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해부사공(휘 광헌)행적

 

경모재 김해부사공 휘 광헌 재각
소재지: 광주광역시 광산구 동호동 본촌 206-5


公은 靑松人으로 諱는 광헌(光憲) 字는 彦章이요, 號는 三巖이다. 公의 家狀을 略述하면 靑松沈氏의 始祖는 고려문림랑 위위시승(高麗文林郞 衛尉寺丞) 諱 홍부(洪孚)이며 4世祖는 려말 문하시중(麗末 門下侍中)과 鮮初 좌의정(鮮初 左議政)을 역임(歷任)하고 靑城伯에 봉작(封爵)된 諱 덕부(德符)이며 5世祖는 仁壽府尹을 역임한 諱 징(澄)이고 京畿監司를 역임한 後 귀양주(歸楊州)하여 亭子를 짓고, 自號를 망세정(忘世亭)이라 하며, 은둔(隱遁)했던 諱 선(璿)은 公의 증조이며 海州牧使를 역임한 안지(安智)는 祖이고 기묘사화(己卯士禍)에 연루(連累)되어 鐵山으로 유배(流配)된 後 羅州로 移居한 己卯名賢 諱 풍(灃)은 그의 考이다. 文獻의 실전(失傳)으로 生年이 傳하지 않으나 여러 記錄들을 參考해 보면 公은 1541年~2年으로 추정된다.
公은 名家의 出身으로 총명절인(聰明絶人)하고 임사(臨事)에 忠直하였다. 벼슬은 訓練主簿였으나 壬辰亂에 宗社가 거의 폐허(廢墟)가 되기 전부터 公께서는 일찍이 국가 변방(國家邊方)에 방위(防衛)가 허술한 틈을 타서 왜적(倭敵)이 侵入할 날이 있을 것을 豫見하고 유비무환(有備無患)의 마음을 굳게 다짐하며 有事時에는 싸우다가 죽어 말가죽에 덮여 오는 시신(屍身)이 되어야겠다는 것이 그의 포부(抱負)였기에 작은 벼슬을 사양(辭讓)하지 않고 主簿라는 벼슬에서 자기의 所任에 精誠을 다하였다. 1592年 壬辰倭亂이 일어나자 50이 지난 老將으로 정예수백(精銳數百)을 募兵 忠武公 李舜臣 幕下에 들어가 玉浦戰에서 적선(敵船)을 격파(擊破)하는데 크게 기여하고 固城 明月浦로 가서 全羅道 都事 최철견(崔鐵堅)과 힘을 합쳐 방어진(防禦陣)을 구축(構築)하고 敵과 싸우다가 노량전(露粱戰)에 參戰하여 패주적병(敗走敵兵)들을 泗川까지 추격한 후 적선 구척(九隻)을 격파하였고 이어 한산도(閑山島) 安骨浦 해전에서도 많은 전공을 세웠다. 그 후 公은 分陣을 이끌고 江陵戰에 참전하게 되는데 이때 明將 宋大贇이 왜적에게 포위되어 死地에 이르렀다. 公께서는 이 소식을 듣고 비 오듯 쏟아지는 화살을 뚫고 돌격하여 명장 宋大贇을 구하니 왜적 또한 쓰러져 죽은 자가 헤아릴 수 없었다. 이 戰況에 대하여 명장 송대빈이 朝廷에 주청해 말하기를 만일 沈장군이 아니었다면 거의 적의 칼날에 죽엄을 면치 못했으리라 하니 宣祖께서 公의 戰功을 嘉尙이 여겨 特除 金海府使하고 宣武原從功臣에 勳封하였다.
配는 光山金氏 有章의 女로 化龍1子를 두시었다. 三綱錄, 李舜臣同義錄, 光州 全南 忠義士錄, 羅州郡誌, 光山郡誌等에 事載되었으며 墓는 羅州北獐山 現 光州廣域市 光山區 東湖洞 本村後 金富洞 壬坐에 모셔져 있다.
時祭는 유택이나 경모제에서 每年 음력 10月10日에 모시고 있으며 東湖祠에도 모시고 祭祀를 지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