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인공(휘 순문)묘갈명 |
사인공 휘 순문 묘소 묘 표 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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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위 증정경부인 평산신씨 묘표석 사인공 휘 순문 묘갈 |
議政府舍人贈領議政諱順門墓碣銘
贈通政大夫承政院都承旨兼經筵參贊官春秋館修撰官藝文館直提學尙瑞院正沈公淑夫人申氏合葬于通津縣東瓮井里艮坐坤向之原其孤吏曹正郞連源典設司守達源生員逢源通源方居廬于塋側列狀請碣銘於安國安國生後未及遊公之門然以新進叅列班行覿公風儀竣整辭氣弘毅想像其中所守盖必有異於人者今觀家狀益悉其平生況夫人我先妣堂娣之女其德懿之實閨範之美合門欽誦安國所詳知雖古史簡所稱賢婦人蔑以過之安國義不得以文辭拒謹按公諱順門字敬之靑松府人高祖左議政府事靑城伯諱德符曾祖大匡輔國崇祿大夫領議政府事諱溫卽我昭憲王后之皇考王后之弟曰輸忠保社定難翊戴純誠明亮經濟佐理功臣大匡輔國崇祿大夫議政府領議政靑松府院君恭肅公諱澮是公祖生贈純忠積德補祚功臣嘉善大夫吏曹叅判諱湲是公考配曰貞夫人李氏中軍副司正義坵之女宗室義安大君和之曾孫以成化元年乙酉生公幼沉靜寡言大與羣兒殊然叅判公早世家無嚴訓至十四五無志學意大夫人憂慮召而勅戒之公惕然感厲求師受業勤苦不怠雖雨雪未嘗癈程課學日就成恭肅公喜甚於諸孫中特鍾愛恒以遠大期之未幾中丙午司馬試登弘治乙卯第選入承文院歷正字著作至博士兼史職叅修成宗實錄陞授成均館典籍轉司憲府監察以書狀官朝京師俄擢弘文館副修撰知製敎兼經筵檢討官春秋館記事官遷司諫院正言移兵曹佐郞陞拜弘文副校理兼帶知製敎經筵春秋館承文院職累歷兵曹正郞司憲府持平掌令以薦拜議政府檢詳陞舍人復兼史館立朝十年淸愼恪勤雖小事未敢忽曰居其位思盡其職人臣之分也甲子燕山主荒亂追讐言事之臣誅竄殆盡公亦編配開寧縣主怒未已復逮繫獄竟陷非命不幸之日神色不記從容再拜就刑實是年十二月五日也人莫不痛惜揮涕時年四十明年二月克葬正德丙寅九月今 上卽位追贈公今官公天資簡重謹厚培以學力德哭益能立心正大方嚴有執守望之儼然起敬內實坦易無畦畛故人樂與之交一時以公輔望之天道華爽運遭凶舛痛矣哉公孝友篤至事大夫人色養無違奉祭必誠丁亥之亂叅判公卒於咸興公尙幼旣長哀慕懷慟屛却紛華痛撲若終其身娣先亡公夢見則必齊素以竟日親舊有喪黽勉扶護殫其心力而後已待子姪嚴而慈至於藏獲胥徒皆寬而有恩畏愛不敢欺平生不慕榮利不與人苟合摻履有定顚沛不失亦未嘗爲矯激過情之行處事接物一以誠信然有非理必規正之人不춊而益敬服公之行誼豈可及哉夫人平山望族有諱崇謙佐麗朝定三韓爲開國元勳之首平山之申皆其後也曾祖諱敬宗贈崇政判中樞院事祖諱守福刑曹都官正郞考諱永錫司憲府監察母許氏贈領議政陽川府院君諱蓀之女名相忠貞公琮文貞公琛之娣有賢德通書史家範甚修夫人生于成化丁亥幼服慈訓性復和淑貞惠略習傳記達於大義事公敬順祇愼家政雖小不敦專必禀而行公欲有爲雖甚難竭承以副世俗妬忌之脅絶於辭色公交遊間聞之以爲婦人難能徃徃試之咸歎服母夫人年近百歲至今康寧夫人存日事之極孝常屛棄家事盡夜不離側坐臥必躬扶之甘旨之奉備至無闕或退在居第罄資供具絡繹于道撫視姪甥如親子夫人弟署令援夫婦相繼先逝夫人慟傷之言及未챐不涕泣扶喪盡其力恩育遺孤過於所生未婚嫁者皆管辨其資裝親戚有匱窮者必周給之常慕古人同居之義曰昔張公藝九世猶同居崔孝芬之家一錢尺帛不人私室雖古今異宜分房析居宜以古人敦睦處心家庭之內務存仁恕婢僕有過不喜笞亦未嘗以惡言苛焉常戒子婦曰昔陶潛送一力給其子曰此亦人子可善遇之劉寬不怒侍婢覆羹牛弘不恠舍弟殺牛爾曹當以此爲法慈祥惻怛之念積于中而發乎外其見諸言行無非誠悃性明達能知吉凶倚伏之理當窮達得失之際不屑屑焉每誦夫子之言曰死生有命富貴在天遇一事成敗輒曰焉知福焉知禍諸子落第不以爲戚得第亦不甚失喜敎諸子親授孝經小學導以義方皆爲一時聞人夫人之德著于閨門達于宗族傳于縉紳小大遠近靡不景仰而欽式之可謂克配公美而愈有光矣甲子之禍夫人悲號不食幾至滅性自是哀慕屛處不與親隣慶壽婚嫁之會祭必躬執致誠遇忌日八月輒不食肉茹葷常以未亡爲恨不樂久生於世疾病不肯服藥餌祈速從於地下嘉靖七年戊子正月二十八日感疾卒享年六十二內外姪甥曁藏獲悲號哭擗如喪父母以至族黨姻婚隣里亦莫不悼吊異常噫夫人之賢今世無有儷者撰美多溢辭安國竊懼夫紀之不能盡不足以昭揚夫人之德于永久不虞辭之有溢也獨恠天之純昇之厚而祿命之不稱以駁使人多憾於施報之際果何歟四月祔窆公兆之左距公沒二十五歲而竟從焉夫人殆無遺恨矣四子連源魁丙子生員試擢壬午第捷丙戌重試達源登丁丑第蚤歷淸華逢源中丙子生員通源中己卯生員俱有文行令譽公與夫人之遺慶其屬於玆乎連源娶漢城判尹金璫女生一男三女男鋼皆幼達源娶兵曹叅判尹希仁女生四男鎭鎡銓鐩女適宗室荒壤正壽獜餘皆幼逢源娶刑曹正郞金顯祖女生男鍵幼通源娶宗室德林君孜女生二男錪鐳與一女皆幼 銘曰 玄機轇轕孰主張是濁淸粹駁寧有勝紀吉與純俱凶昇悖德理昭終古萬同一錯孰候于玆叩喆于穹懿厥夭婦醇誼服躬肫肫仁厚循軌踏祥胡及其施顚礩奇狹淫詭多脩慈良則嗇數與運 定或不克嗚呼曷托徵在嗣續世世茂慶永守貞石 大提學 金安國 撰 의정부사인증영의정휘순문묘갈명 증 통정대부 승정원 도승지 겸 경연참찬관 춘추관 수찬관 예문관 직제학 상서원정(正)과 숙부인 신씨(申氏)를 통진현 동쪽 옹정리 간좌곤향의 언덕에 합장(合葬)하고 그의 아들 이조정랑(吏曹正郞) 연원(連源)과 전설사수(典設司守) 달원(達源)과 생원 봉원(逢源)과 통원(通源)이 묘 옆에서 시묘살이하다가 가장(家狀)을 들고 와서 안국(安國)에게 묘갈명(墓碣銘)을 간청하였다. 안국이 생후 한 번도 공의 가문과 교유한 바는 없으나 신진으로서 열반(列班)①에 참여했고 공의 행실을 볼 때 풍채와 거동이 의젓하고 언사와 안색이 크고 굳세어 그 가운데 지키는 바가 있다고 생각했다. 대개 남들과는 반드시 특이함이 있고 오늘 또 그 집의 가장을 보니 더욱 그의 평생을 알게 되었으며 항차 부인은 내 선비(先妣)②의 종질녀라 그 덕의(德懿)③의 실상과 규범(閨範)④의 아름다움을 온 문중이 칭찬하니 안국이 소상하게 알고 있는 바이고 비록 옛부터 이름 있는 집 현부인이라도 지내보지 못하니 안국이 정의로써 글 못한다고 거절할 수 없었다. 살펴보건대, 공의 이름은 순문(順門)이요, 자는 경지(敬之)이니 청송부 출신이다. 고조부는 영의정부사 청성백(靑城伯)으로 이름이 덕부(德符)이고 증조부는 대광보국숭록대부(大匡輔國崇祿大夫) 영의정부사로 이름이 온(溫)이니 곧 우리 소헌왕후(昭憲王后)의 부친이다. 왕후의 동생은 수충보사정난 익대순성명량경제 좌리공신(輸忠保社定難翊戴純誠明亮經濟 佐理功臣) 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좌의정 청송부원군 공숙공(恭肅公) 이름 회(澮)니 이분이 공의 조부이다. 증 순충적덕보조공신(純忠積德補助功臣) 가선대부 이조참판 이름 원(湲)은 공의 아버지이고, 어머니는 정부인 이씨인데 중군부사정(中軍副司正) 의구(義坵)의 딸이고 종실 의안대군(義安大君) 화(和)의 증손으로 을유(乙酉:1465)년에 공을 낳으니, 공은 어릴 적에 차분하고 말이 없었으며 자라면서 다른 아이들보다 특수했다. 그러나 참판공이 일찍 죽고 집에 엄한 훈계가 없어서 나이 열대여섯까지 학문에 대한 뜻을 세우지 못하여 어머니께서 몹시 우려하고 불러서 나무라고 타이르니 공이 슬피 깨우치고 감동하여 스승을 찾아 수업할 때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않고 비록 비와 눈이 내리더라도 거르지 않으니 학업이 날로 진취하여 조부인 공숙공께서 심히 기뻐하며 여러 자손 가운데 특별히 사랑을 모아주고 항상 원대하게 기약하였다. 얼마 안 되어 병오(丙午:1486)년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고 을묘(乙卯:1495)년의 과거에 급제하여 승문원(承文院)에 뽑히고 정자(正字)와 저작(著作)을 거쳐서 박사(博士)에 이르고 사직(史職)⑤을 겸하여 《성종실록》에 참수(參修)하였다. 승급하여 성균관 전적(典籍)이 되고 사헌부 감찰(監察)로 전직되었다가 서장관(書狀官)⑥으로 연경(燕京-지금의 북경)에 다녀왔다. 그 뒤 홍문관 부수찬(副修撰)으로 발탁되어 지제교(知製敎)에 경연검토관(經筵檢討官)과 춘추관의 기사관(記事官)을 겸했다. 사간원 정원으로 옮겼다가 다시 병조좌랑(兵曹佐郞)으로 옮긴 뒤 홍문관 부교리(副校理)로 승진하여 지제교를 겸했다. 이후에도 경연과 춘추관과 승문원의 직책을 여러번 경유하고서 병조정랑으로 승진하고 사헌부 지평(持平)과 장령(掌令)이 되었는데 천거로써 의정부 검상(檢詳)에 임명되고 사인(舍人)으로 승급해서 다시 사관(史官)을 겸했다. 조정에 들어온 지 10년에 늘 청렴하고 삼가고 정성스럽고 부지런하여 비록 작은 일이라도 감히 소홀히 하지 않고 날로 그 위치에서 그 직분과 신하로서의 도리를 다할 것을 생각하였다. 갑자(甲子:1504)년에 연산군이 황란(荒亂)하여 지난 일을 미루어 언관(言官)들에게 원수를 갚을 때 거의 다 죽이고 귀양 보내니 공도 함께 쌓여 개령현(開寧縣)으로 내쳤다가 얼마 후 옥사에 다시 연루 체포되니 마침내 비명으로 죽었다. 불행을 당하던 날에도 신색이 안온하고 조용히 재배한 후 형을 받으니 이해 12월 5일이었다. 사람들이 원통하고 애석하여 눈물을 흘리지 않는 이가 없었고 향년 40세였으며 이듬해 2월에 검소하게 장사지냈다. 병인(丙寅:1506)년 9월에 중종께서 즉위하시고 공에게 지금의 벼슬을 추증하셨다. 공은 천품이 간중(簡重)하고 근후(謹厚)하며 학력을 북돋우니 덕스러운 국량이 더욱 능하였다. 마음을 정대하게 세우고 근엄하며 주관이 뚜렷해서 바라보면 어엿하여 공경하는 마음이 저절로 일어났다. 완벽하게 내실을 다지고서도 표현상 아무 차별이 없어 사람들이 즐겨 사귀고자 했다. 한때는 공으로 하여금 세상을 도울 것이라고 희망하였는데 천도가 어그러지고 시운(時運)을 못쓰게 만났으니 원통하도다. 공께서는 효우가 지극히 돈독하고 어머니를 섬기는 데는 안색을 편안하게 하여 마음을 어기는 일이 없고 봉제사 때는 반드시 정성을 다 쏟았다. 정해(丁亥:1467)년 난리 때 참판공이 함흥에서 죽었으니 공이 거의 어릴 때이다. 다 자라서도 슬피 사모하고 통한을 품어서 종신토록 분잡하고 화려한 짓은 물리쳤으며 누님이 먼저 죽었는데 공이 꿈에 보니 종일토록 소복(素服)⑦하고 있더라. 친구가 상(喪)을 당했을 때에도 힘써서 부호해 주고 그 심력을 다해 주고서야 물러서며 자녀들을 대할 때에도 엄하면서도 자애롭고 노비와 잡배들에게까지도 다 관유하게 은혜를 베푸니 두렵고 경애하여 감히 속이는 자가 없었다. 평생을 영리에 관해 생각해 본 적이 없고 남들과도 구차한 짓이 전혀 없었다. 처신에 정해진 바가 있고 어떠한 때도 실수함이 없으며 거짓말을 하거나 정상에 맞지 않는 행동은 하지 않으며 처사접물(處事接物)⑧에 한결같이 정성과 신의로써 다루나 만일 잘못이 엿보이면 반드시 바로 잡으니 사람들이 거스르지 못하고 더욱 공경하고 복종하니 공의 행의를 어찌 가히 따르리오. 부인은 평산의 명망있는 집안이니 이름을 신숭겸(申崇謙)이라고 하는 분이 있었는데 고려를 도와서 삼한(三韓)을 평정하고 개국원훈(開國元勳)의 으뜸이 되었으니 평산 신씨는 다 그의 후손이다. 증조부의 이름은 경종(敬宗)이니 증 숭정대부(崇政大夫) 판중추원사(判中樞院事)이고 조부의 이름은 수복(守福)이니 형조도관정랑(刑曹都官正郞)이다. 아버지는 영석(永錫)인데 사헌부 감찰이고 어머니는 허씨이니 증 영의정 양천부원군 허손(許蓀)의 딸이며 명상(名相) 충정공(忠貞公) 종(琮)과 문정공(文貞公) 침(琛)의 누님이다. 어진 덕을 두었고 경서와 사적(史籍)을 통했으며 집안 범절을 심히 엄수하였다. 부인이 정해(丁亥:1467)년에 태어났는데 어릴 때 어머니의 훈도를 받아서 성품이 온화하고 정숙하고 은혜로웠으며 전기(傳記)를 대충배워도 대의(大義)를 통달하였다. 경순(敬順)으로 공을 섬기고 가정일에 조심하고 삼가서 비록 작은 일일지라도 마음대로 결정하지 않고 반드시 여쭌 뒤에 처리했다. 부군께서 하고자 하는 일이 있으면 아무리 어렵더라도 정성을 다하여 다 받들어 주고 세속의 투기 같은 습성은 성색(聲色)⑨에서 엿볼 수 없고 공의 교유간의 견문이 부인께서 능숙하여 왕왕 비교하니 모두들 탄복하였다. 어머니의 연세가 백 세에 가까우나 아직 강건한데 부인께서 날로 극진히 효도하고 가사는 뒤로 미루고 밤낮 곁을 떠나지 않으며 앉고 눕는데 몸소 부축하고 맛있는 음식을 준비하여 잊는 법이 없었다. 간혹 물러나 여가가 있을 때는 모자라는 음식을 고루 장만하여 도리에 빈틈이 없었다. 조카와 생질들을 돌보는데 친자식같이 하였다. 부인의 동생인 서령(署令) 원(援)의 부부가 연달아 미리 죽었는데 부인이 애통하여 말끝마다 울먹였으며 초상 때에도 힘껏 도와주고 그 유자녀를 은혜롭게 기르니 본인 소생보다 더 잘 하였다. 혼인을 못하는 자가 있으면 다들 보살펴 주선해 주고 친척 가운데 굶주리는 사람이 있는 것을 알면 고루 나누어 주고 항상 옛사람들이 함께 사는 의리를 생각하여 말하기를, 『옛적에 장공예(張公藝)는 9대가 한 집안에서 살고 최효분(崔孝芬)의 집은 한푼의 돈과 짤막한 포백일지라도 사적으로 챙기지 않았으니 비록 고금이 다르나 당연히 방을 나누고 거실을 쪼개서 옛사람들이 돈목하는 것같이 마음 먹어야 된다.』고 하였다. 가정내에서는 어질고 용서함을 힘써서 노비들이 과오를 저질러도 볼기나 종아리를 치지 않고 또한 모진 말로 가혹하게 꾸짖지도 않았다. 항상 며느리에게 훈계하여 말하기를, 『옛날 도잠(陶潛)은 시종(侍從) 한 사람을 그의 아들에게 보내며 이도 또한 인간이니 잘 대해 주라.』하였으며, 『유관(劉寬)은 시비(侍婢)가 국그릇을 엎었어도 성내지 않고 우홍(牛弘)은 동생이 소를 죽여도 아무렇지 않으니 너희들은 마땅히 여기에 본받아야 된다.』고 하였다. 자상하고 측은한 생각이 내면에서 쌓여 밖으로 벗어 나왔으니 그 언행을 바라보면 한 가지도 정성스럽지 않은 것이 없었다. 성품이 밝게 통달하여 능히 길흉과 처신할 이치를 알고 궁달과 득실의 즈음에도 침착하고 번거롭지 않았다. 매양 공자의 말씀을 외우면서 말하기를, 『죽고 사는 것은 명이 있고 부귀는 하늘에 달렸는데 한 가지 일의 성패로써 어찌 화복을 논할 수 있느냐?』고 하였다. 아들네가 낙방해도 슬퍼하지 않고 급제해도 역시 크게 기뻐하지 않았다. 아들들에게 친히 효경(孝經)과 소학(小學)을 가르쳐서 의로운 방향으로 인도하니 다 한때 소문이 자자했다. 부인의 덕이 규문 안에서 나타나서 일가친척으로 퍼지고 고위층까지 전해져서 대소원근이 경앙(敬仰)하고 모범으로 여기니 공의 아름다움에 능히 짝하고 더욱 광채가 났다. 갑자(甲子)년의 화란에 공이 죽으니 부인께서 슬피 부르짖고 먹지 않으니 거의 죽게 되었다. 이 때부터 문을 닫고 슬피 사모하여 친척과 이웃의 각종 연회에는 참여하지 않았고 제사 때는 반드시 몸소 간여하여 정성을 바쳤다. 제삿날을 당하면 드는 달에는 고기와 양념을 입에 대지 않고 항상 못죽어서 한을 삼으며 세상에 오래 사는 것을 즐겁게 여기지 않으며 질병에도 복약하기를 즐기지 않고 속히 지하로 돌아가기를 빌었다. 무자(戊子:1528)년 정월 28일 감기를 앓다가 죽으니 향년 62세이다. 안팎의 친척과 노비들이 슬피 호곡하며 가슴을 치니 부모상을 당한 것 같고 집안과 인척과 이웃까지 유달리 슬퍼하고 조상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아, 부인의 현덕은 이 세상에서는 다시 짝하지 못하니 미담과 찬사를 안국이 다 기록해서 짓지 못하고 만족하게 드러내지 못할 것을 두렵게 여기나 부인의 덕이 영구하여 찬사가 넘치는 것은 근심하지 않는다. 다만 하늘의 순수한 두터움에 복록과 명수의 맞지 않음이 괴이하니 사람들로 하여금 베풀고 갚는 즈음에 한이 많음을 논박하니 과연 어떠한가. 4월에 공의 묘소 왼편에 부장(祔葬)했으니 공이 죽은 뒤 25년만에 마침내 뒤를 따랐으니 부인은 자못 유한이 없을 것이다. 네 아들 중 장남인 연원이 병자(丙子)년 생원시에서 장원(壯元)하고 임오(壬午)년 문과(文科)와 병술(丙戌)년 중시(重試)까지 급제했고, 차남인 달원은 정축(丁丑)년에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일찍이 중국까지 다녀왔고, 삼남인 봉원은 병자(丙子)년에 생원이 되고, 사남인 통원은 기묘(己卯)년에 생원이 되었으니 모두들 문장과 행실과 영예를 갖췄으니 공과 부인의 유경(遺慶)⑩이 이로 인해 따라 붙은 것이다. 장남인 연원은 한성판윤(漢城判尹) 김당(金璫)의 딸에게 장가들어 1남3녀를 낳으니 아들은 강(鋼)이고 나머지는 어리다. 차남인 달원은 병조참판 윤희인(尹希仁)의 딸에게 장가들어 네 아들을 낳으니 진(鎭)과 자(鎡)와 전(銓)과 수(鐩)이고 딸은 종실(宗室)⑪ 황양정(荒壤正)⑫ 수린(壽쬧)에게 시집가고 나머지는 어리다. 삼남인 봉원은 형조정랑 김현조(金顯祖)의 딸에게 장가들어 아들 건(鍵)을 낳았으나 어리다. 사남 통원이 종실 덕림군(德林君) 자(孜)의 딸에게 장가들어 두 아들을 낳으니 전(錪)과 뇌(鐳)인데 딸 하나와 모두 어리다. 명(銘)은 다음과 같다. 현묘한 이치가 넓고 아득하니 누구의 주장이 옳으며 맑고 흐리고 순수하고 섞인것을 어떻게 다 알 수 있을까. 길조와 순수함을 함께 했으나 흉사를 주니 덕에 어긋났네. 이치가 소명하여 제자리로 돌렸으니 만 가지는 같으나 한 가지가 어긋났네. 누가 이에 분개하랴. 하늘에서 따져 물어보자. 아름답도다 저 화평한 부인이여, 순수한 정의를 몸소 이행했네. 정성을 다하여 어질고 후덕하니 운명따라 복을 누렸네. 그의 베품에는 미치지 못하였고 엎어지고 쓰러지니 재앙이 웬일이냐. 황탄한 일을 많이 다스렸으니 선량하면 인색할까. 명수와 운세를 만나면 안정을 이루지 못하니 아, 어디에 의탁할고. 징험이 자손에게 있을 것이고 대를 이어 경사가 무성하니 이 비석을 영원히 지킬 것이다. 대제학 김안국이 지음. 註① 열반(列班):위계의 차례. 반열. ② 선비(先妣):죽은 어머니. ③ 덕의(德懿):부덕의 참아름다움. ④ 규범(閨範):부인의 범절. 가정 안의 법도. ⑤ 사직(史職):실록을 정리하는 직책. ⑥ 서장관(書狀官):외국에 보내는 사신을 따라 보내는 임시 벼슬인 기록관. ⑦ 소복(素服):흰옷을 입는 것. 상주가 되면 물색옷을 입지 않음. ⑧ 처사접물(處事接物):일을 처리하고 물건을 다루는 것. ⑨ 성색(聲色):말소리와 행동에서 보이는 표현. ⑩ 유경(遺慶):끼친 경사. 즉 후광. ⑪ 종실(宗室):왕실. ⑫ 황양정(荒壤正):왕실에게 내리는 계위(階位)이니 대군(大君)·군(君)·도정(都正)·정(正)·부정(副正)·수(守)·부수(副守)·령(令)·부령(副令)·감(監) 등 왕족의 계급 따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