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일기 |
壬辰日記 長子 應洛 錄
伏壬辰四月十七日聞倭寇蔽海而來二十三日已到釜山東萊府使宋象賢僉使鄭撥遇害卽日招致里中子弟共議倡義之擧使冶匠金元福李莫介日夜鑄成弓矛劒戟等器又使邑人李遂大運穀于道藏洞以爲餽餉之道 ○二十四日揭牓于道洞召募義兵應募者至八十餘人 ○五月初七日率兵至本府時人民潰散處處盜賊蜂起凶徒數十百豕突府廨乃登西陴勵聲大喝曰汝知沈淸乎令賊徒立麻骨於客舍四方引弓舍矢寸寸摧折賊徒驚懼遁去 ○七月初三日聞 大駕西遷奮然流涕曰我 國家數百年禮義之邦一朝寧入於蠻酋之藪乎此臣子報國之日也誰謂嶺左七十州曾無一人義士耶吾將殞首矢石以雪君父之恥及聞金應澤倡義於慶州顧謂二子曰家國元無二致忠孝實難雙全應洛汝則氣質超常同我矢石當赴國難遂與趙亨道趙東道往赴焉 ○八月初一日至慶州牛山時列邑諸義將皆會軍聲稍振 ○九月初十日李訥結陣于孝嶺李繼秀設陣于牛山時奮忠將李應春禦賊于孔巖之下 ○十一月初一日聞 王世子爲賊所迫慨然流涕曰 主辱臣死天彛之炳然殺身成仁君子之大義與諸義將誓死同盟於和江之上 ○癸巳二月初六日分部至羅兒谷乃使諸軍各持茅柴以火攻之時西北風大起賊兵潰散追至西浦 ○四月初四日與金應澤李龍甲權應心金弘燁崔文炳金應河水擊於孔巖浦 ○初十日見賊船蔽江而來諸將皆恐懼乃以義曉之曰奮義將金應澤膽勇邁倫裨將朴敏好善組練奮忠將金洽善知虛實雖賊船千萬艘不足畏也諸將勿復懼焉 ○五月初二日倭船自柳浦猝至西下浦與金應澤分隊入谷歛衆據險援枹鼓勇士氣益壯 ○初八日聞招諭使金誠一卒于晉陽四月二十九日愕然長歎中夜不寐曰長城壞矣其於社稷生靈何遂日夜督進不懈 ○九月初十日還石邑令軍中屯田種麥休兵蓄銳以爲禦賊之計 ○甲午三月日與趙亨道登勸武科 ○八月二十日復至牛嶺與金應澤考試所備弓矢霖雨累日筋膠盡解使弓人金始大更爲調繕溫處又使能幹者李石尹一衡刈取竹箭與桑材五千餘箇時兵燹數年倉無積貯野無耕穫謂諸將曰漢倉之紅腐已盡魯公之峙糧無計卒食半菽士有飢色此宜給餽餉然後可以保百戰之卒遂以軍糧監轉至本府時一枝倭寇自福州漸入府界以留城軍百餘人爲疑兵各持三頭炬期暮山 上山一時擧火火焰漲天賊疑其多兵是夜移師踰嶺退陣于伐川坪遂發各倉所在粟及李遂大所得穀合數千餘斛轉漕于釜山浦五百里之地從和江南下累遇賊兵瀕於危殆且行且戰調運各營 ○二十七日將向羅兒谷忽値賊兵大掠挺身賈勇力戰十二合至孔巖襲擊大破前後所獲二十餘級上功幕府體察使李元翼以聞 除訓鍊奉事 ○九月初五日收屯田穀使老弱水碓兵糧小米三十一斛大米八十八斛太豆十五斛 ○十月十二日與金應澤鍊兵向于大邱營 ○十八日行至朱砂山與金應河李龍甲孫時李承級金光福金蘭李應璧崔文炳金弘煒合陣時賊酋數千馳入月城而西鄭世雅曹俊驥鄭四震曹以節禦于永境之口賊遂踰嶺而走金應河金弘煒潛伏于山之南李龍甲崔文炳拒斷石之北遂與金應澤率其强弩伏于林藪之中投石發弩時風雪大作山路幽黑賊兵迷失路躡其後斬獲數十級賊兵潰散諸將皆賀曰吾儕自倡義以來今日之擧實爲首功而沈訓鍊之智畧金奮義之武勇賊酋之素所讋伏云爾 ○二十日使驛卒徐一孫獻窖于判官營中 ○二十七日和江諸義將以檄徵之率兵馳往 ○十一月初二日至和江李應春徐仁忠全玠尹弘鳴來言曰今日之會務在得人臨戰合變金應澤一人而已轉漕調兵沈淸一人而已 ○十二月二十九日還軍石邑衆多移散之意以軍律治之朴好春金萬得韓德孫時捉送于判官陳中 ○乙未十月初三日收舂兵糧使丁大碩朴春燁更繕軍器 ○十二月初三日發軍向大邱陣 ○丙申八月二十九日聞防禦使郭再祐前翰林成大起留兵於昌寧往赴之 ○九月初五日聞權應銖至昌寧募得兵馬二十五匹又出健牛三十七隻使金得福調兵 ○二十八日至八公山寧海義將南慶生朴應長李菽安東義將柳元直柳復起邊仲一朴泰回孫胤男靑松義將沈淸趙東道大邱義將孫處訥崔東輔洪瀚崔認蔡夢硯朴忠後淸道義將李雲龍朴澈朴泂蔚山義將尹弘鳴金洽興海義將安成節鄭仁獻鄭三畏密陽義將孫起陽金太虛孫纘先新寧義將金大寬權應心永川義將鄭世雅曹俊驥曹以節盧起宗慶州義將金弘燁李訥金應澤權士諤崔文炳李龍甲李繼秀金應河吳悅蔣啓賢各自賦詩同盟焉 ○丁酉七月二十九日收軍糧七十五斛運置牛山大筶中 ○九月初九日聞防禦使郭再祐丁母夫人喪出綿布使驛卒賻送有疏問 ○二十三日行到八公山時賊兵馳突山城李訥金弘燁爲賊丸所中 ○二十七日與金應澤全一元堅川至夾擊左右賊酋盡散 ○十二月十一日與權應銖金應澤金應河禦賊于唐津大小數十餘戰賊兵奔散我軍死者七十餘人堅川至李應璧李龜甲李大震亦爲被傷 ○二十一日轉至島山時賊勢大熾據高飛砲衆皆喪氣與金應澤權應心邊仲一躳擐甲胄挺身先登竭力終日矢盡道窮同爲賊丸所中長子應洛收屍從間路還葬于九松亭之右 임진일기 큰아들 응락(應洛)이 기록함 임진4월17일 왜구(倭寇)가 바다를 가리어 덮고 온다는 말을 들었는데 23일 이미 부산에 이르러 동래부사(東萊府使) 송상현(宋象賢), 첨사(僉使) 정발(鄭撥)이 살해(殺害)를 당하자 즉일로 마을의 자제(子弟)를 불러 창의(倡義)할 것을 의논하고 대장장이 김원복(金元福), 이막개(李莫介)를 시켜 밤낮으로 활과 방패, 창같은 무기를 만들고 또 고을 사람 이수대(李遂大)를 시켜 곡식을 도장동(道藏洞)에 운반하여 군량미(軍糧米)로 쓰게 하였다. ○24일 방문(榜文)을 도동(道洞)에 게시(揭示)하여 의병(義兵)을 소모(召募)하니 응모자(應募者)가 80여인에 이르렀다. ○5월초7일 군사를 거느리고 본부(本府)에 이르니 이때 사람들이 무너져서 흩어지고 곳곳에서 도적이 떼지어 일어나 흉도(凶徒) 수십백(數十百)이 저돌적(猪突的)으로 관청에 침입(侵入)하거늘 서쪽 성가퀴에 올라가 큰소리로 꾸짖어 말하기를 너희들은 심청(沈淸)을 아느냐 하고 적도(賊徒)로 하여금 껍질을 벗긴 삼대를 객사(客舍)에 세우게 하고 사방에서 활을 쏘아 마디마디가 부러지니 적도가 놀라서 두려워하고 도망갔다. ○7월초3일 임금이 도성을 떠나 피난하였다는 말을 듣고 분하여 눈물을 흘리며 말하기를 우리나라가 수백년 동안 예의의 나라로서 하루아침에 오랑캐의 손에 들어갈 수 있겠는가. 지금은 신하로서 나라에 보답할 때이다. 경상도 70고을에 일찍이 한사람의 의사(義士)도 없단 말인가 내가 장차 머리를 화살과 돌을 삼아 임금의 치욕(耻辱)을 깨끗이 씻어줄 것이다 하였다. 김응택(金應澤)이 경주(慶州)에서 창의(倡義)하였다는 말을 듣고 두 아들을 보고 말하기를 집과 나라가 둘이라는 이치는 없고 충(忠)과 효(孝)를 두 가지 다 온전하기는 진실로 어렵다. 응락(應洛) 너는 기질이 뛰어나니 나와 함께 전쟁에 나가자 하고 드디어 조형도(趙亨道), 조동도(趙東道)와 더불어 같이 갔다. ○8월초1일 경주우산(慶州牛山)에 이르니 모든 고을의 의장(義將)이 다 모여 병정과 군마(軍馬)의 떠드는 소리가 차차 떨쳤다. ○9월초10일 이눌(李訥)이 효령(孝嶺)에 진을 치고 이계수(李繼秀)가 우산(牛山)에 진(陣)을 만드니 이 때 분충장(奮忠將) 이응춘(李應春)은 공암(孔岩)의 아래에서 적을 방어하였다. ○11월초1일 왕세자(王世子)가 적의 핍박을 받았다는 말을 듣고 분하게 여기며 눈물을 흘리고 말하기를 임금이 욕을 당하면 신하는 임금을 위하여 목숨을 바치는 것이 천륜(天倫)의 당연함이요 세상을 위하여 생명을 바침은 군자의 대의(大義)라 하고 여러 의병장과 더불어 화강(和江) 위에서 동맹하였다. ○계사2월초6일 부대를 나누고 나아곡(羅兒谷)에 이르러 여러 군대로 하여금 각각 띠와 잎나무에 불을 부쳐 공격하니 이때 서북풍이 크게 불어 적병이 흩어지자 서포(西浦)까지 추격(追擊)하였다. ○4월초4일 김응택(金應澤), 이용갑(李龍甲), 권응심(權應心), 김홍엽(金弘燁), 최문병(崔文炳), 김응하(金應河)와 함께 공암포(孔岩浦)에서 배를 타고 싸우며 적을 공격하였다. ○초10일 적선(賊船)이 강을 가리어 덮고 쳐들어오자 여러 장수가 모두 두려워 하거늘 의(義)로써 깨우쳐 말하기를 분의장(奮義將) 김응택(金應澤)은 담력과 용맹이 뛰어나고 비장(裨將) 박민(朴敏)은 교련(敎練)이 잘 되었고 분충장(奮忠將) 김흡(金洽)은 허실(虛實)을 잘 아니 비록 적선 천만척 이라도 족히 두려울 것이 없으니 여러 장수는 다시 두려워하지 말라 하였다. ○5월초2일 왜선(倭船)이 유포(柳浦)로부터 갑자기 서하포(西下浦)로 쳐들어 옴으로 김응택(金應澤)과 더불어 부대를 나누어 골짜기에 들어가 무리를 숨기고 북채로 북을 치어 고무(鼓舞)하여 용기를 내게 하니 사기(士氣)가 더욱 씩씩하여졌다. ○초8일 초유사(招諭使) 김성일(金誠一)이 진양(晉陽)에서 4월29일 죽었다는 말을 듣고 깜짝 놀라 한숨을 쉬며 깊은 밤까지 잠자지 못하고 말하기를 항 나라의 중진(重鎭)이 무너졌으니 그 나라와 백성에게 어떻게 해야하나 하고 드디어 밤낮으로 부하 격려하는 것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9월초10일 석읍(石邑)으로 돌아와 군중(軍中)에 명령하여 둔전(屯田)에 보리농사를 지으며 군대를 쉬게 하고 왕성한 기력을 쌓아 적을 방어하는 계획을 삼았다. ○갑오3월 일 조형도(趙亨道)에게 무과(武科)에 급제할 것을 권하였다. ○8월20일 다시 우령(牛嶺)에 이르러 김응택과 더불어 비축한 활과 화살을 시험해 보니 여러 날 장마가 계속되어 화살에 부친 아교가 다 녹았다. 궁인(弓人) 김시대(金始大)로 하여금 다시 조절하여 수선시키고 또 재간이 있는 이석(李石), 윤일형(尹一衡)으로 하여금 화살대와 뽕나무 五천여개를 베어오게 하였다. 이때 병화(兵火)에 시달린지 수년에 창고에 남은 곡식이 없고 들에서 수확할 것이 없으니 여러 장수에게 말하기를 한무제(漢武帝)때 창고의 곡식이 썩어 없어진 것과 노공(魯公)이 쌓아둔 곡식이 없어진 것과 같았다. 군사(軍士)가 콩 반쪽을 나누어 먹고 굶은 기색이 있으니 마땅히 잘 먹인 연후에야 백 번을 싸울만한 병졸을 둘 수 있다 하고 드디어 군량감(軍糧監)으로써 전직(轉職)하여 본부(本府)에 이르렀다. 이 때 한 떼의 왜구(倭寇)가 복주(福州)로 부터 점점 부계(府界)로 들어와 성에 머문 군사가 백여인이 되었다. 가짜 병정을 만들어 각각 세 개의 횃불을 가지고 밤에 일시(一時)에 불을 들어 올리니 화염(火焰)이 하늘에 가득하니 적이 그 군사가 많은 것을 의심하고 이날 밤에 군사를 옮겨 고개를 넘고 벌천평(伐川坪)에 퇴진(退陳)하자 드디어 각 창고에 있는 곡식을 풀었고 이수대(李遂大)가 얻은 곡식은 합하여 수천곡(數千斛)이나 되어 부산포(釜山浦) 五백리 배로 운반하는데 화강(和江)에서 남쪽으로 내려가다가 여러번 적을 만나 위태로울 뻔하였으나 가다가 싸우다가 하며 각 감영(監營)에 운반하였다. ○27일 나아곡(羅兒谷)을 향하여 가다가 갑자기 적병이 크게 침략하므로 앞서서 전진하고 용기를 내어 힘써 열두 번을 싸우고 공암(孔岩)까지 습격(襲擊)하여 대파(大破)하여 전후(前後) 참획(斬獲)한 적의 머리수가 20여개나 되어 막부(幕府)에 공(功)을 상신(上申)하니 체찰사(體察使) 이원익(李元翼)이 조정에 알려 훈련원 봉사에 제수되었다. ○9월초5일 둔전곡(屯田穀)을 수확하여 노약(老弱)을 시켜 물방아로 찧은것이 소미(小米:좁쌀) 31곡(斛), 대미(大米, 白米) 88곡. 대두(大豆) 15곡이었다. ○10월12일 김응택과 더불어 군사를 훈련시키려 대구감영에 갔다. ○18일 주사산(朱砂山)에 가서 김응하(金應河), 이용갑(李龍甲), 손시(孫時), 이승급(李承級), 김광복(金光福), 김란(金蘭), 이응벽(李應壁), 최문병(崔文炳), 김홍위(金弘췿)의 군대와 합쳤다. 이때 적병 수천명이 월성(月城)으로 들어와 서쪽으로 진격하거늘 정세아(鄭世雅), 조준기(曺俊驥), 정사진(鄭四震), 조이절(曺以節)이 영경(永境)의 입구에서 막으니 적병이 드디어 고개를 넘어 달아나거늘 김응하, 김홍위가 산의 남쪽에 잠복(潛伏)하고 이용갑, 최문병은 단석(斷石)이 북쪽을 막고 김응택과 더불어 강궁(强弓)을 거느리고 덤풀속에 잠복하여 돌을 던지고 쇠뇌를 발사(發射)하였다. 이때 풍설(風雪)이 크게 일어나 산길이 어둡고 밝지 않으니 적병이 길을 잃었다. 그 뒤를 쳐서 적의 머리를 참획한 수가 수십급(數十級)이요 적병이 궤멸(潰滅)되어 흐트러지니 여러 장수가 모두 하례하여 말하기를 우리들이 창의한 이래로 오늘날의 싸움에서 진실로 수공(首功)은 심훈련(沈訓鍊)의 지략(智略)과 김분의(金奮義)의 무용(武勇)으로 적병이 두려워서 항복한 것이다. ○20일 역졸(驛卒) 서일손(徐一孫)을 시켜 벤 적의 머리를 판관영중(判官營中)에 바쳤다. ○27일 화강(和江)의 모든 의장(義將)들이 격문(檄文)을 돌리고 군사를 거느려 달려갔다. ○11월초2일 화강에 이르니 이응춘(李應春), 서인충(徐仁忠), 김개(金죐), 윤홍명(尹弘鳴)이 와서 말하기를 오늘날의 싸움에 사람을 얻는데 힘쓰고 싸움에 임하여 변화에 따른 것은 김응택 한사람 뿐이고 배를 타고 군량(軍糧)을 조달(調達)한 것은 심청 한사람 뿐이다 하였다. ○12월29일 석읍(石邑)으로 환군(還軍)하자 이산(移散)한다는 뜻을 말하는 사람이 많았다. 군률(軍律)로 다스리고 박호춘(朴好春), 김만득(金萬得), 한덕(韓德), 손시(孫時)가 잡아서 판관진중(判官陳中)에 보냈다. ○을미10월초3일 방아를 찧어 군량미를 장만하고 정대석(丁大碩), 박춘엽(朴春燁)을 시켜 다시 무기를 수선하였다. ○12월초3일 대구진(大邱陳)을 향하여 발군(發軍)하였다. ○병신8월29일 방어사(防禦使) 곽재우(郭再祐), 전 한림(翰林) 성대기(成大起)가 창녕(昌寧)이 군사를 머물게 하였다는 말을 듣고 가 보았다. ○9월초5일 권응수(權應銖)가 창녕(昌寧)에 이르러 병마(兵馬) 25마리를 모집하여 얻고 또 건우(健牛) 37마리가 나왔다는 말을 듣고 김득복(金得福)을 시켜 군사들을 조양(調養)시켰다. ○28일 팔공산(八公山)에 이르러 영해(寧海) 의장(義將) 남경생(南慶生), 박응장(朴應長), 이숙(李菽)과 안동(安東) 의장 류원직(柳元直), 류복기(柳復起), 변중일(邊仲一), 박태회(朴泰回), 손윤남(孫胤男)과 청송(靑松) 의장 심청(沈淸), 조동도(趙東道)와 대구(大邱) 의장 손처눌(孫處訥), 최동보(崔東輔), 홍한(洪瀚), 최인(崔認), 채몽연(蔡夢硯), 박충후(朴忠後)와 청도(淸道) 의장 이운용(李雲龍), 박철(朴澈), 박형(朴泂)과 울산(蔚山) 의장 윤홍명(尹弘鳴), 김흡(金洽)과 흥해(興海) 의장 안성절(安成節), 정인헌(鄭仁獻), 정삼외(鄭三畏)와 밀양(密陽) 의장 손기양(孫起陽), 김태허(金太虛), 손찬선(孫纘先)과 신영(新寧) 의장 김대관(金大寬), 권응심(權應心), 영천(永川) 의장 정세아(鄭世雅), 조준기(曺俊驥), 조이절(曺以節), 노기종(盧起宗)과 경주(慶州) 의장 김홍엽(金弘燁), 이눌(李訥), 김응택(金應澤), 권사악(權士諤), 최문병(崔文炳), 이용갑(李龍甲), 이계수(李繼秀), 김응하(金應河), 오열(吳悅), 장계현(張啓賢)이 각각 시(詩)를 지어 동맹(同盟)하였다. ○정유7월29일 군량(軍糧) 75곡(斛)을 모아 우산(牛山)의 큰 창고에 운반하여 비치(備置)하였다. ○9월초9일 방어사(防禦使) 곽재우가 모친상을 당하였다는 말을 듣고 면직물(綿織物)을 역졸(驛卒)을 시켜 부조(賻助)로 보내고 글을 써서 문상(問喪)하였다. ○23일 팔공산에 갔다. 이 때 적병이 돌산성(突山城)에 쳐들어와 이눌(李訥), 김홍엽(金弘燁)이 적의 탄환(彈丸)에 맞았다. ○27일 김응택(金應澤), 전일원(全一元)이 견천(堅川)에 이르러 좌우(左右)에서 협공(挾功)하니 적병이 흩어져 달아났다. ○12월11일 권응수(權應銖), 김응택, 김응하(金應河)와 더불어 당진(唐津)에서 크고 작은 수십여전(數十餘戰)에 적병이 흩어져 달아나고 우리 군사의 전사(戰死)한 사람도 70여인이고 견천(堅川)에 이르러 이응벽(李應壁), 이귀갑(李龜甲), 이대진(李大震)도 또한 부상(負傷)당하였다. ○21일 도산(島山)으로 돌아오니 이때 적세(賊勢)가 크게 성하여 높은 곳에서 포탄(砲彈)이 날아오자 군중(軍衆)이 모두 사기(士氣)를 잃었다. 김응택, 권응심, 변중일과 더불어 갑옷 입고 투구 쓰고 앞장서서 먼저 올라가 힘을 다하여 종일 싸우다가 화살이 다 떨어지고 어찌할 도리가 없어 적탄(賊彈)에 맞아 죽으니 큰 아들 응락(應洛)이 시신(屍身)을 거두어 사이 길을 따라 구송정(九松亭)의 오른쪽에 환장(還葬)하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