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장공(휘 대)신도비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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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장공 휘 대 묘소 묘표석 |
贈忠勤貞亮効節協策扈聖功臣大匡輔國崇祿大夫議政府領議政兼領經筵弘文藝文春秋館觀象監事靑原府院君諡忠壯行嘉善大夫京畿觀察使沈公神道碑銘幷序
공자왈지사(孔子曰志士)는 불망재구학(不忘在溝壑)하고 용사(勇士)는 불망상기원(不忘喪其元)이라 하셨다. 즉 지사(志士)는 개천구렁에 버려져있고 용사(勇士)는 그 머리 없어짐을 잊지 않는 뜻이니 公이 바로 그런 분이다. 公의 諱는 岱요 字는 公望이요 서돈(西墩)은 그 號요 청송심씨(靑松沈氏)이다. 麗朝에 왜적(倭賊)을 토벌(討伐)하신 청성백(靑城伯) 諱 덕부(德符)의 6世孫이요 朝鮮에 청천부원군안효공(靑川府院君安孝公)의 五世孫이며 고휘(考諱) 의검(義儉)은 經歷으로 영의정청송부원군(領議政靑松府院君)을 특증(特贈)하고 妣는 증정경부인(贈貞敬夫人) 고령신씨(高靈申氏)로 찬성광한(贊成光漢)의 따님으로 明宗元年(西紀1546年)丙午에 公을 낳았다. 公이 자소호의(自少好義)하여 20에 설죽가(雪竹歌)로 그 지조(志操)를 말하였고 壬申에 文科에 合格하여 三司를 거쳐 사인검상(舍人檢詳)을 역임(歷任)하되 옥당(玉堂)에서 경서(經書)를 교정국해(校正國解)하였다. 宣祖25年(西紀1592年)壬辰에 왜적(倭賊)이 불우침범(不虞侵犯)하여 도성(都城)을 육박(肉薄)하자 선조대왕(宣祖大王)께서 파천(播遷)하실제 公이 시강원보덕(侍講院輔德)으로 단기호종(單騎扈從)하여 송도(松都)에 至해서 양호근왕(兩湖勤王)의 兵을 자청왕유(自請往諭)하여 내위(來衛)케 하고 평양(平壤)에 복명호종(復命扈從)하여 용만(龍灣)에 至하였을 때 경기감사(京畿監司) 권징(權徵)이 공성망명(空城亡命)함으로 중의(衆議)를 따라 公이 제수(除授)되었다. 부임도중안주(赴任途中安州)에서 서애유상공(西厓柳相公)에게 장사장성인(壯士張姓人)을 분여(分與)받아 오다가 모병수천(募兵數千)하여 연천징파(漣川澄波)나루에서 賊을 만나 격파(擊破)하였으나 철원잔적(鐵原殘賊)이 배후(背後)를 기습(奇襲)하는고로 삭영(朔寧)에 이둔(移屯)하여 의산방어(依山防禦)하며 모병(募兵)을 증강(增强)하고 관하수령윤경원(管下守令尹敬元) 강수남(姜壽男) 양지 삼의사(梁誌 三義士)를 종사관(從事官)으로 계청(啓請)하는 同時 강화의병장(江華義兵將) 우성부(禹性傅)의 강화공수책(江華共守策)을 불응(不應)하고 강삭지각지세(江朔持角之勢)로 경성수복(京城收復)을 계획(計劃)하면서 열읍민인(列邑民人)을 초유(招諭)하니 충의(忠義)에 감복(感服)되어 많이 응모(應募)하여 군세대진(軍勢大振)하니 도성주민(都城住民)도 믿고 적정(賊情)을 내보(來報)하는者 많아 정일내응(定日內應)하여 대거소탕(大擧掃蕩)을 약속(約束)하고 연일적노(連日積勞)로 숙환(宿患)이 복발(復發)되어 신고중(辛苦中) 적첩(賊牒)인 성여해(成汝諧)가 인적야습(引賊夜襲)해오매 진중(陳中)이 궤난(潰亂)된지라 대수(大樹)를 배좌(背坐)하여 차아사소(此我死所)라하고 역전고투(力戰苦鬪) 끝에 시진기진(矢盡氣盡)하여 47의 壯年으로 장열(壯烈)한 순절(殉節)을 하시니 때는 壬辰10月18日이다. 嗚呼라 이 아니 불망재구학(不忘在溝壑) 불망상기원(不忘喪其元)인가 장성인종사관삼인(張姓人從事官三人)도 동순(同殉)하였다. 公의 질대관(姪大觀)이 수시(收尸)하여 삭녕(朔寧)뒷山밭에 평가장(平假葬)하여 적해(賊害)를 방지(防止)하였더니 결국적(結局賊)이 도굴취수(盜掘取首)하여 종로(鍾路)거리에 달아놓은지 60일 동안 面色이 매적당시(罵賊當時)와 同一함으로 都人이 그 충의(忠義)를 못내 애도(哀悼)하고 賊도 탄복(嘆復)하였다 한다. 양주목사(楊州牧使) 고언백(高彦伯)이 그 首를 계취(計取)하여 강화(江華)로 함송(函送)되었다가 난정후(亂定後) 尸身과 더불어 남양(南陽)에 천장(遷葬)하였다. 大王께서 흉보(凶報)를 들으시고 크게 슬퍼하시며 이조판서(吏曹判書)를 贈하고 예장(禮葬)과 치제(致祭)를 명사(命賜)하셨다. 癸巳에 천도후 유족(遷都後 遺族)에게 미포(米布)를 월급(月給)하여 제종삼년(祭終三年)케하니 配는 정경부인전주최씨(貞敬夫人全州崔氏)요 우윤홍한(右尹弘僩)의 따님이다. 五男에 장대복(長大復)은 공음(公蔭)으로 九郡邑을 역전(歷典)하고 계자(階資)는 가선(嘉善)이요 청녕군(靑寧君)에 습봉(襲封)되고 차대임(次大臨)은 금오랑(金吾郞)으로 증승지(贈承旨)하고 次大頤 大濟는 모두 無后하고 次大孚는 文科로 사간(司諫) 응교(應敎) 사인(舍人)을 歷任하고 1女는 군수최행(郡守崔行)에게 출가(出嫁)했다. 甲辰에 公을 호성공신이등녹훈(扈聖功臣二等錄勳)과 증좌찬성청원군(贈左贊成靑原君)하고 庚戌에 선무공신일등녹훈(宣武功臣一等錄勳)과 영의정청원부원군(領議政靑原府院君)을 가증(加贈)하고 英祖46年 庚寅에 증시충장(贈諡忠壯)하니 임환불망국왈충(臨患不忘國曰忠)이요 사우원야왈 장(死于原野曰 壯)이라는 뜻이다. 용인군남사면완장리해좌원(龍仁郡南四面完庄里亥坐原)에 천장(遷葬)함과 同時 山下에 정여(旌閭)를 명수(命竪)하여 여하(閭下)에 사우(祠宇)를 봉건(奉建)하고 삭영민인(朔寧民人)이 애모불기(哀慕不己)하여 순절처(殉節處)에 모옥(茅屋)을 건립(建立)하고 세절(歲節)에 享祀하다가 正宗15年 辛亥5月에 王命으로 철모건사(撤茅建祠)하고 표절(表節)이라 사액(賜額)하시며 상공채제공(相公蔡濟恭)이 축문(祝文)을 봉교제(奉敎製)하되 曰 쌍수재피(双樹在彼)에 성일혁혁(星日赫赫)하니 충의여쟁(忠義輿爭)이로다. 의공지특(義公之特)하여 모옥이제(茅屋以祭)하되 팽임순속(烹飪循俗)하니 시기보공(是豈報公)이리요 성상왈(聖上曰) 咨라 건사익익(建祠翼翼)하고 혈이식지(血以食之)하니 질풍가정(叱風駕霆)하고 방불격사(髣髴格思)하리 환환장좌(桓桓將佐)가 열시여석(列侍如昔)이로다. 생폐시장(牲幣是將)하니 감아성의(鑑我誠懿)라하여 향사(享祀)해온지 수백성상(數百星霜)을 經過하는동안 삭영(朔寧)은 금재북지(今在北地)라 하회미상(下回未詳)하고 용인사우(龍仁祠宇)는 계속수호(繼續守護)하였으나 풍우(風雨)를 불폐(不蔽)라 後孫 및 士林이 개탄(慨嘆)한 나머지 충장사중건추진위원회(忠壯祠重建推進委員會)에서 발의(發議)하여 제족(諸族)과 사림(士林)이 협력(協力)하고 관역보조(官亦補助)해서 중수(重修)를 도모(圖謀)하는바 신도(神道)의 현각(顯刻)이 상궐(尙闕)하니 천고유한(千古遺恨)이라. 차비(此碑)를 병수(幷樹)키로 하고 이 시장(諡狀)을 근안(謹按)하여 행적(行蹟)을 약술(略述)하고 설죽가(雪竹歌)로 銘을 代한다. 歌曰 雪裏摧低竹 誰人道他曲 曲兮其節 雪裏也靑靑 眞箇是歲寒高節 惟竹也夫 「눈 속에 휘어진 대를 뉘라서 굽다하리 굽을 節이면 눈 속에 푸를소냐 眞實로 歲寒高節은 대뿐인가」 忠壯祠重建推進委員會 委員 11世孫 章根 12世孫 景裕 永裕 晩裕 昶裕 13世宗孫 相憲 永周
서기1975年 9月 20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