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대사헌공(휘 호)묘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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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재공 휘 호 묘소 묘표석 |
十一世祖
贈大司憲 兼 知經筵事 宗親府典簿 諱 鎬 墓誌
維我先祖諱鎬字景基號逸齋考諱光彦號鈍庵判書妣漢陽趙氏參議邦楨女以 正德戊寅十一月初四日生公自幼貌溫而性敏判書公命嗣伯氏郡守諱光門後年十二丁郡守公憂執喪讀禮洪公彦弼見而奇之弱冠文藝夙成操履詳雅專心學業不喜紛華以親命屈跡公車而非其志癸卯陞上舍見識言論爲士友標望及乙巳時事不靖不復作場屋跡事親至孝左右就養判書公旣大耋春秋設宴稱觴獻壽都人皆爭聚觀願加福慶其壽筵圖詩曰風流司馬我所愛雅尙偏於孝友篤者鄭林塘惟吉語也行誼著聞薦拜典簿而風標介潔超然物表視世軒冕若腐鼠選曺知公意更不敢累以官職漫浪江湖終老不起以己丑五月二十一日考終壽七十二訃聞太史氏特書曰西湖處士沈某卒其負當世之望如此 贈大司憲兼同知 經筵事葬廣州長旨里坐庚原鈍庵墓前配光州金氏大司憲弘胤女越乙未後公七年七月十五日歿合窆公天資奇偉識度高曠世喧而若不聞衆馳而獨歛跡生於華閥而絶綺紈之習長於闤闠而外聲利之求老於湖山而無放傲之志眞所謂長德君子矣平居正衣冠危坐讀性理書演窮奧旨怳然有自得之趣與退溪聽松一齋爲道義交有亭號集勝勝槩冠西湖每當佳辰含盃撫琴歡如也所與酬唱盡一時名流林公億齡沈公守慶朴公淳最其優者也嘗騎木馬命小車徃來江干見者知其爲神仙中人至今傳以爲美談公下世幾百歲尙闕阡隧之文大惧年代遷易陵谷不恒玆敢觕記顚末燒磁納竁嗚呼先祖標致之高學行之美非後昆所敢容議欲知其詳國有一部靑史千載之下知有西湖處士 六世孫 埈 撰 11세조 증대사헌 겸 지경연사 종친부전부 휘 호(鎬) 묘지 우리 선조 휘(諱) 호(鎬)께서는 字가 경기(景基)이고 호는 일재(逸齋)이시다. 父親 휘 光彦께서는 호가 둔암(鈍菴)이시고 판서를 역임하셨다. 모친은 漢陽趙氏로 參議 방정(邦楨)의 따님이신데, 正德 戊寅年 11월 4일에 公을 낳으셨다. 어려서부터 용모(容貌)가 온순(溫順)하시고 성품이 민첩하셨기에 판서공(判書公)께서 백씨(伯氏)인 군수 휘 光門의 후사(後嗣)로 命하셨다. 12세가 되셨을 때, 郡守公께서 돌아가시자 상례(喪禮)를 치르고 예서(禮書)를 읽으며 거상(居喪)하셨는데, 홍언필(洪彦弼)께서 이를 보고 기특하게 여기셨다. 약관(弱冠)의 나이에 문예(文藝)가 조숙하셨고 조리(操履)가 안상(安詳)하고 온아(溫雅)하셨으며 학업에 전심(專心)하며 분화(紛華)한 것을 좋아하지 않으셨다. 부친의 명령으로 과거 준비에 몸을 굽히셨으나 그의 뜻은 아니셨다. 계묘년(癸卯年)에 進士에 오르셨는데 견식(見識)과 言論이 士友의 표망(標望)이 되셨다. 乙巳年이 되었을 때, 시사(時事)가 혼란스러워지자 다시는 과거를 보지 않으셨고, 부모님을 지극히 효성스럽게 섬기며 좌우에서 봉양하셨다. 판서공께서 매우 연로하셨기에 봄과 가을이 되면 연회를 베풀어 술잔을 올리며 헌수(獻壽)를 하셨는데 사람들이 모두 다투어 모여 바라보며 福이 더해지기를 축원했다. 그 〈수연도(壽筵圖)〉 시(詩)에 『사마(司馬)의 풍류(風流)를 내 사랑했건만, 돈독한 효우(孝友)를 유독 숭상하는구나』라 하였으니 임당(林塘) 정유길(鄭惟吉)의 작품이다. 행의(行誼)가 자자히 들려지자 천거(薦擧)되어 전부(典簿)에 제수(除授)되었다. 그러나 풍표(風標)가 개결(介潔)하여 아득히 世俗의 바깥을 초월(超越)하니, 세상의 벼슬을 마치 썩은 쥐 보듯이 하셨다. 吏曹에서 公의 뜻을 알았기 때문에 다시는 감히 관직으로써 그에게 누를 끼치지 않으려 하였다. 유유자적하게 강호(江湖)를 노닐며 돌아가실 때까지 관직에 나오지 않으셨다. 己丑年 5월 21일에 돌아가시니 향년은 72세이다. 부음(訃音)이 전해지자 사관(史官)은 『서호처사(西湖處士) 심모(沈某)가 卒하였다』라고 특별히 기록했다. 당시에 그가 받았던 명망(名望)이 이와 같았다. 대사헌(大司憲) 겸(兼) 동지경연사(同知經筵事)에 추증(追贈)되었고, 廣州 장지리(長旨里) 경좌(庚坐) 原에 둔암공(鈍菴公) 묘소 앞에 장사지냈다. 배위(配位)는 광주김씨(光州金氏)로 대사헌 홍윤(弘胤)의 따님이다. 公께서 돌아가신 지 7년째 되는 乙未年 7월 15일에 돌아가셨는데 합폄(合窆)되었다. 公은 타고난 자질이 기이하고 우뚝하며 식견과 법도가 높고 넓었기에, 세상이 떠들썩해도 듣지 못한 양 하셨고, 많은 사람이 한 쪽으로 치달려도 홀로 자취를 거두어들이셨다. 번화(繁華)한 벌열(閥閱)에서 태어나셨으나 부유한 자제의 습속(習俗)을 끊어버리셨고, 성시(城市)에서 성장하셨으나 명예나 이익의 추구를 등한시하셨다. 그리고 강호와 산림에서 늙으셨으나 방탕하고 거만한 뜻이 없었으니 진실로 훌륭한 덕을 가진 君子라 할 만하다. 평소에도 의관(衣冠)을 단정히 하고 정좌(正坐)하여 성리서(性理書)를 읽으셨고, 심오한 뜻을 연역(演繹)하고 궁구(窮究)하여 황홀히 자득하는 의취가 있으셨다. 퇴계(退溪) 이황(李滉)과 청송(聽松) 성수침(成守琛), 일재(一齋) 이항(李恒)과 더불어 도의(道義)의 교유를 나누었다. 정자(亭子)를 가지고 계셨는데 「집승(集勝)」이라 불렸다. 그 승경(勝景)은 서호(西湖)의 으뜸이었다. 매양 좋은 때를 만나면 술잔을 머금고 거문고를 타며 기뻐하셨다. 함께 수창(酬唱)한 사람들은 모두 한 시대의 명류(名流)인데, 임억령(林億齡), 심수경(沈守慶), 박순(朴淳)이 가장 뛰어난 사람들이다. 일찍이 木馬를 타고 작은 수레를 부리며 강가를 왕래하였는데, 보는 사람들이 신선과 같은 사람이라고 생각하였거니와 지금까지도 아름다운 이야기로 전해지고 있다. 公이 세상을 떠나신 지 몇 백년이나 되었던가! 그런데도 오히려 묘비(墓碑)의 글자가 결락(缺落)되었기에 매우 두려운 심정이다. 세월은 쉽게 흘러가고 능곡(陵谷)은 일정한 것이 아니어서, 이에 감히 전말(顚末)을 기록하고 사기를 태워 광혈(壙穴)에 넣는 바이다. 아! 선조의 고상한 의취(意趣)와 전미(全美)한 學行은 후손이 감히 이야기할 바 아니나 그 상세한 것을 알고자 하는 것은 나라에 한 부(部)의 청사(靑史)가 있으면 천년 뒤에라도 서호처사(西湖處士)가 있는 줄 알기 때문이다. 6세손(世孫) 준(埈)이 짓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