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주목사공(휘 우정)묘지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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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주목사공 휘 우정 묘소(앞 산소) 신도비 |
十一世祖
贈吏曹判書 行 驪州牧使公 諱 友正 墓誌銘
丁酉秋余公退在第天方雨夜無人闑然也聞叩門起視則沈君元擇沾濕涉內霤近揖而迓之君笑曰非敢干私就與之訣耳吾病侵尋不幸有廣州之命其無乃運之窮歟今不得與平生人訣卽溘然長辭恐抱恨泉壞至夜分愍然而歸余因而忽忽不樂者累日己亥朝京辨誣幹事而回公則逝矣其明年余廻自南藩渡江漬綿尋問所謂沈君墓者雖草己宿念及疇昔猶越禮而哭之後七年其孤誢諿以家狀來速銘余曰噫公之行其可以一二擧耶余揂記甲午年間寇退國虛廟議無所依簿可以鞏基而鎭民者則乃議收集江華爲保障不虞而難其人有公卿言謂公亮采綜理以左通禮增秩爲本府使時漢京迷民陷賊染惡逋流入海滛用非彛鴟義煽動雖惟良老手視江民亂澠莫肯叱馭公白面到官乃式典集明以莅政慈以撫民民畢棄咎遂節性納軌所以忱裕之于一島者純如也知民可用乃令曰朝廷遣我匪惟安民維以保民寇來無城民將焉保且有 上命盍築海堧遂令役於民民咸奔走徒庸事期不愆于素而績用克成民忘其勞事聞 上特賜表裏以寵之初至大夫人病力民有祈天乞代者考滿民又借寇居數月病辭民皆遮道哭留之不可則立石紀德後聞公有大夫人喪乃與公嘗所遺惠廣州之人出米助哀嗚呼非其德之入人深能若是乎今按家狀沈爲靑松望族高麗時有諱龍爲門下侍中至諱德符爲靑城伯入我朝爲左政丞生溫溫生澮聯三世秉政澮生湲湲生諱順門議政府舍人燕山時以忠及禍後贈領議政生諱達源通禮院左通禮贈吏曹參判生諱鎡繕工監僉正贈議政府左贊成娶郡守具思謙女以嘉靖丙午生公諱友正元擇其字也公禀氣淸弱少多疾病年十七始讀書丙子成進士戊寅丁內艱廬墓三年癸未捷魁科以典籍遷刑曹佐郞詰姦刑亂訖威與富獄成而孚人服神明至刷還北民尤穎脫有聲自是出入持平正言戶禮刑工四曹員外郞中全羅都事海運判官所至職擧己丑以漢城庶尹忤當塗出補宣川郡惠于民病免家居壬辰之亂都元帥金命元辟爲從事出陣漢江軍潰公叩馬泣曰今主上西幸願守臨津以捍其後及臨津亦潰公方在上游間行以西聞王世子撫軍伊川便道上謁授侍講院弼善巡按海西俄有朝旨使募兵江原道中飛語罷癸巳漢京賊退民多阻飢公以賑恤郞哺喣多所活歷軍器寺正坡州牧使司諫獻納丁酉廷議欲大治廣州山城以公嘗治江華有聲績薦爲廣州時天朝大軍絡繹二南廣當南路走集之衝民賴惠化不知有兵戊戌天兵在嶺南糧匱以公名才能臣改授調度之任秋以母病奔歸及喪深墨逾禮因以成疾己亥春易쾝江廣民賻之如大夫人喪設奠會哭春秋五十四是年閏四月十八日葬于衿川北面公歿後六年上策扈聖宣武等勳且以子諿亦參宣武原從累贈至吏曹判書公少時贊成公寢疾輒嘗藥以進嘗糞以驗贊成撫之異諸兒擇膏田及良臧獲以畀之及贊成沒公盡歸之伯仲一無所與念大夫人寡久家事益旁落佐治産業經紀微密朝夕滑甘四時寒燠及左右婢侍大小百須皆由公出伯仲之亡撫其遺孤恩若己出僕隸違慢未嘗見聲氣子弟收科不見有喜色因亂歷試號爲才臣屢處之劇地勞勤致疾遂成消渴有言其母自若者公曰平生遇事未嘗放過況當時危敢自愛耶自持益動一不易公娶牧使安汝敬女生三男長譓先歿次誢諿卽乞銘者與余善譓娶都事韓浣女生二女士人鄭遵尹碩亨其婿也誢蔭仕至司饔院直長娶牧使宋寧女生二女長曰洪憲次未歸諿及第官爲竹山府使娶直提學洪宗祿女生一男幼銘曰 世或進文章而 退政事視 利民澤物 爲塵俗 較是二者長短 儒欲致用者 何學不空言而 允蹈 惟公所以高躅 若將有以大施也 吁止是而中踣 崇祿大夫 左 議 政 李恒福 撰 通訓大夫 長城縣監 李 潚 書 崇政大夫 知中樞府事 盧 稷 篆 萬曆四十一年 月 日立 11세조 증이조판서 행여주목사공 휘 우정(友正) 묘지명 丁酉(1597)년 가을에 내가 공무를 마치고 집에 돌아와 있었는데 마침 비가 내리고 사람 하나 없이 고요한데 누군가가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 일어나 보니 심원택(沈元擇)이 젖은 옷을 걷어들고 처마 밑으로 가까이 와서 읍을 하여 맞이하였더니 군이 웃으면서 말하였다. 『오늘날 사사로이 찾아와서 이별 인사를 하지 않으면 내가 병에 걸렸는데 오래지않아 불행하게 廣州로 명령을 받았으니 운이 궁하게 되지 않았습니까? 오늘날 평생 사귀던 분과 말 한마디 못하고 곧 갑자기 영구히 떠난다면 아마도 황천길에 한이 될 것입니다.』 그러고는 밤늦게 쓸쓸하게 돌아갔었다. 나는 이로 인해 홀홀히 여러 날을 기분이 언짢았는데 2년 뒤 己亥(1599)년에 조정에서 무고사건을 주간하여 다루고 돌아오니 공이 서거(逝去)하였다. 그 이듬해 내가 남쪽지방으로부터 돌아올 때 지면(漬綿)에서 강을 건너고 곧바로 심군의 묘소를 방문하였다. 비록 잔디가 잠잤으나 옛 생각이 어젯일 같았으며 禮를 넘어서 일곡(一哭)을 하였는데 그로부터 七년뒤에 공의 아들 현과 즙이 가장(家狀)을 들고와서 나에게 명(銘)을 청하였다. 슬프다. 공의 행적을 어찌 한 두가지로써 찬양하랴만은 내 오히려 甲午(1594)년 사이의 일을 기억하나니 왜구가 물러갔으나 나라가 폐허가 되었으니 조정의 의논이 박약하게 서두르지 말고 기틀을 공고히 하고 백성을 진안시키려면 강화도에 성과 진터를 쌓아야 한다는 의논이 있었으나 능력있는 사람이 알맞지 않아서 공경 대신들이 공을 천거하여 튼튼하고 종합적으로 처리할 수 있도록 말하여 左通禮라는 벼슬을 더해서 江華府使를 삼았다. 당시 서울의 난민들이 적에게 짓밟히고 지쳐서 강화도로 흘러들어 방탕하기 짝이 없고 되지 못하게 선동하니 비록 어질고 노련한 관리들이 백성들의 어려움을 보살펴도 시키는대로 즐겨 따르지 않을 터인데 공은 나이 젊고 겸험이 부족한 사람으로서 책임자가 되어 이에 모범적이고 떳떳하게 하며 정사를 명료하게 하고 자애롭게 백성을 어루만지니 모두들 트집을 잊고 원망하지 않았다. 드디어 성정을 절제하고 본보기를 삼았으니 이 지역에 정성을 쏟아부음이 순박한 까닭이었다. 백성들에게 쓰일 만함을 알고 이에 명령을 내려 말하였다. 『조정에서 나를 보낸 것은 오직 백성을 편안하게만 함이 아니라 백성들을 보전하고자 함이다. 도적들이 침입해도 지킬 성이 없으니 장차 어찌 지탱하리오.』 또한 왕명으로 해변을 축조하라는 명이 내렸다 하고 드디어 도민들을 설득시키니 백성들이 다들 나와서 떳떳이 일을 맡아서 평소와 다름없이 공적을 이루었으나 백성들은 그 수고로움을 잊었다. 이런 소문이 나니 임금께서 특별히 옷 한벌을 하사하시고 사랑하셨다. 처음으로 어머니께서 병이 나셨는데 공을 위해 힘쓰는 백성 중에 자기가 대신하여 병을 앓게 해달라고 하늘에 비는 자도 있었다. 공이 임기를 마치니 백성들이 유임(留任)을 간청하여 만류하였고 병으로 사퇴하니 사람들이 길을 가로막고 울면서 머무르라고 하였다. 끝내 비석을 세워 공의 덕행을 기록했고 뒷날 공이 어머니의 상을 당했다는 소문을 듣고 장지에 찾아와서 공께서 은혜를 끼쳐 참여했다 하니 廣州사람들이 모두 나와서 슬픔을 도왔다. 아, 그의 덕행이 사람들에게 깊이 스며들지 않았으면 능히 이와 같았을 것이냐. 이제 와서 공의 가장을 살펴보니 심씨는 청송의 명망 있는 집안으로 고려때 이름 龍이라는 분이 있어서 門下侍中이었고 이름 德符에 이르러서는 靑城伯이었는데 조선조에 들어와서 좌정승이 되었다. 이 분이 溫을 낳고 溫이 澮를 낳으니 연 3代가 정승을 지냈다. 澮가 湲을 낳고 湲이 이름 順門을 낳으니 의정부의 舍人으로 연산군 때 충절로써 화를 입었는데 뒤에 증직으로 영의정이 되었다. 이 분이 達源을 낳았으니 通禮院의 좌통례로서 이조참판의 증직을 받았으며 이름 자(鎡)를 낳으니 이 분이 공의 아버지로서 선공감의 첨정(繕工監 僉正)인데 증직이 의정부 좌찬성(議政府 左贊成)이다. 군수인 구사겸(具思謙)의 딸에게 장가들어 丙午(1546)년에 공을 낳으니 이름이 友正이고 元擇은 그의 字이다. 공은 기품이 맑고 허약하여 어릴 때부터 질병이 많았는데 17세가 되어 글을 읽고 丙子(1576)년에 進士가 되었다. 2년 뒤인 戊寅(1578)년에 모친상을 당하여 三년상을 입었고 癸未(1583)년에 괴과(魁科)①을 하여 전적(典籍)으로서 형조좌랑(刑曹佐郞)이 되고 간신들을 다스려 형난(刑亂)이 끝나자 위엄이 서고 옥사를 성공시켜 사람들을 믿게 하고 神明이 도와 유랑하는 北民들을 귀환시켜 더욱 훌륭하게 빼어났다고 소문이 드날렸다. 이로부터 持平과 正言 그리고 호, 예, 형, 공조(戶, 禮, 刑, 工曹)의 員外와 낭중(郞中)으로 들고 나왔으며 전라도 都事와 海運判官을 차례대로 거쳤다. 己丑(1589)년에 漢城庶尹으로 있을때 상관에게 거슬려서 宣川郡守로 좌천되었으나 군민에게 선정을 베풀었으며 병으로 사임하고 집에서 쉬었다. 임진왜란 때 도원수 金命元의 종사관이 되어 한강으로 출진하였으나 우리 군대가 궤멸하니 공이 말을 채칙질하며 말하니 『지금 임금께서 평양으로 행차하셨으니 임진강을 지키는 것이 나의 소원이오.』 공은 곧 뒤를 막았으나 이어 임진강 역시 무너지고 말았으니 이 때 공이 江 상류로부터 평양 쪽으로 가려다가 왕세자께서 伊川에서 군대를 독려한다는 말을 듣고 찾아가 도중에서 뵙고 시강원 필선(侍講院 弼善)을 받고 평양 쪽으로 이동하다가 조정으로부터 강원도로 가서 모병하라는 명을 받고 활약하였으나 남의 모략으로 그만두게 되었다. 癸巳(1593)년에 서울에서 적이 물러갔으나 백성들이 헐벗고 굶주려서 공이 진휼랑(賑恤郞)이 되어 고루 먹이고 돌봐서 많이 구제하였다. 이어 軍器寺의 正을 거쳐 坡州牧使와 사간원 헌납(司諫院 獻納)을 지냈다. 丁酉(1597)년에 조정의 공의가 광주산성을 크게 수축하기로 결정했는데 공이 전일 강화도에서 공적을 세웠다고 하여 천거로써 광주목사가 되었다. 당시 명나라 대군이 양남(兩南)②에서 줄을 잇고 있으니 광주는 남북으로 통하는 교통과 집결의 요충지였으나 백성들은 교화와 은혜에 힘입어 군병이 있음을 알지 못하였다. 이듬해 명군이 영남에 있었는데 군량이 떨어져서 공이 能臣으로 재주가 인정되어 조달의 임무를 맡게 되었다. 가을에 모친의 병이 위급하여 집으로 돌아갔으나 바로 상을 당하고 지나친 집상(執喪)③ 때문에 피로하여 이로써 병이 되어서 己亥(1599)년 봄에 사망했는데 강화도와 광주 백성들이 모친상 때와 같이 많은 부조를 하고 제삿상을 차려놓고 모여서 곡읍(哭泣)했으니 공의 나이 54세였고 이해 윤 4月 18日 衿川 北面에 장사 지냈다. 공이 죽은 뒤 6年만에 호성, 선무공신(扈聖, 宣武功臣)등 훈공이 책봉되고 공의 아들 즙(諿) 역시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에 참여되었고 공은 여러번 증직을 받고 吏曹判書가 되었다. 어릴 적에 아버지인 贊成公이 누워 앓고 있었는데 늘 약을 다려주고 분뇨(糞尿)로써 차도를 시험하니 찬성공이 어루만지면서 다른 애들보다 특이하다 하고 기름진 전답과 쓸만한 노비를 가려서 다 주었으나 찬성공이 죽은뒤에 모두 되돌려 주었고 맏형과 둘째 형은 이를 받지 아니했다. 어머니가 오래도록 홀로 계시는 것을 염려하여 가사일을 더욱 넉넉하게 하고 살림살이를 세밀한데까지 보살피고 도왔으며 아침 저녁으로 맛있는 음식으로 봉양하고 사철에 덥고 추운것을 조절하였으니 좌우 시종으로부터 크고 작은 일들이 모두 공으로 인해 이루어졌다. 백, 중씨들이 죽으니 그의 유자녀들을 본인 자식같이 돌보고 노비들이 실수를 하여도 언성을 높이는 것을 한 번도 보지 못하였다. 자제들이 등과를 해도 지나치게 기뻐하지 않고 어지러운 일들을 잘 치러내니 재능이 있다고들 하였다. 여러번 모진 처지를 당해서 지치고 병이 되어 마침내 소갈증(消渴症)에 걸리니 어머니께서는 고생을 자초한다고 말하나 공이 대답하였다. 『평생토록 감당해야 할 일을 한 번도 방과하지 않았는데 하물며 급한 일을 당하여 어찌 내몸만 아끼리오.』 공은 스스로 더욱 부지런히 하고 한 번도 그 뜻이 바뀌지 않았다. 공이 목사 안여경(安汝敬)의 딸에게 장가들어 세 아들을 낳으니 맏아들이 혜(譓)인데 먼저 죽고 둘째 아들이 현(誢), 셋째 아들이 즙(諿)인데 곧 나에게 명(銘)을 빌러온 사람들이고 평소 나와 잘 지냈다. 맏아들 혜가 都事 韓浣의 딸에게 장가들어 딸 둘을 낳았으니 선비인 정준(鄭遵)과 윤석형(尹碩亨)이 그의 사위들이다. 둘째 아들 현(誢)이 蔭仕④로 直長이 되었는데 목사 宋寧의 딸에게 장가들어 두 딸을 낳았으며 맏사위는 洪憲이고 둘째 딸은 미혼이다. 즙(諿)이 급제하여 竹山府使가 되었는데 直提學 洪宗祿의 딸에게 장가들어 아들 하나를 두었으나 아직 어리다. 명에 이르되, 세상에는 혹 문장에는 나아가고 정사에는 물러서며 이로움을 보면 백성에게 돌리고 물욕은 초개(草芥)⑤같이 여기니 이 두 가지의 장단을 비교할 때 선비라면 어느쪽을 택하겠는가. 배워서 헛되지 않게 실행했으니 오직 공의 높은 자취로다. 만약 크게 베푸는 것으로써 주장한다면 여기에 그쳐 나아가지 못함을 탄식하네. 주(註) ① 괴과(魁科):문과에 장원함. ② 양남(兩南):영남과 호남. ③ 집상(執喪):상례를 수행함. ④ 음사(蔭仕):과거를 치르지 않고 추천으로 받은 벼슬 ⑤ 초개(草芥):풀과 지푸라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