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양군수공(휘 인겸)묘갈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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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양군수공 휘 인겸 묘소 묘 비 |
十一世祖
贈左承旨 行 溫陽郡守公 諱 仁謙 墓碣文
公諱仁謙字讓叔考諱鋼領敦寧靑陵府院君諡翼孝쯼完山府夫人李氏縣令薱女嘉靖癸巳六月公生戊午司馬甲子以翼孝公命始補蔭仕內職則活人暑別提南部禮賓寺軍器寺司醞署主簿司圃暑司圃再爲工刑曹佐郞掌隸院司評司議繕工監判官都摠府都事戶工刑三曹正郞漢城府判官庶尹外職則天安豊德溫陽三郡守也萬曆八年庚辰十一月十七日卒于溫陽之郡舍壽四十八公爲人坦易有量平生任眞物無競忤一時門闌燀爀貴盛未嘗有挾盈加人意藝業夙成敏述善隸發解屢高等其遊太學儕流愛慕亦未嘗以才名自有兩親旣喪年未及强遂不赴擧承顔之下無子弟之過兄弟和而樂朋友羣而信執喪有法奉先能禮善讓於財不屑營爲居官莅務不用苛細或橫譴落職受咎不白一時咸稱爲長者焉其卒 上命有司賻贈禮官吊祭 異數也後以孫靑雲君命世貴 贈左承旨夫人全州李氏刑曹佐郞拔女生于嘉靖辛卯卒于萬曆甲午八月十七日墓在通津瓮井里先塋 北兵使 李濟臣 撰 11세조 증좌승지 행 온양군수공 휘 인겸(仁謙) 묘갈문 公의 휘는 인겸(仁謙)이요, 字는 양숙(讓叔)이다. 아버지의 휘는 강(鋼)이니 영돈녕부사(領敦寧府事)에 청릉부원군(靑陵府院君)으로 시호(諡號)가 익효(翼孝)이시고 어머니는 완산부부인(完山府夫人) 이씨(李氏)로서 현령(縣令)인 대(薱)의 딸이다. 가정 계사(嘉靖癸巳:1533)년 6月 공이 태어나서 戊午(1558)년에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고, 甲子(1564)년에 익효공의 명령으로 처음 음사(蔭仕)로 보직을 받았으니 내직으로는 활인서 별제(活人署 別提), 남부 예빈시(南部禮賓寺), 군기시(軍器寺), 사온서 주부(司醞署主簿), 사포서 사포(司圃署 司圃) 다시 공조와 형조의 좌랑(佐郞), 장예원 사평(掌隸院司評), 사의(司議), 선공감 판관(繕工監判官), 도총부 도사(都摠部都事), 호조와 공조 형조의 3曹의 正郞 漢城府判官 서윤(庶尹) 등을 역임하고 외직으로는, 天安, 豊德, 溫陽 세 곳의 군수를 지냈는데 만력(萬曆) 8年인 庚辰(1580)년 11月 17日 온양의 군사(郡舍)에서 卒하니 나이 48歲였다. 공은 사람됨이 편안하고 도량이 넓어서 평생을 참되게 지내며 억지 쓰지 않으며 한때 집안이 환하게 빛나서 귀하고 성했으나 한차례도 부귀로써 남의 뜻을 억누르지 않았다. 공부가 일찍 숙성하여 저술에 능하고 예서(隸書)를 잘 써서 여러 차례 발표하여 등류에서 높혔으니 성균관에서 함께 공부하던 동배들이 애모하였으나 또한 재주가 있다고 자랑하지 않았다. 양친이 이미 세상을 뜨고 나이 아직 20歲가 못 되어 드디어 과거 보지 않았다. 어른들 앞에서는 자제들을 허물하지 않았고 형제간에는 화목하게 즐겼으며 붕우간에는 무리를 이루고 신의(信義)가 있었다. 상을 당하여서는 상례를 지켰으며 선조를 받드는 데 법도를 두었다. 재물은 양보를 잘하고 무리한 경영을 싫어했다. 관원으로서 임무를 수행할 때는 까다롭고 세밀하지 않았으며 혹 엉뚱한 견책으로 직위가 해제되어도 허물을 뒤집어쓰고 변명하지 않았으니 한때 모두들 장자라고 칭찬하였다. 공이 죽음에 상감께서 유사에게 명하여 관원을 예우하여 부조를 하고 제사에 조문케 했으니 특이한 대우였다. 뒤에 공의 손자인 청운군 명세(靑雲君命世)가 귀하게 됨으로써 좌승지(左承旨)의 증직을 받았다. 부인은 全州李氏이니 형조좌랑(刑曹佐郞) 발(拔)의 딸이다. 가정 신묘(嘉靖辛卯:1594)년 8月 17日에 죽었으며 묘는 통진 옹정리(通津瓮井里)의 선영에 있다. 북병사 이제신(北兵使 李濟臣)① 글 지음. 주(註) ① 이제신(李濟臣):1536(중종 31年)~1584(宣祖 17年) 字는 몽응(夢應), 호는 청강(淸江), 본관은 전의(全義). 병사 문성(文城)의 아들. 함경도 병마절도사 역임. 시호는 평간공(平簡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