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문장공(휘 청)묘갈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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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문장공 휘 청 묘소 묘 표 석 |
自古忠義之士必才兼文武而後可以當大事昔唐之張睢陽博學疆記其責尹子奇一言見識甚高非後世諸儒所及矣畢竟守孤城抗强虜北首不屈而死豈非讀書之力有以助發其忠義之氣耶不佞每誦此而發歎矣今沈斯文誠之甫百里齎書替族子懿澤而告之曰吾祖碧節先生歿已三百餘年家藏書籍盡灰鬱攸惟有當日倡義日錄在粗爲千古微響願子一言之不佞屢辭而作而曰是錄也于先生直是一部丹靑矣何必多乎哉因序之曰公諱淸字千一姓沈氏靑松人號碧節以嘉靖甲寅二月二十三日生於府北道致洞幼倜儻多膽勇稍長博通經史深於性理書旁究天文曆數 宣廟壬午中進士丙戌丁先公憂易戚備至服闋搆亭水上手植九松于庭畔扁以碧節蓋寓歲寒之志書于亭壁曰慷慨殺身易從容就義難此其公素所蓄積也一日夜讀書亭上仰覘天象掩卷歎曰不出數年國有兵禍果於壬辰四月倭寇大入 鑾駕去豳公奮然曰此臣子報國之秋也決意勇赴時母夫人年高在堂公淚而拜稟曰忠孝固難兩全國事如此敢效一死母夫人泣許之卽具由告廟召二子謂曰應濂替我事老母應洛從我赴國難可也遂與趙東溪亨道其弟東道往赴于和江上誓死同盟作詩言志癸巳聞招諭使金先生誠一晉陽之訃愕然曰吾南無長城我輩尤當效死甲午與趙東溪俱登虎榜復還義營盡力調運體察使李公元翼以功聞除訓鍊將至朱砂山與賊춚戰大破之諸將喜曰倡義以來此捷最快沈訓鍊之智略賊酋當慴伏矣及論功皆曰今日之功金應澤沈淸二人爲首云丙申諸義將會于八公山公有詩曰有天讎忍戴爲國死無憂丁酉聞防禦使郭再祐丁母憂爲書弔唁而以國事憂歎之是年十二月二十一日赴島山賊陣冒刃力戰竟不旋踵而立殣於矢石嗚呼天曷故焉忠臣腔血竟膏於草野已乎長子應洛馬革收屍而返葬于九松亭右麓艮坐原公年僅四十四天於公若假之數年則國家湔讎何至多年耶公之上祖高麗文林郞諱洪孚生諱淵閤門祗侯生諱龍典理正郞靑華府院君生諱元符典理判書麗運訖隱杜門洞生諱天潤令同正生諱孝尙號石村寔公五代祖曾祖諱遜 顯陵叅奉號月軒祖諱弼倫副護軍考諱鶴齡以學行薦主簿號道谷妣淑人眞城李氏禦侮祥之女配淑夫人礪山宋氏禦侮億齡之女墓祔有二男長應洛次應濂俱訓導應洛二男鐸鎛應濂四男鑊僉知鐺察訪釳察訪欽鐸一男世佐鎛一男世佑鑊二男世文僉知世勳出鐺二男世章世明釳以世勳爲嗣欽一男世蕃餘不盡錄嗚呼公以詩禮子弟弓馬之非其役也防禦之非其責也特以義理之性出於秉彛忠憤之志激於良心不必以成敗利鈍期於心而鋤耰爲兵芋木揭旗朱砂之捷孔巖之馘遂爲一道保障之前矛視彼當日鳥竄之計肉食之謀豈不是堂堂也哉是宜銘銘曰
公死而魂返故山魂不死兮公死而名垂後世名不死兮視彼當死不死而名隨而泯者公其壽兮山千古兮石千古與天地而悠久兮
黃猪維夏上浣 11세조 수문장공 휘 청(淸) 묘갈명병서 예로부터 충성과 절의가 있는 선비는 반드시 재주에 문무를 겸한 뒤에야 큰 일을 감당할 수 있으니 옛날 당나라의 장순(張巡)은 널리 배우고 기억력이 좋았으며 춘추시대 제(齊) 나라의 자기(子奇)는 한 마디로 말해서 식견(識見)이 매우 높아 후세의 여러 선비가 따라올 수 없었다. 필경에는 외로운 성을 지키며 강한 오랑캐와 굽히지 않고 싸우다가 죽었으니 어찌 글을 읽는 힘이 그 충성과 절의의 기운을 냄을 도움이 아니리오 내가 늘 이것을 읽고 감탄(感歎)하였으니 지금 심사문(沈斯文:儒學者) 성지(誠之)가 책을 싸서 족자(族子:일가의 자손) 의택(懿澤)을 대신 보내어 말하기를 나의 조상 벽절(碧節)선생이 돌아 가신지 이미 삼백여년에 가장(家藏)되었던 서적이 모두 불에 타고 오직 남은 것은 그 때 창의일록(倡義日錄)만 있어서 대략이나마 천고(千古)의 희미한 명성(名聲)이 있으니 원컨대 자네가 한마디 비문을 써주게 하므로 내가 사양하다가 일어나서 말하기를 이 기록은 다만 선생의 일부 역사책이니 어찌 반드시 많으리오 하고 인하여 서술(敍述)하니 다음과 같다. 공의 휘는 청(淸)이요 자는 천일(千一)이며 성은 심씨요 청송인이고 호는 벽절(碧節)이다. 가정(嘉靖) 갑인년 2月 23日에 부북(府北) 도치동(道致洞)에서 낳으니 어려서부터 인물이 뛰어나서 남에게 눌려 지내지 않고 담력이 세고 용맹이 많더니 차차 장성하여서는 널리 경서와 사기에 통달하고 성리학을 깊이 탐구(探究)하고 그 외 천문역수(天文曆數)를 연구하였다. 선조 임오년에 진사시에 합격하였고 병술년에 아버지의 상을 당하여 슬픔을 다하였고 복을 벗고 나서 물위에 정자를 짓고 손수 아홉 그루의 소나무를 뜰 가에 심어 벽절(碧節)이라 이름하였으니 대개 겨울철에도 소나무는 변치 않는다는 뜻이다. 정자의 벽에 써 부치기를 한때의 분개로 죽는 것은 쉽고 자연스럽고 태연하게 의를 위하여 몸을 희생하는 것은 어렵다 하였으니 이것은 공이 본디 쌓은 포부이다. 하루는 정자 위에서 글을 읽으며 천체(天體)의 현상을 우러러보고는 책을 덮고 탄식하며 말하기를 몇 년 안에 나라에 병화(兵禍)가 있을 것이라 하더니 과연 임진년 4月에 왜구(倭寇)가 크게 쳐들어와 임금이 난리를 피하여 서울을 떠나서 가자 공이 분개하여 말하기를 이는 신자(臣子)로서 나라를 위하여 보답할 때라하며 결심하고 용감하게 전쟁에 나가려할 때 늙은 어머니가 집에 계신지라 공이 눈물을 흘리며 뵙고 말하기를 충효를 둘 다 온전하기는 어려우나 나라 일이 이와 같으니 감히 한번 죽어 나라에 보답하겠다하자 어머니가 울면서 허락하였다. 곧 사당에 고하고 두 아들을 불러 말하기를 응렴(應濂)은 나를 대신하여 늙은 어머니를 섬기고 응락(應洛)은 나를 따라 전쟁터에 가는 것이 좋겠다하고 드디어 조동계(趙東溪) 형도(亨道)와 그 아우 동도(東道)와 같이 화강상(和江上)에 가서 죽기로 동맹하고 시를 지어 뜻을 말하였으며 계사년에 초유사(招諭使) 김선생 성일(誠一)이 진주에서 전사하였다는 말을 듣고 깜짝 놀라며 말하기를 우리 나라의 남쪽에 중진(重鎭)이 될 사람이 없어 졌으니 우리들은 더욱 마땅히 죽을힘을 다하여야할 것이라 하였다. 갑오년에 조동계와 같이 무과에 급제하였고 다시 의병(義兵)의 진영(陣營)에 돌아와서 힘을 다하여 물자를 조달하고 운반하니 체찰사(體察使) 이공(李公) 원익(元翼)이 공을 알려 조정에서 훈련장(訓鍊將)에 임명하였고 주사산(朱砂山)에 이르러 적(賊)과 싸워서 대파(大破)하니 여러 장수들이 기뻐하여 말하기를 난리를 당하여 의병을 일으킨 이래로 이번 싸움에 이긴 것이 가장 통쾌하고 심훈련장의 지략(智略)으로 적의 괴수가 항복하게 되었다하였고 공을 논할 적에 모두 오늘의 공은 김응택(金應澤) 심청(沈淸) 두 사람의 공이 으뜸이라 하였다. 병신년에 모든 의병장이 팔공산(八公山)에 모였는데 공이 시를 지어 말하기를 유천수인대(有天讎忍戴) 위국사무우(爲國死無憂) 즉 같은 하늘아래 원수와 같이 있는 것을 참으니 나라를 위하여 죽어도 걱정이 없다라고 하였다. 정유년에 방어사(防禦使) 곽재우(郭再祐)가 어머니의 상을 당하였는데 서신으로 조문(弔問)하고 나라 일을 걱정하여 한탄하였다. 이 해 12月 21日에 도산(島山)에 가서 적진에서 칼을 무릅쓰고 힘써 싸우다가 마침내 돌아오지 못하고 전쟁에서 순절(殉節)하였다. 아아 하늘이 어떠한 연고로 충신을 초야(草野)에서 죽게 하였던가 맏아들 응락(應洛)이 말가죽으로 시체를 거두어 구송정(九松亭) 우록(右麓) 간좌원에 반장(返葬)하니 공의 나이 44세였다. 하늘이 만약 몇 년의 수를 더 주었더라면 나라에서 원수를 소탕(掃蕩)하는데 어찌 세월이 많이 걸렸으리오 공의 시조는 고려조의 문림랑 휘 홍부(洪孚)요, 휘 연(淵)을 낳으니 합문지후(閤門祗侯)요, 휘 용(龍)을 낳으니 전리정랑(典理正郞)이며 청화부원군이요, 휘 원부(元符)를 낳으니 전리판서가 되었고, 고려의 운이 다하자 두문동에 숨었고 휘 천윤(天潤)을 낳으니 영동정이요, 휘 효상(孝尙)을 낳으니 호가 석촌(石村)으로 이 분이 공의 五대조이고, 증조의 휘는 손(遜)이니 현릉(顯陵)참봉이요 호가 월헌(月軒)이며, 할아버지의 휘는 필륜(弼倫)이니 부호군이었고, 아버지의 휘는 학령(鶴齡)이니 학행으로써 주부(主簿)였고 호가 도곡(道谷)이다. 어머니는 숙인(淑人) 진성이씨(眞城李氏)로 어모장군 상(祥)의 따님이요 배위는 숙부인 여산송씨(礪山宋氏)로 어모장군 억령(億齡)의 따님이요 묘는 합부하였다. 두 아들을 두었으니 장남은 응락(應洛)이요 2男은 응렴(應濂)으로 모두 훈도(訓導)요 응락의 두 아들은 탁(鐸) 박(鎛)이요 응렴이 4남을 두었으니 확(鑊)은 첨지(僉知)요 당(鐺)은 찰방(察訪)이며 흘(釳)은 찰방이고 흠(欽)이요 탁의 1남은 세좌(世佐)요 박의 1남은 세우(世佑)며 확이 2남을 두었으니 세문(世文)은 첨지요 세훈(世勳)은 出系하였으며 당의 2남은 세장(世章) 세명(世明)이요 흘은 세훈으로써 양자를 삼았고 흠의 1남은 세번(世蕃)이며 나머지는 다 기록하지 않는다. 아아 공은 시례지문(詩禮之門)의 자제로써 무사(武士)가 그의 일이 아니며 방어(防禦)가 그의 책임이 아니나 특별히 의리의 성품으로써 인간의 떳떳한 도리를 지키는데 나가고 충성스러운 마음을 가지고 옳지 못한 일을 분개하는 뜻으로써 양심(良心)에 격동하여 반드시 이기고 지는 것과 날카롭고 둔한 것을 마음에 기대하지 않고 호미로 무기를 삼고 장대에 기를 걸어 주사산의 싸움에 이겼고 공암(孔岩)에서 적을 베어 드디어 한 도를 보장(保障)하는데 앞장서 힘쓰고 저들이 당일 조수(鳥獸)의 고기를 먹는 것을 보았으니 어찌 당당(堂堂)하지 아니 하였으리오 이는 마땅히 명(銘) 할만하니 명은 다음과 같다. 공이 죽어서 혼(魂)이 옛 산에 돌아왔으니 혼은 죽지 아니 하였도다. 공이 죽어서 이름은 후세에 전하였으니 이름은 죽지 아니 하였도다. 저 마땅히 죽어야 하는데 죽지 아니한 사람을 보니 이름이 따라서 없어진 자로다. 공은 그 이름이 남아 산이 천고에 푸르르고 비석이 천고에 빛나 천지와 더불어 유구(悠久)하리로다.
기해4월 상순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