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균진사공(휘 간)묘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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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사공 휘 간 묘소 묘표석 |
公諱幹字子翼姓沈靑松府人有遠祖諱龍顯于麗朝爲吏曹正郞贈門下侍中靑華府院君是生諱德符相恭愍王再爲門下侍中逮奉我 朝特進輔國崇祿大夫議政府左議政封靑城伯是生諱溫大匡輔國崇祿大夫議政府領議政靑川府院君卽我昭憲王后之皇考實公高祖是生輸忠保社大匡輔國崇祿大夫議政府領議政靑松府院君諱澮實公曾祖是生通訓大夫兵曹參議諱潾實公祖父是生通訓大夫高城郡守 贈議政府左贊成諱順路實公之考妣曰李氏宗室壽春君諱玹之嫡女是世宗大王之孫也以成化甲午六月二十二日丙子生公公稟性眞醇氣宇夷曠酣觴樂志不屑外飾自少勤學好問積功經傳聲華籍甚中 辛酉進士遊於太學咸以遠到期之弘治甲子三月初六日以 病卒得年三十一氣淸數局齊志不誠痛哉初娶小主李氏讓寧大君諱禔之曾孫咸陽君諱 之孫佐理功臣湖山君諱鉉之嫡女司饔院正禹垓之外孫小主德性溫惠敬承無違善於女工其敏如神弘治辛亥十一月初五日卒年二十三葬在公墓之北傍繼室宜人李氏籍德水考諱琚兵曹參議祖諱孝祖奉禮郞曾祖諱邊領中樞府事外祖陳克忠行載寧郡守宜人旣未亡衣去染食不肉幾逾三紀嘉靖壬子十二月二十二日卒享年七十無嗣葬之公之墓左當公之卒也燕山荒亂京內封標之禁方酷不得以時克葬于先塋之側而卜玆衿川江寺洞癸坐丁向之原從前室宅兆也小主生一男曰宗元官至通訓大夫行堤川縣監娶通政安州牧使鄭灝之女生三男三女男長苓中甲午司馬擢己亥文科官至司諫院正言次荀中丙午司馬登辛酉文科官至豊德郡守次蓉中乙卯生員女長適宗室義原君億次適漢城判官李思謇次適司蓄別坐鄭惟慶內外諸孫一百十四人予自以微末之孫不敢贊揚世美祗著先祖之所自出繼以後昆之其麗寔繁庶昭千載之示冀免冥漠之稱焉彌
皇明萬曆十一年癸未正月 謹按墓所衿川江寺洞卽讓寧大君山所局內去露梁津不過十里之地考位碣石題成均進士沈公之墓陰有刻妣位在上短碣題小主李氏之墓繼妣位在考位左傍亦短碣題宜人李氏之墓便同品字樣坐癸向丁水得巽巳而破於酉各說床石而皆古朴惟考位前有石人一對而己封築世遠崩夷戊午二月坡州諸宗捐財拔力改莎加土宗人諱東準運海主事蕫役東尙東呂益燁益聖海最亦往赴焉同麓上下有三塚白虎麓又有三塚皆益燁先世葬而其一塚尤爲壓近於小主墓龍尾數步之內域極未安世久難移當初不能禁實可恨舊有墓廬墓田乙丙歉歲散闕失今無餘存故每世節日自益燁家不廢香火大君墓直李有土里一體守護禁伐云矣小主考湖山君墓在案山下相對之地 9세조 성균진사공 휘 간(幹) 묘갈 公의 휘는 간(幹)이요, 字는 자익(子翼)이며, 성은 沈이니 관향(貫鄕)이 靑松이다. 先代祖 휘 용(龍)이 고려조 때 이조정랑(吏曹正郞)이시고 증직(贈職) 문하시중(門下侍中) 청화부원군(靑華府院君)이셨다. 이 분이 휘 덕부(德符)를 낳으시니 공민왕 때 정승을 하여 두 번이나 문하시중(門下侍中)이 되셨고, 조선조에 이르러 특진보국(特進輔國) 숭록대부(崇祿大夫) 의정부(議政府) 좌의정(左議政)이 되시고 청성백(靑城伯)에 봉(封)함을 받으셨다. 청성백이 휘 온(溫)을 낳으시니 대광보국(大匡輔國) 숭록대부(崇祿大夫) 의정부(議政府) 영의정(領議政)이 되시고 청천부원군(靑川府院君)이 되시니 소헌왕후(昭憲王后)의 아버지이시고 공의 고조가 되신다. 안효공(安孝公)께서 수충보사(輸忠保社) 대광보국(大匡輔國) 숭록대부(崇祿大夫) 의정부(議政府) 영의정 청송부원군(靑松府院君) 휘 회(澮)를 낳으시니 공의 증조(曾祖)가 되신다. 이 분이 통정대부(通政大夫) 병조참의(兵曹參議) 휘 린(潾)을 낳으시니 공의 조부(祖父)이시며 이 분이 통훈대부(通訓大夫) 고성군수(高城郡守) 증의정부(贈議政府) 좌찬성(左贊成) 휘 순로(順路)를 낳으시니 공의 아버지이시다. 비(妣)는 李氏이니 종실수춘군(宗室壽春君) 현(玹)의 따님이시고 世宗大王의 孫女이신바, 成化 甲午 成宗五年(1474) 6月22日 丙子에 공을 낳으셨는데 공은 성품이 곧고, 그릇이 크고 술을 즐기시고, 사치를 싫어하셨으며 유시(幼時)부터 근학(勤學)하시고 묻기를 좋아하시고 경전(經傳)에 힘쓰시어 명성이 높으셨고, 신유(辛酉)년에 進士가 되시고 太學에 들어 공부하게 되시니 크게 성공할거라 기대했더니 弘治 甲子(1504)년 3月 初6日에 병(病)으로 별세하시어 향년(享年) 31세 밖에 안 되시니 진실로 애통(哀痛)한 일이 아닌가. 초취소주(初娶小主) 李氏는 양녕대군(讓寧大君) 휘 제(禔)의 증손녀되시고, 함양군(咸陽君) 휘 포(포)의 손녀되시며, 좌리공신(佐理功臣) 호산군(湖山君) 휘 현(鉉)의 따님이 되시니 사옹원정(司饔院正) 우해(禹垓)의 외손녀가 되시기도 한다. 小主는 德性이 溫和하시고 어른과 남편 섬김에 어김이 없고 女工에 능하시어 그 민첩함이 신기(神奇)하셨다. 弘治 辛亥(1491) 11月 初5日에 별세하시니 나이 23歲였고 公墓의 北쪽에 장례하였다. 계실(繼室:後娶) 의인이씨(宜人李氏)는 본관(本貫)이 德水인바 부의 휘는 거(琚)요, 관직은 병조참의(兵曹參議)이며 祖父의 휘는 효조(孝祖)니 봉례랑(奉禮郞)이고, 증조 휘는 변(邊)이니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이며, 외조부는 진극충(陳克忠)이니 載寧郡守이시다. 宜人이 남편을 잃고 난 뒤에는 색의(色衣)를 입지 않으시고 육식(肉食)도 하지 않으심이 거의 3年 동안이나 된다. 가정 임자(嘉靖 壬子) 12月 22日에 별세하시니 향년이 70歲 이시며 子女는 두지 못하셨고 공의 묘좌측에 장례하였다. 공이 별세하시던 해에 연산갑자사화(燕山甲子士禍)가 일어나 도성(都城) 지역 내에서는 묘를 쓸 수 없어 선영(先塋)에 장례 지내지 못하고 금천강사동계좌정향(衿川江寺洞癸坐丁向)의 자리인 전실택조(前室宅兆) 옆에 장례 모셨다. 小主는 1男만을 두니 이름은 종원(宗元)이요, 관직은 通訓大夫 제천현감(堤川縣監)이다. 이 분이 通政大夫 안주목사(安州牧使) 정호(鄭灝)의 따님과 결혼하시어 3男3女를 두니 長男 령(苓)이 甲午년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고 을해년에 文科에 급제하여 관직이 사간원정언(司諫院正言)에 이르고, 次男 순(荀)은 丙午년에 司馬試에 합격하고 辛酉년에 文科에 등과하여 풍덕군수(豊德郡守)를 지냈고, 3男 용(蓉)은 을묘년 生員試에 합격하였으며, 장녀는 종실(宗室) 의원군(義原君) 억(億)에게 출가하고, 차녀는 한성판관(漢城判官) 이사건(李思騫)에게 출가하고, 3女는 사축별좌(司蓄別坐) 정유경(鄭惟慶)에게 출가하였다. 그런데 內外孫이 114人이나 된다. 내가 미말지손(微末之孫)으로서 世德을 찬양(讚揚)하기는 죄송하나 선조(先祖)의 사적(事蹟)을 쓰고 후손의 많음을 기록하여 千歲의 運을 비는 동시에 더욱 흥성할 것을 바라는 바이다.
황명만력(黃明萬曆) 11年 계미(癸未)년 1月 日에 삼가 묘소를 살피건대 금천강사동(衿川江寺洞)은 양녕대군(讓寧大君) 산소가 있는 국내(局內)인데 노량진(露梁津)까지는 십리가 못 되는 곳이다. 고위 갈석(考位碣石)에 성균진사심공지묘(成均進士沈公之墓)라 쓰여 있고 그 음기(陰記) 비위(妣位)는 상(上)에 있다고 새겨 있다. 또 단갈(短碣)에 소주이씨지묘(小主李氏之墓)라 쓰여 있고 계비위(繼妣位)는 고위묘(考位墓) 좌측(左側)에 있는데 역시 단갈(短碣)에 의인이씨묘(宜人李氏墓)라 새겨져 있으며 품(品) 字 모양으로서 계좌 정향(癸坐丁向)이며 득수(得水)는 손사(巽巳)이고 파(破)는 유방(酉方)으로 되어 있다. 墓前에 각기 床石을 구비하였으며 다만 考位前에만 石人 한 쌍이 있다. 봉축(封築)한 지가 너무 오래되어서 붕퇴(崩頹)되었기로 무오(戊午)년 2月에 파주에 사는 제종족(諸宗族)이 재물(財物)을 내고 힘을 합하여 사초(莎草)를 하였는데 宗人 휘 동준(東準) 운해(運海)가 일을 주관했으며 동상(東尙), 동려(東呂), 익엽(益燁), 익성(益聖), 해최(海最)도 함께 도왔다. 동록상하(同麓上下)에 세 묘가 있고 백호록(白虎麓:右)에 또 3墓가 있는데 이는 익엽(益燁)의 先代墓인데 그 중 한 개의 묘가 소주묘용미수보내(小主墓龍尾數步內)에 있어 실로 미안(未安)하여 오래되어 이장할 수도 없으니 당초에 금장(禁葬) 못한 것이 한이 된다. 옛날에는 묘려묘전(墓廬墓田)이 있었으나 乙丙 흉년에 산산궐실(散散闕失)되어 지금은 남은 것이 없고 매년 절일(每年節日)에는 익엽(益燁)의 집에서 향문(香文)을 올리고 대군묘직 이(大君墓直 李)가 유토리 일체(有土里 一體)의 금벌(禁伐)을 하고 있다. 소주(小主)의 친정아버지 호산군(湖山君) 묘는 안산(案山) 아래 마주 보이는 자리에 모셔져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