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사공(휘 우준)묘갈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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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사공 휘 우준 묘소 묘 비 |
十一世祖
贈吏曹參判 進士公 諱 友俊 墓碣銘
始睟光年甫成童遇公於泮宮公時爲上舍生意勤勤不以隅坐視之旣睟光贅于公門公又特相親愛情款甚至固艶公爲厚德長者今其孤牧使君詻以所爲家狀索銘于睟光義不敢辭迺忟涕而叙之謹按公諱友俊字而擇考諱銓京畿觀察使 贈補祚功臣吏曹判書靑坡府院君啚妣貞夫人全義李氏縣監諱翰之女以嘉靖丁未九月初三日生公公才學夙成中甲子進士謂可立取上第而旣累試輒詘因厭棄擧子業萬曆己丑遇判書公憂毁戚幾不勝壬寅丁內艱守制如前喪不以年邁有異甲辰服除僅踰朔病遂谻以六月初六日告終于家春秋五十有八公天性篤孝其事親從少至老執子弟役不少懈與姉妹昆季極其友愛雖異居晝必相聚語笑以爲樂入夜乃罷日以爲常待人接物出於至誠聞人窘急則施與無所惜且有幹局善達事理凡所籌畵人莫能及職者咸許以國器而公素偃蹇自高與人寡又不肯謟屈爲規徇俗底意坐此拓落不偶於世吁亦命矣當壬辰之避地江都也公獨與宗人奉老母爲保守計人皆危之後竟得全始服其智及天兵勦倭進次松京公毅然曰古者簞食壺漿以迎王師義不容但已倡率同志辦酒食船載往勞軍前天將大嘉其義接伴宰臣具聞于 朝有賞職之命而終不屑就人益服其高致卽此而公之所存可知已先配竹山朴氏爲濟用監判官世炯女稟質溫順克有令聞庭無間言萬曆甲戌十一月初十日歿年僅三十葬果川別王村申坐原及公葬葬於其右後配宋氏爲學生球女乃恩津望族奕世冠冕之後也卓有懿行事君子無違持心公正處事惟義臨財絶意苟得治家恩威並行寡居二十年供奉祭祀誠敬備盡撫養諸孤慈訓亦嚴理所當爲則一身之勤勞家儲之有無略不顧計於宗族隣里間咸得歡心至天啓癸亥十月初八日歿壽止六十一翌年甲子十二月二十二日始窆于公墓之南盖以其間山運不齊姑曾權庴之故也銘曰日旣降材而不遇時無位與壽天實何爲歛福于躬惟後是貽善報非忒厥或相之一丘中坎公宅於斯式銘潛德尙永無隳
工曹判書 兼 弘文提學 李晬光 撰 11세조 증이조참판 진사공 휘 우준(友俊) 묘갈명 처음에 수광(晬光)의 나이 겨우 15세 때 성균관에서 공을 만났다. 당시 공께서는 상사(上舍)가 되셔서 의욕이 왕성하였으나 구석에 앉은 나를 무시하지 않았다. 그 뒤 수광이 공의 집안으로 장가들었는데 공이 또한 특별히 서로 친숙하게 하고 애정이 심히 정성스러웠으나 기도가 풍만한 후덕장자였다. 이제 그의 아들인 목사군 액(牧使君 詻)이 가장을 갖고 와서 수광에게 갈명을 지어 달라고 하니 의리로써 감히 사양하지 못하고 눈물을 문지르면서 서술한다. 삼가 살피건대 공의 휘는 우준(友俊), 字는 이택(而澤)인데 아버지의 휘는 전(銓)이니 경기도관찰사(京畿道觀察使)로서 증직으로 보조공신 이조판서(補祚功臣 吏曹判書)에 청파부원군(靑坡府院君)이 봉해졌으며 어머니인 정부인 전의이씨(全義李氏)는 현감 한(翰)의 딸이다. 가정정미(嘉靖丁未:1547)년 9월 3일에 공을 낳았으니 공은 재주와 학문이 일찍이 성취하여 甲子(1564)년에 進士가 되었으니 모두들 문과에 급제할 것이라 하였으나 여러 번의 과시에서 낙방하고 인해 과거업을 포기했다. 만력기축(萬曆己丑:1589)년에 판서공의 상을 당하여 몹시 슬프고 여의어 거의 감내하지 못하였고 3년 뒤인 壬寅(1602)년에 어머니의 상을 당하여 복제를 전상과 같이 하였으니 해가 지나서도 달리하지 않았다. 甲辰(1604)년에 복이 겨우 끝나고 한달을 넘기고서 병이 극심하여 그해 6월 6일 본가에서 마치니 나이 58세였다. 공은 천성이 돈독하고 효심으로 그 어버이를 섬김에 평생을 자식으로서의 역할을 다하여 조금도 해이하지 않았으며 자매와 형제들과 더불어 그 우애를 다하고 비록 각거 하더라도 낮으로 반드시 함께 모여 웃음소리로써 낙을 삼고 밤이 되어서야 흩어지니 항상 그와 같이 지냈었다. 사람을 대하거나 물건을 접했을 때는 지성으로 처리하고 남의 궁색하고 급박한 일에는 아낌없이 베풀어 주었고 또한 보살펴야 될 판국에는 사리에 잘 어울리도록 하여 모든 계획을 남들이 따를 수가 없으니 알만한 사람들은 모두들 국가적 인물이라 여겼으나 공은 평소 자존심으로 스스로 높혀 남들과 잘 어울리지 아니하고 굽히기를 싫어하며 빳빳하고 속되게 뜻을 낮추어 주저 앉아 불행하게 세상을 만나지 못했으니, 아! 이것 또한 운명이로다. 임진년의 강화도 피란 때는 공이 홀로 일가들과 더불어 노모를 받들어 보전하여 지키려하니 모두들 위태롭게 여겼으나 마침내 안전하였으니 비로소 그의 지혜에 감복하였다. 명나라 병사들이 왜군을 무찌르고 개성으로 나아갈 때 공이 꿋꿋하게 이르기를 옛 글에 도시락밥과 음료로써 왕의 군사를 맞이했다고 하나 의리로써는 용납할 수 없으되 다만 명병들이 이미 동지들을 인솔하였음으로 술과 음식을 장만하여 배에 실고 군영 앞에 나아가서 위로하니 중국 장수가 그의 의리를 크게 칭찬하였으니 접반하던 우리 관원들이 조정에 보고하여 포상으로 벼슬을 내리도록 명하였으나 마침내 즐겨 취임하지 아니하여 사람들은 더욱 그의 고상한 행동에 감복하였으며 이것으로도 공의 마음가짐을 알만할 따름이다. 전 부인은 竹山朴氏로서 제용감판관 세경(濟用監判官 世烱)의 딸인데 성품이 온순하여 능히 좋은 소문이 들렸고 집 안에 이간하는 말들이 없었다. 만력갑술(萬曆甲戌:1574)년 11월 10일에 죽었으니 나이 겨우 30세다. 과천별왕촌(果川別王村) 신좌의 언덕에 장사 지냈다가 공의 장사 때 그 오른편에 이장했고, 후부인 宋氏는 유학 구(球)의 딸이니 은진(恩津)의 좋은 집안으로 세상을 빛낸 벼슬아치의 후손이다. 아름다운 행실이 두드러졌으며 남편을 섬김에 어긋남이 없었고 마음가짐이 올바르고 의롭게 처사했으며 재물에는 욕심을 끊고 구차하게 집을 다스렸으나 은혜와 위엄을 함께 했다. 과부로서 20년을 살았으나 제사를 받드는데 성의와 공경을 다 갖추었고 여러 고아들을 잘 어루만져 주었으니 모훈이 또한 엄하였다. 사리에 합당하면 일신의 괴로움이나 가산의 유무를 돌보지 않고 진행하였으니 일가들과 이웃들의 환심이 지극하였다. 천계계해(天啓癸亥:1623)년 10월 8일에 마치니 수가 61세에 이르렀고 다음해 12월 22일 공의 묘소 남쪽에 장사 지냈으니 대개 그 사이 산 운이 맞지 않아 가장(假葬)을 했던 까닭이다. 명(銘)에 이르기를 『이미 인재를 내렸으되 때를 만나지 못했고, 직위는 없었으되 수를 주었으니 하늘은 진실로 어찌 함인고, 몸에서 복을 거두어 후손에게 주었으며 잘 보답하여 어긋나지 않았으니 그도 혹 도운 것이리. 한 언덕의 중간 혈(穴)이 공의 유택이로다. 쌓은 덕을 명에 새겨 길이길이 전하리.』
공조판서 겸 홍문제학 이수광 지음(工曹判書 兼 弘文提學 李晬光 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