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천현감공(휘 금)묘갈명

 

과천공 휘 금 묘소
소재지: 남양주시 오남읍 양지리 선영하

신묘표


十一世祖 贈吏曹判書 行果川縣監 諱 錦 墓碣銘
我先祖 贈判書監祭公生三十五歲卒有男子子七姓孫十二女孫七我宗之至於今不絶皆監察公之餘庥也夫公之得年才過顔子三歲而其子孫之盛幾與顔氏類豈無由也獨恨其世代已遠無得以詳焉間嘗從宗人長老聞世傳之言則公豊幹偉貌德器粹然文華夙就與仲氏逸齋公相上下磨礱其業譽聞於退溪一松之間也又聞公傍通兵家之學有膂力善射藝朝廷以其文武兼備將大用而未果也其後又見靑松世稿則公所爲詩有若干篇藻思飄然有出塵象其圓通寺詩曰石泉喧客夢松月冷僧襟恬悵明朝別還爲俗事侵其贈默上人枝曰修道有要則無令欲上人自然歸妙極心作櫓枝春其雜咏詩句有曰山村四月行人少深樹黃鸎自在啼又有曰雲生迷石路花發暎春衣又有曰立庭方民塔橫草蔡翁碑又有曰已得眼窮千里地怳疑身在九重天公之片嗂零珠也於是乎考之言而徵諸詩則公之所得可知已所有如是之富而天嗇其年旣不大施矣而豈無燾後之理哉始信其子孫之盛果有由也公諱錦字美仲沈氏系靑松高祖諱璿仕端廟爲京畿道觀察使 光廟元年棄官號忘世亭曾祖諱安仁節度使祖諱濱正郞考諱光彦判書號鈍庵受業於靜庵之門己卯士禍有名節妣漢陽趙氏參議邦楨女公以嘉靖辛卯二月十二日生二十五歲乙卯登上庠筮仕內歷郞冞監察外除果川縣乙丑十二月十七日卒于官 贈吏曹判書葬于廣州長旨里先塋坐亥原前配驪興閔氏判官希說女生于庚寅九月初六日歿于癸亥三月十八日後配漢陽趙氏直長訔女生于癸卯十二月十六日歿于萬曆壬午八月二十一日男道宗叅議宗忱通政府使宗敏郡守宗直參議宗周宗毅前配出男宗準縣監後配出宗道生俠郡守宗忱生偰俱監役宗敏生郡守正婿參議洪瑞翼別坐禹祗身直講鄭元奭宗直生佶侙伉休婿牧使李守綱宗周生佑壻許倜宗毅生健司議婿都事李耉俊宗準生俛奉事噫小孫於公之歿有絶悲而且惑焉者公以其父祖則有鈍庵忘世亭旣如彼之卓卓以其孫曾則有栗牛諸門人及晩沙竹塢又如彼其赫赫而若公之才德與重望雖厄於無年而不施於世然其紹前啓後之仁則實有大焉獨不見其有發揮者何也豈人事易於遺遠而未之有耶抑有之而失其傳歟玆敢叙之如右而係之以銘曰
煌煌吾祖寔繼名門有德有年乃昌厥孫水渟而發冬揫而伸檜枝之許尙亦照人不僣者理如筮斯期小孫敢夸徵來有辭

七世孫 定鎭 撰


11세조 증이조판서 행과천현감 휘 금(錦) 묘갈명
우리 선조이신 증(贈) 판서(判書) 감찰공(監察公)께서는 35년을 살다 돌아가셨는데, 아들이 일곱, 손자가 스물, 손녀 일곱 명을 두셨다. 우리 家門이 지금까지 면면히 이어지는 것은 모두 監察公 덕택이다. 대저 公의 수명은 안자(顔子)보다 고작 3년 많으나, 그 子孫의 성대함은 안씨(顔氏)의 후손과 거의 같으니, 어찌 말미암은 바가 없겠는가? 유독 한스러운 것은 世代가 너무 멀어 상세하게 알 수 없는 것이다.
이따금 宗親 長老에게 대대로 전해오는 말을 들을 수 있었으니, 公께서는 풍채(風采)가 건장(健壯)하시고 덕기(德器)가 맑으셨으며, 이른 나이에 문화(文華)에 성취를 보이셔서 중씨(仲氏) 일재공(逸齋公)과 함께 막상막하이셨다고 한다. 그리고 학문에 힘써 퇴계(退溪) 이황(李滉)과 일재(一齋) 이항(李恒)에게 명성이 전해지셨고, 兵家의 학술에 두루 통달하셨으며, 근력(筋力)이 좋아 활 쏘는 솜씨가 뛰어나다고 소문이 자자하였다. 조정(朝廷)에서는 그가 문무를 겸비했기 때문에 장차 크게 쓰려 했지만 실제로 그렇게 되지 못했다고 한다.
그 후에 다시 『청송세고(靑松世稿)』를 보니, 公께서 지으신 약간 편의 시가 있는데, 그 시상(詩想)과 수식(修飾)이 표연(飄然)히 세속을 벗어난 모습이 있었다.
그분께서 지으신 〈원통사시(圓通寺詩)〉
석천(石泉)의 요란한 물소리 나그네 잠을 깨우고
소나무에 걸린 달은 스님의 옷깃을 서늘히 만드네
내일 아침의 이별을 남몰래 슬퍼하는데
도리어 세속(世俗)의 일이 날 괴롭히는구나
〈묵상인에게 나뭇가지를 주다〔贈默上人枝〕〉는 다음과 같다.
도(道)를 닦음에는 요법(要法)이 있으니
타인을 능멸하려 하지 말라
자연히 오묘(奧妙)의 극치로 귀착되어
마음은 봄철의 가지가 되는구나
〈잡영시(雜咏詩)〉는 다음과 같다.
4월이라 산촌(山村)을 지나는 사람 적은데
울창한 나무 속 꾀꼬리는 절로 울고 있네
또 구름이 피어오르니 돌길이 보일 듯 말 듯
활짝 핀 꽃은 봄옷을 환히 비취네
또 뜨락에 세운 방민(方民)의 탑
풀이 무성한 채옹(蔡翁)의 비석
또 천리(千里) 땅을 구석구석 보고 나니
이내 몸 구중천(九重天)에 있는 듯 황홀하여라

公의 한 마디 말은 마치 하늘이 보배로운 구슬을 내리는 듯 하다. 이에 公의 말씀을 잘 살펴 여러 한시(漢詩)를 징험(徵驗)해 보니, 公께서 터득한 바를 알 수 있다. 이미 터득한 바가 이와 같은 합당함을 얻었거늘, 하늘이 수명을 인색하게 주셔서 이미 크게 쓰이지 못하셨다. 그러나 어찌 후손을 비춰주는 이치가 없겠는가! 그 자손이 성대하게 된 것이 과연 까닭이 있다는 것을 비로소 믿게 된다.
公의 휘(諱)는 금(錦)이요, 字는 미중(美仲)이다. 沈氏의 관향은 靑松으로, 高祖의 휘는 선(璿)인데 단종조(端宗朝)에 벼슬하여 경기도관찰사가 되었고 世祖 元年에 벼슬을 버리셨다. 호(號)는 망세정(忘世亭)이다. 증조의 휘는 安仁으로 節度使를 역임하셨다. 조부의 휘는 빈(濱)으로 正郞이셨고, 부친의 휘는 광언(光彦)으로 판서를 지내셨고 호는 둔암(鈍菴)이다. 정암(靜庵) 조광조(趙光祖)의 門下에서 배우셨는데, 기묘사화(己卯士禍) 때 名節을 세우셨다. 모친은 한양조씨(漢陽趙氏)로 참의(參議) 방정(邦楨)의 따님이시다.
公은 가정(嘉靖) 辛卯年 2월 12일에 태어나셔서, 25세 때인 乙卯年에 상상(上庠)에 오르셨다. 관직은 내직으로는 佐郞과 監察을 역임하셨고 외직으로 果川縣監에 제수되셨다. 그리고 乙丑年 12월 17일에 官舍에서 돌아가셨다. 이조판서에 추증되었으며, 墓所는 廣州 장지리(長旨里) 선영 해좌(亥坐)의 들에 있다.
전배(前配)는 여흥민씨(驪興閔氏)로 判官 희열(希說)의 따님이다. 경인년(庚寅年) 9월 6일에 태어나셔서, 계해년(癸亥年) 3월 18일 돌아가셨다. 후배(後配)는 한양조씨(漢陽趙氏)로 직장(直長) 은(訔)의 따님이며, 계묘년(癸卯年) 12월 16일에 태어나셔서 만력(萬曆) 壬午年 8월 21일에 돌아가셨다.
아들인 종도(宗道)는 참의(參議)를 지냈고, 종침(宗忱)은 통정대부(通政大夫)의 품계(品階)를 받았으며, 부사(府使)를 역임했다. 종민(宗敏)은 군수를 지냈고, 종직(宗直)은 참의(參議)를 지냈으며, 이밖에 종주(宗周)와 종의(宗毅)가 있다. 이들은 모두 전배(前配)가 낳은 아들이다. 그리고 현감을 지낸 종준(宗準)이 있는데, 후배(後配)의 所生이다.
종도(宗道)는 군수 협(俠)을 낳았고, 종침(宗忱)은 설(偰)과 석()을 낳았는데 모두 감역(監役)이다. 종민(宗敏)은 군수 혁()과 상의원 정(尙衣院 正) 집()을 낳았고, 참의(參議) 홍서익(洪瑞翼)과 별좌(別坐) 우지신(禹祗身), 직강(直講) 정원석(鄭元奭)을 사위로 맞았다. 종직(宗直)은 길(佶)과 항(伉), 휴(休)를 낳았고, 목사(牧使) 이수강(李守綱)을 사위로 맞았으며, 종주(宗周)는 우(佑)를 낳았고, 허척(許倜)에게 딸을 시집보냈다. 종의(宗毅)는 사의(司議) 건(健)을 낳았고, 사위는 도사(都事) 이구준(李耉俊)이다. 그리고 종준(宗準)은 봉사(奉事) 면(俛)을 낳았다.
아! 小孫은 公의 죽음에 대해 커다란 비감(悲感)이 있고, 또한 느껴운 바가 있는 사람이다. 公의 부친과 조부이신 둔암공(鈍菴公)과 망세정(忘世亭)께서는 이미 저렇게 우뚝한 명성이 있거니와, 그 손자와 증손도 율곡(栗谷) 이이(李珥)와 우계(牛溪) 성혼(成渾)의 門人이다. 그리고 만사(晩沙) 심지원(沈之源)과 죽오(竹塢) 심익현(沈益顯) 또한 저렇게 혁혁한 명망을 자랑하였다.
公의 재덕(才德)과 중망(重望)은 비록 단명(短命)에 막혀 세상에 베풀어지지 못했지만, 先祖를 계승하여 후손을 계도한 어진 마음은 실로 웅대(雄大)한 것이다. 그런데 유독 公께서 발휘(發揮)하신 것을 보지 못하는 것은 어째서일까? 人事가 멀리 전해지는 것을 소홀히 여겨 결국 사라지게 된 것인가? 아니면 있었으나 전해진 것을 일실(逸失)한 것인가? 이에 감히 이상과 같이 서술하고 명(銘)을 잇는다.
명(銘)은 다음과 같다.
빛나누나! 우리 선조(先祖)여! 이 분께서 명문(名門)을 이으셨지
덕행(德行)이 풍성(豊盛)하셨기에 그 후손을 창성(昌盛)히 하셨네
물은 괴었다 흘러가고 겨울은 움츠렸다 펴지는 법
노송나무 심어진 곳은 오히려 사람을 비춰주며
참람하지 않는 자는 순조로울 것이라 점을 치듯 기약(期約)하네
소손(小孫)은 감히 자랑하며 미래를 징험(徵驗)하려 글을 적네

칠세손(7世孫) 정진(定鎭) 짓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