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사공(휘 손)묘갈명 |
진사공 휘 손 묘소 묘표석 |
國朝 莊光之際士大夫出處不失其正大光明如六臣之殺身成仁植倫綱於千秋者固己盛矣而又或炳幾恬退秉義自靖晦遯无悔世無得以稱焉月軒先生沈公諱遜亦其一也先生與醉琴朴忠正公梅竹成忠文公丹溪河忠烈公道義契重以書以詩與相勉懋各遂其志之所安跡雖殊而其揆則一嗚呼休哉先生字汝謙月軒其號也胄于 高麗同平章事靑松君諱洪孚世襲簪組傳緖蟬嫣生諱淵閤門祗侯生諱龍靑華府院君生諱元符典理判書判書公與農隱閔公安富入杜門洞於先生爲高祖也曾祖諱天潤令同正我 太宗朝奬忠孝褒門閭祖諱孝尙號石村明經博學考諱太山號弄泉副司果妣安東權氏處士軫女擧先生于山陰石畓村第生有異表岐議嶷出萃孝友根天文學日就六歲隨先公移攸竽于靑鳧月明村未幾遭先公憂易戚備至守制如成人 國初世家之不苟仕進門戶寥落固其義也而妣夫人嚴於義方之敎先生亦遵述庭謨靡或一心放過而與弟洪因心篤友怡怡有春津之樂從祖靑川君甚愛重之曰家門之托枉是庚午丁內艱居瘠視前喪 世宗朝中進士 端廟踐祚除 顯陵參奉及 光廟輔政遂決歸田里塞兌息影無復當世之志嘗與河丹溪書略曰聞兄書奏辭甚切至足以動人主之心一時士大夫皆爲兄危遜則爲兄賀也不有此言先王付託之意果安枉哉乙亥聞朴忠正公按忠淸以詩寄之曰應記集賢當日 敎如今世事不勝情又有月上軒詩以見志慷慨悽楚有楚騷遺響每空山疎雨曉牕殘月聞子規啼聲輒掩抑哽咽淚縱橫沾襟枕坐必向越寢必首北含寃茹痛如不欲生竟以成化丙午五月六日終距其生宣德庚戌八月二十日爲五十五歲淹病之席自著誌文是年七月葬于郡之巨大谷負震原從先兆也配安東權氏萬春女閨範夙著克配公德生後先生二歲歿先先生二十歲墓上下塋二男長弼倫護軍次弼瑞一女鄭致厚弼倫男鶴齡宗簿寺主簿女朴世彊金湖弼瑞男自英鶴齡男淸進士女李尙賢自英男繼賢嗚呼忠孝百行之冠冕理根於天而道行乎人無是也則人道息矣先生衆善焯焯可述而皆原於孝而移於忠名義風節有可以炳朗永世而晻昧不影無所槩見悲夫然無所爲而於先生何有哉其後孫誠之送瑀澤懿澤書以來託麗牲之文不佞癃淹無以修辭辭不獲則以托名爲榮遂爲之銘曰
君臣大義天地經常胚胎先懿杜門家聲卷懷歸藏剷采韜光深淺厲揭不濡我裳子規聲中涕淚縱橫煩寃其氣上簿穹蒼秋柏之實烈烈風霜潛德幽光閼而不影有封四尺侐侐斧堂我筆不諛載揭石章用詔千祀永垂無疆前 義禁府都事 達城 徐贊奎 謹撰 8세조 진사공 휘 손(遜) 묘갈명 조선조 단종(端宗) 세조(世祖)시대에 문벌이 높은 집안의 사람들의 거취(去就)가 그 정대하고 광명함을 잃지 않았으니 사육신(死六臣)의 세상을 위하여 생명을 바치고 윤리 강령을 천추에 심은 것 같은 것은 진실로 성대한 일이었고 또 혹 기미를 알고도 명예나 이익에 뜻이 없어 스스로 조용히 숨어살며 후회하지 아니하여 세상에 일컬어지지 않은 사람도 있었으니 월헌(月軒)선생 심공 휘 손(遜)이 그 한 분이다. 선생은 취금헌(醉琴軒) 박충정공(朴忠正公)과 매죽헌(梅竹軒) 성충문공(成忠文公)과 단계(丹溪) 하충렬공(河忠烈公)과 더불어 도의(道義)로 사귀는 것을 중히 여겼으며 서(書)와 시(詩)로써 서로 힘써 각각 그 뜻의 편안한 바를 이루었으니 행적은 비록 다르나 그 법도는 한가지였다. 아아 아름답도다. 선생의 자는 여겸(汝謙)이요 월헌은 그의 호이니 고려조에 평장사 청송군 휘 홍부(洪孚)가 시조요 대대로 높은 벼슬이 끊이지 아니하였다. 휘 연(淵)을 낳으니 합문지후(閤門祗侯)였고 휘 용(龍)을 낳으니 청화부원군(靑華府院君)이며 휘 원부(元符)를 낳으니 전리판서(典理判書)였다. 판서공이 농은(農隱) 민공(閔公) 안부(安富)와 더불어 두문동(杜門洞)에 들어갔으니 선생에게 고조가 되고 증조의 휘는 천윤(天潤)이니 영동정(令同正)으로 우리 태종대왕이 충효(忠孝)를 표창하여 정려(旌閭)를 내렸고 할아버지의 휘는 효상(孝尙)으로 호가 석촌(石村)이요 경서(經書)에 밝고 박식(博識)하였으며 아버지의 휘는 태산(太山)이니 호가 농천(弄泉)이요 벼슬은 부사과(副司果)였다. 어머니는 안동권씨 처사 진(軫)의 따님으로 선생을 산음 석답촌 집에서 낳으니 나면서부터 재능(才能)이 뛰어나고 효도와 우애가 있으며 문학이 날로 성취되었다. 여섯 살에 아버지를 따라 청부(靑鳧)의 월명촌(月明村)에 이사하여 얼마 안되어 아버지의 상을 당함에 슬퍼함을 다하였고 예제(禮制)를 지킴이 성인(成人)과 같았고 국초(國初)에 명족(名族)으로서 구차하게 벼슬길에 나가지 아니하여 가문이 몰락(沒落)하였으나 그 의를 고수(固守)하였고 어머니가 의방(義方)으로 교육함을 엄중하게 하니 선생 또한 가정의 교훈을 준수(遵守)하여 한결같은 마음으로 방탕하며 지내지 않고 아우 홍(洪)과 더불어 우애를 돈독(敦篤)히 하며 옛날 춘(春)과 진(津)의 우애와 같이하였다. 종조(從祖) 청천군(靑川君)이 매우 사랑하고 중히 여겨 말하기를 가문을 맡길 사람은 이 아이라고 하였다. 경오년에 어머니 상을 당하여 슬퍼하기를 먼저 아버지의 상을 당하였을 때와 같이 하였다. 세종조에 진사시에 합격하였고 단종이 즉위하자 현릉참봉이 되었더니 세조가 정권을 잡자 드디어 전리(田里) 새태(塞兌)로 돌아가 한가히 살며 세상에 나갈 마음을 먹지 않고 일찍이 단계(丹溪) 하위지(河緯地)에게 서신을 보내어 말하기를 형(兄)이 써서 아뢴 말이 매우 간절하여 족히 임금의 마음을 감동시킬만 하였으나 이 때 사대부(士大夫)들이 모두 형을 위하여 위험한 짓을 하였다. 했지만 나는 형을 위하여 하례하니 이 말이 없었으면 선왕(先王)이 부탁한 뜻이 과연 어디에 있었으리오 하였다. 을해년에 충정공 박팽년(朴彭年)이 충청감사로 왔을 적에 시를 보내어 말하기를 응당 집현전(集賢殿)에서 당일의 세종대왕의 교지(敎旨)를 기억할 것이나 지금과 같아서는 세상일에 정(情)을 이기지 못하겠다 하였고 또 월상헌(月上軒)의 시가 있어 뜻이 슬프고 처량함을 보였고 초(楚)나라에는 굴원(屈原)의 이소(離騷) 초사(楚辭)의 편명(扁名)의 유향(遺響)이 있으며 늘 빈 산에서 비가 그쳐 새벽달이 비칠적에 두견새의 우는 소리를 들으면 문득 목이 매어 눈물이 줄줄 흘러 옷깃을 적시고 잠잘 때는 건너 방을 향하여 반드시 머리를 북쪽으로 하여 슬픔을 머금고 살고자 하지 않은 것 같이 하더니 마침내 성화(成化) 병오년 5월6일에 돌아가니 선덕(宣德) 경술년 8월20일에 낳아 55년을 살았다. 오랫동안의 병석에서 스스로 지문(誌文)을 지었고 이 해 7월에 군(郡)의 거대곡(巨大谷) 부진원(負震原)에 장사지내니 선영을 따른 것이다. 배위는 안동권씨 만춘(萬春)의 따님으로 부녀자로서의 법도가 있어 능히 공을 배필할 수 있는 덕이 있었다. 선생보다 2년 뒤에 낳았고 선생보다 20년 먼저 돌아갔고 묘는 상하분(上下墳)이다. 2남을 두었으니 장남은 필륜(弼倫)으로 호군(護軍)이요 2남은 필서(弼瑞)이며 딸 하나는 정치후(鄭致厚)에게 시집갔고 필륜의 아들은 학령(學齡)으로 종부시주부(宗簿寺主簿)요 사위는 박세강(朴世疆) 김호(金湖)이며 필서의 아들은 자영(自英)이고 학령의 아들은 청(淸)이니 진사요 사위는 이상현(李尙賢)이요 자영의 아들은 계현(繼賢)이다. 아아 충효는 백행(百行)의 제일이요 이치는 하늘에 뿌리를 박고 도(道)는 사람이 행하는 것이니 이것이 없으면 사람의 도리가 없어지는 것이다. 선생의 여러 착한 행실이 밝아 저술(著述)할만 하며 모두 효도에 근원하여 충성에 옮겼고 명의(名義)와 풍절(風節)이 영원히 밝았으나 사실은 분별하기 어려워 그 대략이나마 나타나지 않으니, 슬프도다. 그러나 한 것이 없으나 선생을 위하는 것은 무엇이 어려움이 있으리오 그 후손 성지(誠之)가 우택(瑀澤) 의택(懿澤)에게 글을 보내어 비문을 나에게 지어달라고 하니 늙어서 글을 지을 수 없다고 사양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아니하여 부탁한 명분만으로도 영광으로 여겨 드디어 명(銘)을 지으니 명은 다음과 같다. 君臣의 正道는 천지에서 항상 일정하여 변하지 아니하네. 조상의 아름다움을 타고났으나 문을 닫고 명성(名聲)을 들어내지 아니하였네. 재능을 숨기어 나타내지 않고 덕을 감추어 들어내지 아니하였네. 깊고 얕은 것을 헤아려 임기응변(臨機應變)으로 세상을 살았으나 세속(世俗)에 물들지는 않았네. 두견새가 울면 눈물이 종횡(縱橫)으로 흘렀네. 번민(煩悶)하며 원망하는 기운이 위로 하늘에까지 이르렀네. 송백(松柏)과 같이 바람 서리에도 변하지 않았네.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덕 있는 사람의 그윽한 빛이 가로막혀 나타나지 않았네. 넉자의 무덤은 쓸쓸하기만 하네. 내가 쓴 명(銘)은 아첨하지 않았고 비석에 새겼네. 천년에 고하니 길이 전하여 무궁하리로다.
전의금부도사 달성 서찬규가 삼가 지음 |