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본관문

呈本官文 癸巳十二月 日
伏以褒忠奬義 朝家之盛典微顯闡幽後世之公議民等六代祖諱淸卽令同正六世孫也生有異質膽勇邁倫嘗曰慷慨殺身易從容就義難揭于壁每自警省所居道洞有巖石之勝築亭于其上以文史自娛每於嘯咏之暇嫺習弓射手植九松自號曰碧節蓋寓歲寒後凋之義也逮當龍蛇之亂八路創攘蠻酋滔天公遂奮不顧身與鄕人趙亨道趙東道爲倡義將紏率士人往赴于慶州牛山與金應澤權應心黃希顔合陳遂以運糧監往運于東萊釜山浦五百里之地不避艱險竭力餽餉未嘗乏絶壬辰十一月初一日聞 
王世子爲賊所迫與諸將焚香祝天慨然流涕曰 主辱臣死天彛之炳然殺身成仁君子之大義誓死同盟於和江之上至八公山與安東義將柳元直柳復起邊仲一協謀勵勇大戰數日或燔柴木或投石磧禽獲二十餘級先是聞招諭使金先生誠一卒于 晉陽愕然長歎曰今日吾當決死以報國耳丁酉十月二十一日赴島山時倭虜大掠嶺左轉而南下勢若風雨與金應澤權應心邊仲一率旅防禦於島山之前港衆寡勢絶矢盡道窮終爲賊丸所中而公之長子應洛同爲赴陣求屍於崤山亂骸之中裏革返葬謹按邑誌有曰沈淸當龍蛇之亂運糧於東萊釜山浦五百里之地餉軍不乏後以功體察使李公元翼以聞 
除訓鍊奉事松皐金應澤龍蛇日記曰丁酉島山之戰權應心沈淸邊仲一挺身賈勇爲賊丸所中而致死又載艮翁金璉會盟記此皆當日殉國之信蹟相傳於野史且亂中所著日錄昭然尙存實非後生溢美之言而邑誌日記外可據文蹟散在各處未及收聚竊念島夷猖獗之日野無荷戟之士邑無乘障之卒任封疆有官守者皆望風奔潰公獨以一介布衣倡義南土與一二同志揭竿爲旗斬木爲兵挺身於危急之際奮勇於板蕩之地釜山之運糧孔巖之獻馘皆其卓卓然偉異者也而及其賊勢大熾孤軍無援張空拳冒白刃北首以死於賊盖其殉國之蹟宜不讓於湖南之高霽峯嶺左之郭忘憂也沒於數百年之下豈不寃哉島山之役同死諸賢俱爲褒揚已蒙旌貤之澤而獨民等六代祖幽不顯子推之忠焉而褒賞不及杲卿之義焉而何狀不識其爲子孫寃鬱之情當何如哉今當舊甲之重回自 朝家蒐訪立殣之舊蹟營飭纔到公頌齊鬱此正微顯闡幽之秋也謹將前後實蹟仰訴於閤下褒奬之下伏願細加詳覽修報營門俾蒙登聞之地千萬祈懇
題曰殉義事蹟已見於邑誌又已摭報巡營不可疊狀事

고을 수령에게 올리는 글 계사12월 일
삼가 생각하건대 충(忠)과 의(義)를 칭찬하여 장려하는 것은 나라의 성대한 의식(儀式)이요 명백한 일을 노골적으로 말하지 않고 명백하지 못한 일을 명료하게 밝히는 것은 후세의 공의(公議)입니다.
저희들의 6대조 휘 청(淸)은 즉 영동정(令同正)의 6세손으로 나면서부터 남달리 빼어난 재주가 있고 담력과 용맹이 뛰어나 일찍이 말하기를 의롭지 못한 것을 보고 의분을 느껴 죽는 것은 쉽고 조용히 의를 위하여 죽는 것은 어렵다는 것을 벽에 걸고 늘 스스로 경계하고 반성하며 사는 곳 도동(道洞)에 암석(岩石)이 아름다운 곳이 있는데 그 위에 정자를 짓고 학문하는 일을 스스로 즐기고 노래나 시를 읊조리는 여가에 활 쏘는 것을 익히고 손수 아홉 그루의 소나무를 심고 스스로 벽절(碧節)이라고 호를 지었으니 대개 소나무는 날이 찬 뒤에 시든다는 뜻을 취한 것입니다. 임진왜란을 당하여 팔도(八道)가 오랑캐에게 짓밟히자 공이 격분하여 몸을 돌보지 않고 향인(鄕人) 조형도(趙亨道), 조동도(趙東道)와 더불어 창의장(倡義將)이 되어 군사를 규합(糾合)하여 인솔하고 경주(慶州) 우산(牛山)에 가서 김응택(金應澤), 권응심(權應心), 황희안(黃希顔)과 합진(合陣)하고 드디어 운량감(運糧監)으로써 동래(東萊)와 부산포(釜山浦) 5백리의 땅을 왕복하며 어려움을 피하지 않고 힘을 다하여 군량미(軍糧米)를 일찍이 떨어뜨리지 아니하였습니다.
임진11월초1일 왕세자(王世子)가 적의 핍박을 받았다는 말을 듣고 여러 장수와 더불어 향불을 피우고 하늘에 빌며 분하여 눈물을 흘리고 말하기를 임금이 욕을 당하면 신하가 죽는 것은 천륜(天倫)의 당연함이요 세상을 위하여 생명을 바침은 군자의 대의(大義)입니다 하고 죽기를 맹세코 화강(和江)의 위에서 동맹(同盟)하였습니다. 팔공산(八公山)에 이르러 안동의장 류원직(柳元直), 류복기(柳復起), 변중일(邊仲一)과 더불어 협의하여 모사하고 용기를 내어 크게 몇 일간을 싸우는데 혹은 섶위에 옥백(玉帛)과 희생(犧牲)을 올려놓고 이를 태우면서 천제(天祭)도 지내고 혹은 돌을 던져 사로잡은 것이 20여급(餘級)이나 되었습니다. 이보다 먼저 조유사(詔諭使) 김성일(金誠一) 선생이 진양(晉陽)에서 순직(殉職)하였다는 말을 듣고 깜짝 놀라 긴 한숨을 내쉬며 탄식하여 말하기를 오늘 나는 마땅히 죽음을 각오하고 있는 힘을 다하여 싸워서 죽어 나라에 보답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정유10월21일 도산(島山)에 갔는데 이때 왜적이 크게 노략질하며 영남으로 돌아 남쪽으로 내려오는 기세(氣勢)가 비바람이 몰아치는 것 같으니 김응택(金應澤), 권응심(權應心), 변중일(邊仲一)과 더불어 군사를 거느리고 도산의 앞 항구에서 방어하였으나 중과부적(衆寡不敵)이요 화살이 떨어져 어찌할 도리 없이 적탄에 맞아 돌아가니 공의 큰아들 응락(應洛)이 같이 진중(陣中)에 있다가 시체를 효산(崤山)에 흐트러진 유해(遺骸)속에서 찾아 가죽에 쌓아 가지고 반장(返葬)하였습니다. 삼가 읍지(邑誌)를 살피건대 읍지에 말하기를 심청(沈淸)이 임진왜란을 당함에 군량(軍糧)을 동래(東萊) 부산포(釜山浦) 5백리의 땅에 운반하여 떨어뜨리지 아니하니 뒤에 그 공을 체찰사(體察使) 이공(李公) 원익(元翼)이 알아 조정에 보고하여 훈련원 봉사(訓鍊院奉事)에 제수되었다 하였고 송고(松皐) 김응택(金應澤)의 임진일기에는 정유년 도산의 싸움에서 권응심, 심청, 변중일이 앞장서서 용기를 내어 싸우다가 적탄에 맞아 전사(戰死)하였다 하였으며 또 간옹(艮翁) 김련(金璉)의 회맹기(會盟記)에도 실려 있으니 이것이 모두 당일 순국(殉國)한 신적(信蹟)이 야사(野史)나 난중일기에 서로 전하여 소상(昭詳)하게 아직도 남은 것이요 진실로 후생(後生)의 과찬(過讚)한 말이 아니며 읍지, 일기 외에 근거가 될만한 문적(文蹟)이 각처에 흩어져 있으므로 아직 거두어 모으지 못하였습니다. 가만히 생각하건대 왜적이 우리나라를 침공하여 오던 날에 들이나 고을에 군사가 없고 나라의 벼슬아치들은 모두 바람에 쓸어 지듯 무너졌으나 공은 홀로 일개 서인(庶人)으로써 남쪽에서 창의(倡義)하여 한 두 사람의 동지(同志)와 더불어 장대를 세워 기(旗)를 삼고 나무를 베어 무기를 만들고 위급할 때 앞장서고 국정이 문란한 처지에 용기를 내어 부산에 군량을 운반하고 공암(孔岩)에서 적의 머리를 베어 바친 것은 모두 뛰어나게 위대한 것이었으나 적의 기세가 크게 성하였으나 외로운 군사로 원조도 없이 맨주먹으로 칼날을 무릅쓰고 적에게 죽었으니 그 나라를 위하여 죽은 것이 호남의 제봉(霽峰) 고경명(高敬命)과 영남의 망우당(忘憂堂) 곽재우(郭再祐)만 못하지도 않은데 수 백년 동안 묻히었으니 어찌 억울하지 않겠습니까. 도산의 싸움에서 같이 죽은 제현(諸賢)은 모두 찬양하여 이미 정려(旌閭)를 명 받았으나 홀로 저희들의 6대조는 어두움에 가리어 충성한 실적도 나타나지 않고 포상(褒賞)도 받지 못하였으니 어디에 호소하여야 할지 모르겠으며 그 자손된 자로서 억울한 마음이 어떻겠습니까. 지금 구갑(舊甲)이 거듭 돌아와 나라에서 순직(殉職)한 옛 자취를 수집하고 찾아 감영(監營)에 훈령(訓令)이 겨우 도착하였다니 공의 억울함을 바로잡을 때입니다. 삼가 전후(前後) 실적(實蹟)을 가지고 합하(閤下)에게 포장(褒奬)하여 주실 것을 우러러 호소하오니 삼가 원하옵건대 자세히 살피시고 감영에 보고하여 정려가 내리도록 하여 주심을 천만 기간(祈懇)하옵니다. 끝으로 순의사적(殉義事蹟)은 이미 읍지에 나오고 또 감영에 보고하였으니 거듭 말씀드리지 않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