끊어지지 아니했다. 아버지 광보(光寶)는 선무랑인데 찬성 윤임(尹任)의 가문에 장가들었고 청아하고 높은 지조가 있었으며 의로움을 실천하고 청결하며 강직하여 어버이가 죽었을 때는 예에 규정된 것보다 지나치게 집상하면서 3년을 죽만 마시고 지냈다. 또한 명종과 선조의 두 임금의 상을 당하여 소찬(素饌)②으로 상기를 마쳤다. 乙巳(1545)년의 화(禍)로 처가가 망하자 광보(光寶)는 속세(俗世)를 따르고자 아니해서 영귀정(詠歸亭)을 지어놓고 우유자적(優遊自適)③하면서 80歲가 되도록 살았다. 군은 태어나면서 기우(氣宇)가 남달리 빼어나서 어려서부터 글을 읽고 예술을 익혔다. 스무살이 되자 처음 무예를 배웠으나 여력(膂力)④ 이 남보다 뛰어나고 겸하여 활도 잘 쏘고 말도 잘 탔다. 戊子(1588)년에 무과에 급제하여 곧 선전랑이 되어 비변랑을 겸직했으니 이것은 특별한 예우였다. 임진(壬辰:1592)년 여름에 왜구가 갑자기 쳐들어오니 열군(列郡)⑤이 기와장이 깨어지듯 무너졌다. 조정에서는 이일(李鎰)이 상주(尙州)에서 싸우다가 졌다는 말을 듣고 판윤(判尹) 신립(申砬)에게 삼도순변사(三道巡邊使)를 시켜서 적을 막게 하였다. 그 때는 태평세월이 오래 계속되어온 터라 백성들은 전쟁이 무엇인지조차 알지 못했다. 신립은 다만 자기가 거느리고 있던 휘하(麾下)⑥ 병과 응모한 군인 수백 명만을 인솔하고 가니 조정이나 백성들이 모두 걱정을 했고 군도 강개(慷慨)⑦함을 마지아니했다. 그래서 임금께 자청(自請)⑧하였다. 『신(臣)이 비록 미천(微賤)⑨한 몸이기는 하지만 항상 분발할 것을 생각하여 몸을 돌아보지 아니하고 국가의 위급함에 몸을 맡기고자 함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고 오래전부터 생각해온 것입니다. 마침 큰 도적이 쳐들어 왔으니 원하옵건대 신립의 군중으로 들어가서 임금이 욕을 당하면 신하는 스스로 죽어야 한다는 의리를 보여주고자 합니다.』 선조께서는 장하다고 가납하시고 특별히 훈련원판관으로 승진시키고 이어서 전마(戰馬)⑩와 자장(資裝)⑪을 하사해서 보냈다. 군은 곧 사은(謝恩)한 뒤 부모와는 눈물로 영결(永訣)⑫하고 그 아우 전(錪)에게 말하였다. 『나는 이미 임금의 명령을 받았으므로 집일을 돌아볼 수가 없으니 너는 부모님을 모시고 서쪽으로 돌아가서 적을 피하도록 하라.』 가서 신립의 군문(軍門)에 이르기도 전에 신립의 군대가 건천(健川)에서 패하였다는 말을 듣고 또 어가가 평양으로 떠났다는 말을 들은 뒤 다시 통어영(統禦營)으로 갔다. 신할(申硈)이 물러나서 임진(臨津)을 지켰는데 할(硈)은 립(砬)의 아우다. 반드시 강을 건너서 배수진(背水陣)⑬을 치고 싸우고자 하니 군이 힘써 간하였다. 『지금 한신(韓信)이 없는데 배수진을 친다는 것은 병법에 합당하지 아니할까 두렵습니다.』 할(硈)이 듣지 아니하고 군을 인솔하여 강을 건너니 우리 군대 가운데 북쪽 언덕에 있는 사람들이 바라보고는 반드시 이길 것이라 하면서 모두 뛰고 기뻐했으나 군은 반드시 패할 줄 알고 평산(平山)의 무사 홍승열(洪承烈)과 같이 물에 들어가서 벗어났다. 『관군이 전멸한다면 우리들 몇 사람이 살아남는다고 무엇을 하겠는가. 돌아가서 부모를 뵙고 다시 의병을 모으자.』 홍승열(洪承烈)이 군에게 말하자 군이 대답하였다. 『나는 이미 임금께 명을 받았거늘 하물며 원수(元帥) 이하의 장졸이 모두 여기 있는데 이곳이 곧 내가 죽을 곳이다. 바라건대, 군은 돌아가서 내 부모형제에게 고하여 이 사실을 밝혀 주게. 탁(鐸)은 반드시 죽을 것이며 돌아갈 마음이 없다는 뜻을 전해주게.』 군의 집에서 살아 있다는 소식을 듣고 종을 시켜서 의복을 가지고 가서 임진에서 군을 찾으니 적병은 강을 건넜고 군은 이미 전사하였는데 그 해 5月 27日이었다. 나이 겨우 31세다. 아내 민씨는 또한 현숙(賢淑)했으며 혼을 불러 신주(神主)⑭를 만들고 마침내 전(컆)의 아들 종적(宗迪)으로 후사를 이었다. 반남(潘南) 박세채가 전(傳)하기를, 태사공(太史公)의 말에 의하면 죽지 아니하는 것도 어려운데 죽음에 처한 자는 더 어렵다고 했다. 임금께서는 평양에 있고 군은 임진군중(臨津軍中)에 있었는데 신할(申硈)과 같이 죽지 아니한 것은 지혜요, 적이 강을 건너는 날 죽은 것은 용기다. 다만 이와 같이한 연후에야 거의 처음 뜻한 바를 이루고 군신의 대의(大義)를 지켰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먼저 대란에 나아가 몸을 보잘것 없는 풀처럼 버렸으나 일찍 정려(旌閭)의 은전을 받지 못했으니 어찌 신자(臣子)된 자에게 권할 만한 것이겠는가. 아! 슬프구나. 부(傅) 박세채(朴世采) 지음. 주(註) ① 문벌(門閥):가문 또는 종족. ② 소찬(素饌):반찬 없는 밥. ③ 우유자적(優遊自適):아무 거리낌없이 스스로 만족해하는 일. ④ 여력(쪺力):체력. 등뼈의 힘. ⑤ 열군(列郡):지방의 여러 고을. 적이 침공해 오는 주변에 있는 고을. ⑥ 휘하(麾下):부하. 평시 자기가 인솔하고 다니는 군인. ⑦ 강개(慷慨):의분을 못 이겨 슬픈 빛을 나타냄. 슬퍼함. ⑧ 자청(自請):스스로 할 일을 청함. 자원(自願)함. ⑨ 미천(微賤):미미하고 천박함. 비유하여 자기를 비하하는 겸손한 말. ⑩ 전마(戰馬):장수가 타고 싸울 수 있는 말. 군마. ⑪ 자장(資裝):식량, 전포, 투구, 칼, 활 등 전쟁에 필요한 장비. 보급품. ⑫ 영결(永訣):생자와 사자의 이별. 마지막 작별. ⑬ 배수진(背水陣):물을 뒤에 두고 치는 군진. 후퇴할 길을 막아 필사적으로 싸우게 하는 방법. 중국 한(漢)나라 장수 한신이 시초함. ⑭ 신주(神主):신위 또는 위패. 사당에 모셔두고 제사에 사용. 현대의 지방(紙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