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문원정자공(휘 건)묘표문

 

승문원정자공 휘 건 묘소
소재지: 고양시 덕양구 원흥동 원흥리

묘 표 석


정자공 휘 건 배위 광주이씨 표석


沈重啓旣卒且葬友人佐郞李重慶虬語所與俱學從父兄弟敎官鎭主簿鎡修撰銓曰窀穸之事 有家公寡妻孤兒之生涯在諸父昆弟生旣不得展其志歿又無徵於後嗣則豈非吾黨之罪乎遂與平素交遊十數人買石而識之重啓諱鍵靑松人世爲東韓名族入本朝三世爲公者曰德符曰溫曰澮其功業在國史可攷也厥後贈贊成湲贈領議政順門宗簿正逢源是君三代也宗正公娶正郞金顯祖之女以正德己卯生君君自幼穎悟絶倫父友晦齋尹宗伯漑奇愛之敎于家塾視之如子旣長贅于李君延慶家君內有賢父兄外有明師所與皆一時聞人學行之成日大以肆師友淵源盖可想也癸卯中進士戊申登第選入承文院爲正字卽有登瀛之薦以親嬚未果拜歲庚戌出使湖西得寒疾四月初四日卒于公州之官舍是月戊午來殯于京越翌月庚寅永窆于高陽郡木稀里壬坐丙向之原從舅氏阡也噫雙親在堂孤纔三歲又有遺復而尙未彌月斯人之痛曷有其極嗚呼重啓生而鄕黨宗族無不愛沒而朋友哭之無不失聲出涕者嗚呼重啓何以得此於人也善與人交告之有過則喜克伐怨欲不行焉者吾重啓其殆庶乎言語戱謔外似駁雜而中則捐介有守其於名利泊然也人有過面折不能容而退無後言怨亦用是希焉有不平之事對人輒言無所疑避人或危之乃言曰毁譽在彼吾何關心乎哉一家之內秉鈞列臺閣者盖若干人而常以盈滿自戒未嘗一日安於心容儀俊秀眉目踈明貌如其心人望之儼然咸以遠大期之不幸夭沒莫不嗟惜嗚呼斯人不可得以見之矣將求於名公才子以圖不朽則有未暇焉友人光山金繼輝窃述梗槩以標其墓且備後裔之觀云

司憲府大司憲 金繼輝 撰 號黃崗 光山人
弘文館副修撰 從弟 銓 書


10세조 증영의정 행승문원정자공 휘 건(鍵) 묘표문
심중계(沈重啓)가 작고하여 장사를 지냈는데 좌랑벼슬하는 친구 이중경이 어릴 때부터 함께 공부하던 종형제인 교관 진(鎭)과 주부 자(鎡)와 수찬 전(銓)께 말씀드렸다.
『분묘의 일은 귀택의 일이나 중계의 홀로 된 아내와 외로운 자식의 생활이 삼촌과 사촌들에게 달렸고 살아서는 이미 그 뜻을 펴지 못했으며 죽은 뒤에도 자식에게 아무 표징이 없으면 이 어찌 우리들의 죄책이 아니겠는가 하고』
드디어 평소 함께 사귀던 십여 명이 돌을 사서 기록을 했다.
공의 자는 중계요, 이름은 건(鍵)이니 靑松人이다. 대대로 이 나라의 명족이었으니 조선조에 들어와서는 삼대가 정승의 벼슬에 있었으니 덕부(德符)와 온(溫)과 회(澮)였으며 그 훈업이 국사에 실려 가히 참고가 된다. 그 뒤 증찬성(贈贊成)① 원(湲)과 증영의정 순문(順門)과 종부정(宗簿正)② 봉원(逢源)은 공의 증조부·조부·아버지 삼대이다.
아버지 종부정께서 정랑 김현조(金顯祖)의 딸에게 장가들어 己卯(1519)년에 건(鍵)을 낳으니 어릴 적부터 슬기롭고 남달리 뛰어나서 아버지의 친구인 회재(晦齋) 윤종백(尹宗伯) 개(漑)께서 기특하게 사랑하여 자기 서당에서 가리키며 자식같이 여기고 다 자라서 이연경(李延慶)의 딸에게 장가들어 안으로는 어진 부형이 있고 밖으로는 밝은 스승이 있으니 함께 하는 이가 모두 당시의 이름난 사람들이었고 학행이 날로 성취(成就)된 것은 스승과 벗의 근원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癸卯(1543)년에 진사시에 합격하고 戊申(1548)년에 문과 급제하여 승문원(承文院)③에 들어가 정자(正字)가 되었으며 곧 제주목사에 천거되었으나 친족의 혐의로 보류되었고 庚戌(1550)년에 호서지방에 나갔다가 감기에 걸려 4月4日 공주관사에서 작고했다. 이달 戊午일에 빈소를 서울로 옮기고 다음달 庚寅일에 고양군 목희리 임좌병향의 언덕에 장사 지내니 장인의 묘역 근처이다.
슬프다. 양친이 살아 계시고 외로운 아들이 겨우 세 살이며 또한 유복자가 아직 열 달이 못되니 이 사람이 원통함이 어찌 극심하지 않으랴. 아아 중계는 살아서 향당과 종족에게 사랑 받지 않음이 없고 죽어서 친구들이 울어서 목 메이고 눈물 흘리지 않은 이 없었는데 어찌 사람에게 이런 일이 있을까 남들과 잘 사귀고 누가 허물을 일러준즉 기뻐하되 원한을 갖지 않았으니 우리 중계가 그러한 사람이었다. 언어가 희롱하듯 밖으로는 되는 대로인 듯하나 안으로는 굳굳하게 지킴이 있으며 名利에는 욕심이 없었다. 사람들이 잘못하면 곧바로 타이르고 용서하지 않으며 뒷말은 전혀 없으니 원한도 받지 않았다. 혹 불편한 일이 있으면 대하여 말로하고 의심쩍은 일을 피하는 적은 없다. 남이 혹 험담을 하면 이렇게 말하였다.
『험담과 칭찬은 저에게 있으니 내게 무슨 관심입니까.』
한 집안 내에서 균축(鈞軸)④을 잡고 대각(臺閣)⑤에 참여하는 이 몇몇 분이 되나, 항상 가득차는 것을 스스로 경계하고 하루도 안심하는 날이 없었다. 몸매는 훤칠하고 얼굴은 소명하여 안색이 그 마음과 같으니 사람들이 바라보고 공경하여 모두들 원대한 희망을 기대했는데 불행하게 일찍이 죽으니 몹시 아까워하지 않은 이 없더라. 슬프다. 이 사람을 다시 보지 못하니 장차 덕망과 재능이 있는 이에게 부탁하여 불후의 글을 도모함에 이대로 둘 수 없이 친구인 광산 김계휘(金繼輝)가 간단히 묘표(墓表)⑥를 지어서 후손들이 보도록 대비하였다.

사헌부대사헌 김계휘 지음(호는 황강 광산사람)
홍문관 부수찬 종제 전(銓) 씀.


주(註)
① 증찬성(贈贊成):조선 때 의정부의 종1품 관직 좌우찬성이 있었고 여기에 증(贈)이란 행직이 아니고 죽은 뒤에 내린 벼슬을 이름.
② 종부정(宗簿正):종부시(宗簿寺)의 정(正)이란 뜻. 왕실의 계보와 친인척에 관한 일을 맡은 관아의 책임자.
③ 승문원(承文院):조선 때 외교문서를 맡아보던 관청.
④ 균축(鈞軸):시축 또는 문장을 전형하는 것. 지금의 고시 관리와 같은 것.
⑤ 대각(臺閣):지금의 내각이니 당시의 사헌부, 사간원 등.
⑥ 묘표(墓表):표석에 죽은 이의 신상관계를 기록하여 묘 옆에 세우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